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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는 조선 민중. |
영국의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국’이라는 것의 이상시대를 꼽아 놓고 있다. 그것은 황제 넬바의 즉위(AD96)에서부터 <명상록>을 남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제(帝)의 죽음(AD180)까지의 이른바 오현제(五賢帝) 시대 84년간이다.
기번은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의 ‘제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술(評述)하고 있다.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 이끌어지는 절대권력 밑에서 통치되고 있었다. 군대는 죄다 4대에 걸친 황제의 강고하지만 평화적 수법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들 황제의 인물과 권위에 대해 국민들도 모두 자발적인 경앙의 마음을 바쳤다. … 이들 황제로서도 자유의 세상에 기쁨을 느끼고, 스스로 책임 있는 법의 집행자인 것에 자족하고 있었다.”
조선이 ‘대일본제국’에 편입 당하고서 10년 있다가 3·1운동은 일어났다. 운동이 딛고 섰던 민족자결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제국’이라는 것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개념이었다.
앞에서 든 기번의 인용은 인류사에 있었던 ‘제국’의 하나의 전형이다. 조선을 10년간 깔고 앉아 온 시점에서, 일본사람들이 ‘제국’이라도 제대로 했던지, 할 것을 했던지 비교하고 가늠해 보라고 인용했다.
‘제국’ 10년간의 굵은 것 몇 가지, 조선병탄(倂呑)을 총괄 지휘했던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그 공으로, 천황의 최측근이자 대리역 같은 내대신(內大臣) 겸 천황 시종장 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선문제가 발단이었던 다이쇼 정변 속에서 다시 수상이 되었지만, 헌정(憲政)옹호를 외치는 군중의 폭동상황을 만나 2개월을 못 버티고 물러났다.
이성과는 거리가 먼 군중이 일본 정치의 판세를 좌우하는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결정적으로는 3·1운동 전해 여름에는, 쌀값 등귀로 인해 쌀가게를 습격, 약탈, 방화하는 미곡(米穀)폭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이 폭동 끝에 조선에 통감으로 와서 병탄을 현장지휘하고 초대(初代) 총독을 하다가 이때에 수상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고서 반년쯤 있다가 ‘제국’은 3·1운동을 만났던 것이다. 100년의 고지에서 보면 ‘일제’는 제국 같은 것 할 게 아니었다. 조선의 3·1운동은 일본사람들한테 ‘제국’은 무리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 3·1운동으로 태어난 ‘민족’
망국체험에서 100년이 지난 시공에서 3·1만세의 의미를 새겨 보고자 한다.
조선사람들이 세계사적 사조인 민족자결의 원칙에 눈떴을 때 독립만세는 터져 나왔다. 고을마다의 장터에서, 반상(班常)의 차가 없었고, 빈부의 차가 없었고, 남녀노소의 차가 없었고, 신교(信敎)의 차가 없었다. 조선사람들이 역사 있고서 처음으로 하나 되는 마당이 독립만세 속에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회한을 함께하는 ‘회한의 공동체’ 속에서 조선사람은 하나 되었고, 나라를 찾으려는 소망 속에서 하나 되는 ‘소망의 공동체’가 조선사람 위에 있었다. 조선사람이 ‘네이션(nation·국민-민족)’이 된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3·1만세 속에서 근대가 말하는 네이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라가 없는데 네이션(국민)이라 한다 할 것인가. 역사로부터 나라를 빚진 국민, 조선사람은 3·1운동 속에서 마이너스 국민(네이션)으로 태어났다. 나라 찾기의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3·1운동의 의미를 깨닫는데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르낭(1823~1892)만 한 사상가는 없을 것 같다. 르낭은 ‘민족’의 출산을 두고서, 공유(共有)된 고통의 과거를 강조한다. 사람이란 ‘고통에 비례해서 더욱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공통의 고통은 환희 이상으로 사람들을 뭉치게 한다. 국민적 추억이나 애통은 승리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르낭의 네이션(민족)은 혈통이 같거나 언어 종교가 같은 것을 넘어서고 있다. 네이션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해를 초월한 정서 그것이고, 혼(魂)이면서 정신적 원리’이다. 그래서 민족(네이션)이란 ‘사람들이 과거에 있어서 치렀고, 금후(今後)에도 치를 용의가 있는 희생의 정서로 구성된 위대한 연대심’인 것이다(<국민이란 무엇인가?>).
