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압송로 진산-전주) -
그 날, 그 길 150리를 걷다
송천동 성당
이상원 (라파엘)
진산군수 신사원은 윤지충에게 유교에서 말하는 효(孝)의 정신을 상기 시키며, 윤지충의 재주와 명문세가인
가문의 명예를 아까워하면서 회유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형벌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덕을 닦는 것이 효도
를 어기는 것인가?”하고 윤지충은 반문하였다. 진산군수는 설득과 회유를 시도해 보았으나, 마음을 바꾸어놓
기는커녕 믿음과 결의를 더욱 다져주는 격이 되자, 10월 29일(양 11월 24일) 전라감영으로 압송하였다.
새벽닭이 울자, 전라감영을 향해 출발하여, 배티, 산북, 배바위, 용계원을 지나 신거랭이에서 쉬며 조반을 먹
었다. 경천, 고산, 어우리를 지나 개바위에서 두 번째 쉬며 말을 먹였고, 해가 질 무렵에 안덕원을 지나 완동
문을 거쳐 초저녁에야 전주 중진영에 도착하였다.
1791년 신유년으로부터 220년이 지난 2011년 10월 26일. 이날따라 유난히 기온이 뚝 떨어져 찬바람이 파고들 때
오싹함을 느끼며 옷깃을 여미어본다. 깜깜한 밤이다. 새벽닭이 울었던 그 시각에 맞추기 위하여 새벽 3시에
교구청을 출발한 순례단이 진산에 도착한 시간은 4시경이었다. 지도신부님이신 이영춘(사도요한) 신부님의 간단
한 해설과 기도로 출발의식을 가진 우리는 달빛도 없는 밤길을 헤드램프와 작은 손전등에 의지하며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 때는 어땠을까? 아마도 포졸이 든 횃불이 길을 비추어 주었겠지. 진산삼거리를
지나 17번 도로를 걸을 때 밤공기를 가르는 자동차가 차가운 바람을 우리에게 쫙 퍼부으며 지나간다.
도로를 벗어나 배티 고개를 오를 때는 벌써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40일 동안 전
국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한 관록 때문이기도 하지만, 순교자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끌려가셨던 그 길을 걸으며
그분들의 신앙심을 헤아려 보고자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배티재를 내려 올 때 잠시 길을 잃었다.
깜깜하기도 하거니와 낙엽이 쌓여 길 비슷한 흔적도 보이지가 않았다.
"여행이란 고생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광야를 지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긁히고 미끌어지고 자빠지며 산을 벗어났을 때, 그만 내 배낭에 꽂아둔 순례자 깃발이 어딘가에서 빠지고 말았
다. 왜 이리도 허전한지. 그 깃발이 어떤 깃발인가? 전국을 순례 할 때도, 성지순례를 할 때도, 아름다운 순례길
을 걸을 때도 나와 함께 한 사연이 있는 깃발인데. 침묵을 깨고 농담을 해본다. 다음에 이 길을 오는 사람이 내
깃발을 찾아주면 술 한 잔 거하게 사겠노라고.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 되어 두 번째 순례를 마치고 막걸리를 사
게 되었다.)
산을 완전히 벗어나 얼음골에 도착하니 저 멀리 보이는 대둔산에 햇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의 시작
을 알리는 해돋이를 하게 될 때는 무언가 희망을 갖게 되고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 때 그분들의 심
정은 어땠을까를 헤아려 본다. 아비도 임금도 모르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짐승만도 못한 역적의 무리로 몰려
관아로 끌려가는 길에 무슨 희망을 가지며 무슨 뿌듯함이 있었으랴? 정말 그랬을까? 아니었다. 그분들은 오히려
희망을 품고 더 뿌듯한 감회를 가지고 이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후의 모습에서도 들어났듯이 천주를 향
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바로 영광이라는 것을 행동과 말로 표현했었으니까.
옷 안에서는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는데도 손이랑 얼굴이랑은 차갑기 짝이 없다. 다시 17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
다가 주암교를 지나 배바위(舟岩)을 지났다. 숯고개(炭峴)마루에 올라 잠시 다리를 쉬고 목을 축인다. 벌써 다리
가 아파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서로들 한마디씩. 옛날 그분들은 아직 한 번도 쉬지 않았었노라고.
삼거리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름이 아름답다. 선녀와 나무꾼. 인증샷을 하고 바로 출발이다. 두모소, 활골, 용계원
(운주면 금당리)을 지나 다시 산길을 오른다. 임도로 잘 닦여진 길이지만 조금만 비탈이 져도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다리가 한결 수월스럽다. 꼭 인생길의 굴곡만 같아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며
조용히 묵상에 잠기면서 철학자가 되어보기도 한다.
