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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억(李慶億, 1620년(광해군 12) ~ 1673년(현종 14)
[향년] 53세
[세계] 29世
■ 좌의정 화곡 이경억 묘갈명
(左議政 華谷 李慶億 墓碣銘)
1702년(숙종 28) 겨울 - 서계 박세당 찬
공은 휘(諱)는 경억(慶億), 자는 석이(錫爾), 성은 이씨(李氏), 호(號)는 화곡(華谷)이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신라 초에 알평(謁平)이란 분이 육부(六部)의 대인(大人)이 되었다. 그 뒤에 금서(金書)란 분이 고려에 벼슬하여 중원 태수(中原太守)가 되었다.
고려 말에 진(瑱)이 임해군(臨海君)이 되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을 낳아 집안이 더욱 성대해졌다. 본조에서는 평안도 관찰사 윤인(尹仁)이 창평 현령(昌平縣令) 공린(公麟)을 낳았으니, 이분이 박팽년(朴彭年)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여덟을 두었다.
원(黿)이 셋째이니,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을 사사(師事)하여 사화에 화를 당하여 예조 낭관으로 벼슬을 마쳤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발(渤)과 증조 경윤(憬胤)은 모두 가난(家難)으로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휘 대건(大建)은 진사이니, 젊어서 태학에서 공부하여 ‘관중(館中)의 안자(顔子)’로 추앙을 받았으나 일찍 죽었다.
부친 형조 판서 증 영의정 휘 시발(時發)은 재주와 명망으로 당대의 추중을 받았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승지 응구(應榘)의 따님이니, 광해 경신년(1620, 광해군 12) 9월 22일 병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을 낳을 때에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이름을 지어 주었으므로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7세에 부친을 잃어 신씨 부인이 밤낮으로 보살피고 가르쳤는데, 공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여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인조 22년 갑신년(1644,인조 22)에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여 전적(典籍)에 제수되었고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초상 때 의문(儀文)이 빠진 것이 많았는데 예문(禮文)에 근거해 존절하여 경중에 맞게 하였다. 다른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고 정랑으로 천전되었다.
부안 군수(扶安郡守)로 나가 청렴결백하고 간략하고 분명하게 하니, 백성들이 그 다스림을 즐거워하였다. 3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현의 백성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웠다. 기축년(1649, 인조 27) 겨울에 예조 정랑에 서용되었다.
경인년(1650,효종 원년)에 사서(司書)로 옮겼고《인조실록》의 찬수(纂修)에 참여하였으며 정언으로 이배되었다. 효종 원년에 상소하여 국사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다스림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하니, 혹 오래된 폐단에 안주하여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는 것과, 혹 중론(衆論)에 미혹되어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것과, 혹 처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분발하다가도 끝을 맺지 못하는 것은 모두 뜻이 확립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습니다.
전하께서는 다스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일이 혹 순서가 없어 흔단이 두루 생기자 드디어 상규를 지켜야만 무사할 수 있다고 하여 옛것을 답습하면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계시니, 이는 뜻이 성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상의 뜻을 확고히 정해 흔들림 없이 단단히 지키고 선왕(先王)의 다스림을 반드시 본받을 수 있다고 여겨 원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이를 분명히 깨닫도록 한다면 조정에서 책려함에 각자 그 마음을 다하여 만사가 다스려지는 것을 장차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언로가 트이느냐 막히느냐에 국가의 흥망이 매여 있습니다. 즉위하신 초기에는 곧은 말과 바른 논의가 날마다 성상께 진달되었는데 요즈음에는 침묵하는 것이 풍조로 굳어져 재차 구언(求言)하였는데도 중외(中外)가 잠잠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신묘년(1651,효종 2)에 직강에 제수되었고 다시 정언이 되었다. 7월에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수익(金壽翼)이 정의 현감(㫌義縣監) 안집(安緝)과 반목하였다. 상이 제주는 바다 건너 외떨어진 곳이므로 장차 어사(御史) 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명을 받고 조사하게 되었다. 안집(安緝)은 무인(武人)이었지만 청렴하고 근실하였다.
