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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봄 수필반 작품집>
(가상) 김홍은 교수님 영전에 드립니다
이희우
푸르른 녹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6월이 왔습니다. 먼 산과 가까운 들녘에도 흐드러진 녹색의 향연이 차창가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이내 소낙비가 몰아쳤습니다. 바람과 함께 실려 온 꽃잎들이 어수선하게 내 차창에 걸리는 것 이었습니다. 씻어낼 수록 계속하여 차창을 때리는 꽃잎들,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학교를 향해 운전을 했습니다. 갑자기 벨이 울리는 바람에 가방속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습니다. 순간 나는 휴대폰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아! 교수님 이렇게 황망하고 허망할 수가 있습니까? 어찌 사랑스런 제자를 두고 이렇게 홀연히 떠나실 수 있습니까?
가시기가 서러워 차창을 때리던 그 꽃잎이 바로 교수님 이셨단 말입니까? 순간 교수님과 함께 했던 짧은 만남이 내마음속에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당신은 체구의 열배나 되어 보이는 나뭇짐을 지고 동네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순박한 나무꾼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지성의 전당 대학에 계시면서도 그 흔한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은 자연주의자 였습니다.
당신은 글과 사람이 같아야 된다고 항상 강조하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고매한 인격의 도덕주의자 였습니다.
산당산성 등줄기에 벚꽃이 만개해 꽃비가 내리던 어느 날, 활짝 웃고 있는 철쭉꽃을 따 제자들의 머리에 꽂아 주시던 당신은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오늘 저는 녹색의 우울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산성에는 철쭉과 영산홍이 만개해 있건만 제 머리에 꽃을 꽂아줄 교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수양으로 달관된 인생관과 사물을 깊이보고 사색의 시간을 가지라며, 나누어 준 풀잎은 제 책속에 고이 접혀 있어요.
풀잎이 창작의 힘으로 수필이 되는 날 그 작품을 어느 분 앞에서 낭독해야 될까요?
평소에는 다정한 어버이 같고, 때로는 친구 같고, 어느 때는 연인같이 아름답고 멋진 스승이 아니시던가요.
그러면서도 수업시간 만은 냉철하면서도 엄하고, 수필 뿐 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어떤 도(道)까지도 일깨워 주기도 하셨지요.
연두 빛 새순이 오르고 있던 오월 어느 날,
담양가사문학관을 향해 가던 문학기행 때 40여명의 회비를 몽땅 내고
“나 오늘 다 벗을 거 여” 하며 여자 스타킹을 벗어 들어, 저희는 관광버스가 흔들릴 정도로 한바탕 웃어야만 했던 즐거운 여행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나누어 주신 책을 받고 가졌던 새로운 수필에 대한 기대감이며, 민속촌의 알싸한 동동주와 보글보글 끓던 김치찌개 맛도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을 울릴 뿐입니다.
교수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던 푸른솔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가신단 말입니까.
교수님, 생존해 계실 때 더 다가가서 마음 편히 잘해드리지 못한 저희 들 이기에 더욱 후회스럽고 가슴이 메 입니다.
칠흑 같은 캄캄한 어둠과 슬픔이 제 가슴속에 계속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슬픔과 눈물을 거두고자 합니다. 불가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했습니다. 교수님은 떠나셨지만 우리는 결코 보내지 않았습니다.
수필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당신의 꿈은 문학 공원을 만드는 것 이었지요. 얼마 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미동산 수목원에서 첫 삽을 뜨셨지요. 이제 그 꿈은 저희 제자들이 이루겠습니다. 그 꿈을 실현하는 날 당신께서 홀연히 나타나 꽃비를 뿌려주세요. 꽃비를 모아 그 공원에 뿌리 오리다.
부디 편히 영면 하소서. 2006년 6월 3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제자 이희우 올립니다.
이 시대의 문학가 김홍은 교수님을 보내며…….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화창한 오후.
우리는 지금 우리시대의 문학가 김홍은 교수님을 바람처럼 떠나보내려 합니다.
하늘이 주신 소중한 선물같고, 신이 내린 보석같은 교수님을 다시 하늘 저편으로 돌려보내려합니다.
제 기억 속의 교수님은 모든 곳에서 온전히 자리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이제 교수님은 없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처음 교수님의 얼굴을 뵙고 따뜻한 손을 잡으며 문학의 열정을 키워왔던 시절.
불혹의 나이에 찾아온 수필의 투박함과 순수가 맺어준 인연이 지금은 온통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고 지금 이순간도 이렇게 생생하지만 교수님의 손을 이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이 저 먼 곳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손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교수님의 따스했던 손이 이제 신기루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무심한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무심하기만 한 세상을 향해 이 힘없는 청년과 우리 문우들은 교수님이 못다 토해낸 문학의 열정을 대신 하려 합니다.
손을 잡고 오르던 상당산성, 그 길가에 올해도 여지없이 철쭉이며 영산홍이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교수님이 유독 좋아하셨던 연분홍 철쭉을 한잎따서 입가에 가져가 봅니다.
아싸하게 스며들때면 씁쓸하게 웃으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계절은 봄날인데도 교수님이 떠난 오늘은 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같고, 나는 정신잃은 아이처럼 멍한 눈으로 하늘을 봅니다.
혼자 버려진 아이로 남아 마냥 이렇게 살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수님!
문학없는 삭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교수님의 생은 그 자체였습니다.
여름이 오고,
겨울이 가고, 또 세월이 흘러, 먼 먼 훗날, 내가 교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 그날까지 제가 문학을 이야기하고 삶을 써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래서 이승에 미련을 두지 않고 교수님을 따라 훌훌 이세상 떠날때까지 저의 꿈을 놓지 말아주세요.
내 사랑하는 교수님!
부르고 또 불러도 너무나 아깝고 아쉬운 내 사랑하는 교수님!
교수님은 아직도,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우리의 자랑스러운 스승이십니다.
교수님은 우리 생의 최고의 선물이셨습니다. 이 말을 교수님 살아 생전에 직접 전하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제 가슴을 메어지게 합니다.
교수님!
삶에 지치고 생이 힘들다 느껴질 때 언제라도 이곳에 와서 교수님을 부르겠습니다.
살아생전 늘 유언처럼 말씀하셨던 “나 죽으면 화장해서 고향 강물에 뿌려라”는 말씀을, 그때는 그렇게도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는데, 오늘에야 현실이 되어 이렇게 교수님을 보내드립니다.
유유히 흐르는 대청호에서, 저와 우리 문우들은 교수님과 맺었던 인연의 끈을 놓으려 합니다.
말없는 물속 저 깊은 곳에 교수님이 뛰어놀던 동산과 교수님의 옛집은 고스란히 남아있겠지요.
교수님 이젠 그 옛 고향에 들러 어릴적 소꿉친구도 만나시고 정겨운 이웃도 만나세요.
그리고 보고픈 교수님의 어머니 무릎을 베고 고이 고이 아가처럼 잠드세요.
다음 세상에 다시 우리들의 스승으로 태어나 주길 기원하고 기원합니다.
교수님! 좀더 지켜주지 못해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기회를 준다면 다시는 교수님을 혼자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게 하지 않을께요.
교수님 사랑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께요.
다음 생을 기약 할 수밖에 없는 이 힘없는 문우들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잊지 말아주세요.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는 밝은 별이 되어 주세요. 보고플때 실컷 바라볼 수 있도록......
편히 잘 가세요. 사랑하는 교수님!!
이 배 근 追悼
(가상) 덕유 김홍은 교수님을 떠나보내며
이효순
교수님,
5월의 하늘은 파랗고 새소리는 아직도 청아합니다.
교수님 어느 나라로 가셨나요?
저희들 이렇게 이승에 남겨두고, 뒤도 안보고 왜 급히 가셨어요?
그곳이 여기보다 더 좋던가요.
3년 전 야간 강좌 폐강하였다고 메일 보냈던 철없는 저인데
이렇게 잘 키워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작은 원생의 마음을 받아 주셔서 야간에 무료로 설강을 하셨지요. 몸도 불편하신데...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오래전부터 교수님께 수필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저녁시간으로 이어지는 교수님의 가르침은 배움을 갈망하는 저희들에게
큰 즐거움과 보람이었습니다.
제 감사한 마음도 외면하고 가시다니 마음만 애석합니다.
저희들과 교수님의 숨결이 가득했던 푸른솔 숲, 평생교육원은 적막함이 감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언제 교수님과 함께 웃음을 나누며 공부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교수님만 안계시네요.
별이 빛나는 밤에 꿈속에서나 뵐 수 있을까요.
홈페지의 사진 속에서 뵈어야 하나요.
교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던 민속촌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찻집도
빛바랜 세월속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수님, 이승에 남은 저희들 푸른솔 숲을 이루어 솔향기를 발하며 생전에 주신 가르침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애달피 우는 소쩍새는 교수님을 더 생각나게 합니다.
교수님,
저희들이 천국에 가서 만나뵐때까지 편안히 쉬소서.
부족한 제자 이효순 올립니다.
(가상) 故 김홍은 교수님께 바칩니다.
김경숙
교수님! 저희들이 이렇게 목 놓아 불러도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저희들은 참 스승이 계셔서 행복하다고 기뻐 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습니까.
아직도 고우신 사모님과 예쁜 손자 손녀를 두고 그렇게 서둘러 가셔야만 했습니까.
이 재부 선생님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자 청출어람(靑出於藍)아라며 그리도 좋아 하시더니.....
모두 함께가서 축하해 주자며 어린아이처럼 좋아 하시던 교수님은 어디가시고 영정 사진만 우리앞에 있는 것인지.....
가슴이 미어지고 비통의 눈물만이 눈앞을 가립니다.
교수님! 하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교수님이 대답하시면 장난기 섞인 말로 그냥 불러 봤어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교수님을 보냅니다.
가슴 따뜻했던 추억만을 간직하고, 교수님을 보내 드립니다.
이런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2006년 5월 18일 김 경숙 올림
교수님 영전에 삼가 고합니다.
이종준
간밤에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세 차게 울더니만 끝내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 아래 다시 볼 수 없는 교수님의 영정 앞에 고별사를 하게 되었으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솟는 애통함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영전에 고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나라 없는 민족 압박과 서러움 배고픔을 지닌 채 이 땅의 시골농촌 오가리에서 태어나 동족 전쟁에 친구를 잃어야 했고 뭘-건 죽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메우며 쓰라린 배고픔을 겪으면서 책과 씨름을 하시였던 어린시절. 4.19. 5.16. 혁명 정의 앞에 횃불 들고 민주화를 외치며 꿈 많은 학창시절을 보내며 배워야 산다! 굶주린 자여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난과 고통을 이기고 드디어 교수님이 되시던 날 그렇게도 좋으신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동네방네 자랑하시던 아버님.
자랑스러운 이 겨레의 스승이요 사랑과 긍지로 제자 앞에서 언제나 새로운 향기를 풍기며 거룩한 스승의 길을 걸으신 교수님!
교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행복이 서려있고 해맑은 하늘에 꿈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왜 이렇게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지요? 그토록 사랑하는 사모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안타는 자녀 손주들을 두고 어디로 어떻게 가신단 말이요 괴로우나 즐거우나 민속촌 동동주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시던 교수님 멀리는 가시지 마세요.
우리를 두고 가버리는 교수님이여! 있어야할 자리에 이름석자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 애통함 울어도 울어도 손가락하나 어리지 않는 우리 어두운 눈시울에 향내와 비 바람소리만이 교수님 잃어버린 우리를 한없이 울립니다. 교수님이여 아직도 할일 많은 이 세상을 어떻게 가시려 합니까?
이 햇병아리가 장 닭이 되어 날개 치며 여명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교수님 어진성품에서 고동치는 아름다움이 너울너울 우리의 가슴에 파고듭니다. 교수님! 몸부림치는 사모님 가슴에 한을 남기고 울부짖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매정하게 어디로 어떻게 가신단 말이요 끝내 가신다면 저의 말 한마디나 듣고 가시구려.
사도의 굳은 절개 사랑의 일편단심
오늘도 구름타고 저 청산 넘노라니
높푸른 창공 한 조각 흰 구름사이
한 마리 백조가 되여
베티재 하늘 날다 비 맞으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가족
우리 수필 반 제자들의 눈물인줄 아시구려.
