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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17세기 영남 남인의 태두 학사 김응조
1. 서언
학사 김응조는 퇴계 이황의 재전제자(再傳弟子)로, 문헌의 고장인 영남에서 태어나 퇴계로부터 전해지는 유학의 전통을 이어 17세기 영남 남인의 태두로 우뚝 선 인물이다. 어려서는 권두문(權斗文)과 권호신(權虎臣)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성장해서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적 진보를 이룩하였고, 서애 사후에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적 토론을 통하여 진일보된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장현광의 예학을 계승하여 이 분야에서 달성한 탁월한 업적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응조는 예송논쟁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관계에 나아가 활동하면서 그릇된 사회나 문물제도에 대해 직간하며 사환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 시기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국가의 재정확보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민생의 문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또 사회기강이 무너진 것은 위정자들의 자질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보고 독서와 교육으로 능력을 향상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문교의 부흥을 권장하였다.
대산 이상정은《학사집》서문에서 “김응조로 하여금 조정에서 자신이 쌓아온 역량을 펼치게 하였다면, 반드시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며 가르침을 펴고 풍속을 바로잡아, 한 시대의 정치와 교화를 빛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영남 북부권에 있어서 그의 존재감과 학문적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뒷날 그의 학문은 매원(梅園) 김계광(金啓光), 노노재(魯魯齋) 김만휴(金萬烋), 경옥(景玉) 이보(李簠) 등에게 전파되어 갔다. 김응조에 대한 선행 연구성과로는 김선주의〈학사 김응조의 삶과 시세계〉와 김태년의〈학사 김응조의 생애와 학문〉이라는 2편의 결과물이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적으로 《학사집》에 실린 김응조의 행장과 연보 등을 바탕으로 하고, 필요한 경우 2편의 성과물을 참조하여 김응조의 생애와 학문, 문집의 간행과 체재, 문집의 내용 등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2. 생애와 학문
1) 생애
김응조는 1587년(선조 20) 12월 26일에 영주 봉향리(奉香里)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를 살펴보면, 원래 안동 풍산에 살다가 송도(松都)로 옮겨 살았는데, 8대조 김안정(金安鼎)이 고려 말에 벼슬이 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올랐고, 7대조 김자순(金子純)이 서울 장의동(壯義洞)으로 옮겨 살았다.
고조 김양진(金楊震)은 호가 허백당(虛白堂)이다. 일찍이 대사간으로 재임할 때 부마(駙馬) 김희(金禧)를 논핵하였다가 김희의 부친인 김안로(金安老)에게 배척당하여 서울에서 다시 풍산 오미동(五美洞)에 이거하면서 오미동 김씨의 중흥기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증조 김의정(金義貞)은 호가 잠암(潛庵)이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조부 김농(金農)은 호가 화남(華南)이고,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다. 아버지 김대현(金大賢)은 호가 유연당(悠然堂)이고, 산음 현감(山陰縣監)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수의부위(修義副尉) 찬금(鑽金)의 따님이자 전주 부윤(全州府尹) 즙(楫)의 손녀이다. 김대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에 여덟째 김술조(金述祖)는 요절(夭折)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ㆍ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ㆍ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1581~1637)ㆍ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ㆍ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ㆍ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ㆍ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 1589~1652)ㆍ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이다. 특이하게도 8형제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들 중 5형제(봉조ㆍ영조ㆍ연조ㆍ응조ㆍ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仁祖) 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무동(五畝洞)에서 오미동(五美洞)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미동의 풍산 김씨는 ‘미김(美金)’으로 불리며 명망 있는 재지 사족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 것이다.
김응조는 자가 효징(孝徵), 호가 학사(鶴沙)ㆍ아헌(啞軒)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지녀 5~6세에 이미 어버이를 공경하고 형을 따르는 법도를 알았고, 아이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7세에 다섯째 형 김연조와 함께《소학(小學)》을 배웠는데, 하루는 스스로 허리띠를 잘라버려 모친이 괴이하여 물으니 “예의에 띠를 묶고서 측간을 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모친이 좋게 여기고 따로 띠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외부의 스승으로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1543~1617)과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 1558~1629)에게 수학하였다.