드디어 첫 번째 쉬기로 한 신거랭이(운주면 가천리)가 보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 자리를 잡고 우
선 아침식사를 해야만 했다. 진산을 출발하여 22Km를 고갯길로 걸어 왔으니 여간 배가 고프지가 않았다. 차디찬
김밥으로, 주먹밥으로, 과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그 때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쉬며 조반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
다. 신거랭이라는 지명이 재미있다. 신거랭이는 전주와 금산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원님 일행이 하룻밤 묵고
가는 중간 기착마을로, 또 장꾼들, 항양으로 가는 선비들, 여행객들이 쉬어가는 쉼터마을로, 자연스레 주막이 들
어서고 주민들이 짚신을 삼아 걸어 놓으면 갈아 신고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부드러운 발음으로 ‘싱
그랭이‘라 부르고 있다.
신거랭이부터는 고산성당의 박종남 형제와 봉동성당의 변성배 형제가 흰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포승줄로 묶어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분장을 하고 그 모습을 재연하며 걸었다. 요동, 구재, 가천, 죽림을 거쳐 갱금이(경천)를
지날 때였다. 지나가는 길에 동네 분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와 묻는다. 무슨 일로 왜 그 사람을 잡아가느냐고. 우
리는 그저 호기심에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승줄에 묶여가는 박종남이 바로 경천 출신이었기
에 자기 동네 사람이 잡혀가는 줄로만 알고 소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급기야 집안 형수씨라는 분이 달려오고 어
떤 분은 경운기로 길을 막아 가지 못하게 하면서,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며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
왜 잡아가느냐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일행도 잠시 장난기가 발동하여 아무 설명도 해 주지를 않아 더 사
건이 커지게 되었다. 그분들이 고산성당 신부님께 연락을 하고 면사무소에 신고도 하고...
220년 전 그때는 어땠을까? 선비요 양반이며 선한 사람을 왜 잡아가느냐고 따지고 덤볐을까? 아니면 불효자요
역적이니 잘 잡혀간다고 손가락질을 해댔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내 모습을 본다. 신앙생활을 하며 혹시라도 양
심에 걸리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는지? 어느 땐가 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느라 성호경을 긋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며 남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일으키며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고산교를 지날 때, 어느 분이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가지고
오셨다. 누눈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일행 중에 비봉 사는 유승철 형제의 자매님이 격려차 오신 것이었다. 천변에서
먹은 막걸리 한 잔과 두부김치는 정말 생명의 양식만 같았다. 고산성당에 도착하니 안봉환 신부님께서 반겨주신
다. 내심 이곳에서 점심은 먹겠거니 했는데 웬걸 점심은 고사하고 음료수도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지도신부님께
서 점심은 없기로 하셨다고. 그 때 당시 순교자들은 간식도 점심도 먹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그때를 재연한다는 우
리가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셨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금 전 막걸리와 두부김치
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맛있게 먹었으니 내심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고산을 막 지날 때 지도신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우리 삼거리에서 주교님과 교황대사님이 우리 순례단을 격
려해주시기 위해 기다리신다고. 우리는 코스를 일부 변경하여 걸음을 재촉했다. 어우리 삼거리에 도착하니 우리
교구장이신 이병호 주교님과 오스발도 파빌랴 교황대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대사님께서 무슨 행사인지를 물
으시니 주교님께서 설명해 주신다. 우리나라 첫 순교자이신 하느님의종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두 분의
압송을 220년 만에 재연하면서, 우리나라의 하느님의종 125위의 시복시성을 위한 도보순례이며 의상과 포승줄도
옛날 그대로를 재연한 것이라고. 시복시성을 위한 행사라는 설명에 감동적이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일행에게 일
일이 악수와 안수를 해 주시니 아픈 다리도 고픈 배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당시 그분들도 천주님
의 은총이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로 알고 이 길을 걸었으리라.
고산을 지나 약 35Km쯤을 걷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몸에 무리라고 생각한 몇 사람이 완주를 포기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신기, 용암, 양화, 용봉교를 거쳐 봉동을 지나는데 막 해가 지고 있었는데 지는 해를 바라보니 왜 그런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220년의 시공을 넘어 그분들과 함께 걷는 착각 속에 내 눈가에는 촉촉한 기운이 돌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 다리가 아프지도 않고 발가락도 아픈 줄을 모르겠다. 그저 한발 한발 묵묵히 걸을 뿐이다.