교수님이 못다 이룬 푸른 소나무 더욱 푸르고 아름다운 향기를 펼칠 것을 교수님 영정 앞에 삼가 옷깃을 여미고 다짐합니다.
마지막 불려보는 김 홍은 교수님!
고통 없는 하늘나라 편안히 가시옵소서. 몸은 비록 없을망정 교수님의 숭고한 그 정신 영원무궁토록 빛날지어다. 고이고이 잠드소서.
수필창작 문인동지회 일동
*본 작품은 푸른솔 홈 <사랑방>에 올린 글을
편집자가 옮겨왔습니다.
봄이 왔어요
손청숙
올해는 봄이란 놈이 내게도 와버렸습니다.
늦가을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파란 하늘과 쌩코롬하게 코를 베어가는 초겨울을 좋아하고 ,알레르기 비염이란 지병이 있는 나에게 있어,봄은 차라리 불청객이었습니다.
그런 내게 올 봄은 여느 해의 봄과는 달랐답니다.
맛도 각양각색인 나물로 위장과 간을 시퍼렇게 물들이는 것도 봄맛이긴 하겠으나, 역시 봄맛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라는 꽃에 있더군요.
아파트 화단에 핀 하얗고 빨갛고 노랗고 분홍인 꽃들.
갓 시집온 새색시 치마를 널어놓은 것 같은 지리산 세석평전의 철쭉꽃밭.
벌써 남들은 꽃구경 갑네 하고 화사한 빛깔로 꽃흉내 내면서 봄타령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언제 꽃구경 가보나 하고 자조하고 있던 어느날 아침,
뭐 그리 바쁘냐며 쉬엄쉬엄 가라고 별로 이쁘지도 않은 빨간 손으로 막아서며 신호등이 가리켜준 그 곳엔, 아파트의 빨간 벽돌 캔버스 위를 기어가고 있는 연둣빛 애기손이, 마치 엄마 따라 소풍 나온 삐약이의 날갯짓처럼 퍼득이고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손청숙
마알갛게 바닥을 드러내보이며 흐르는 물을 보면
시퍼렇게 속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물을 보면
어느때에건 상관없이 솔직할 수 없어
이마음 저마음 홀짝이며 건너다니는 가벼움에.
미안합니다
콸콸 쏟아져 내리는 폭포앞에서
조그만 돌덩이 하나 넘지 못하여 돌아가는 개울물앞에서
용기있게 나를 버리지 못하여
주변머리 없이 꼿꼿함에.
괜히 미안합니다.
흘러가면서 자꾸 말합니다
물처럼 살라고.
여행의 발견
-호주, 뉴질랜드를 다녀와서-
조순희
어느 날 우연히 여행을 같이 갔다 오자는 제안이 날아들었다. 여행에 동반할 분들은 예전 남편의 직장동료이기도 했던 선생님들 부부였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그랬다. 나 역시 부부라는 이름으로 잉꼬부부처럼 이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값진 여행으로서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빈자리를 가득 채워왔다.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제안 때문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샘처럼 솟아나는 눈물을 억제하며 우울한 마음을 지워 버리고 여행사에서 받아온 여행 일정표에 눈길을 주었다. 그렇잖아도 전부터 생일 겸 여행을 다녀오라는 가족들의 권유가 있던 터였다. 여행할 수 있는 운이 닿았는지 기회가 잘 이루어졌다.
여행지는 호주와 뉴질랜드이다. 자식들의 효(孝) 덕에 생각지 않게 1월 4일 출발해서 1월 11날 도착하는 7박 8일간의 일정을 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자연과 생활풍속을 인생 한 자락의 체험으로 담기 위해 한국을 뒤로 한 채 비행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이륙하였다.
여행은 떠나는 맛이라 하지 않았는가. 비행기 좌석이 설렘 반 꿈 반으로 술렁여 엉덩이마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기내를 둘러보니 온갖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와글거렸다. 서로가 여행에 들뜬 몸과 마음을 공유하면서 구름 위에 눌러 앉아 기내에서 긴 시간을 보낸 뒤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여행 일주에 나와 짝이 되어 동반할 사람은 룸메이트이기도 한 여자 가이드였다. 역시 시드니 공항에도 여자 가이드가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은 발을 옮길 틈도 없이 수많은 인파로 인해 한눈을 팔았다면 내 자리를 잊어버리고 호주 사람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함께 할 일행들을 확인하니 총 26명으로,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 8명이 포함돼 있었다. 희귀한 냄새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호주’라는 새로운 세계를 끌어안은 채 발도 쉽사리 뗄 수 없는 굴 속을 빠져나오듯 우리 일행은 한 동아리로 어우러져 준비해 온 도구에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쉽게도 비가 내렸다. 그렇지만 다행히 큰 비는 아니고 가랑비에 속했다.
일정에 따라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 설레는 마음으로 첫 코스인 동물원으로 향하였다. 흐린 날씨에 먼 곳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이라 나누어주는 우산을 받아쓰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구경을 하려 하니, 일기도 그렇고 길고 지루했던 기내에서 방금 나와 피곤한 몸이라 그런지 구경의 맛은 사라지고 여행의 기대감에 못 미쳤다. 허나 아이들은 희귀한 동물들을 보더니 가뭄에 단비를 맞듯이 비가 오든 말든 흥겨운 날갯짓으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으로 한 점의 문화적인 체험을 공부로서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아 좋아 보였다.
날씨가 흐린 탓으로 그림의 떡 보듯 첫날의 여행코스를 돌고는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호텔에 투숙했다. 저녁식사 후에 우리 일행은 한 객실에 자리를 만들고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고가는 웃음 속에 피로가 싹 풀리었다. 술잔에 부딪히는 반가움의 함성은 가족처럼 뭉쳐 보람 있게 여행의 추억을 남기자는 덕담에, 정감 있는 분위기가 어우러져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나왔다. 술자리는 웃음이 퍼지는 등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늘 평소에 웃음을 잃어버리고 그늘 속에서 지내듯 삶의 제 맛을 못 느끼는 착잡한 생활이었건만, 세월의 흐름이 약이 된지라 이 자리로서 비로소 아픈 상처가 아물듯이 행복한 세상을 다 차지한 것처럼 기쁨의 도가니로 빠져 드는 듯했다. 좋아 하지도 않고 먹지도 못하는 술이건만 부딪힌 술 한 잔에 억지 춘향으로 마지못해 마시니 술이라는 맛도 모르게 몸은 마비가 된 듯이 모든 것에 정신을 잃고 잠에 취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제일 먼저 일기가 궁금했다. 커튼을 걷고 창을 열어 내다보니 전날과는 아주 달리 해맑은 날씨에 반팔 옷차림으로 여행을 하기에 딱 좋았다. 어느 날 내 인생에 변화가 찾아들어 타국에 온 것처럼, 일기도 급변하여 조물주가 새로이 세상을 창조한 듯 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에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양산으로 더위를 피하며 절로 감사함이 느껴졌다. 얼음이 해동하여 스스로 포근한 날씨로 풀리듯, 여행의 체험을 좋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식사 때 풍성한 먹을거리를 걸러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사실 지난여름 중국여행 때 음식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뒤였다.
즐거운 구경길로 들어섰다.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한눈에 담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의 말처럼 호주는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과 맑은 공기의 기를 받아 힘이 솟아나는 듯한 열정을 피부로 느끼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그것은 신선함의 연속이었다. 이국적인 정취와 풍광 등 볼거리가 많은 자연에 담긴 멋진 경관에 나는 정신이 나간 듯 푹 빠져버리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넓은 들녘으로, 소작 하는 것 없이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소떼만 보이고 사람조차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혹간 보이는 사람은 비만이 심한 뚱뚱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인형처럼 다 예뻐 지금도 그 이쁜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거리에 달리는 차도 흔히 볼 수 없고 또 보이는 차라면 우리처럼 관광객을 싣고 다니는 버스뿐이었다. 차를 보고 느낀 점은 모두 일괄적으로 세차한 것처럼 윤택이 나고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는 숨이 막힐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 주택건물이 꽉 매어져 있지만 그와 달리 호주와 뉴질랜드는 시내가 아니고는 주택을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졌고 주택은 하나같이 단층이며 울타리라고는 인공적인 벽돌이나 담장을 설치한 것이 아닌, 거의 나무로 장식되어 심어져 있었다. 부촌이라고 해도 가옥의 디자인만 다를 뿐이지 2층이라는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계절이 없는(극심한 추위와 더위가 없는) 알맞은 기온에 맑은 공기와 더불어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맘 놓고 물을 먹을 수 있었다. 여행의 코스에 따라 접하는 자연경관마다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시드니의 유명한 건축물 오페라하우스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있었으며 규모가 굉장하였다. 커팅 된 오렌지 조각에서 그 디자인이 유래되었다는 시드니항의 오페라하우스는 14년간의 공사를 거쳐 1973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실내는 5개의 크고 작은 공연장도 있고 부설되어 있는 방도 무려 1000개나 된다고 했다. 가장 큰 콘서트홀은 27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고, 1600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오페라 극장 등도 유명하다 했다.
호주보다 볼거리가 많은 뉴질랜드는 반딧불 석회동굴, 양몰이 털깎기, 유황온천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진 관광코스 하며, 잊지 못할 자연경관과 정취가 너무나 많았다.
내 인생의 한 자락으로 남겨두기에 이번 호주, 뉴질랜드 여행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모로 체험한 그 맛에 간사스러운 마음이 새로록 피어오른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지휘가 되고 취향에 따라 개선 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의 생활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삶의 도전으로서,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터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놓고 못 다 이룬 즐거운 생활들을 해보고 싶다. 그것이 나의 남은 인생 희로애락 어느 한켠에 들어도 좋으리라…. 그렇게 풍요로운 멋을 담뿍 느끼며 인생을 마무리 하고 싶다는 바람이 바로 그것이다.
잃어버린 붓통
조순희
야외 수업차 찾은 무석 공예실에 들어서면서 신비로운 촉감이 느껴지는 우아한 작품과 다양하게 만들어진 묘한 느낌의 공예품들이 마음을 흔들어 뜻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평상시 흔하게 접할 수 없었던, 말로만 듣던 공예 작품을 둘러보니, 아기자기한 각기의 작품들이 멋을 부리는 듯 아름답고도 오묘한 빛을 발산하며 도자기의 일품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다양하면서도 깊은 멋을 뿜어내는 조각 작품에 호감이 감과 동시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놓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손재주를 부려 빚어지는 도자기의 제작 과정이 너무도 보고 싶고 또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공예 작품으로 장식되어지고 빼곡히 채워진 실내를 이곳저곳 찬찬히 살피면서 나도 모르게 4대조 할아버님의 추억과 흔적으로 생각이 옮아가, 잃어버린 붓통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가슴 가득 느끼며 어디 비슷한 모양의 붓통이라도 없나 하고 둥글고 길쭉한 작품이 있는 곳을 찾아보느라 눈길이 바빴습니다.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어진 붓통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생긴 모양의 작품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4대조 할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관리를 못한 증손부로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대로 내려오던 조상의 유물을, 할아버님 평생에 갈고 닦고 삶과 생활의 애환과 넋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 점 사죄한들 용서가 되겠습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붓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인식 등 세월의 변화에 따라 날로 진품명품 골동품의 가치가 상승하고 활기를 띠는 걸 보면서 죄책감으로 더욱더 가슴 아픈 마음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잃어버린 붓통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항상 가슴속 밑에 꾸욱 눌러져있는 아픔입니다.
허나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묻혀 살던 지라 소홀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바쁜 농촌생활 속의 촌부(村婦)로서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밭일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집에 돌아와 힘들어 마루에 턱 걸쳐 누워 있으려니 생각지 않게 어떤 사내가 노성농 씨 댁이시냐?고 묻기에 맞는데요.하니,
이 댁을 찾기 위해 물어물어 찾아오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 팔아먹고 붓통, 벼루통밖에 없습니다. 했지요. 그거라도 볼 수 없느냐?고 하기에, 시부모님 사용 하시는 사랑방 선반 위에 놓인 붓통을 보여주고 할아버지 옛 글들이 담긴 것들도 보여주었습니다.