16세에 산음(山陰) 임소(任所)에서 부친상을 당하여 형들을 따라 여막을 지켰고, 집상(執喪)을 마치 성인처럼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 선조 37)에 탈상을 하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을 찾아뵙고 학업을 질정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시국이 어그러져 혼란함을 만나서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쫓아 공부하며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물으니 공경과 존중을 대단히 받았다. 1623년에 인조가 등극하자 5월에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나가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1625년(인조 3)에 승진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맏형의 익산(益山) 임소(任所)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
김응조는 그의 나이 45세 때인 1631년에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청렴한 목민관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일찍이 이웃 고을 두 원님과 함께 선운산(禪雲山)을 유람하였는데, 두 원님 모두 자기 고을의 종을 많이 데리고 왔다.
음악이 요란하였지만 선생은 들리지 않는 듯하였다. 저녁에 두 원님이 한 기녀에게 선생(김응조)을 모시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기녀는 선생의 침구가 모두 목면에 거친 베인 것을 보고, 뒷날 한 선비에게 말하기를 “촌스럽도다. 흥덕 현감의 이부자리여!”라 하니, 선비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 이 사람의 귀함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응조는 이웃 고을의 원님들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선운산을 유람하게 되었다. 타 고을 수령들은 종을 대동하였으나 김응조는 그들과 다르게 수행원 없이 홀로 유람에 참여하였고, 질펀한 향연을 싫어하였고 기녀의 접대도 사양하였다. 한편 기녀에게 침구조차 값싼 목면을 사용한다는 비웃음을 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목민관이 지녀야 할 청렴함을 몸소 실천하였다.
1633년(인조 11)에 다시 병조 정랑에 제수 되었다가 호서(湖西)의 향시를 관장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9월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에 제수 되어 부지암에 있던 장현광에게 나아가 학문을 질의하였으며, 이듬해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살던 갈산(葛山) 남쪽 언덕 바위 위에 작은 집을 짓고 ‘명재(瞑齋)’라 하고 헌(軒)을 ‘아헌(啞軒)’이라 하였다.
1634년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635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1636년 겨울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선생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쉬고 있었다. 중형(仲兄) 망암공(忘庵公)과 함께 밤길을 달려 임금께 문안하였는데, 성(城)이 함락되었다고 하자 선생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곧바로 사직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자신을 지켰다.
일상생활의 모든 글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고, 달력을 하사받으면 반드시 맨 앞면을 제거하고 보았다. 여러 번 성균 사예(成均司藝),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40년(인조 18)에 다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가, 재차 헌납(獻納)에 제수되어 비로소 힘써 부응하였는데, 얼마 뒤에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나갔다. 그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상기(喪期)가 이미 끝나 유생들을 거느리고 부지암(不知巖)에 사당을 세우고 문집 간행을 의논하였고, 또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1641년에 관직에 있으면서〈학사정기(鶴沙亭記)〉를 지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담았다. 이듬해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643년에 장령(掌令)에서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다가 다시 헌납으로 돌아왔다. 11월에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弘文館副修撰知製敎)에 제수되었다. 1646년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에 부교리(副校理)에서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효종이 동궁 시절에 선생을 매우 칭찬하여, 강론함에 경의(經義)에 밝다고 대전(大殿)에 주달(奏達)하고, 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효종을 모시면서 태만하여 실례를 하면 선생을 꺼려 몰래 조심을 시켰으니, 그 공경하고 두려워한 것이 이와 같았다.
4월에 교리에 임명되고, 천재(天災)로 인하여 수성(修省)할 것을 진술하여 봉사(封事)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에 다시 수찬(修撰)이 되고, 보덕(輔德)을 거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겼다. 1648년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보덕(輔德), 부교리(副校理), 집의(執義), 수찬(修撰) 등을 전전하다가 다시 사간(司諫)과 집의(執義)로 환원하였다가, 체임되어 돌아왔다.
1649년에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되었다. 집의(執義)로 옮겼다가 직강(直講)에 체부(遞付)되었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간(司諫)으로서 상소하여, 계술(繼述)의 도를 말하여 처음 베푸는 정치를 면려하고 경계하였다. 8월에 부교리(副校理)에서 보덕(輔德)으로 전직하고 응교(應敎)에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에 체직되었다.
