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제사 원공 묘갈명(統制使元公墓碣銘)
[생졸년] 1624년(인조 2)~1693년(숙종 19) / 향년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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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왕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큰 뜻을 품고 무신들을 길렀는데, 원상(元相) 공이 내승(內乘)이 되어 은혜와 지우를 가장 많이 입었으니, 자주 불러들여 자기 먹을 음식을 밀어주었다. 성상께서 오랑캐 말을 아꼈는데 미처 조련하기도 전에 직접 타고 달리려 하였다.
공이 귀한 신분의 사람은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계를 극진히 아뢰었다. 그 뒤 누차 말을 조련했는지 하문하였으나 이전처럼 대답했다. 하루는 성상께서 후원에 나와 공에게 타라고 명하셨다. 그러자 말이 갑자기 솔숲 사이로 뛰어드는 바람에 위험했으나 겨우 화를 면했다.
성상이 탄식하며,
“그대는 나를 아끼는구나.”
하고, 술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공은 효종(孝宗,조선 제17대 국왕)의 기일을 만날 때마다 소식(素食, 생선이나 고기반찬 따위가 없는 간소한 밥)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공(公)은 자가 거경(巨卿)이며 원주(原州) 사람이다. 시조 홍필(弘弼)은 고려 때 지문하사를 지냈다.
우리나라 우정언 황(晃)은 판서를 지낸 효연(孝然,1404~1466)을 낳았고, 4대가 지나 사의 순보(純輔)라는 분이 있었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 사열(士說)은 전부를 지냈고, 부친 충(翀)은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원주 이씨(原州李氏)이다. 복정공은 공에게 아우 흡(翕)의 후사를 이으라고 명했는데, 흡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계(天啓) 갑자년(甲子年,1624, 인조 2) 12월 5일 태어났다.
6세에 복정공이 세상을 떠나자 어른처럼 곡하였다. 병자년(丙子年,1636) 대부인을 모시고 강릉(江陵) 대미산(大美山)으로 들어가 곁에서 모시며 난리를 피하였다. 무자년(戊子年,16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부 도사와 경력,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용천 부사(龍川府使)가 되어 세금을 줄이고 폐단을 혁파했다. 조정으로 돌아와 부정이 되었다. 태복시에 있을 때는 특별히 초모(貂帽, 담비 모피로 만든 모자)를 하사받고, 모친의 병으로 휴가를 청하자 편전(便殿) 밖에서 약물을 하사하고 또 빨리 오라고 재촉하였으니 남다른 은혜였다.
병신년(丙申年,1656), 죽산 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고 얼마 후 통정대부에 올라 진주 영장(晉州營將)으로 옮겼다가 조정으로 들어와 내금위장이 되었다. 또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잘 진휼하고, 또 군무(軍務)에 유념하여 표리(表裏)와 말을 하사받았다.
유임하여 1년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오위장, 겸사복장에 임명되고, 부산 첨사(釜山僉使)가 되자 훈련대장 이완(李浣,1602~1674) 공이 붙잡아 두고 자신을 돕게 하였다. 또 영흥(永興)과 영변(寧邊)의 부사가 되고, 승진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소강(所江)을 방영(防營)으로 새로 올리고 공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공이 그곳에 가서 마음을 다해 조처하니 우뚝이 큰 진을 이루었다. 또 백성을 모집하여 빈 섬에서 밭을 개간하게 하여 군수에 보탰다. 강계(江界)로 옮겼다가 다시 유임되고, 임기가 차자 다시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성상이 면유하여 이르기를,
“소강에 있을 때처럼 직분을 다하라.”
하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경신년(庚申年,1680), 선전관을 거쳐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발탁되었다가 작은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얼마 후 풀려났는데, 대신 김수항(金壽恒) 공의 말에 따라 다시 가선대부의 품계를 주고 훈국 중군, 부총관에 차임되었다.
통제사에 임명되어 성곽과 전함을 대거 보수하고 저축을 늘려 전쟁에 대비했다. 연달아 남병사, 북병사가 되었는데, 북쪽 지방의 풍속이 사나웠으나 공이 은혜와 위엄을 나란히 시행하니 관청 건물과 무기가 오래지 않아 새로워졌다. 남병영과 북병영에서는 지금까지도 청렴결백한 장수를 말할 때면 반드시 너도나도 원공이라고 한다.