골동품 장수가 붓통을 팔라고 권하며 저 글들은 팔면 안 돼요. 저 글은 꼭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하기에 안 팔아요. 멋모르고 팔았지.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소지품들이 세월 따라 너도나도 구하러 다니는 이렇게 귀한 골동품이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알은 지금 이나마 어찌 팔을 수가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는 돌아가고 저는 또 들로 나갔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님이 얘야, 선반 위의 붓통이 없어졌다.고 하시기에 웬일이에요? 저도 모르지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하며 방으로 들어가 찾아 둘러보니 붓통은 간 곳이 없고 그 순간 골동품 장수 생각이 딱 떠올랐습니다. 평생 잘 있다가 골동품 아저씨가 왔다 간 뒤로 즉시 없어졌으니까 도둑맞았다는 예상은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으로 골동품을 수집하러 다니는 이들이 많았었습니다.
사실 농촌 생활로서는 도둑맞기가 쉬운 일이었습니다. 한 집터에 건물만 지어 서로 마음만 믿고 당내끼리 사노라니, 울도 대문도 없이 짐승도 활개를 치고 자라는 유일한 시절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어 시아버님께 야단맞을 생각은 전혀 못하고 방정맞은 생각으로 아버님, 엊그제 골동품 장수가 노성농 씨 댁이 여기냐고 하며 찾아왔습니다. 맞는다고 했더니 골동품이 몇 점이 남았습니까? 하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붓통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붓통이 어떤 붓통인데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네 마음대로 보여 주었느냐.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나 그 자리에서 아버님 앞을 얼른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후로 붓통을 잃어버린 슬픔 보다는 시아버님 노(怒)하시는 호령으로 매서운 눈길 피하기가 너무도 힘들고 조용한 집안을 보내기에는 여간 힘든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 4대조 할아버님께서는 기품 있고 학식이 뛰어난 선비로서, 그윽한 먹의 향기에 품위를 담아 학문에 정진하시고 글을 쓰셨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이던 조랑말이나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하실라 치면 할아버님 헛기침 소리에 온 동네가 다 조용해졌다 했지요. 또한 편지글을 통해 문우나 지인들과 서신왕래를 하셨는데, 그때에 남산이라는 하인이 있어 할아버님 편지글을 가지고 심부름을 가거나 답장을 받아오곤 하였습니다.
붓통이 떠난 뒤로 아버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잃어버린 붓통으로 아픔은 더욱더 겹쳐져 잊지를 못합니다. 이제는 짝을 잃은 듯 벼룻돌과 먹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붓에서는 아직도 할아버님의 그윽한 인품과 손길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렇게 남은 유품을 볼 때마다 4대조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고 애틋함과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옵니다.
지난 수업시간의 교수님 말씀 중에 다음 주는 공예 집에서 수업을 하신다고 하기에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붓통을 마음속에 떠올리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하여 대신할 수 있는 붓통을 만들겠다는 다짐 하에 공예수업 일정을 기다려왔습니다. 그 계기로 작업실로 들어가 도자기 굽는 지도를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공예품 만들기에 착수했습니다.
할아버님과 잃어버린 붓통에 대한 생각과 추억을 떠올리며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사랑방 선반 위에 놓였던 붓통의 외양을 상상하며 정성이 담긴 마음으로, 진품은 아니지만 비슷한 공예품이라도 만들어 잃어버린 아픔의 반이라도 채울 수 있도록 그 빈자리를 옛날 것을 보듯 안치 하고자 합니다.
어찌 잊으랴, 나누어준 흙을 가지고 할아버님 생각과 잃어버린 붓통의 흔적을 마음속에 그리며 집중해서 만들기에 푹 빠져 들어갔습니다. 잠시나마 할아버지를 모시는 마음으로 옛 붓통을 만들었습니다. 흙을 만지고 도자기를 굽는 일은 처음이라 기술이 없는 탓인지 형식에 의한 이름만 붓통이지 제대로 만들어진 붓통은 아닙니다.
이렇게 공예 수업의 계기를 통해 떠난 붓통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의미담은 붓통으로 떠난 붓통 그리며라는 글을 새겨 놓으며 애틋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공예 수업의 막을 내렸습니다.
도서관 단상
김 경숙
중앙도서관에 갔다. 집중해서 공부해야 할 것도 자료를 찾을 일도 없는데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나도 몰래 도서관으로 발길이 간다. 아마도 그것은 20대 일요일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안정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대 일요일은 이른 아침부터 도서관에 갈 준비로 분주했다. 직장 생활과 검정고시를 병행하던 나는 턱없이 부족한 공부를 하자면 일요일에는 꼭 도서관을 가야했다.
널찍한 열람실은 학생들의 진지한 눈빛과 책 넘기는 소리 뿐 조용했다. 이 분위기가 좋았다. 도서관에 왔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가방가득 들어있는 중학생 참고서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책상이 칸막이로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다른 책은 숨기듯이 가방에 넣어 두고 영어 책을 꺼냈다. 누가 봐도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활자가 큰 중학생용 교제를 펴자니 주변 시선이 부담되어 공부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티 없이 밝은 여학생들이 자기네들끼리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더니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했다. 스무 살이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이 중학교 공부를 하고 있다며 저희들끼리 흉을 보는 듯 하여 마음이 움츠러들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I am a boy. How old are you?' 오늘따라 영어 참고서의 활자가 확대경으로 보는 듯 크게 보였다. 몸의 고단함보다 열등감과 자존심이 더 견디기 힘이 들었다. 이제까지 잘 참았던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고향동네에 살던 미친 여자 생각이 났다. 머리에 꽃을 꽂고, 옷만 보면 어른 것이나 아이 것 가리지 않고 입어서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하던 여자. 무엇이 좋은지 항상 웃고 다니던 그녀가 부러웠다. 나도 그녀처럼 미치고 싶었다.
한참 울고 났더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눈물로 얼룩진 책을 보며 결코 편안함에 길들여지지 않으리란 마음으로 연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서관의 음식은 저렴하면서도 맛이 있어 좋다. 오늘 메뉴는 정월 대보름이라 오곡밥에 삼색나물, 미니돈가스, 김치와 무국이 나왔다. 내 앞에 대학생인 듯한 여학생이 앉는다. 보온 도시락에서 나온 반찬이 제법 푸짐하다. 국은 둥글둥글한 홍 고추가 들어 있는 콩나물국이었다. 여학생의 콩나물국을 보자 밥이 목울대를 타고 내려가려다 말고 통증으로 울컥한다.
20여년 저쪽, 서울 정독 도서관에서는 콩나물국을 50원에 팔았다. 점심시간 콩나물국을 사서 누가 볼세라 식당 맨 구석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반찬은 혀가 절여질 만큼 짠 장아찌나 된장 이었다. 날씨가 추운 날은 따끈한 콩나물국을 먼저 먹고 식은 밥은 된장에 비볐다. 비빈 밥 위에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허허로운 마음과 젖은 눈을 들킬까봐 밥을 비비고 또 비볐다. 입 가득 밥을 넣고 눈물을 물 삼아 먹었다.
중앙도서관 2층 종합자료실에 ‘향토작가코너’가있다. 이곳에서 반 숙자 선생님을 만났다. 청각장애를 가진 선생님의 눈물어린 사랑과 고통의 가슴 절절한 글을 보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필 공부를 하여 가슴 훈훈한 글을 쓰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분노와 증오가 그대로였고, 정제되지 않은 무절제한 문장들로 어지러웠다.
선생님의 책 ‘그대 피어나라 하시기에’ 와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를 교과서 삼아 내 안의 열등감과 분노를 승화시켜 선생님처럼 따뜻한 글을 써 보리란 각오를 해 본다.
빈자리가 많은 향토작가코너의 책꽂이에서 내 이름을 보고 싶다는 소망은 걸음마를 배우는 내게는 지나친 욕심일까.
시媤아버지 (나의 아버지)
권인자
오월이 가기 전에, 아카시아 꽃이 지기 전에, 무작정 차를 달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가로수 터널을 지나면서 많은 생각들이 밤하늘에 별무리처럼 흩어졌다 모이고 또는 더 영롱하게 빛나기도 해서 더욱 속력을 내게 했다.
강산이 두 번하고도 세 번째 바뀌어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 그곳은 개발지역이 되어버려서 모를 심어놓고 엎드려 뜬모 하시던 아버지의 손길 닿았던 논의 흔적은 간 곳 없이 메꾸어 졌고 어느 때보다도 더욱 짙은 향기를 발하며 나를 위로했던 아카시아 나무도 없어졌다. 어디쯤인가 가늠해보면서 들판을 걸어본다. ‘아버지 여기쯤이죠?’ ‘싯째 왔구나’(시아버님이 생전에 셋째며느리인 나를 부르던 호칭, 사투리) ‘네, 아버지!’ 그때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대답해본다. 22살에 한 살? 아니 정확하게 몇 개월 더 먼저 태어났고 군대를 막 제대한 남편을 만나 함께 양장점을 차려 운영하면서 이듬해, 또 이듬해에 연년생 딸을 낳아 사대가 한집에 사는 셋째 며느리가 되었다. 첫아이를 낳을 때 마흔 여섯의 젊고 말수가 없으신 시어머니와 달리 공직에서 막 퇴직하신 시아버님은 무척 자상하셔서 친정아버지 이상으로 잘 해주셨다.
많은 논농사를 지어도 기계로 모든 일을 하니까 그리 바쁘지 않았기에 대서소를 차려서 운영하며 노년을 알차고 건강하게 지내셨다. 아이 둘을 낳기만 했지 기저귀와 우유 등 밤에도 우리가 퇴근하면 잠깐 내 방에 왔다가 손수 데리고 주무실 정도로 며느리에 대한 배려와 손주들의 사랑이 지극하셨다. 결혼만 해주면 밤 하늘에 별도, 달도 다 따준다고 하던 약속을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은 잘 지켜가더니 어느날 부턴가 남편은 바깥세상이 많이 궁금했나보다.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그럴 때 마다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양장점과 집의 거리는 몇 정거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일감도 많아서 늦은 밤까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때이기도 했다. 유난히 무서움이 많은 나는 혼자 퇴근하는 시간이 공포 그 자체였다. 여러 해 동안 그런 날이 지속되다 보니 엄마와 아내, 그리고 며느리의 자리도 나에겐 더 이상 버티며 살아갈 꿈도 희망도 없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여 향기 진동하고 논두렁에 쇠뜨기풀이 유난히 많던 그 논을 돌아보시며 물꼬를 틔워주고는 후우~ 한숨과 함께, 담배 한 모금을 허공을 향해 연기와 함께 날려 보내고 계셨다. “아버지” “으응! 싯째 왔구나”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철없는 어린 새댁은 다정다감하신 시아버님께 이야기를 했고 또 혼자 다니는 모습을 보아서도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아버지! 제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애요. 더 이상 아버지의 며느리도, 애들의 엄마 노릇도 할 수가 없어요. 부족한 것 많지만 아버지의 착한 며느리, 또 착한 애들 엄마, 착한 아내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잡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가봐요 아버지” 한참을 울면서 말을 하고 대답 없는 아버지를 보니 울고 계셨다. “나쁜놈의 자식!” 이미 모든 상황을 보아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어린 며느리의 삶이 애처로왔지만 아이도 둘이나 있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열정을 다하길래 잘 이기고 있구나 속으로 응원하며 격려하고 있었다면서 “너는 처음부터 며느리가 아니고 내 딸이었다. 지금까지 잘 이기고 왔던 것처럼 엄마 아버지 믿고 의지하며 같이 살면 안되겠니? 아니 같이 살자"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논두렁에 앉아서 목 놓아 우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도 함께 울며 오랜 시간 다독여 주셨다.
그 일이 있고 어느 때 부터인지 시아버님이 아버지로 어머님은 엄마로 호칭이 바뀌었다. 먹는 것에서부터 모든 삶에 자잘한 것 까지, 철없는 아들의 미흡함을 더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려는 듯, 심지어 퇴근해서 집에 갈때면 “엄마 나 지금 집에 가려구” “응, 그래 알았다 어서와” 신작로까지 마중은 늘 있는 일이고, 밤중에 화장실 출입도 “엄마!” 하고 부르면 대청마루 끝에서 기다려 주던 엄마는 지금까지도 김치며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우리 집에 오시는 걸 무척 기뻐하신다. 명절 때 동서들과 전을 부치고 있으면 “싯째야 물 좀 떠와라” 물 떠온 나에게 아버지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건네시며 형님들 모르게 빨리 차에 갖다 실으라고 하신다. 이튿날 보면 똑같은 선물을 동서들에게도 주시면서 껄껄껄 웃으시던 아버지!!! 나에게 엄마의 자리를, 아내와 며느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나를 지켜 주시던 아버지! 아무 사정을 모르던 동서들의 시샘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 싯째가 먼저이셨던 것은 약하고 부족한 자식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께서 십여년 전 아직도 건강하고 젊으시다고 느끼던 어느날 갑자기 하늘로 가셨다. 며느리에게 그 어떤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진자리 마른자리도 감당할 마음의 다짐이 있었는데! 황량한 세월 속에 태산이 되어주셨던 시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그리며 하늘을 본다. ‘아버지께 못다한 것 혼자계신 엄마에게 더 잘해드릴께요’ 하고...