1650년(효종1)에 다시 응교의 관직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사간으로 옮겼다가 응교 겸 필선(弼善)에 환직(還職)되었다. 당시에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가 존호(尊號)를 논한 일로 주상이 진노하여 모두 멀리 귀양을 보내었다. 엄중(嚴重)한 교지(敎旨)가 연달아 내려와 온 조정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선생이 홀로 장계를 올려 힘써 분변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5월에 집의(執義)가 되고 다시 응교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1월에 응교(應敎)의 직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상소를 올려 먼저 조정이 분열되고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상황을 논하고 이어서 각 사(司)와 관아의 폐단을 말하였다.
1651년 봄에 응교에 제수되고 또 사간으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고, 환곡의 삼분모곡을 면포로 대납하는 일의 폐단을 논하여 아뢰니 주상이 특별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튿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시켰다. 소를 올려 주(州)와 현(縣)에 교수관(敎授官)을 다시 두어 인재를 교육하도록 청원하였다.
10월에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어 학교를 세우고 비리를 척결하고 온갖 폐정(廢政)을 개선하였다. 1652년에 어떤 일로 그만두고 귀향하였다가 이듬해에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제수되어, 양로례(養老禮)를 마련하여 시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쳐 교화를 돈독히 하였다.
1655년(효종 6)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부임하였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하였다. 1656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되어 돌아왔는데, 6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1658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옮겼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59년 4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국상(國喪)에 달려가서 통곡하고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현종 1)에 가뭄으로 인한 응지(應旨) 상소에 수성(修省)과 견역(蠲役) 등의 일을 진달(進達)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64년(현종 5)에 담양(潭陽)의 환곡에 대한 일로 전후(前後)의 관리 모두 체포되었을 적에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1666년에 대신들의 변호로 인하여 주상이 서용(敍用)하여 원로를 우대하라는 은전을 내려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부인 의성 김씨는 학봉 김성일의 손녀로 2남 4녀를 두었다. 장자 김시행(金時行)은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차자 김시지(金時止)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네 딸은 사인(士人) 김찬(金鑽)ㆍ권식(權軾)ㆍ김익중(金益重)ㆍ권수하(權壽夏)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김시행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김휘도(金輝道)와 차남 김휘봉(金輝鳳)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삼남 김휘보(金輝黼)는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두 딸은 사인(士人) 정횡(鄭鐄)과 장이룡(張以龍)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김시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휘벽(輝璧)은 영릉 참봉(寧陵參奉)이고, 딸은 사인 김서성(金瑞星)에게 출가하였다.
2) 학문
김응조의 학문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륜(彝倫)의 법식에 근본하여 도의(道義)가 밝고 드넓은 영역에 도달하여 공명정대하고 두루 포괄하였으며 안으로는 몸을 수양하고 마음을 바로잡고 밖으로는 일에 대응하고 사물에 접하였다. 가까이는 가정과 고을에서 생활하는 데서부터 멀리 조정(朝廷)에 벼슬하여 세상에 쓰이기까지 한결같이 성신독경(誠信篤敬)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크게는 의리가 정밀하고 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우뚝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는 나아가고 물러남의 의(義)를 신중하게 하되,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으면 바로 몸을 받들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하루해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의론에 분쟁이 일어날 때에는 마음이 공정하고 보는 눈이 밝아서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치우치는 경우가 없었다. 또 친구들이 불러 노는 데에 구차하게 영합하여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의 관직이 항상 명성보다 낮았다.
1636년(인조 14) 이후에는 더욱 벼슬에 나아가기를 싫어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였다. 인조가 만년에 선생의 어짊을 깊이 알고 총애와 대우가 점점 융숭(隆崇)하였으며, 효종도 선생을 깊이 존경하여 등용할 마음을 가졌다.
이에 선생은 임금이 알아주고 대우해 줌에 감격하여 일에 따라서 방도를 진달함에 성의를 다하고 말을 곡진히 하여 꺼리거나 피함이 없었으니, 대개 자신의 포부를 가지고 성덕을 보필하여 아름다운 정치를 이루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 조정에서 같이 일하는 자들이 시기로 걸핏하면 배척을 당하여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루려던 뜻을 끝내 펼 수가 없었다.