추억의 風化는 국가가 저지해야
비폭력 무저항의 3·1독립만세에 가해진 무차별 총격의 학살, 시위하는 다중에 휘두른 총검의 난도질,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골육을 으깨는 지옥에도 없을 고문, 일본 순사 헌병들은 조선사람들 두 눈을 번연히 띄워 놓고, 그 보금자리를 불태워 초토로 돌변케 했으니….
이 잔학한 소문이 퍼져도 조선사람 독립만세는 의연히 고난과 십자가 속으로 나아갔다. 이 만세가 온 나라를 한 바퀴 돌았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그 장년(壯年)시절에, 보불전쟁(普佛戰爭·1870~1871)에서 조국이 패배하고, 비스마르크·몰트케의 프러시아가 승리하여 베르사유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하는 거들먹거림을 직접 보아서일까, 영광보다는 수난과 회한의 과거에서 민족의 바이탈리티(vitality)는 터져나오는 것임을 열정으로 알려주고 있다.
3·1운동으로 다시 태어난 ‘민족’은, 당연히 ‘과거를 두고는 공유해야 할 영광과 회오(悔悟)의 유산’으로 힘을 받는 것이고, ‘미래를 향해서는 실현해야 할 공동의 프로그램’ 앞에 함께 서는 것이다.
나라를 빚진 ‘마이너스 국민’의 프로그램에는 관리체가 있어야 했고, 그것은 임시정부였다. 조선에 생겨난 ‘네이션’의 나라 찾기 프로그램의 관리자요 지휘탑이 상해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3·1운동으로 네이션(민족)이 태어났기에 그 집중적 표현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존재는 드러나게 된 것임을 우선 확인해 두겠다.
르낭의 ‘민족’ 형성의 계기는, 온 민족이 함께 당한 고통과 그 고통의 추억 공유 속에 있다. 그러므로 3·1운동의 회상이 조선사람을 ‘민족’이게 하는 것이다. 일제의 가학(加虐) 공간에서 그랬고, 광복공간에서도 그렇고, 극일(克日)의 고지를 넘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평화의 지주(支柱)가 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국가는 역사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국가가 3·1운동 앞에 바로 섰는가는 되풀이해서 물어져야 할 사안이다. 추억의 풍화(風化)는 국가가 저지해야 할 것이다.
온 민족이 외치고 일어난 3·1운동의 눈에 보이는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조선, 조선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캐나다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던 단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거사 전날 2월 28일 밤, 가깝게 지내던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미국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는 쾌히 받아들이면서 “이 같은 독립운동을 해도 성공할 가망성은 없다. 오히려 조선사람에게 해가 미친다. 계획을 중지하라”고 학생에게 권했다는 것이다(‘3·1에 있었던 일’,
3·1운동이 가져온 변화
3월 1일부터 운동이 한고비 넘기는 5월 30...
위대한 양심법정
진주만 기습 직후 對日선전포고에 서명하는 F.루스벨트. |
봄이 왔다.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 평생에도 봄이 한 번 왔다. 망국(亡國)의 백성 이승만 손에 여권이 들어와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간 지 30년이나 되었어도, 미국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조선사람이기를 고집하는 무국적(無國籍)의 이승만에게 여권을 내줄 정부는 그동안 없었다. 그는 1932년 12월 뉴욕을 출발하여 이듬해 8월에 그리로 돌아갔다. 여행의 주목적은 물론 독립운동이다.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 1931년) 문제가 국제연맹에 제소되어 세계의 이목이 제네바에 집중해 있는 기회에 세계 여론에 다시 한 번 조선독립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이 여행에서 이승만은 다음해 결혼하게 되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 양과 만나게 된다(자세하게는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독립의 소망이 클수록 날이면 날마다 좌절감만 쌓이는 쉰여덟 홀아비의 일상에 봄이 왔다 할 것이다. 순수 게르만인 프란체스카는 영어에도 능했고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이승만은 이 여행에서, 망명정객에게 없어서는 안될 운동의 보좌역과 인생의 반려를 얻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이 필요로 하는 끝없는 도전과 창의의 정신작용의 안정적 공급원인 가정을, 이승만은 이 여행을 통해 드디어 얻게 되었다.