김수익이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는 첩을 방치해 두는 것에 분노하여 심지어 칼을 잡고 관아의 뜰에서 힐난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그 실상을 잘 기록하여 돌아와 보고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김수익의 벼슬이 높아 사자(使者)가 혹 그에게 휘둘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공이 진상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되어서는 가상히 여겨 찬탄해 마지않았고 김수익 등에게 죄를 주는 것을 모두 공의 말대로 하였다. 아뢰어 진달한 일 가운데 혁파되거나 시행된 것이 많았으니, 공이 이로 말미암아 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공이 탐라(耽羅)에 있을 때에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고 기로(耆老)들을 모아 공당(公堂)에서 잔치를 베풀고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펴니, 섬의 백성들이 오래도록 왕의 사자를 보지 못하다가 공의 풍도가 여유 있고 단아하여 간략히 하면서도 사체에 맞는 것을 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상[임금]이 일찍이 능침(陵寢)에 배알할 때에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횃불이 꺼지는 바람에 다리가 무너져 말이 넘어졌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경기 관찰사 유철(兪㯙)에 대한 죄를 감죄(勘罪)한 것이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으로 그치니, 상이 노하여 특별히 조석윤을 파직하였다.
당시에 또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데 정밀히 뽑은 군사를 쓰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 박서(朴遾)가 직접 명을 받고서도 행하지 않았고 뒤에 마침내 그 죄를 이서(吏胥)에게 돌려 이서가 형신을 받아 장차 죽게 되었다. 공이 정언이 되어 논핵하기를, “조석윤이 법을 가볍게 적용한 잘못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박서는 직접 하교를 받들고도 이서에게 전가하여 이서가 억울하게 형신을 당하였으니, 조석윤은 파직하지 말고 박서에게 죄를 물으소서.” 하니, 상이 더욱 심히 노하여 먼저 공을 파직하였다.
승지가 모두 입대하여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더욱 노하여 공을 경성(鏡城)에 안치하되 신속히 배소(配所)에 도착시키고 역말로 보고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나 공은 태연히 길에 올라 서울을 떠난 지 18일 만에 배소에 도착하였다. 간쟁하는 대신과 대각(臺閣)이 많았으므로 채 1개월이 못 되어 홍천(洪川)으로 양이(量移)되었다.
이듬해 봄에 풀려나 돌아왔다. 가을에 병조 정랑에 서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몇 달 사이에 남쪽으로는 한라산(漢拏山)에 오르고 북쪽으로는 장백산(長白山)에 임하였으니, 인생을 살면서 구경하는 장관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계사년(1653, 효종 4) 봄에 다시 병조 정랑에 제배되었다. 겨울에 어사가 되어 영남 일로의 군정(軍政)을 안찰(按察)하였다. 당시 상이 뜻을 가다듬어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여 군읍이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가혹하게 하지 않고 너그럽게 처리하였고 오직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법대로 하지 않는 자만을 바로잡았다.
갑오년(1654,효종 5)에 복명(復命)한 내용이 상의 뜻에 맞으니 다시 병조 정랑이 되고 사서와 정언으로 옮겼다. 어느 날 소견(召見)이 있었는데 상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이르기를, “탐라의 일을 공정하게 조사한 것을 내가 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지난번에는 너무 갑자기 화를 냈는데 내가 잘못을 후회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힘써 나의 부족함을 메워 달라.” 하고 아비가 누구인지 물으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선조조(宣祖朝)의 명신 이시발(李時發)입니다.” 하였다.
공의 형 춘전공(春田公)이 일을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해가 바뀌도록 파산된 상태로 있었는데 특별히 서용하도록 명하였고, 이어 지성스러운 말로 권면하고 타이르니, 이날 입시했던 신하들이 모두 의용(儀容)을 가다듬었다.
여름에 응지(應旨)하여 일을 논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질 것이며, 인재를 구하고 군무(軍務)를 다스릴 것이며, 기강을 세우고 붕당을 깨뜨릴 것을 청하였고 또 사치함을 경계하였는데 내용이 모두 개절하였다. 상이 이 때문에 즉시 공주(公主)의 집 50칸을 철거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자, 대간이 파격이라고 하여 쟁변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사직한 뒤에 마침내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공은 평소 몸이 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어느 날 상이 묻기를, “춘전공의 아우의 병이 근자에는 어떠한가?” 하였다. 이어 어약(御藥)을 하사하고 이르기를, “어서 병이 나아 입시하라.” 하였다.