50여 년간의 벼슬살이를 통틀어 해를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이 나아갔다가 물러 나왔다. 그리고 조정에 있을 때는 여러 번 하읍(下邑)에서 배회하였으나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을 위한 일에 마음을 다하였고 쇠잔한 사람들을 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였다. 가난한 생활의 지조는 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선생이 다스린 다섯 고을에 모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있다. 그 백성들이 선생의 고을 사람과 자손들을 만나고 선생을 언급할 때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수신(修身)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방 하나를 깨끗이 쓸고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책을 보며 학문 연구에 열중하다가 해가 저물면 안으로 들어가 옷깃을 여미고 묵묵히 앉아서 덕성을 함양하였다.
때로 좋은 때 좋은 계절을 만나면 벗들과 손을 잡고 임천(林泉)의 좋은 경치를 유람하고 거닐며 시를 읊으니, 표연(飄然)히 세상을 벗어나 홀로 서 있는 뜻이 있었다. 정사(精舍) 옆에 별도로 띳집 몇 칸을 지어 ‘불야(不夜)’라고 하였으니, 사수(沙水)의 맑은 물이 창문에 밝게 비치어 밤이라도 낮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티끌이 깨끗이 사라지고 흉금이 시원하니 이곳을 지나가는 자가 갈건야복(葛巾野服) 차림으로 그 사이에 있는 선생을 보고서는 옥계(玉界)의 신선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집이 가난하여 거친 밥도 거르는 때가 있었으나 태연히 걱정하지를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의 신관(身觀)이 전날보다 나은 것 같다.”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듣건대 흰죽이 기운을 보양한다고 하니 어찌 그 힘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윤리에 돈독하여,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늙도록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국상(國喪)을 당한 날 비록 집에 있었지만 반드시 소찬(素饌)을 먹었고, 친구의 부음(訃音)을 들으면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람을 접대함에 정성을 다하고 온화하게 믿음으로 사귀어 안팎의 구별이 없었다.
일찍이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원근의 인사(人士)가 와서 질의(質疑)하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상세하고 절실하게 깨우쳐 주니, 아무리 둔하고 무지한 사람이라도 깨우치고 이해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지만《주역》공부에 더욱 힘을 쏟았다.
관상을 보고 점을 침에 정결(淨潔)하고 정미(精微)한 뜻을 극진히 하였다. 예서(禮書)를 공부하여 선현들이 논설한 관혼상제(冠昏喪祭)의 의심나는 문장과 변례(變禮)들을 모아《사례문답(四禮問答)》을 편찬하였다. 일찍이 퇴계의〈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바탕으로 그 의미를 연역하고 자신의 설(說)을 지어 스스로를 살폈다.
또 서애(西厓)가 임진왜란 때 화해를 주동했다는 무고를 오랫동안 당하였는데, 이 일이 후인들을 미혹시켜 사문(師門)에 누가 될까 걱정하여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여《서애유선생변무록(西厓柳先生辨誣綠)》을 지었다. 또 평소에 지은 시문이 매우 많았는데《산중록(山中錄)》이라고 명명하였다.
김응조의 문장은 명백(明白)하고도 간엄(簡嚴)하여 저절로 문체의 법도가 있었으니 모두 성정(性情)이 올바른 데서 나왔다. 논하는 자들이 이것은 선생의 행실과도 비슷하다고 말하였다. 김응조가 일찍이 예천 감천(甘泉)에 물계정사(勿溪精舍)를 세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제사 지내고 유생들의 강학 장소로 삼았으며, 또 의산(義山)에 서당을 지어 역봉(櫟峯) 이개립(李介立)을 제사 지내고《물계지(勿溪志)》와《의산지(義山志)》를 지었다.
3.《학사집》간행과 서지 사항
《학사집》의 구성은 본집 9권, 외집 1권, 세계도, 연보,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학사집》은 1734년경에 김응조의 증손인 노봉(蘆峯) 김정(金)이 집에 보관된 유고를 모아서 정리한 것을 중형(仲兄) 김개(金价)가 연보ㆍ부록을 추가하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편차를 거친 정고본(定稿本)을 1776년경에 김정의 아들인 김서필(金瑞必)이 영주의 의산서원 유생들의 협조를 얻어 다시 교정(校正)ㆍ편차하여 판각하였다.
책머리는 대산 이상정이 1716년(숙종 42)에 쓴 문집 서문이다. 이상정은 김응조의 인물됨에 대해서 “영민한 자질에다가 각고의 공부를 더 하였고, 드넓은 식견에다가 연원(淵源)의 요점을 탐구하였다. 떳떳한 본성의 올바른 행동 가운데에 도를 보전하였고, 일상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공을 드러내었다.
