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에밀레종 人身공양은 실제일까 우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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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지?" "아이 뼈 같은데요…!" 2000년 여름, 경북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를 발굴하던 조사단원들의 눈앞에 이상한 유골이 나타났다. 깊이가 10m를 넘는 통일신라시대의 우물 밑바닥에서였다.
거꾸로 선 채 뻘층에서 거의 온전하게 보존된 어린아이의 전신 유골이었다. 신장은 123㎝, 나이는 7~8세 정도로 추정됐다. 두개골 함몰 흔적도 있었다. 우물 입구에서 머리부터 떨어져 파묻혀 버렸던 것이다.
손뼈의 위치는 두개골 아래였다. 추락할 때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한 것은 부서지지 않은 토기와 소·닭뼈처럼 뭔가 제사에 쓰일 법한 것들이 유골 주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말했다. "어떤 의식(儀式)을 위한 희생으로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실제로 인신공양(人身供養)이 존재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에밀레종(鐘)의 전설이 진짜였단 말인가?
전설을 따라가 보자. 종 만드는 일이 계속 실패하자 봉덕사(奉德寺) 승려들이 쇠붙이를 시주받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한 아낙이 어린 자식을 안고 나와 푸념했다. "내놓을 거라곤 이 아이밖에 없다우!"
돌아간 중은 꿈에서 "그 애를 넣어야 종이 완성된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결국 그 아이를 펄펄 끓는 도가니에 집어넣고서야 종이 완성됐는데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어미 때문이야)"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등장 안 해
한 음성공학 전문가는 2003년 "지금은 당목(종 치는 막대)이 낡아 잘 들리지 않지만 30년 전 종소리를 분석해 보니 1초에 5~8번 '엉~ 엉~'거리는 주파수가 애타게 우는 유아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고 말했다.
이제 에밀레종, 정식명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왜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만 근의 구리가 들어갔다는 거대한 종은 통일 이후 신라 중대(中代) 왕실의 번영과 안정을 상징하기 위한 기념물이다.
신문왕의 차남인 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35대 경덕왕(景德王)이 이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된 것도 이때다. 번영과 안정?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이었을 뿐이었다.
왕실과 나라의 기틀에는 이미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귀족들의 도전으로 왕권은 흔들렸고 백성들은 거듭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불국사·석굴암·에밀레종은 종교의 힘으로 민심을 달래려는 것이었다.
이런 대역사(大役事)가 일어날 때마다 건축비의 일부를 충당해야 하는 건 결국 여염집 백성이었다. 그런데 에밀레종을 완성한 왕은 경덕왕이 아니라 그 아들 36대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옥좌에 올랐을 때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을 맡았다. 이때부터 귀족세력은 노골적으로 왕권을 협박했다. 768년 대공(大恭), 770년 김융(金融)의 반란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종에서 뼈 성분 검출 안 돼
내물왕의 10대손인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이 일어나 이 와중에 혜공왕은 피살됐다. 이어 김양상이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했다.
이는 신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무열왕계 왕통이 끊어지고 신라 중대 왕실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적인 상황과 에밀레종 전설을 결합시킨 흥미로운 학설이 최근 제기됐다.
중학교 교사인 역사연구가 성낙주씨의 해석이다. 전설에 드러나지 않는 '부재(不在)의 아버지'는 경덕왕,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어머니는 친정오빠 김옹(金邕)과 함께 권력을 농락한 만월부인, 그리고 제물로 바쳐진 어린아이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된 혜공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막연한 상식과는 달리 에밀레종 전설 자체가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1895년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쓴 영문(英文) 자료였다.
에밀레종 설화로서 제대로 정착된 건 1920년대의 일이었다.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이야기는 실제일까? 신라 왕실의 비극을 빗댄 정치적 우화일까? 근대에 출현한 '날조된 설화'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현대의 정밀분석 결과 사람 뼈의 주성분인 인(燐)은 이 종에서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201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