장군봉을 오르며
박종남
봄이 오면 봄을 만끽하리라 기대해보며 설레는 맘으로 창 밖을 기웃대며 봄이 오기를 고대했다
겨울 산을 오를때의 칼 바람과 눈 꽃을 피워낸 산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겨울 산의 멋에 흠뻑 취했었다. 그리고, 봄엔 또 다른 계절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산행에 대한 욕망과 기대로 풍선처럼 가슴을 부풀리고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그 봄의 모습을 제대로 느끼고 올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는 알 수없으나 밤을 하얗듯이 새운듯 무거운 몸으로 아침 일찍 체육관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었다. 발 걸음을 떼어 놓으며 이른 아침의 하늘을 올려다 보니 나의 몸의 컨디션 처럼 하늘도 온통 회색 빛의 얼굴이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가 전국적으로 내린다고 하였으니 예상대로라면 비가 내릴것인데 산행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만 내려 주었음하는 기도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갖고 다시 한번 올려다 보니 발길은 빠른 걸음 걸이로 버스에 도착 하게 한다. 자주 가는 산악회다 보니 안면이 있는 산우들이 반갑게 맞아 눈 인사를 나누고 내 자릴 찾아 의자에 깊숙히 앉는다. 봄은 봄인가 보다. 일상을 떠나 하루 동안의 여정에 발길을 머물게 하려는 사람들로 체육관 앞은 북적이는 사람들로 초 만원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미끄러지듯이 체육관을 빠져나와 잠시의 도심을 지나쳐 고속도로 한켠을 차지하고 질주를 한다. 눈을 들어 창 밖을 내다보는 나의 눈은 바쁘다. 눈 처럼 하얗게 보이는 산 벚꽃의 이쁜 모습
나무의 여린 잎들의 새순들이 똑 같은 색깔이 아니어서 그대로 하나의 꽃을 피워낸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아~오늘보니 5월의 신록도 아름답지만 4월의 여린 순한 새잎들의 합창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차창밖 나무들의 하모니였다. 4월의 산하엔 볼거리 넘실대는 보물 창고이다. 과수원엔 이화와 도화의 아름다움이 눈을 황홀케하고, 산 자락엔 낮은키로 선홍색의 피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가 눈길을 끌고 나무는 저마다의 독특한 색감으로 채색을 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듯 넋을 놓고 즐길 즈음 버스는 우리를 산 들머리에 썰물처럼 토해 놓았다. 내래서 휘 돌아보니 발 아래엔 약각은 커다란 냇물이 흐르고 있고 그 냇물이 어찌나 맑던지 모두가 한결 같이 아~ 참 맑다! 감탄사을 연발한다. 위로 올라가니 또랑물이 되어 우리의 발길아래 가로 놓여 진다. 펄쩍 펄쩍 뛰어 건너니 어린시절 징검다리를 건너 뛰기하던 시절이 다들 생각이 났던지 모두의 얼굴엔 함박 웃음이 번지며 장난기가 발동들을 한다.
초입으로 들어서니 벌써 나무의 향내로 마음에 날개를 단다. 발걸음도 경쾌하게 내어 걷고 감기가 잔뜩 실린 나의 몸도 거뜬 한듯하나 그것은 기분 뿐인듯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먼저 다녀간 산꾼들의 표적인 알록 달록한 흔적을 쫓아 그들의 땀내와 안내로 쉽게 길을 찾아 올라간다. 가는 고샅길의 양 옆으론 진달래가 길게 열지어 따라와 주고, 키 작은 야생화의 노란 꽃 모습이 앙징맞고, 보라색 붓꽃이 그 자태를 수줍게 내어주고 자꾸만 유혹한다 . 저 꽃을 캐어다 내 집 화분에 옮겨 심으면 좋겠다는...
산 중턱을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우리가 산을 향해 왔던 길이 한 눈에 들어오며 위에 오른 기쁨을 안겨준다. 편안한 솔잎 방석 위에 앉아 솔향을 맡으며 가져간 간식을 꺼내어 나누어 먹으니 소풍가서 간식 까먹던 기억이 마음 곁으로 다가와 쏠쏠한 재미를 더해준다. 쉼을 거두고 올라갈 방향을 살펴보니 집채만한 바위 암릉이 우릴 반길것 같다. 숨을 몰아쉬고 가까이 다가서보니 암릉 옆으로는 천길 낭떨어지이고 달랑 외줄하나가 바람에 이리흔들 저리흔들 너울대고 있다. 용기 있게 발을 한 발 한 발 힘있게 버티고 팔에 힘을 주어 아슬아슬하게 올라서니 온 몸이 후줄근하다. 아마도 긴장한 탓이리라. 순간을 잘 넘기고 나니 이런 묘미에 산에 오르지 싶다. 인생 여정을 산행에 비유하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삶의 긴 시간을 가노라면 경험하고 싶지 않은 우여 곡절과 맞닦뜨리고 그 질곡에서 헤어나려고 버둥거리다 보면 많은 시간을 훌쩍 지나쳐 버리게도 되고, 그 순간을 지나치고 시간이 흐르면 아련한 그리움 같은 여운을 안게도 되듯이! 말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고 사색을 즐기며 나무들과 꽃들과 춤추둣 오르니 정상인 장군봉에 다다랐다. 힘겹게 오른 정상의 표지치곤 아주 조그마한 석비에 장군봉735m라는 푯말과 희끄무레한 하늘과 바람이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은 인생사와 마찬가지로 산행길도 오름의 행동 뒤엔 결코 내림짓을 피할 수는 없는것, 어찌보면 내려오기 위해 우린 매번 오름짓을 하고 있지 않던가?...그러나 그 내리막 길이란 것도 결코 평탄하게 내려 올 수가 없다. 힘겹게 오른 만큼 하산길이 만만치가 않다. 곡예를 해야 하듯이 외줄 하나에 의지하고 미끄러운 벼랑 위에서 대롱 거릴때는 내가 이런 고생을 왜 할까? 하는 마음 속의 자문에 나의 대답은 그렇지! 삶은 결코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겠지? 위험 천만한 상황에서도 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산행을 하면서 얻는 것은 결코 만만한 산행은 없듯이 삶의 순간도 결코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인 시켜 준다는 점이다. 벼랑 바위에서 위촉 즉발의 위기 상황에서도 위를 올려다 보면 영락없이 바람이 날라다 준 조금의 양분에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생명체를 발견하곤한다. 특히나 조그만 소나무에 조롱조롱 억척스럽게 열매를 맺어놓은 솔방울을 보노라면 인간이나 식물이나 종족을 보존하고 번식하려는 것은! 본능임이 틀림없다. 그런 놈들을 보노라면 애잔한 슬픔까지 마음 속에서 녹아내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도 준비해간 도시락을 판판한 바위 위에 펼쳐 놓으니 그대로 하나의 휼륭한 오찬이 널따란 바위 상에 놓여진다.
오늘의 산행의 진수는 하산 길에 만난 해골 바위이다. 뒤로는 병풍처럼 거대한 바위 벼랑이 둘러쳐진 앞으로 작은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가 앞 전면이 우리가 영상으로 본 해골 그 모습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하다. 바위 중간중간에 움푹 움푹 패인 것이 썩어 문드러져서 사그러진 눈, 코, 잎 모습을 보는 듯해 진저리가 쳐 졌다. 우리 일행들은 그 패인 곳에 웅크리고 앉아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난 차마 그럴수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니 청아한 물소리가 귀를 간지럽흰다. 계곡이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한 모금 길게 빨아들여 마시니 싸한 청명한 기운이 내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꿈틀대는 듯 하다. 맑은 물 멋을 느끼고 우린 등산화를 벗고 물에 담그니 시려오는 발끝에 일분도 담그고 있지를 못하게 한다. 몇 번을 담금질을 하고 하산길을 마무리 하니 해냈단 뿌듯함과 함께 고단함이 일시에 몰려든다.
버스에 오르기전 오늘 오른 산 등성이를 따라서 눈으로 더듬어 보니 오늘도 많은 발걸음을 한걸음씩 떼어 놓은 하루였다. 그리고 혼자 되뇌어 본다. 산은 늘 계절의 변화된 모습에 순응하며 그 모습 그대로 있어 주고있듯이 다시 오면 언제고 품어주리라. 내 마음 이렇게 산 그림자에 서성이듯이...
나의 아버지
이현자
새끼와 함께 너 댓 마리의 소가 있던 축사는 텅 비어 있다. 살붙이 같던 소를 윗마을 건실한 청년에게 넘긴 건 서울 큰 병원으로 가기 하루 전이었다. 자식 집에 다니러 와도 소를 핑계 삼아 급히 내려가시는 것을 보면 다 자라 뻣뻣해진 우리들 보단 어린송아지를 더 애살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지난 가을, 갈무리 할 무렵부터 찾아온 그 복통 만 아니었다면 지금은 보드라운 새끼가 한마리쯤 더 노닐고 있을 터이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흥분 되었던 마음이 곧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비장함으로 바뀐 것은 몇 해 전부터 연락이 닿은 어릴 적 동무들과 벼르고 벼른 금강산 여행을 몇 일 말미를 두고였다. 여름부터 속이 좋지 않아 읍내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한 후 죽과 약만 의지 한 채 홀로 삭였던 고통이 말기 암이라는 믿기지 않는 통보로 되돌아 왔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집안 일 이며 농협대출금까지 모두 정리 하신 후 광에서 내오신 것은 보험 증서였다. 막내 까지 모두 출가 시킨 후 송아지를 팔아 푼푼히 부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본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작은 가방 하나만 챙기셨다. 그리고는 겨울에 몸을 풀 소를 돌보지 못함을 추측 하시는지 곧바로 소를 팔았다.
젖도 채 떼기 전에 어머니를 잃고 두 살 위의 형님과 대장부 같다던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인지 다정스러움은 언제나 무뚝뚝함 으로 내 보이셨다. 그래도 가끔 술에 취해서 끄억끄억 울부짖었던 것은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그리워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얼핏 본 아버지의 일기장엔 첫 살림을 내고도 몇 해가 지나 장만한 송아지와 쇠죽솥을 들이는 날, 첫 잎담배 농사로 돈을 손에 쥐어본 날이 설레임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보며 깊은 그리움과 사랑이 무뚝뚝함 이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수술을 위해 입원 하던 첫날밤은 결혼 하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던 밤이었다. 술에 취한 노랫가락도 없고 넋두리도 없이 새벽녘에 찾아온 덩어리의 요동은 젊은 날 울부짖었던 소리보다 조용했지만 더 가슴을 타들게 했다. 어머니의 정을 서럽게 삭이다가 이제야 내뱉는 듯 산통 같다는 아픔은 내게도 선명히 전해져 왔다. 탯줄 놓고 자궁을 빠져나온 아이 같이 고향을 저리 두고 온 아픔이 더 했는지도 모른다.
분주한 의료진의 손길을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온갖 쓴 화학 물질을 젖줄처럼 받아 들이 듯 아버지는 몸을 맡기셨다. 덩어리를 뚝 떼어 내고 훨훨 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길었던 잠은 겨우내 낙엽 같은 몸으로 지내게 했다. 자장가 대신 곤한 콧소리와 젖무덤을 내주었을 어머니 같은 고향에 서둘러 내려온 아버지는 아이처럼 푸근히 안기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육신과 가슴에 맺혔던 덩어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날부
터 머나먼 타향에 떼어 놓고 온 것처럼 봄빛 드는 들과 소 우리를 전에 없이 오간다.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 어찌 저렇게도 애달프게 아시는 걸까?