의리를 진실하게 좋아하여 물루(物累)에 얽매이지 않았고, 성현(聖賢)을 사모함이 간절하여 명리(名利)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라고 평하였다. 권1과 권2는 모두 시이다. 김응조는 스스로 지은 시를 ‘산중록’이라 명명하고서 표절하거나 꾸밈이 없이 성정에서 우러나온 시임을 밝히고 있다.
권3은〈교강원감사서(敎江原監司書)〉등 교서(敎書) 2편과〈청우재수성소(請遇災修省疏)〉등 소(疏) 11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옥당청종권제차(玉堂請從權制箚)〉등 차(箚) 4편,〈이사간부소사직계(以司諫赴召辭職啓)〉등 계(啓) 3편,〈상여헌선생문목(上旅軒先生問目)〉등 편지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는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주화오국(主和誤國)의 누명을 썼는데 이는 실상과 다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호인의 입장에서 쓴 〈서애유선생변무록(西厓柳先生辨誣錄)〉등 잡저 4편,〈학사삼곡서(鶴沙三曲序)〉등 서(序) 4편,〈불야재기(不夜齋記)〉등 기(記) 10편, 관혼상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사례문답발(四禮問答跋)〉등 발(跋) 28편이 실려 있다.
권6에는 벼루를 소재로 자신의 삶과 의지를 담은〈연명(硯銘)〉등 명(銘) 4편,〈신미정조진하전(辛未正朝陳賀箋)〉등 전(箋) 2편, 〈영훈정상량문(迎薰亭上樑文)〉등 상량문 6편,〈의산절효사봉안문(義山節孝祠奉安文)〉등 제문(祭文) 40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수암(修巖) 유진(柳袗), 인재(訒齋) 최현(崔晛), 계암(溪巖) 김령(金坽) 등 영남지역 홍유석학(弘孺碩學)들에 대한 칭송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여헌 장현광에 대한 제문이 2편이나 실려져 있는 것이 독특한데, 이는 장현광으로부터 예학 등 학문적 형성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권7에는〈고려문하시중문성공회헌안선생여표(高麗門下侍中文成公晦軒安先生閭表)〉등 여표(閭表) 3편,〈학사모옹자명(鶴沙耄翁自銘)〉등 묘갈명 28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8에는〈한강선생묘지명(寒岡先生墓誌銘)〉등 묘지명 17편이 실려 있다.
권9에는 화산삼걸로 불리는 귀촌(龜村) 유경심(柳景深, 1516~1571)의〈귀촌선생대사헌유공경심신도비명(龜村先生大司憲柳公景深神道碑銘)〉등 신도비명 3편, 이개립(李介立, 1544~1625)의 행장인〈선교랑산음현감역봉선생이공개립행장(宣敎郞山陰縣監櫟峯先生李公介立行狀)〉등 행장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외집(外集)에는〈맹암김공여엽묘표(盲巖金公汝燁墓表)〉등 묘갈지명(墓碣誌銘) 24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세계(世系), 연보(年譜), 행장, 묘지, 만사, 제문, 봉안문, 상향축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4. 문집 내용의 간개(簡介)
문집 권1~2에는 318제 400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연도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시의 형식적 특징으로는 5언과 7언의 절구와 율시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고시(古詩)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이산야음(伊山夜吟)〉,〈죽지사(竹枝詞)〉,〈타맥사(打麥詞)〉,〈백죽음(白粥吟)〉등 악부시 경향의 시와〈이여순피염정사영(李汝純避炎亭四詠)〉,〈남애정사잡영(南厓精舍雜詠)〉,〈빈가사시사(貧家四時詞)〉,〈화전가사시사(和田家四時詞)〉,〈김차야야헌팔영(金次野野軒八詠)〉등 연작시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면에 있어서〈쌍령(雙嶺)〉,〈대가입남한 분문도충원 과세(大駕入南漢奔問到忠原過歲)〉등은 전란에서 겪은 뼈아픈 상처를 노래하고 있으며,〈전가즉사(田家卽事)〉,〈목면화(木緜花)〉,〈관가정(觀稼亭)〉,〈타맥사(打麥詞)〉등은 전원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진솔하게 시어 속에 담아내고 있다.