을미년(1655) 가을에 또 영남 추쇄어사(嶺南推刷御史)가 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체차되어 돌아왔고 수찬에 배수되었다.
병신년(1656, 효종 7)에 기전(畿甸)을 염찰(廉察)하였고 직강, 병조 정랑, 교리, 헌납, 부교리가 되었다.
겨울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발탁되었으나 병이 다시 도져 떠나기 전에 개차되었다. 어의가 와서 문병하였고 내국(內局)의 약을 내어 주었으니, 은수(恩數)의 융숭함이 이와 같았다. 옥당으로 돌아와 필선을 겸하였다. 정유년(1657,효종 8)에 부응교로 천전되었고 사인(舍人)으로 옮겨졌으며 충청도 관찰사에 초수(超授)되었다.
아뢰기를, “구례(舊例)에 공사(公私)의 노비는 아비가 양인이고 어미가 천인이면 어미의 신분을 따르고, 어미가 양인이고 아비가 천인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천례(賤隷)가 날로 불어나고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드니, 지금부터는 사내는 아비의 신분을 따르고 계집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 고르게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공의 의견대로 하고 이를 법으로 정하였다.
병이 심해져 사직을 청하니 재상이 힐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경억은 반드시 임금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지우(知遇)의 성대함은 군신(群臣)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무술년(1658,효종 9) 겨울에 동부승지가 되었고 체차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
기해년(1659,효종 10)에 도로 승지가 되었다. 5월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양암(諒闇) 중에 계셨는데 근밀한 자리에서 모시면서 보익(補益)한 것이 크고 많았다. 대사성, 대사간, 예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 2)에 공조로 이배(移拜)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였다.
계묘년(1663,현종 4)에 상기를 마쳤다. 병조 참의에 배수되었고 승지, 대사간, 부제학으로 이배되었다.
갑진년(1664,현종 5)에 또 대사간, 부제학이 되었다. 상소하여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니, 가납하였다. 조금 있다가 이조 참의가 되었다.
을사년(1665,현종 6)에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도승지가 되었는데 자급은 오히려 통정대부였으니, 드문 일이었다. 체차되어 호조 참의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으며 대사간으로 이배되었으니, 전후에 걸쳐 육조의 참의를 맡고 미원(薇垣), 옥당, 성균관의 장을 맡은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겨울에 한성부 우윤에 발탁되어 아뢰기를, “판적(版籍)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호적(戶籍)에 관한 법이 폐기되어 인구의 실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옛 제도를 새로 밝혀 호적에서 누락된 자에 대한 처벌의 법을 엄격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말고 모두 변방으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따랐고 공에게 대략 규례를 정하도록 명하여 비로소 이듬해 병오년(1666, 현종 7)에 법으로 만들었다.
여름에 대사간으로 이배되었고 비국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하였다. 이전의 공로로 자급이 올랐으며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대사헌, 형조 참판으로 이배되었으며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관내의 6개 우역(郵驛)이 경성 근처에 집중되어 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그 우관(郵官)이 거처할 곳이 없어 방곡(坊曲)에 기식(寄食)하고 있으므로 공사(公私)가 모두 병통으로 여기자 남은 재물을 출연하여 빈 터를 사서 거처하게 하고 곡식 100여 석을 내어 우관으로 하여금 교대로 염산(斂散)을 맡게 하여 잉여를 취해서 곤핍한 우관을 구제하게 하였고 또 고마법(雇馬法)을 세우니, 제역(諸驛)이 편케 여겼다.
정미년(1667,현종 8)에 내직으로 들어와 도헌(都憲)이 되었으며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특별히 형조 판서에 제수되어 의심스럽고 지체된 송옥(訟獄)을 명확히 판결하여 지체되는 일이 없었는데 법의 적용이 공정하였고 적체된 안건이 마침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
이에 앞서 의주(義州) 사람이 국경을 넘어간 일이 있어 북사(北使)가 와서 부윤을 죽여야 한다고 힐책하였고 또 대신에게 관소(館所) 아래에서 대죄(待罪)할 것을 요구하니, 우상 허적(許積)이 은밀히 상에게 스스로 감당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관소에 나아가 북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결국 벌금을 무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부윤이 죽지 않게 되었는데 듣는 자들이 놀라고 분해하였다.