지열이 끓던 들판에서 청춘을 불태우며 감자알 같던 자식들 머리 굵히느라 영근 통증으로 찾아온 아버지의 그리움. 이렇게 자식 두엇 두고 어릴 적 고향 추억을 돌이키며 사람 보다 더 그리웁다고 내뱉는 나의 언어들은 흙길에 깔린 자갈돌 같다.
봄이 다 가기 전에 윗마을 청년에게 넘겼던 어미 소가 낳은 송아지를 새로 들일 모양이다. 외지인 에게 인삼밭으로 넘긴 밭가에서 오늘도 한참을 서성인다.
외면은 무뚝뚝하지만 여린 속내를 가지고
육신에 병이 돋는 줄도 모르고 한세월 바삐 사신 아버지
엄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식한테 지는
갈무리 하지 못하는 정을 지닌 나의 아버지.
특별한 생일 선물
이현자
며칠 전부터 작은 애는 용돈을 모으려고 했지만 쉽사리 되지 않는 듯 하다. 동전만 보면 저금통에 넣는 버릇 때문에 모아 지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부쩍 제방에 들어 앉아 있는 시간이 늘은 걸 보면 책을 읽을 때마다 값을 매겨서 용돈을 받을 속셈이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식탁위에 있는 작은 달력에 생일이라고 쳐둔 표시 때문인 것 같다.
생일이라면 고정관념 같아서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건 바쁜 농촌에서 자란 까닭이다. 어쩌다 일 많던 어머니의 기억으로 아침 밥상에 미역국이라도 오를라치면 형제 중 가장 대접 받는 기분이 드는 건 아무도 모르는 기쁨일 것이다.
더욱이 고추 심는 날로 정해져 있던 어린이날이 가장 싫었던 기억은 나뿐만이 아닐지 모른다. 가난한 농촌 마을엔 철마다 제각기 아이들이 도와야 하는 일이 많았다. 밭고랑에 풀을 뽑거나 긴 이랑에 질린 채 고추를 따야했고 아버지 따라 삭정이 줍던 일이 지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생일을 앞둔 날, 몇 명의 친구와 가출을 하게 되었는데 고삐 풀린 소를 찾으러 밤새 온 들판을 헤메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 찾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시오리나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가서 돈도 없이 구경만 하다 오는 길은 한없이 길고 힘들었지만 집으로 돌아 갈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마을에서 외떨어진 방앗간이다.
밤이 되면서 두렵기 보다는 어머니가 애 먹을 생각을 하니 잘 되었다는 마음이 앞섰다. 의기양양해진 우리는 제대로 잠도 못자고 온갖 상상 속에 아침을 맞았다. 마을앞 다리 아래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때가 되기 전에 돌아온 집은 적막강산이다. 식구들이 나를 찾으러 나간 텅 빈집이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후, 돌아오신 어머니를 보니 아무 말이 없고 폭풍 전야 같은 불안감이 감돌아 잘못 했다고 먼저 선수 치는 것이 나은 상황이다. 주눅들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떼려니 ‘옥이네서 놀고 거기서 자는 줄 알았지.’하며 내놓는 쑥 개떡이 원망스럽고 차라리 부지깽이로 등줄기 몇 대 후려 맞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었다. 그날, 혼났던 친구는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우리만의 가출이 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 아니 관심 끌기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 마저도 호사였던 것이다. 지금은 나긋한 자장가 보다 곤한 콧소리가 그립고 고운 인절미 보단 거친 쑥 버무리가 좋은 것을 보면 뒤늦게 철이 드는가 보다.
그 후로도 농번기에 있는 생일과 어린이날은 곱으로 괴로웠지만 돌이켜 보면 가끔 먹었던 미역국과 쑥 개떡은 일년 내내 어머니 마음 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릴 때 못 먹여서 몸집이 작은 줄 아시니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는 표시를 하지 않아도 작은 선물과 메모라도 오고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지만 닦달하지 않는다. 남편도 도시락을 제대로 싸가지 못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생일은 제쳐둘 일이다. 단번에 얻는 즐거움 보다는 겨자씨 같은 행복이라도 날마다 갖는 것에 더 큰 삶의 의미를 둔다. 이런 궁합 까지 맞는 다며 가끔 웃곤 하지만 달력에 쳐둔 가족 행사를 보고 아이들이 먼저 발견을 한다.
작은애가 엄마는 뭐가 좋으냐며 은근히 떠본다. 제방 청소나 책읽기에 값을 쳐서 만든 얼마간의 돈을 들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진다. 해거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집주변을 서성이는데 검은 봉지를 감싸 안고 달려온다. 들고 노느라 구겨진 봉지 속에는 쑥 절편이 뭉개져 있다. 몇 번인지 쑥 개떡 이야기를 듣고는 저 아래 시장까지 가서 사온 모양이다.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초저녁 하늘엔 잔별이 보이지 않지만 아이와 나의 마음엔 고향 마을 다리처럼 은하수가 깔렸다. 밥물에 익힌 쑥 향이 살그머니 퍼지듯 어둑어둑한 하늘에 주름진 어머니 얼굴이 가득 하다.
쑥절편 곱게 빼어 고향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달래가 흐드러진 앞산이 아른 거린다.
06.04.20
민들레처럼
조 경 진
무심천 벚꽃이 꽃구름으로 피어오르던 화려한 봄날이 심술궂은 황사와 이상 저온에 며칠 몸살을 앓더니 오늘은 한 계절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듯 햇살이 꽤나 따갑다. 모처럼 오후가 자유로운 한낮, 하늘이 너무 맑아 그냥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둘러친 담장 밑에, 보드 블록 사이에 피어있는 민들레꽃이 자꾸 눈길을 붙잡는다. 좁디좁은 틈새를 뚫고 올라와 납작 엎드려 나지막하게 꽃대를 세우고 꽃을 피운 민들레. 주위를 둘러보니 담장 밑에 노란 꽃들이 고개를 들고 줄을 서있다.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대를 세운 그 힘과 참을성이 대견하여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비 한 마리가 민들레꽃을 맴돌며 가볍게 날개 짓을 한다. 나비의 하얀 옷깃에 노란 물이 드는 듯하다.
들판이나 도심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는 민들레. 흙냄새만 맡을 수 있으면 어디서나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의 그물망 같은 뿌리를 헤집고 자리를 잡는가 하면 콘크리트 담장사이, 심지어는 슬래브 옥상 구석진 곳 한줌의 흙먼지만 있어도 싹을 틔워 잡초의 끈질긴 근성을 보여준다.
모양새 역시 개성이 있거나 고급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푹 퍼져 펑퍼짐한 생김, 겹으로 돋아나 다투고 있는 잎새, 흔한 들꽃에서 볼 수 있는 두상화(頭狀花)로 된 꽃모양. 길가에 터를 잡고 밟히며 살아가는 모습은 질긴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닮았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빛깔로 주위를 끌고 주변 환경에 따라 꽃대를 키워내고 씨앗을 퍼뜨리는 지혜는 세상에서 뛰어나다는 어느 생물에 못지않다.
민들레꽃을 하나 꺾어 들었다. 꺾인 상처에서 하얗게 솟아나는 슬픔, 짙은 삶의 고뇌가 눈물로 농축되어 솟는다. 꽃을 들어 가까이 보니 노란꽃잎이 맑은 햇살을 받고 싱그럽게 눈에 들더니 얼마 안 가서 꽃대에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진다. 그리 빨리 시들 줄이야. 괜스레 꽃을 꺾었다 싶어 후회하면서 조용필의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를 흥얼거리며 민들레에 대한 설화를 떠올렸다. 첫날 밤 뛰쳐나간 남자를 기다리다 흙먼지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며, 꽃대를 꺾으면 얼마를 가지 않아 고개를 숙이는 그런 성질로 인해 많은 설화가 생기고, 민들레의 곧은 뿌리를 의미화 하여 일편단심 민들레”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또한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을 본받을 표상으로 포공구덕(蒲公九德)이라 하여 아홉 가지 덕목(忍, 剛, 禮, 用, 情, 慈, 仁, 孝, 勇)을 옛 서당에서 가르침의 길잡이로 삼기도 했으니 민들레의 인기가 상당했음이다.
생기 잃은 민들레꽃을 들고 화요장터로 갔다. 민들레가 아파트 담장 바람막이가 된 곳에 옹기종기 모여 꽃을 피우듯이 작은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어쩌다 자신의 빛깔을 잃어가는 생활이지만 화요일이 덤으로 희망인 사람들, 그늘진 고샅에 앉아 난전을 벌이고 풋나물 한줌, 알곡 몇 되를 놓고 오가는 발길에 눈길을 주며 질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보인다.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는 모습에서 요즘 들어 자꾸 늘어져 가는 나의 생활태도를 다시 다잡으며 꽃재 공원을 들어섰다.
잘 다듬어진 수목의 새싹이 맑은 하늘을 껴안고 환호하는 듯, 여린 싹이 내 뿜는 색깔에서 활기찬 꿈을 본다. 주단처럼 깔린 잔디사이에 드믄드믄 노랗게 물든 민들레꽃이 꽃 대궁을 한껏 키워 동그랗게 캡슐을 얹고 비행을 준비 하고 있다. 마침 일렁대는 바람결이 꽃씨를 몇 개씩 날린다. 눈부신 창공으로 고운 속살 드러내고 부끄러운 듯 치맛자락 붙잡고 하늘거리며 세상 여는 열쇠 하나 쥐고 가벼이 떠나가는 민들레 꽃씨를 바라본다. 땅을 박차고 일어나 비상하는 자유로움. 가는 곳이 비록 바람이 데려다 주는 곳, 그 곳이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따라나서야 하는 삶의 여정. 나의 비상의 꿈은 마음만 상하는데. 살기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맞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갖은 세파에 밀리다 지치는 우리네는 삶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절망하지 않던가. 민들레꽃에서 나의 삶을 드려다 본다. 하찮은 것에 눈 돌리고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다며 지나온 시간이었는데. 어떠한 어려운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싹을 틔우고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여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민들레에 경외감마저 든다. 잡초의 일생을 그저 그런 것이려니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수없이 널려 별것 아닐 수 있는 민들레의 삶도 엄숙하고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 세상의 어엿한 주인인 것을.
달빛 사랑
조 경 진
나는 달밤을 좋아 한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도 좋지만 어스름 달빛 속에서 그림자를 벗 삼아 한적한 공원이나 오솔길을 걷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달빛은 오뉴월 햇빛처럼 가슴을 찔러오는 아픔을 주지 않고 당당함은 없으나 유약한 듯, 수줍은 듯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고 오만함을 갖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차고 기울어 권태롭지 않고 그 빛이 은은하여 드러내기 부끄러운 모양새를 꿰뚫어 상처를 주는 일이 없다. 달빛은 내게 적당히 밝음을 내려 감각을 자극하고 신비감을 자아내며 마음대로 느끼도록 자유를 부여한다.
달빛을 흠뻑 받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잠재된 감성이 고개를 든다. 달빛은 달의 모양에 따라 음영의 깊이가 다르지만 초승달이던 보름달이던 관계없이 오직 달빛 속에 내가 젖어들면 그것으로 족하다. 초저녁에 앳된 얼굴로 잠시 머뭇거리다 서산으로 숨어 버리는 초승달은 빛이 미미하고 그 빛을 붙잡을 시간이 짧아 아쉬움이 남는다. 보름달은 넉넉한 얼굴에 넘치는 치기稚氣로 나를 당황하게 하지만 내 첫사랑의 여인을 닮아 소중하다. 모두 잠든 시각에 애잔한 모습으로 쓸쓸히 떠있는 그믐달이나 달무리 속 으스름 달빛은 고조되는 감성을 제압하고 평정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서 좋다.
내가 어렸을 때 달은 신비와 우상의 대상이었다. 정월 대보름의 달맞이 행사는 정월 초하루 해맞이에 비견할 만큼 무척 경건하고 신비로웠다. 대보름 저녁이 되면 싸리나무로 횃불을 만들어 동산위에 꽂아놓고 달을 향해 절을 하고 그해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달 속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요즘은 유치원 원아들이 읽는 동화 속에만 살아 있다가 초등학생이 되면 바로 없어져버리는 계수나무와 토끼들.