또〈기묘추대수 촌거표몰(己卯秋大水村居漂沒)〉,〈고열행(苦熱行)〉등은 기근, 가뭄, 수해 등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그들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하는 내면의식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곧 그의 애민의식의 발로였음은 물론이다.
대낮에 성난 물결이 대지를 뒤흔들어 / 濤雷當晝殷坤維
수만 나무가 지탱하지 못하고 뽑혔네 / 萬樹離披摠不支
양쪽 언덕에는 푸른 산만 겨우 보이고 / 惟有靑山成兩岸
수많은 산비탈이 흙탕물에 사라졌네 / 漸看黃濁沒千陂
벼들은 모래에 뒤덮여 쭉정이만 남았고 / 稻田沙擁餘殘穗
부엌이 물에 잠겨 저녁밥도 지을 수 없네 / 鍋竈波沈失暮炊
백발이 될 때까지 한평생 굶주렸거늘 / 顑頷百年成白首
흉년에 좀 굶었다고 어찌 감히 원망하랴 / 歲凶何敢怨長飢
위에 인용한 시는 김응조가 53세 되던 1639년 가을에 지은 것이다. 추수를 앞둔 농부들이 대홍수로 인해 겪은 참담한 아픔을 매우 핍진하게 그려내었다. 모든 시구와 시어에 있어서 수식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측면이 학사 시가 지니고 있는 특징점이라 할 수 있다.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현실을 목도한 시인은 스스로 몇 끼 굶게 되는 처지에 원망하지 않고 당연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산수를 즐기며 노니는 풍류를 노래한 시들도 엿보이는데 〈양양제익회화성심대(襄陽諸益會話醒心臺)〉,〈별촌서시제익(別村書示諸益)〉,〈수락대(水落臺)〉 등이 이것이다.
권3에 실린〈청우재수성소(請遇災修省疏)〉는 1647년 홍문관 부교리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가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궁가(宮家)와 세가(勢家)의 어장(漁場)을 백성에게 돌려주고, 아문(衙門)과 영문(營門)의 모리(牟利)를 없애며, 각 고을 수령들의 착취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설득력 있는 이 소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윤허를 받았다.〈정미사직소(丁未辭職疏)〉는 1667년에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사직하면서 올린 것으로 인조 때 임시로 시행한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수정 혹은 폐지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삼분모는 1637년(인조15)에 청(淸)나라 사신의 접대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모곡의 10분의 3을 징수하던 모곡(耗穀)을 말한다. 모곡은 관아에서 환곡(還穀)을 수봉(收捧)할 때 곡물을 쌓아 둘 동안에 자연적으로 감소될 분량을 예상하여 매 섬에 몇 되씩 더 받던 곡식을 말한다.
이 제도는 1554년(명종 9)부터 지방의 모곡 가운데 10분의 1을 호조에 보고하게 하여 회계 장부에 올림으로써 점차 감축되어 가던 원곡(元穀)의 수량을 보충하였는데, 이를 일분모 회록(一分耗會錄)이라고 하였다. 1637년부터는 모곡의 10분의 3을 상평청에 보고하게 하여 회계 장부인 회안(會案)에 등록하였는데, 이를 삼분모 회록(三分耗會錄)이라고 일컬었다. 회록(會錄)은 세곡(稅穀) 또는 기타 곡물을 장부에 모아 기록하는 일이다.
권4에 실린〈여금화숙(與琴和叔)〉은 금성휘(琴聖徽, 1622~1682)에게 보낸 편지로, ‘주화오국’에 대한 개인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내용인즉, 왜와의 주화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심유경(沈惟敬)이고, 월천 조목이 산림에 있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애 유성룡이 왜와의 화친을 주장했다고 믿게 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조성당 김택룡이〈월천언행초기〉에서 ‘주화오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한 통의 편지는 권5에서 살펴보게 될〈서애유선생변무록〉에 대한 연장선에서 이해하면 좋을성싶다.
권5의〈서애유선생변무록〉은 서애 유성룡이 ‘주화오국’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배경과 이로 인하여 빚어진 각종 오해에 대해서 겸암 유운룡의 편지 2통을 바탕으로 서애를 변호한 글이다. 유운룡은 서애의 친형으로서 월천과 서애와의 반목을 화해의 분위기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2통의 편지에서 한 통은 1597년에 서애에게 보낸 편지글로 《겸암집》에도 실려 있다. 나머지 한 통은 1598년에 월천에게 보내려다가 그만둔 편지이다. 김응조는 겸암의 편지 2통과 서애가 명나라에 장수 이여송에게 보낸 편지와 국왕 선조에게 올린 차자(箚子)를 바탕으로 하여 “선생(유성룡)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을 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참언(讒言)과 사설(邪說)로 무고함이 심하여 변론할 필요조차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서애를 변호하고 있다.