이에 양사가 합사(合辭)하여 삼공(三公)을 아울러 논핵하니, 상이 논핵한 간관을 모두 귀양 보냈다. 공이 사헌부에 들어와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친히 모욕을 감수하게 하였으니, 본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재상은 관소에 있어 입대할 겨를이 없었으니, 일이 우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삼공을 아울러 논핵하니, 이는 불가합니다.”라고 하면서 허적만을 논핵하여 죄를 바루기를 청하고 여러 간관들을 유배 보내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정언 안숙(安塾)이 도리어 공이 중론(重論)을 경솔히 바꾸었다고 논핵하자 상은 안숙을 내치고 특별히 공을 도승지에 배수하였다. 그러나 극력 사직을 청하여 체차되었다.
무신년(1668, 현종 9)에 헌장(憲長), 종백(宗伯), 좌우 참찬을 역임하였고 호조 판서를 맡아 부서(簿書)를 정밀히 살피고 절약에 더욱 힘쓰니, 쓸데없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가을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고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겨울에 연경(燕京)에 사신을 갔다가 돌아왔다. 전대(錢袋)를 여러 원역(員役)들에게 나누어 주어 짐이 단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기유년(1669,현종 10) 봄에 도로 추관(秋官)의 장을 맡았고 종백으로 이배되었다. 춘전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대신 전형의 직임을 맡았다. 사간 조성보(趙聖輔)가 춘전공이 자신을 억누른 것을 원망하였으나 원한을 풀 길이 없었으므로 작은 허물을 주워 모아 공을 논핵하였다. 공이 강변으로 나가 간곡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들어와 사은하였고 또 더욱 힘껏 사직하여 마침내 전장(銓長)에서 해직되고 참찬에 배수되었다.
경술년(1670,현종 11)에 우빈객,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김징(金澄)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잔치를 성대히 열어 그 어버이를 위해 축수한 일이 있었는데 간관(諫官) 김석주(金錫冑)가 그 사치함을 논핵하였다. 김징이 대각에 있을 때에 주저함 없이 신랄하게 탄핵하여 전후로 논핵한 이가 50여 인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들 감정을 품고 벌 떼처럼 일어나서 장오(贓汚)를 크게 범했다고 하여 김징을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조사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논하는 자가 더욱 강하게 주장하여 드디어 실상을 다시 조사하여 관리를 구금하고 갖은 방법으로 철저히 캐물었다. 당시 오시수(吳始壽)가 김징의 후임으로 있었는데 평소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 엽전 한 닢과 베 한 척까지도 모아서 계산에 넣어 그 죄안을 꾸몄다.
공이 차관(次官)으로서 심리하게 되었는데 원망을 품은 여러 사람들이 유언비어로 공격하여 공을 뒤흔들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말하기를, “설령 김징의 일이 분수에 넘는 점이 있더라도 어버이에게 축수한 것으로 인해 죄를 주는 것은 이미 효도로 다스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재삼 조사하여 끝내 장오의 자취가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관물(官物)을 유용한 죄를 적용하여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는 것으로 감죄(勘罪)하였다. 수상(首相) 허적이 김징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은 터라 사사로이 장리(贓吏)를 비호한다고 공을 비방하자 공이 사직을 청하였다.
허적이 또 상차하여 법을 희롱하였다고 지목하니, 공이 이로 인해 파직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리를 받고 직첩을 빼앗겼고, 김징은 마침내 해서(海西)로 귀양 갔다. 겨울에 특별히 서용되어 공조 판서가 되었다. 신해년(1671, 현종 12) 봄에 종백으로 이배되고 빈객을 겸하였다. 누차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세자를 책봉하였으므로 공이 마지못해 나아갔으나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다시 강가에 있는 집으로 나와 전처럼 간곡히 사직을 청하였다. 마침 병이 들자 어의가 진찰하고 문병하였고 내국(內局)의 약을 하사하였다. 체차되어 판윤이 되었고 지경연사와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극력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가을에 마침내 나와서 일을 보았다.
그해(1672,현종 13)에 도헌과 참찬을 역임하였다. 여름에 다시 전장(銓長)을 맡았고 승진하여 우의정에 배수되었다. 의정부에 있은 지 채 1개월이 못 되어 병이 나 면직을 청하였으나 전후의 사직이 모두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듬해(1673,현종 14) 여름에 좌의정에 올랐다.