이제는 우주시대가 도래했고 시대에 걸 맞는 문화가 창출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도 동화속의 계수나무만 노래할 것이 아니라 무한의 우주 공간에서 지구 주변의 행성들, 그리고 수십 수백 광년 떨어진 천체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인류문화의 발전을 위한 우주 과학의 발달은 신비에 쌓였던 달의 모습도 밝혀내고 있다. 암석과 분진, 물 한 방울 없는 삭막한 물체로 규명 된 달의 실체는 문명사적 유용가치로 치부되어야하지만 그 대신 아이들 마음속에 꿈으로, 신비로 살아있던 계수나무는 죽고 말았다.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했던 신비의 고향, 우상의 고향을 잃은 것이다.
그럼에도 달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따스하고 포근한 정서적 가치로 남아 있다. 달이 좋아 아예 달에서 영원을 사는 ‘이백’이나 그믐달을 몹시 사랑하여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나도향’의 달사랑은 월석처럼 굳어가는 우리들 마음에 향기를 풍겨주고 심금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달빛은 미움이나 추함을 덮어주는 아량을 베푼다. 영악스럽게 까발리고 들여다보지 않고 조금은 미흡한 것을 채워가며 덮어주고 어수룩한 듯 참고 보아주는 아량과 조그만 것에 집착 않고 큰 것에 마음 쓰는 도량을 가졌다.
얼마 전 ‘뷰티 지수’란 것이 보도 된 것을 보았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며 외모를 가꾸는데 얼마의 시간과 돈을 들이는가를 지수로 계산 한 것이란다. 외모가 얼마나 관심 대상이고 행복의 조건으로 부상되었는가를 말 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 외모란 무엇인가? 한국인의 전통적 미의 기준인 삼백(살결, 이, 손), 삼흑(눈동자, 눈썹, 머리칼), 삼홍(입술, 볼, 손톱)은 이미 서양의 미의 기준에 밀려 자격을 상실했지만 어떻든 외모 지향주의로 치닫는 행태를 보며 달밤의 여인을 생각해 본다.
풍경도 가까이서 보는 것 보다 멀리 보아야 아름다움의 참맛을 느낄 수 있고 원근이 잘 조절된 풍경사진이 실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명료하게 꿰뚫어 보이는 것의 허상을 마음이 읽는 까닭이다. 어차피 우리의 눈은 허상만을 보고 있지 않은가.
달이 구름사이로 숨바꼭질 하는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기를 안고 어르는 젊은 엄마의 얼굴이다. 적어도 일 년 중 반은 모양새를 바꿔가며 잠자리 곁에 앉아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촉촉한 손길은 내 어머니가 보낸 달빛이런가.
나는 교교한 달빛이 내려앉는 밤이면 공원 산책을 즐긴다. 혼자 걸어도 늘 분신을 따르게 하고 사색이나 행동에 조금도 방해 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만들어주는 달빛. 가끔 나무그림자가 그 무엇으로 착각되어 놀라는 적도 있지만 은은함으로 분명함을 보이지 않아도 바라보는 주체의 마음으로 칠정七情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달빛은 나의 영원한 벗이다. 오늘 밤도 늦은 하현달이 떴으니 달빛을 맞으려 나서련다.
봄볕이 들면
김 혜 경
고양이 한 마리가 담 밑에서 졸고 있을 노곤노곤한 햇살이 춘설을 스르르 잠재우며 번져 온다. 영산홍 군자란이 겨우내 지루했던지 온몸을 뒤틀 듯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화사한 봄볕이 들면 굳게 잠긴 마음의 빗장을 풀어 하고 싶어지는 일들이 있다.
오늘은 이불 홑청을 훌훌 털어 내다 널고 싶다. 겨우내 갇혀 있던 가슴 속 눅눅한 습기도 내다 말리고 싶다. 하얀 홑청이 봄볕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모습은 나를 하얀 궁전 속의 작은 요정이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풀 먹여 빳빳하게 말라가는 홑청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뛰어다니던 유년의 봄날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빛 좋은 날은 가두어진 틀을 깨고 생동의 몸짓을 보여주고 싶어진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김득신의 풍속화 ‘파적도’가 생각난다. 나른한 봄날 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고 어미 닭은 필사적으로 고양이를 향해 달려든다. 주인은 장죽으로 내려치려다 마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망건이 멀찍이 날아간다. 아내는 남편을 붙잡으려고 허둥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온통 아수라장이 된 봄날의 풍경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지 병아리의 짹짹대는 소리, 우당탕 구르는 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에도 매화나무엔 조용히 꽃망울이 여무는 풍경이 나를 사로잡는다.
봄은 매화가지에만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찾아든다. 동안거 해제를 봄빛이 알리니 이제 마음을 열어 생기 있게 움직이라한다.
포근한 바람이 가슴을 헤집고 들면 산중턱쯤 볕 고운 자리에 화문석을 폈으면 한다. 분홍치마 연두저고리에 쪽빛 비녀를 얹고 매화타령이나 창부타령의 구성지게 넘어가는 가락에 굿거리장단을 얼르고 싶다.
오동나무 속을 비워 황피 백피 얹고 축승을 둘러쳐 덩기덕 울리는 장구소리는 삶의 무게에 잔뜩 움츠렸던 속을 훑어 내고 더딘 봄을 재촉하리라. 땅속에서 하늘까지 덩덩 울리는 장구의 속빈 공명이 새 생명을 깨워 주리라.
봄이면 바람이 들고 싶다. 들었던 바람도 잠재울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바람 난 봄 처녀가 되어보고 싶다. 춘흥을 못 이겨 들판으로 나가 나물바구니, 지게 작대기를 팽개치고 물가에서 노닥이는 볼 붉은 낭자가 되어봄은 어떨까. 콩당콩당 가슴 뛰는 춘정은 또 어떠려는지. 이렇게 볕 좋은 날은 가슴 한 쪽 뚝 떼어 나눠주고 싶다. ‘70이 되어도 여자는 여자’ 라는 말이 맞는지 남사스런 상념에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담장 가에 한껏 망울이 부푼 목련이 피려한다. 개나리도 목련도 잎이 나기 전에 성급히 꽃망울부터 터트린다. 긴 겨울 간절히 간절히 봄을 꿈꾸어 왔기에 꽃부터 피우나보다. 목이 늘어지고 눈이 쾡 하도록 기다리던 봄볕에 고운 꽃으로 마음 주고 싶었나보다.
비단실처럼 봄빛이 풀어져 내리는 날이면 내 안의 봄은 무늬 고운 명주를 짠다.
연분홍 꽃잎이 시들어도
김 혜 경
나들이는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기분이 들뜨게 한다. 특히 철쭉이 만발한 꽃 숲에 숨어드는 봄나들이는 더욱 더 맘이 설레 일수밖에 없다.
오늘은 수필 반 문우들이 모여 상당산성에 야외수업을 가기로 한 날이다. 모처럼의 외출에 공연히 분주하다. 상당산성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내게는 친구들과의 깊은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지의 친구들이 오면 청주를 소개하기 위해 꼭 들르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나이를 잊고 추억에 잠길 수 있을 것 같다.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친구들과 숨길 것 없이 속을 드러내고 잔돌 하나만 굴러가도 깔깔거리며 숨넘어가게 웃고, 기억 속 그 누군가와 두 손 꼭 잡고 걸었던 소녀 시절의 추억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단체로 봉고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혼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다. 맑은 공기도 들이 키고 박강성의 음악을 들으며 푸른빛에 취해보고 싶다. 호숫가를 산책하며 멋진 시 구절 하나 건져내 볼 심산이고 보니 영락없는 문학소녀가 된 듯하다.
산성의 공기는 늘 푸르고 달콤하다. 영산홍, 철쭉이 작년에 피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고운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초롱초롱한 병 꽃이 그늘 속을 밝히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며 봄 속에 영글어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소나무 두 그루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제 목숨 다해가는 것을 알았던지 무수히 많은 솔방울을 매달고 종족번식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려 한다.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읽고 유쾌한 벗과 나누는 술잔 속에 인생을 담는다.
삶이 매일 이럴 수 있다면 작가들이 쓰는 글이 어찌 연애편지처럼 달콤하지 않으리오. 모든 행사가 즐거이 마무리될 쯤, 선물로 준비해간 양말 몇 켤레가 남은 모양이다. 얼핏 귓전에 연세 드신 분들을 드리자는 소리가 들린다.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내 가방 속에 양말이 들어 있지 않은가. 선물을 받고 이렇게 기분이 착잡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몇 살이나 되었다고 어느새 연세 드신 분들 속에 들어야한단 말인가.
버스 속에서 처음으로 어린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 받은 느낌이 이런 것일까. 마음 들떠 차려입은 연분홍빛 옷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그 곳에 가면 소녀가 될 것 같았던 마음이 검게 시들어가는 소나무 위에 걸려버린 느낌이 든다.
집에 돌아와 심란한 마음으로 치자 꽃을 마주하고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있다. 치자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고 울화와 스트레스를 가라 안치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하얀 꽃잎 속에 코를 묻고 열 번 스무 번 향기를 들이마신다.
두 손을 펴고 나이만큼 접었다 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한참을 접었다 펴야하니 나이가 많긴 많은 모양이다. 허긴 어느 장사가 세월을 이기리오. 얼굴에 깊이 박힌 시간의 흔적을 무슨 재주로 감출 수 있으련가.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려니 허리도 무릎도 우지직 버거운 소리를 지른다. 힘겨워 휘청거리는 육신을 꽃분홍 입성으로 가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산에 해가 이운다. 붉은 비단을 걸치고 있어도 이미 저무는 석양일 뿐인 것을. 허나 가슴에 담은 정열을 다 태우지 못해 마지막 열정을 저리 붉게 토해내고 있음을 누가 알리오.
산성에 두고 온 소녀의 마음이 이 가슴속에선 아직도 꽃 분홍인 것을.
수필입문
윤용희
지구는 불쌍하다.
하루에 한번씩 자전을, 일년에 한번씩 공전을, 천지가 창조된 그날부터 내 지금 글을 써내려가는 순간의 찰나에도 변함없는 반복된 지루한 삶을 살아간다.
지구뿐이겠는가. 나 자신도 그랬었다.
그간 인생의 반 토막을 틀에 박혀 연일 반복되어 쳇바퀴가 굴러가듯 변함없이 살아온 내 인생. 이런 습관처럼 반복 되는 삶으로 내게 남은 또 하나의 반 토막을 보내기엔 나 자신은 용납하기 싫었다.
물론 전환점이 필요했으며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 많은 곳을 수소문하니 어디선가 한 실마리를 얻게 되었고 내게 또 다른 배움 집인 수필마당에 발을 내딛게 하였다.
헌데 요사이 나는 슬슬 후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괜 실히 무료와 저렴한 타이틀에 나의 간사한 귀가 솔깃하여 문을 두드린 이 마당은.
이제는 간간이 후회의 습이 얹혀져 온다. 하루하루 교육을 귀담아 들을 때마다. 어느 시골 장터에서 뵌 듯한 향토적 풍채에 토속적 방언을 연일 구사 하시는 노스승은 제자들을 가만 나두려 하지 않으신다.
항시 다그치시며 ‘미학적 문구를 토해내라’ 연일 요구 하신다.
당신의 잦은 갈구는 숨 막히게 달려와 녹초가 돼버린 말에 또 다른 채찍질을 가하는 것 같아 그들이 병들까봐 안쓰럽기 짝이 없다. 이는 든 것 없이 첨 입문한 초년병으로 글발을 못 토해 냄을 자책하는 것이요. 노스승에겐 송구스러워 할 따름이다.
붓 가는 데로 틀에 구애 받지 않고 편안히 쓰는 분야로 알고 있었던 나의 수필에 대한 가냘픈 지식은 온데간데없이 살아지고 말았다.
일기장 쓰듯이 심심할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그적 낙서하듯 술술 써 내려가면 돼는 줄 알았던, 그렇게 해서 몇 편의 글을 약간의 퇴고를 거쳐 역어내면 흔히들 말하는 ‘에세이’가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는 수필에 대해 쉽게, 어설프게 단정해 버렸고 나의 머리엔 허상만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글을 써내려 갈수 있는 힘 또한 내 머리에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뿐, 서로 억매여서 맞물리고 원활히 작동하여 이어지는 왕성한 메커니즘에 나의 필력은 부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필의 매력인 간결함, 평이함, 여운이 있어야 하는 맛. 이것은 결코 나에게 쉽게 거저 안겨 주지는 않을 것이란 느낌이 언습 해 온다. 이는 참을성이 부족한 나에게 쉽게 포기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속을 태우며 마음을 끊게 할 또 하나의 시름 거리인 것 같다.