〈서우천자산수논후(書愚川子山水論後)〉는 17세기 안동지역에서 문장과 학문으로 명성이 알려진 우천(愚川) 정칙(鄭侙, 1601~1663)의 산수론에 대해서 반박한 글로, 김응조의 산수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이다. 우선 우천 정칙의 산수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대저 경물의 부족하고 온전함은 다만 그 외형일 뿐입니다. 만약 경물 속에서 그 뜻을 부치고 그 흥취를 얻는다면, 장소에 대한 피차(彼此)의 구분이 없이 모두 흥이 나서 회포를 풀 것입니다. 산수의 즐거움도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유주(柳州)의 「산수기(山水記)」는 다만 그 노닐만한 곳을 나열하여 서술하였지, 어찌 일찍이 어느 곳이 어느 곳보다 낫고 어느 경치가 어느 경치보다 못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지금 만약 평론을 드러내어 장단을 비교하고 고하를 품평한다면 어찌 산수의 병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정칙(鄭侙)은 산수의 우열은 외관상에 드러나는 것이지, 산수 자체가 지닌 면모에 대해서는 우열을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면서 정칙은 유종원의 「산수기」를 예를 들어 유종원의 산수관에 입장을 같이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응조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구사하기에 이른다.
대개 만물이 동일하지 않음은 물의 본성이다. 만약 높지 않는 것을 억지로 높이려고 한다면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값이 같다는 말과 가깝게 되지 않겠는가. 보내온 변론에 산수를 사람에 비유하였는데, 인물에 견주어 그 장단을 비교하였다면 진실로 이치를 궁구한 일인데도 어찌 성인과 우자(愚者)를 뒤섞고 선악을 나란히 하여 분별을 하지 않았는가?
공자(孔子) 문하의 삼천 제자 중에 사과(四科)에 든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덕행(德行)ㆍ문학(問學)ㆍ정사(政事)ㆍ언어(言語)의 항목은 어찌 분별과 등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김응조는 사람이 성인(聖人)과 우자(愚者)로 나뉘어지고, 공자 문하의 삼천 제자들 중에서 그 특장에 따라서 덕행ㆍ문학ㆍ정사ㆍ언어로 구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산수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열이 있다는 입장이다.
또 준마와 둔마의 구분이 있고, 문장에도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있듯이 산수에 있어서도 등급을 나눌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퇴계가 예안의 승경에 대해서 말한 ‘다래〔월천〕가 제일이고 의인(宜仁)이 그다음이다.’는 입장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사례문답발(四禮問答跋)〉은 김응조가 그의 나이 59세 되던 1645년 3월에 《사례문답(四禮問答)》을 편찬하고 이 책에 대한 발문을 쓴 것이다. 김응조는 사례(四禮) 즉,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해서 46개의 절목으로 나눈 다음 네 가지 강(綱)에 대해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문답에 인용한 인물들은 주희ㆍ이황을 위시하여 유성룡ㆍ정구ㆍ장현광 등으로, 그들이 제자에게 보낸 서간문으로만 구성하였다.