명혜공주(明惠公主)가 맹만택(孟萬澤)에게 하가(下嫁)하게 되었는데 이미 택일한 뒤에 갑자기 공주가 졸하였다. 상이 가엾게 여겨 맹만택에게 내리는 작위를 정지하지 않고 부부가 되는 것을 성사시키고자 하니, 공이 아뢰기를, “죽은 자를 성혼시키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하여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공의 병이 갈수록 고질이 되었는데 20여 차례 정고(呈告)한 뒤에야 마침내 관직을 떠날 수 있었다. 7월 그믐에 마침내 졸하였다. 병이 난 때로부터 의원을 보내 문병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고 내국의 약제와 진선(珍膳)을 계속 하사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슬퍼하여 철조(輟朝)와 조제(弔祭)를 예법대로 하였으며 관에서 상사를 돌보아주었고 3년 동안 녹봉을 계속 지급하도록 하였다.
11월 11일에 임시로 진천(鎭川)의 선영(先塋)에 부장하였다가 10년 뒤인 갑자년(1684, 숙종 10) 5월 3일에 청안(淸安) 모산(茅山)의 을좌(乙坐)의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개장할 때에 호조가 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었으니, 모두 은례(恩禮)가 특별한 것이었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의용과 풍도가 온화하고 단아하였으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진중하였다. 평소 말을 간결하게 하고 함부로 희로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벼슬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대체(大體)를 보전하여 자잘한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지론(持論)이 공평하여 거짓으로 따르는 일이 없고 구차하게 동조하는 말이 없었으며, 특히 사정(邪正)을 분변하고 시비(是非)를 가리는 데에 밝았다. 평소 신념이 확고하여 굽히거나 꺾이는 바가 없어 춘전공과 더불어 선류(善類)의 영수가 되었다.
현종이 일찍이 정태화(鄭太和)에게 묻기를, “이공(李公) 형제 중에 누가 더 나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난형난제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왕께서 매양 이경억을 일컬으시면서 크게 쓸 만하다고 하셨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에 대한 상의 관심과 사랑이 날로 융숭해졌다.
공은 늘 말하기를, “누조(累朝)의 특별한 지우를 입었으나 털끝만큼도 은혜에 보답한 것이 없으니, 오직 심력을 다해 충성할 뿐이다.” 하였다. 총재가 되었을 때에는 청탁을 물리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발탁하고 적체를 해소하며, 지방관을 신중히 선택하고 재주와 덕행이 있는 이를 발굴하여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가 능력을 헤아려 등용하니, 사로(仕路)가 맑아졌다.
벗을 사귀는 도리에 돈독하여 남들의 호오에 따라 취사하지 않았다. 젊어서 서필원(徐必遠), 김시진(金始振)과 사이가 좋았는데 두 공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비방이 분분하니, 평소 사귀던 친구들이 멀리하고 버린 자가 많았다. 그러나 유독 공 형제만은 처음처럼 서로 사귀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길 때에 효성이 극진하였다. 형제가 이미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조석으로 곁에서 모셔 공사(公事)와 빈객(賓客)이 아니면 좌우를 떠난 적이 없었고 다정하게 굴면서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대부인이 병이 나 해를 넘기게 되었는데 공 형제는 밤이건 낮이건 띠를 풀지 않았고 약물과 음식을 반드시 친히 올렸다.
상(喪)을 당해서는 예법을 준수하여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춘전공과 형제애가 독실하여 집 안에 있을 때는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것을 함께하였고 행지(行止)와 출처(出處)에 있어서는 서로 더불어 지기(知己)가 되었다. 중씨(仲氏)가 먼저 졸하게 되어서는 한가하게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에 못내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녹봉과 하사품을 반드시 형의 집에 나누어 주고 여러 조카들을 자식처럼 어루만지니, 여러 조카들도 공을 아비처럼 섬겼다.