문장력뿐만이 아니다.
글에 대한 기본적인 것부터 뜯어 고쳐야 할 판이며 자책도 해본다. 이는 밑바탕이 돼야 할 올바른 맞춤과 띄어 씀은 뒤죽박죽되어 몹시 난잡하기 이룰 데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붓이 아닌 문명 이기인 컴퓨터 자판 도움 없이는 한 줄 한 줄 써내려 갈 수 없음에 다시 한번 자책을 되새김 한다. 과연 나는 해낼 수 있을까? 반문을 하고 싶다.
각층 선배문인들의 작품세계를 귀에 담아 눈으로 훑으니, 붓으로 온갖 사물을 표현 하려는 그들의 필력을 나 또한 흉내 낼 수는 있을는지,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인고를 거쳐야 얻어낼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을 런지. 잦은 번뇌에 어느덧 미세하나마 솟아오른 털끝은 창작에 대한 나의 긴장과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우선은 모방부터 해야겠다.
앞에서의 언급은 수필이 결코 쉬운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흥적이며 간결한 유행어에 익숙한 내 언어 습관으로는 선배 문인들이 발산하는 미적인 문구와 기교를 어찌 따라 같이 뿌릴 수 있을까! 하물며 기초와 기력은 모자람에 필력은 짧으니 어찌 그들의 글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다짐한다.
수필이라는 먼 길에 내 자신의 삶을 모태로 하여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범주 내에서 그들의 글을 견 눈질하여 기교를 훔치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어깨를 겨눠서 같이 나갈 것이며 어느덧 그들의 필력을 넘어 바른 내 길로 바로 갈 수 있을 때까지 글발을 세우리라. 다짐한다.
환 생(還生)
이 상 기
정든 공직을 뒤로 한지 이십 여일이 지나갔다. 오늘 따라(1월21일 )날씨도 포근하고 바람 한 점 없어, 산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라 집안 식구가 다 가기로 하였다. 식구라야 나와 아내, 둘째아들로, 우리는 아침 열시부터 산행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산행 코스는 매봉산을 한 바퀴 돌아 구룡산 종점까지 갔다 오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고 매봉산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역시 산은 좋았다. 맑은 공기와 흙냄새, 푸른 소나무들, 잎은 하나도 없이 가지만 앙상한 굴참나무, 설한풍에 주눅이 들어 바짝 오므라든 진달래 꽃망울들, 빨간 열매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앙상한 가지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보이고 망나니들의 접근을 방어하는 찔레꽃 등, 몇 종 안 되는 수종이지만 이웃들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듯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구룡산은 인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인가 보다. 더욱이 지난해 말 구름다리가 완공되어 이웃 간에 왕래가 안전하게 되었단다.
우리들은 구룡산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길이 넓은 곳에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다. 십년 전만 해도 등산길 주변의 나무들은 윤기가 돌았고 오솔길 같았었는데, 몇 년 전부터 산행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산행 길은 더 벗겨지고 넓어지기 시작하여 마치 상처가 커져만 가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산남 3지구 개발에 따른 시내에서 유일한 습지대가 없어지고, 두꺼비 서식지마저 위태로운 환경으로 변모해가니, 이래저래 구룡산은 신음하면서, 서서히 병들어 가는 현상에 가슴이 답답함은 우리들만이 아닐 것이라고 격정(激情)하면서, 걷다보니 등산길 종점까지 도착하였다.
우리는 간단히 체조를 한 후 오던 길로 되걷기 시작하였다. 중간 지점까지 왔을까, 아저씨! 아저씨! 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아서, 누가 날 부르나하고 뒤를 돌아보아도 오는 사람 없고, 앞을 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우리 세 식구뿐인데, 아들이 날 아저씨라고 부를 턱이 없을 테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몇 발자국을 떼어 놓는데, 다시 아저씨 하는 소리가 앞에서 나는 것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보니,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소나무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식구들도 덩달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을 자세히 보니, 몇 그루의 소나무 중에서도 눈에 확 뜨이는 그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보다도 더 진한 황토 빛깔을 온 몸에 휘어 감고, 나를 굽어보면서 더 밝은 미소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벌써 공로연수에 들어갔어요?
아직도 젊어 보이고 팔팔한데, 참! 아깝다. 아저씨!
그래, 공로연수는 금년 1월 1일부터 들어갔단다.
후배들 승진을 위해서, 서기관 이상은 정년퇴직 1년 전에
나가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온 거야.
다른 시․도는 6개월 전인데, 충북만 그렇게 한단다.
충북은 마음 좋지…….
아저씨, 속이 좀 상한 것 같은데, 기분 안 좋더라도 참으세요.
이제는 건강이 제일이니까, 자주 와서 저하고 재미난 얘기도
나누면서 놀아요. 네, 아저씨 !
그래 고맙다. 너라도 내 마음을 알고 위로해주니,
정말 고맙다. 공무원 조직이란 갓끈 떨어지면 그날로 그만이야,
그런데, 너는 나와 함께 놀자고 하니 기분이 참 좋구나.
소나무야, 오늘 정말 고맙다.
너에게 자주 놀러올게 잘 있어.
아참, 너의 이름이 무엇이니 ?
네, 제 이름은 「산지기」라고 합니다.
음! 「산지기」 이름 한번 근사하구나.
아저씨, 마음 푸시고 이제는 지나간 일들은 잊어버리시고,
저하고 친구해요. 그럼 잘 가시고, 또 오세요.
이렇게 중얼 거리고 있을 때, 식구들은 나를 물끄러미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잘 생긴「산지기」와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제2의 인생을 위한 환생(還生)을 하는 것 같았다.
2006.4.27일
무심천 벚꽃
이 상 기
춘하추동이라고 하는 사시(四時)의 순환은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가 보다. 설한풍에 꽃샘바람까지 질기게도 매달려 시련을 주었는데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무심천 양변이 온통 꽃터널을 이루었다. 마치 예쁜 아가씨의 수줍은 환한 얼굴과도 같이 화사한 벚꽃은 그렇기에 더욱 가상하다.
청주의 무심천(無心川)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냇가로, 벚꽃나무는 무심천 변을 중심으로 2,100여 그루가 동․서로 변에 약 2.8km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고 난 후 군 생활을 하는 둘째 아들이 벚꽃 구경 가시지 않게냐고 제의를 해 오는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살아오는 동안 바뿐 나로서는 아름다운 벚꽃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자식이 어린 때에는 내가 손을 잡고 한두 번 구경을 한 기억이 나는데, 다 큰 아들이 집에서 놀고 있는 아비의 건강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으로 동의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학생회관 앞 무심천 분수대까지 당도하니 환 한 불빛아래 하늘 높이 치솟는 분수와 불꽃이 여기저기서 터트려 지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고성과 함께, 무심천 양변 벚꽃이 어우러지는 광경은 과히 장관 이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관심 보다는 그 열매가 하루빨리 익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열매가 다 익기도 전에 아름드리 벚나무에 올라가 한참을 따먹다보면 입술이 검정색으로 변하고, 하나뿐인 흰옷은 온통 검정 물이 배어서 어머니한테 혼난 이야기를 해주면서 조깅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엔, 자전거를 타고 재빠르게 달리는 사람들, 젊은 부부들도 열심히 걷고, 어머니와 딸이 함께 힘차게 걷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다 큰 아들이 다정히 걷는 모습은 우리뿐인 것 같아 자부심도 가져보는데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만 묵묵히 듣기만하고 나의 걸음 폭에 맞추어 걷기만 한다.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거의 여자들뿐인데, 여자들이 이렇게 건강관리를 잘하니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일곱 살이나 높다는 수치는 우연이 아닌 것을 입증하는 듯 느껴졌다. 하기야 이 시간에 남자들은 직장에서 야근에 시달리고 업무는 끝났어도 업무상 술좌석에서 과음하고 이차까지 가고 담배 피우고 할 테니 수명이 여자보다 짧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조(自嘲)해 보면서, 걷다보니 무심천을 많이 가꾸려고 노력하는 흔적을 보고, 60만 청주 시민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관계기관에 고마움을 느껴본다.
이 시각이 밤 9시경인데도 벚꽃 야경을 만끽하여 보려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추억을 남기려는 모습, 연인들은 여러가지 포즈를 취해가면서 카메라에 담아보려는 모습, 꽃가지를 아래로 내려 코끝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고 향내에 심취해 보려는 사람들, 자기 얼굴에 벚꽃을 갖다 대고 그 영상을 핸드폰에 담으려는 사람들, 무심천의 벚꽃은 내년, 후년, 아니 영원히 청주 시민의 안식처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보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제야 아들이 한마디 한다.
하늘의 아름다움이 별이라면, 땅의 아름다움은 꽃이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저 꽃처럼 밝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냐고 한다.
아! 행복이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앞에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오늘 행복이 영원하기를 기원해본다.
담쟁이
이 효순
높고 파아란 가을 하늘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곱다. 개울가 언덕에는 갈대꽃이 피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 산마다 고운 단풍의 모습이 가을이 깊어짐을 알려준다.
8년 전 늦가을, 담쟁이가 우리 집 벽을 수놓았던 날,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붉은 단풍 꽃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주말이라 그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아이들과 남편은 화단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빨래를 하다보니 4부자의 이야기가 뜸해지고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어디 다른 곳에 있는지 살펴보니 담쟁이덩굴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예쁘게 물든 잎사귀들이 우리 집 보도블록위에, 그리고 빨간 열매가 달려있는 초록빛 주목(朱木) 위로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
‘이것 왜 잘랐어요? 이 예쁜 담쟁이를… ’
남편의 큰 눈은 더 커지고 내 눈치만 살피면서
“지저분해서 잘랐어.”
‘지저분하다고요’
“바람 불 때마다 떨어지고 지저분하잖아”
… 난 어떻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이 같아야 한번 쥐어박기라도 하지. 정말 울고 싶도록 속상했다. 그 예쁘고 곱던 담쟁이 잎사귀들이 벽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오던 해 , 고향에 사는 친정 남동생에게 담쟁이를 부탁하여 어렵게 두 포기를 구해 현관 앞에 심었다.
담쟁이를 심은 것은 고등학교시절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를 배우면서 진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명 화가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품, 세상을 비관한 소녀 존즈에게 삶의 희망을 주려 비바람 치는 날 밤새도록 벽에 그림을 그렸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났다. 그리고 밤새도록 정성들여 그린 담쟁이 잎사귀로, 죽어 가는 소녀에게 삶의 용기를 준 장면이 너무나 나의 마음에 애절하면서도 좋은 이미지로 남았다. 그래서 이 다음에 내집을 마련하면 꼭 담쟁이를 심겠다고 생각 했었다. 마침 우리 집은 벽돌집으로 담쟁이를 올리면 운치 있는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사연을 지닌 담쟁이는 잘 자라주어 3년 사이에 아래층 벽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주황색 기왓장을 타고 2층 창앞까지 뻗어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하였다. 여름엔 푸르름으로, 가을에는 꿈결처럼 고운 빛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늘 설레임 가운데 아침, 저녁 출퇴근 할 때마다 벽을 쳐다보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야 작은 잎사귀보고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을 사치로 여기겠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나의 마음속에 곱게 자리한 담쟁이를 남편은 사정없이 자른 것이다. 내년에는 담쟁이를 못 보겠다고 울먹이며 다시 빨래를 하러 들어갔다. 빨래를 다 널고 옥상에서 내려와 담쟁이 베어낸 자리를 살펴보았다. 뿌리부분만 조금 남은 채 삭막한 모습을 하고 묵묵히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고 새봄을 맞으며 담쟁이 싹이 꼭 돋아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봄이 한창 익어갈 무렵 지난해 낫으로 벤 담쟁이의 줄기에서 싹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몇 개의 새순이 구불구불한 줄기 사이에서 움트고 있었다. 담쟁이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새순을 보는순간 정말 기뻤다. 그 애태움 속의 기다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장원이 아빠 담쟁이 줄기에 새순이 돋아나요. 빨리 나와 보세요.’
나는 너무 흥분하여 방에 있는 남편을 불렀다.