이승만의 봄과 여권
이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정부가 무국적자 이승만에게 여권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나던 해, 파리강화회의에 가보려고,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했는데도 ‘NO’로 일관하던 국무성이 이번에는 특단의 외교관여권(diplomatic passport)을 발급해 준 것이다. 이 결단을 내린 사람은 당시 세계공황 속에 있던 후버 정권의 국무장관(1929~1933년) 헨리 스팀슨이었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광복하기까지는 지구 규모의 전쟁이 있어야 했던 것을 한 번 상기해 본다. 유격대가 게릴라전 좀 한다고 판세가 어찌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1945년 3월의 도쿄(東京) 대공습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10만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 전해 7월, 도쿄로부터 가폭권(可爆圈)에 있는 사이판에 B29 기지를 만들어서는, 하늘이 새까맣게 날아와, 일본 수도(首都)의 다운타운을 완벽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방공호(防空壕)도 없지 않았을 텐데 비행기 폭격 한바탕에 수도 인구 10만명이 죽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일본 군부는 본토결전 의지만 다졌다. 가장 강경했던 일본 육군 중추가 기가 꺾이는 것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原爆)이 투하되고 나서다. 천황(天皇)조차 육군의 기세에 질려 감히 ‘전쟁 그만두자’는 소리를 못하던 것을 하게 해 준 것은 원자폭탄이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한 사람 바로 밑에서 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프로젝트의 총지휘 책임자가 육군장관 스팀슨이었다. 제네바에 가려는 이승만 여권의 발급을 결단한 사람이 스팀슨이었다.
평소에 미국의 대외(對外)정책을 비판이나 하고 실무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만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승만을 국무부 관리들은 냉대했다. 법적(法的)인 무국적을 고집하는 이승만에게 미국여권은 절대로 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日帝)의 침략성이 세계 앞에 돌출해 버린 만주사변 상황에서 ‘전사(warrior) 스팀슨’(스스로의 호칭)이 독립운동의 고집불통 이승만과 조우함으로써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메이지일본 미국과 師弟관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서 도쿄전범(戰犯)재판을 했을 때 그 소추의 상한은 1928년, 만주사변(1931년)을 중심으로 그 전주곡인 장쭤린(張作霖) 폭살사건까지였다.
만주사변이 나기까지 스팀슨은 일반적인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스팀슨은 1920년대 말 필리핀 총독으로 1년 남짓 재직했는데, 오는 길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고위층의 접대를 받았다. 교토(京都) 미야코(都) 호텔의 추억은, 그가 훗날 원폭 사용의 책임자였을 때, 실무자들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가 원폭효과 측정에 좋다고 첫 대상에 넣어 놓았던 것을 손수 제외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미·일 관계가 시작되는 19세기 중엽 페리함대의 함포외교만 해도, 시바 료타로 같은 작가는 일본이 미국한테 강간당했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더 많은 연구들은 당시의 미국정부가 영·불(英佛) 등의 서구(西歐)국가들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니즘을 발휘하여, 일본을 개명(開明)시키려 했던 것을 알아냈고, 많은 일본사람도 그리 알고 있다.
20세기 초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사람들이 일본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스승이 우등생 제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고, 메이지기(明治期)의 풍물기에도 나온다.
홋카이도, 삿포로 시가와 연이은 벌판이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초대 삿포로 농학교 교장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의 동상이 서 있다. 손으로 오호츠크해(海)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일까. 무리를 향도하는 포즈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동상 대석에 새긴 ‘Boys, be ambitious’ 앞에 서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정경 모두가 미국사람들과 일본사람 관계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다.
근년에 와서 일본 사람들이 유달리 되풀이해서 제2차세계대전을 돌이켜 보고, 설득력 있는 패인을 찾으려, 좌담, 연구토론, 저술 등으로 바빠 보인다. 이때에 자주 인용되는 책 하나가 있다. 아사가와 간이치(朝河貫一) 저(著), <일본(日本)의 화기(禍機)>...
九天을 울린 영적 파워 - 大陸을 깨운 半島의 함성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는 항일민족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
도쿄만. |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