집 안이 청빈하여 뇌물을 문으로 들이지 않았는데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대개 밖에서는 충성스럽고 강직한 태도가 드러났고 집 안에서는 효우의 행실이 돈독하였다. 봉공(奉公)에 있어 조심하고 삼간 것과 율신(律身)에 있어 단정하고 깨끗하게 했던 것은 모두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만년에 형제가 번갈아 전형을 맡게 되자 항상 권세가 극성(極盛)한 것을 두려워하였고 번당(樊塘)에 집을 짓고 채마밭을 가꾸는 것으로 퇴직한 뒤의 계책을 삼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옛집으로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임종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심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자식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과 장례와 제사를 사치스럽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일찍이 어떤 이가 남 약천(南藥泉 남구만(南九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오직 정(精)하게 하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오직 담박해야만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고, 또 친한 이에게 이르기를, “무릇 사람이 작록(爵祿)에 있어 그 오는 것에 대해 무심해야 함은 물론 그 가는 것에 대해서도 무심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 두 가지 말에서 공이 마음에 둔 바를 알 수가 있다. 시문(詩文)과 소차(疏箚) 몇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감찰 원지(元之)의 따님이니, 부덕(婦德)을 훌륭히 갖추었고 자손이 매우 많았다. 모두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인소(寅熽)는 교리이고, 인병(寅炳)은 참의이고, 인엽(寅燁)은 참판이고, 딸은 좌의정 최석정(崔錫鼎), 현감 홍만적(洪萬迪)에게 시집갔다.
인소는 3남을 두었으니 항곤(恒坤), 형곤(衡坤), 숭곤(嵩坤)이요, 1녀는 윤현교(尹顯敎)에게 시집갔으며, 측실에게서 1남을 두었다. 인병은 2남을 두었으니 서곤(瑞坤), 징곤(徵坤)이요, 두 사위는 김문택(金文澤), 송필환(宋必煥)이다. 인엽은 3남을 두었으니 하곤(夏坤), 한곤(漢坤), 명곤(明坤)이고, 1녀는 어리다. 최석정의 1남은 창대(昌大)이니 수찬이고, 딸이 둘이다. 홍만적의 2남은 중구(重九), 중오(重五)요, 딸이 다섯이다.
세당이 어려서부터 공을 알았으니 다른 사람과 견줄 바가 아니고 공이 연경(燕京)에 사신 갈 때 또 서장관(書狀官)으로 주선했던 친분이 있으므로 지금 공의 묘지명을 짓는 때에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사적(事蹟)의 시종을 기술하고 그 끝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봉황과 기린 용과 거북은 / 鳳麟龍龜
상서롭고 기이한 영물이라네 / 瑞異祥奇
이들이 태어남은 그만한 까닭이 있으니 / 其生有爲
다스려진 세상을 밝히기 위함이라네 / 叶靈昭治
어찌 껍질과 비늘 가진 것을 / 豈常介鱗
털 달리고 깃 달린 것에 비기랴 / 毛羽比同
사람 또한 당연히 그러하니 / 人亦宜然
공에게서 이를 볼 수 있다네 / 我見於公
성대한 시대에 영명을 드날리고 / 蜚英盛代
밝은 시대에 빛을 발하였다네 / 振華明時
형과 아우의 재덕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으니 / 難弟難兄
나팔과 피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네 / 吹塤吹篪