봉동천변을 지나 구만리, 건전, 신기, 운교를 지나 개바우(용진)다. 이제 51Km쯤 왔다. 용진중학교 부근 길가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해보다가 누군가의 제의에 따라 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웠다.
당시 기록으로는 이곳 개바우에서 말을 먹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진산에서부터 우리 순례단 뒤를 도로를 통해 따
라오면서 연락을 담당했던 고산성당의 최지선 형제가 자동차에 주유하는 모습이 꼭 그때 말을 먹였다는 기록과 너
무나도 흡사한 모습이어서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제 발가락 하나가 물집이 생겼는지 아파온다. 그래도 내
색을 할 수가 없다. 도보순례의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들은 내가 힘들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서
로 피곤하고 힘이 들기 때문에라도 내색도 하지 못하고 걷는다.
아주 어두워진 시각에 소양교를 건너니 시내 길이다. 자동차가 왜 그리도 빨리도 달리는지 달리면서 일으키는 바
람은 차기만 하고 걷는 우리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어 묵상은커녕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안덕원 네거리에 도착
했다. 안덕원은 조선조 때 역원이 있었던 곳이다. 신호등이 구세주다.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이
아픈 다리가 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바지로 4Km쯤 남았다. 완동문(東門의 옛이름)을 거쳐 태조로를 지나
는데 사람들이 따라오며 묻는다. 무슨 일로 사람을 잡아가느냐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라 잡아간다고 했더니 왜
그게 죄가 되느냐고 따지고 드는 사람들도 있다.
60Km를 걸어 드디어 우리가 목적한 전동성당에 도착하였다. 당시 도착지는 중진영(中鎭營)이었지만 지금은 흔적
이 없기에 중진영 부근이며 그분들이 참수당한 곳 전동성당을 목적지로 하고 온 것이었다. 우리는 신부님과 마중
나온 다른 사람들의 환영 속에 성당 안에서 잠시 조배를 드리고 지친 몸과 목을 축이려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 그
러고 나서야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220년 전 그날,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두 분은 쉬지도 않고 중군아문(中軍衙門)에서 심문을 받고 다음날 10월 30일(양 11월 25일) 새벽에야 감옥으로
갔다.
11월 7일(양 12월 2일) 전라관찰사의 마지막 심문으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윤지충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하며 관찰사의 말문을 막았다. 결국 그들은 대명률(大明
律)을 적용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참수에 처하고, 그 머리를 5일 동안 높이 매달아놓아 백성들로 하여금
윤리강상의 중요함과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도록 하였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윤지충은 마치 잔치에 나가
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가며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장엄하게 하였으며,
권상연은 모진 태형으로 몸이 초죽음 상태인데도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걸어갔다. 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린 시각은 1791년 11월 13일(양 12월 8일) 오후 3시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시각과 같은 시간이었다.
10월 26일의 첫 번째 순례는 [전주교구 천주교문화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 모색을 위한 심포지엄]에 맞
추어 실시하였고, 11월 25일 두 번째 순례는 두 분 순교자가 압송되어 온 바로 그 날에 맞추어 실시한 순례였다.
첫 번째 순례에서 완주한 호성동성당 유영윤 형제는 도중에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으나 당시 끌려오신 분들을 생
각하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노라고. 또 송천동성당 유창호 형제는 평소 산악인으로 60Km정도야 가볍게 생각했
으나 막상 걸어보니 대단한 인내심이 아니면 걸을 수 없었다며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두 번째 순례에서 완주한 한국순례문화연구원 박동진 사무국장은 220년 만에 그 길을 같은 모습으로 걸어온 사람
들은 우리가 처음이라며 감격스러워했고, 송천동성당 순교자현양회 박진석 회장은 이렇게 힘든 길을 죄인 아닌 죄
인으로 끌려오신 신앙선조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또 아름다운 순례길 이동수 회장(서신동성당)
은 순례길을 사전답사하고 험한 길은 일부 보수까지 하고 이번에 완주를 했으니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게 그리고 가장 기쁘게 걸으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성지순례 지도신부님이신 이영춘
(사도요한) 신부님이셨다. 평소 아킬레스건이 불편했는데 그 통증을 참으며 순례단원들을 격려하시면서 1791년 당
시 사건들을 해설해 주시면서 힘들게 완주를 하시고, 전동성당에 도착한 단원들에게 안수를 해 주시며 주님의 축복
을 빌어주시니 순례자들은 그동안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두 번의 완주를 마치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나눈 우리들의 이야기.
“2백 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중요한 건 그 기간이 아니라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거지.”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가 된다.’ 고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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