“ 내가 그래서 아주 밑둥까지 자르지 않고 20㎝정도 남기고 베었잖아”
나는 그때까지 새순은 나무가지에서만 나는 것으로 알았고, 뿌리에 가까운 줄기에서는 나지 않는 것으로 알았다. 식물을 사랑하면서도 그런 무지한 면도 있었다. 남편은 그것을 감안하고 덩굴을 벤 것인데 … 남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해 담쟁인 여린 새순을 내밀고 쭉쭉 힘차게 벽을 타고 뻗어 올라갔다. 뻗어 올라간 줄기마다 살펴보니 가는 실처럼 생긴 손바닥 같은 뿌리가 벽돌에 꼭 붙어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견디어 낸 것이다. 다른 식물들 같으면 벌써 줄기가 꺾이거나 뿌리가 뽑혔을 터인데…생명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끈질겼다. 사람이 떼기 전에는 전혀 꼼짝도 않고 벽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지난해와 다름없이 초록 잎을 물들여 우리 집 벽을 곱게 수놓아 주었다.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그 화려하던 담쟁이 잎사귀들은 가을바람에 힘없이 지고 있었다. 내 인생의 여정이 얼마나 주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저 잎새처럼 생을 마감할 때가 올 텐데… 마음이 찹찹하다. 그러나 뻗어 가는 담쟁이 줄기처럼 남은 생을 좀 더 윤택하고 활기차게 보내고 싶다. 지나온 세월을 살펴보니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와 마음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구를 특별하게 도와준 적도 별로 없고 오직 나만을 위하여, 내 가족만을 위하여 살아온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남은 세월이라도 타인을 위하여 살고픈 것이 잔잔한 마음에 일렁이니 뒤늦은 나이에 철이 드는가보다.
담쟁이의 가을은 그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내게 긴 기다림을…, 자연의 섭리에 인내하며 사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올 가을도 우리 집 벽의 담쟁이는 고운 잎으로 벽을 수놓아 주겠지.
곱게 물든 담쟁이의 가을을…
설원의 아침
송경자
눈이 내린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미명 순백의 꽃이 되어 벌거벗은 나목들 위에 쉼 없이 쏟아져 내린다.
한세월 지나면서 숱하게 얼룩졌던 모든 것들을 화해와 용서의 품안에 품어라도 두려는 듯 그렇게 내려앉고 있다.
오늘은 지난한세월을 통해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낸 저 산자락의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를 벌이는 날.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작은 들꽃나무여! 그대가 있어 세상은 온통 도란도란 속삭임으로 가득했었고, 지금은 벌거벗은 나목이여! 그대모습이 쓸쓸해 보이지만 지난 봄날엔 그 연초록 잎들로 피어나 봄꽃들과 어우러져 춤추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고, 철따라 변해가는 그대를 보면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오.
이제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자고 그렇게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날 아침에, 나는 저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얼마 전, 눈 오는 길목에서 마주 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떠올려본다.
그날은 며칠 전부터 내린 눈으로 하여 골목길은 얼어있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려 걸어 다니기에 매우 불편한 날이었다. 그 길을 오누이로 보이는 어린아이 둘이 걸어오고 있다.
오빠는 예닐곱살, 동생은 네 살 아니면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인다. 앞서가던 오빠가 뒤를 돌아보니 동생이 자꾸 넘어지며 잘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오빠가 동생에게 다가가 등을 대며 업히라는 시늉을 한다. 동생은 싫다는 듯 몇 번 고개를 흔들더니 오빠의 권유에 못 이겨서인지, 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업혀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업고 일어서려면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그도 그럴 것이 오빠가 동생을 업기엔 체격으로 보아 역부족이고 두툼한 겨울외투를 입은 까닭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몇 번을 시도해본 오빠가 이번엔 썰매를 탈 때 앞에서 끌어주듯이 끌고 가야겠다 생각했는지 양손을 뒤로 내밀어 동생의 손을 잡고 가고 있다. 역시 넘어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서...
오누이간의 서로 보듬고 가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보였던지,
어찌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 일지모르지만 이 작은 일로 하여 내 마음은 정말 따뜻했고, 많은 일들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날이었다.
오누이, 형제 자매, 이 얼마나 살갑고 정겨운 단어인가. 우리네 삶의 여정속 허다한 인연 중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특별히 선택된 너와 나 우리사이. 그 위에 함께한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이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형이 있어 동생은 무서울 것이 없었고, 우리 서로 둘러앉아 큰 자배기에 담긴 감자를 몽당숟가락으로 긁어 껍질을 벗기다 서로 마주볼라치면, 감자녹말 잔뜩 튀겨 하얗게 얼룩진 모습에 웃음꽃이 활짝 피곤했던 그런 날들이 우리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함께 나이 들어가던 어느 날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네 얼굴인줄알고 깜짝 놀라 ‘어머나 쟤가 언제 와서 저기 서있을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바로 내 모습이다. 어쩌면 우린 이렇게 많이 닮아있을까..
어쩌다 가끔 우리는 언론매체를 통해 형제자매, 부모자식 간에 재산다툼을하고 시기 질투 원망에 의한 있어서는 안 될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보고 듣는다. 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갑작스레 변해가는 가족관계? 더해만 가는 물질만능주의? 어떤 이유이든 간에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서로 의지하며 눈길을 가고 있는 저 오누이처럼, 더불어 함께할 때 아름답다 말하는 자연의 속삭임처럼 나눔의 삶을 살아가므로, 많이 가진 자도 넘치지 않고 적게 가진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이 아름다운 날 아침에 모카 향 가득한 한 잔의 차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연꽃을 가꾸며
송경자
비 개인 6월 어느 여름밤 꽃바람을 타고 오는 여린 향기가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달콤한 향기는 어디서 나는 걸까. 향기에 취해 향기를 따라 발걸음은 어느 사이 창문 밖, 나의 작은 정원(?)에 머물러 있다. 그 작은 정원엔 베고니아, 디기팰리스, 라벤더, 로즈마리, 천사의 나팔 등 소박한 꽃들의 화무가 달빛 속에 한창이다.
그중에도 오늘쯤은 꽃잎을 벌려 그 하얀 속살을 드러내주지 않을까.. 몇 날을 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에만 핀다는 연꽃 분 앞에 발길을 멈춰 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제 막 봉우리를 터트리려는 듯 미세한 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조금씩 커지고 반복됨에 따라 꽃잎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노랑 꽃술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꽃잎은 점점 더 벌어져 그 희디흰 속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피어있는 모양조차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이렇게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혼자 볼 수 없어,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해보지만 아무와도 연락이 되질 않는다. 아..어떻게 하나! 이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들을 혼자 보아야하다니....
서둘러 한 잔의 차를 준비하고 이제 막 내뿜기 시작하는 달콤한 향기를 찻잔에 담아, 그 향기를 음미하며 피어나는 광경을 혼자서 지켜보고 있다. 밤에만 핀다하여 야한연이라 이름 붙여진 야개화는 내 기다림 속에서 한 삼십 여분에 걸쳐 그 고운 자태를 온전히 드러내었고, 펼쳐진 비단치마자락에 달빛을 가득 안은 채 가슴시린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서있다.
그 모습이 너무 고와서일까 보는 내 가슴은 왠지 사뭇 저리고 아파온다.
우주에 속한 모든 만물들은 낮에는 깨어있고 밤에는 잠을 자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건만 저는 어찌하여 거꾸로 살려고 하는가! 보고 싶지 않은 어떤 것들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밤이 맞도록 기다려야하는 그리운 이가 있어서인가.
야개화를 두고 일명 야한연이라 하지만, 품위 없이 야하다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희노애락의 모든 삶을 온전히 다 살아내고, 당당히 서있는 한 여인네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라 말하고 싶다.
남편과 내가 연꽃과 인연을 맺은 것은 몇 년 전 어느 목사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연꽃하면 길가 어느 연못에 하나 가득 피어있는 것을, 그저 스쳐지나가면서 본 기억밖에 없는데 생각지 않게 백 수십여 종의 연과 수련과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세월의 끝자락에 서있는 우리 부부의 삶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네 인생사는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우리부부의 삶의 여정 속에 전혀 없을 줄 알았던 일들이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부부는 원래가 무엇인가 심고 가꾸는 일을 좋아해서 화분에 꽃을 가꾸어 이웃에게 나누어 주곤 했지만 이렇게 많은 종류의 많은 양을 재배해보긴 처음이었다. 그러나 저들과 함께 하면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자연의 섭리와 그 조화로움에 대해서 조금쯤은 알 것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교만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하며 듣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얼마나 깊게 생각하며 행하고 있는지..
과연 심고 가꾸어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들은 내가 마음을 준만큼. 손길을 준만큼 자라고, 고운 꽃을 피워 내게 기쁨으로 다가온다. 저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 거름과 흙의 순서를 바꾼 상태에서 심었더니 잘 자라주지 않았고, 지나치게 거름을 많이 주었을 때도 자라지 않았다. 어린 묘를 심어놓고 성급한 마음에 자주 손길을 주었더니 또 자라지 않았다. 적당한 때를 알고 그들이 무엇을 언제 필요로 하는가를 알고 돌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빨리 자라라고, 빨리 자라서 꽃을 피워내라고 재촉하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저들은 기다리라고 때가 되어야 한다고 나를 향해 끝없이 속삭여댄다.
나는 연과 수련 중 수련을 더 좋아한다. 참으로 곱고 아름다우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서 좋고, 자신에게 허락된 한생을 살아낸 뒤 마무리하는 모습이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해서 좋다. 보통은 수련하면 물수 자를 쓰는 물속에 사는 꽃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잠잘 수자를 쓰는 잠을 자는 연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련은 아침이면 꽃잎을 벌려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내지만 저녁나절 일정한 시간이 되면 옷깃을 곱게 여미고 빗장을 닫아건 채, 단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잠을 자기 시작한 순서대로 일어나 또 하루를 살아낸다. 이 얼마나 오묘한 일인가.
종족보존과 번식의 형태 또한 신비로움 그 자체다. 어느 것은 뿌리마다에서 작은 싹들이 돋아나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은 뿌리에서 긴 줄기가 형성되어 그 줄기 끝에 야구글러브 같은 것이 생겨나 그곳에 새싹이 돋기도 하고, 어느 것은 어미를 중심으로 아주 작은 새끼 감자알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열려 그곳에서 새싹이 돋기도 한다.
꽃을 피우는 과정 또한 신비롭다. 꽃이 그 포기사이 물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물 속 흙더미 속에서 생겨 물 밖으로 꽃봉오리를 드러내고 얼마 후면 봉우리를 터트린다. 그것도 잎이 무성하고 상태가 좋으면 더디 꽃을 피우고, 양분도 부족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일수록 아주 작은 꽃이지만 안간힘을 다해 꽃을 피워낸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피나는 몸부림의 결정체가 아닌가 싶다. 이들을 보면서 어찌 그 묘한 자연의 섭리와 창조의 원리를 부인할 수 있으랴.
비라도 오는 날이면 저들은 한바탕 춤을 춘다. 초록빛깔 비단 치맛자락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두둥둥 장구소리 북소리가 되어 오묘한 음률을 빚어내고, 빛깔 고운 채색 옷으로 단장한 수줍은 여인네들의 춤사위는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신바람이 난다. 비 그치고 햇살이 들면 비단치마 자락엔 진주알들이 가득하고, 진주알들은 햇빛을 받아 오색빛깔 무지개가 되어 흐른다. 그렇게 허락된 한생을 살아내고 떠날 때가 되면 옷깃 곱게 여미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요히 물속으로 돌아가 한생을 마감한다.
우리네 인생사는 어떠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지 못해 경거망동하기도하고 지나친 욕심과 시기, 질투, 분냄, 증오 등으로 하여 서로가 찌르고 찔리는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른다.
이제 고통을 이겨내고 고고히 서있는 그대 닮은 여인이 되어 빗소리 장단에 춤추는 고운빚깔 여인이 되어 겸손과 인내와 온유를 배우며 남아있는 삶을 흐트러짐 없이 마무리하려 힘쓰고 애쓰며 살아보리라.
첫댓글 귀한글 정성들여 읽고 갑니다.선배님들게 경건한 마음으로 경례!
눈물이 고여드는 글도 있었습니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글도 있었습니다. 좋은글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가슴이 훈훈해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