무진년(戊辰年,1688), 동중추부사가 되어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이듬해 시사가 크게 변하자 공은 즐겁지 않은 마음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다가 얼마 후 병을 핑계로 원주 가정리(稼亭里)로 돌아와 초가를 짓고 살았다.
시골 사람들이 술을 들고 찾아오면 상대하며 기뻐하고 농담하며 하루종일 싫증을 내지 않았다. 때로 흥이 나면 나가서 산수 사이를 소요하였다. 시사를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병이 들자 자제들이 서울로 돌아가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들어주지 않고,
“시골에서 늙어 죽으면 족하다.”
하였다.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나자 의례대로 부조하고 조문하였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장사랑 훤(睻)의 딸이다. 공보다 6년 먼저 세상을 떠나 원주 석우(石隅) 간좌(艮坐)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덕휘(德徽)는 통제사를 지냈고 차남은 덕유(德裕)이다. 사위는 넷이니 도사 권우(權祐), 사인 김일우(金一宇), 참봉 이상엄(李相儼), 부사 유중석(柳重碩)이다.
측실 소생 아들은 덕린(德隣), 덕령(德齡), 사위는 박징(朴澄), 남정석(南鼎錫)이다. 덕령은 첨사를 지냈고 박징은 만호를 지냈다. 덕휘는 종제의 아들 명규(命揆)를 후사로 삼았다. 공은 강직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어버이를 잘 봉양하였다. 후사로 간 집안의 이 부인이 항상 말하기를,
“어찌 직접 아들을 낳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두 모친의 상을 치를 적에 예법을 넘을 정도로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제사 지낼 수가 없어 힘써 농사지어 스스로 마련하고 조복을 팔아 보탰다.《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떠 제사 지내는 법식을 만들어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날씨가 춥다고 해서 그만둔 적이 없었다.
형을 공경히 섬기고 친족을 은혜로 대우하였으며 자제들은 감히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젊은 시절 어떤 이름난 벼슬아치의 첩에게 딸이 있었는데 공에게 첩으로 삼으라고 강요하였으나 공은 끝내 수락하지 않았다. 공무가 아니면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성품이 사치를 싫어하여 평생 양가죽 옷 한 벌을 입었으며 집을 수리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손을 위해 계책을 세우라고 권하면,
“나는 청렴결백을 물려주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관직을 맡으면 엄격하여 권세가라도 용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떠나면 그리워하였다.
공이 영변에 있을 때 관찰사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이 청렴하다고 표창하였는데, 문정공은 나의 외조이다. 나는 미처 공을 알지 못했으나 지금 공의 가장(家狀)을 읽어보니 집안에서의 독실한 행실은 독서하고 도의를 말하는 자라도 더할 수 없다.
만년에 한 번 물러난 일은 더욱 훌륭하니, 훗날 논하는 자가 누군들 성조(聖祖 효종)께서 신하를 잘 알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는 명(銘)을 지어야 마땅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장수 집안에서 예의를 지킨 사람 예로부터 드문데 / 將門秉禮希聞昔
아홉 고을 다섯 변방에서 더욱 청렴이 드러났네 / 九邑五閫愈著白
노년에 시골에 살면서 비장한 눈물 흘렸고 / 白頭畎畝壯淚滴
파릉의 오랑캐 말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었네 / 灞獵胡驢我心獲
여강은 넘실거리고 능침의 잣나무 무성한데 / 驪水湯湯鬱陵柏
아, 영원히 이 무덤을 감싸주리라 / 於億年拱此幽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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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통제사 원공 묘갈 :
이 글은 원상(元相)의 묘갈명이다. 원상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거경(巨卿)이다. 1624년(인조2) 12월 5일 태어나 1693년(숙
종19) 세상을 떠났다.
[주02] 파릉(灞陵) :
한 문제(漢文帝)의 능인데, 여기서는 효종을 말한다.
[주03] 능침 :
효종의 영릉(寧陵)을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