〈대동운옥사본후지(大東韻玉寫本後識)〉는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에 대해서 기록한 글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대동운부군옥》은 상ㆍ중ㆍ하 삼본(三本)이 있었는데, 상본(上本)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홍문관대제학으로 있을 때 서울에 가져가서 임금께 아뢰고 간행하려고 하였다가 왜란 중에 잃어버렸고, 중본(中本)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빌려 갔다가 잃어버렸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본(下本)인데, 권문해의 맏아들인 권별(權鼈)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이 되었을 적에 경내에서 글씨 잘 쓰는 사우(士友)들을 모아 한 본을 등출(謄出)하여 서원에 보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권6에 수록된〈영훈정상량문(迎薰亭上樑文)〉은 영주 관아에 딸린 영훈정을 중건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영훈정은 조선 세종 연간에 당시 영주 군수였던 정종소(鄭從韶)가 고을을 찾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고을 남쪽 돌다리 북쪽에 세웠다.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로 불렀으나 1550년(명종3)에 풍기 군수 이황이 ‘영훈정’으로 개명하고 직접 편액을 썼다고 한다. 그 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644년(인조 22)에 군수 신속(申洬, 1600~1661)이 중건하였고, 1827년에 군수 윤광렬(尹光烈)이 중수하였다. 현재 영주시의회 본관 건물 왼편에 위치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계서원 계현사 봉안문(淸溪書院啓賢祠奉安文)〉은 청계서원에 이황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와 이황의 넷째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 그리고 이황을 봉안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김응조는 제문의 순서에 있어서 먼저 퇴계가 도산에서 학문을 강학하여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음을 밝히었다. 그런 다음 송재의 덕행에 대해서 칭송하였으며, 그리고 온계의 행실과 명망 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권7의〈학사모옹자명(鶴沙耄翁自銘)〉은 김응조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은 것으로, “나는 성품이 글 보기를 좋아하였으나, 끝없는 의미가 있어도 눈이 어두워서 의미를 끝까지 찾아 고인의 단서를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이 첫 번째 한이다.
평생 산수벽(山水癖)이 있어 만년에 학사(鶴沙)의 선장(仙莊)에 터를 잡아 매양 그 속에서 문득 유유자적 도를 즐기고 배고픔도 잊고서 거의 속세 사람들과 함께 말하기 힘들 듯이 하여 항상 그 속에 있으면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한이다.
손님을 좋아함이 기갈(飢渴)처럼 했을 뿐만이 아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맛난 음식으로 현자를 대접하며 오래 머물도록 하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김응조의 고조(高祖) 김양진(金楊震, 1467~1535)과 김응조(金應祖, 1587~1667)는 태어난 간지가 정해년(丁亥年)으로 같다. 말하자면 김응조가 김양진보다 두 갑자 뒤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김양진이 운명하면서 만약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는 후손이 있으면 이름을 ‘응조(應祖)’라 하고 자를 효징(孝徵)으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양진은 50년 뒤에 태어날 고손자의 이름과 자(字)를 미리 지어둘 정도로 선견지명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권8의〈통훈대부 행 사섬시직장 소천 박공 묘갈명(通訓大夫行司贍寺直長蘇川朴公墓碣銘)〉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도였던 박수근(朴守謹, 1576~1622)에 대한 묘갈명이다. 그런데 대상 주인공의 이름이 박수근이 아닌 그의 형 박수겸(朴守謙)으로 잘못되어 있다. 이외에《학사집》에는 오자(誤字)가 간혹 눈에 보인다.
예시로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1617)의 아들인 남악(南嶽) 오여벌(吳汝橃, 1579~1635)의 묘갈명인 〈통훈대부 행 홍문관 교리 남악 오공 묘갈명(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南嶽吳公墓碣銘)〉에서 오여벌이 만력(萬曆) 기묘년에 태어났는데 60년 빠른 정덕(正德)으로 잘못되어 있고, 태어난 곳이 가례리(嘉禮里)인데 가례리(佳禮里)로 잘못되어 있다.
또 김담(金淡)의 5세손인 김우익(金友益, 1571~1640)에 대한 묘갈명인 〈통훈대부 행 한성부 서윤 김공 묘갈명(通訓大夫行漢城府庶尹金公墓碣銘)〉에서 1616년(광해군8)에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ㆍ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였다가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한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를 ‘최기(崔圻)’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류들은 문집 간행 과정에서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 소치로 보여진다.
5. 결어
이상에서 간략하게 김응조의 생애와 학문 및 《학사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김응조는 오미동 풍산 김씨의 상징적인 팔련오계(八蓮五桂) 형제 중에 여섯째로 태어나서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고 덕행과 학문 또한 매우 훌륭하였으며, 조정에서의 탁월한 정치력과 지방 목민관으로서 청렴성은 그가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존경의 대상이 된 까닭이다.
한편 17세기 영남지역의 예학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사례문답》은 그가 예학에 대한 남다른 조예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승인 여헌 장현광과 예에 대해서 문답한 문목,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예에 대한 관점이 남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학사집》에 수록된 내용들은 17세기의 시대상 및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김응조의 예학에 대한 견해, 산수관에 대한 논지 등 그의 학문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 심층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