제주의 일을 잘 처리하여 / 按事海邦
비로소 임금의 인정을 받았고 / 始結上知
덕의를 널리 펴매 / 宣布德意
도민이 환호하였네 / 島民歡馳
도헌과 병판 및 삼정승의 일과 / 憲兵三相
호남의 일을 논할 때에 / 湖南之事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을 무릅써 가며 / 觸威犯怒
자신의 낭패는 돌아보지 않았다네 / 不顧顚躓
강직한 몇 분이 / 曁曁數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매 / 與時相背
남들은 버렸으나 공은 함께하여 / 人棄我與
끝끝내 후회가 없었다네 / 終卒靡悔
세상이 권세와 이익을 향해 달려갔으나 / 勢利奔趨
공만 홀로 지조를 단단히 지켰으니 / 獨堅素守
휩쓸고 흘러가는 거친 물결 속에 / 洪濤震蕩
우뚝 버티고 선 지주와 같았다네 / 中流砥柱
세도가 점점 타락하여 / 世道交喪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 至于今日
식견이 높은 자는 / 達識遐觀
이를 생각하고 탄식하네 / 興思嗟咄
내가 명을 돌에 새겨 / 我銘載石
억만년을 드리우노니 / 垂之萬億
후생 그 누군들 / 誰其來者
이 명문을 보지 않으리 / 不昧斯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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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左議政李公墓碑銘 壬午冬。
公諱慶億。字錫爾。姓李氏。號華谷。其先慶州人。新羅初。有謁平者。爲六部大人。其後有金書者。仕高麗爲中原守。高麗之末。瑱爲臨海君。生文忠公齊賢。家益大。在本朝則平安觀察使尹仁。生昌平縣令公麟。取朴彭年女。有八子。黿居第三。號再思堂。師金宗直。及其禍。官終禮郞。是公五代祖。高祖渤。曾祖憬胤。俱以家難不仕。祖諱大建。進士。少游太學。推爲館中顏子。早沒。父刑曹判書贈領議政諱時發。才望重一世。母貞敬夫人高靈申氏。承旨應榘女。以光海庚申九月二十二日丙申生公。生有異夢。老人來授之以名。七歲。失怙。申夫人日夜提誨。公兄弟皆穎秀聰悟。業日進。仁祖二十二年甲申。庭試狀元。授典籍改禮曹佐郞。昭顯初喪。儀文多缺。考據裁節。輕重合宜。坐他事罷。明年。敍兵曹佐郞。轉正郞。出宰扶安。廉白簡嚴。民樂其治。三年棄歸。縣人追思立碑。己丑冬。敍禮曹正郞。庚寅。改司書。參修仁祖實錄。移拜正言。孝宗初元。上疏言事。略曰。治先立志。或安久弊。不能自振。或惑衆論。莫適所從。或始銳而不終。皆由志不立。殿下求治太急。事或無漸。禍釁旁生。遂以爲守常。可以無事。因循玩愒。此志不誠也。堅定聖志。確守不撓。以先王之治。爲必可法。使遠近曉然。則將見在廷策勵。各盡其心而萬事理矣。又曰。言路開塞。興喪係焉。卽阼之初。危言正論。日陳於前。近日含默成風。再求言。中外寂然。可不懼哉。答批優褒。辛卯。除直講。還正言。七月。濟州牧使金壽翼與旌義縣監安緝相失。上以濟海外絶區。將擇一御史按得其實。公受命按覈。緝武人。廉謹。憤壽翼縱妄漁貨。至按劍庭詰。公具其狀。還以聞上初意壽翼官貴。使者或爲之左右。及得公所言狀。嘉歎不已。罪壽翼等。皆如公言其啓陳事宜。多所罷行公。由是受知於上。公之在耽羅。詢民疾苦。會耋老宴公堂。布朝廷德意島民久不識王人。及見公儀度閑雅。簡而得體。皆歡忻抃躍。頌之至今。上謁陵。天未曉而炬火熄。橋圮馬蹶。大司憲趙錫胤。勘京畿觀察兪㯙罪。止奪告身。上怒。特罷錫胤。時又命衛駕勿用精抄軍。兵曹判書朴遾面得旨不行。後乃歸罪於吏。吏受訊將死。公爲正言。論錫胤議律失輕。非故用意。朴遾親承敎而諉諸吏。吏枉受刑。請無罷錫胤而問遾罪。上怒益甚。故先褫公職。諸承旨入對請收還。上益怒。安置公鏡城。刻日至配。令驛聞。人皆惴惴。公夷然就路。離京十八日而至配。大臣臺閣。多爭之。故未一月。量移洪川。明年春。放還。秋。敍兵曹正郞。不就。公嘗自言數月中南登漢挐。北臨長白。人生壯觀。無出於此。癸巳春復拜兵曹正郞。冬爲御史。按察嶺南一路軍政。時上方勵志修攘。郡邑惕息。公寬裕不苛。唯糾其不勤事不如法者。甲午。復命稱旨。復爲兵曹正郞。改司書正言。一日召見。玉色溫然曰。耽羅按事公正。予實嘉之。往時聲色太遽。予悔予過。益勉方來。以補不逮。因問父爲誰。大臣對曰。宣祖朝名臣李時發。時公兄春田公論事忤旨。經歲處散。特命甄敍。因奬諭諄諄。是日入侍諸臣。無不改容。夏。應旨論事。請勤學正心。求賢詰戎。立紀綱。破朋黨。又戒奢侈。言甚剴切。上爲立撤主第五十間。冬。特授弘交修撰。臺官以格外爭。不從。屢辭乃就。人皆爲華。公素羸多病。一日。上問春田公弟病近復如何。因賜以御藥曰。速待瘳入侍。乙未秋。又爲嶺南推刷御史。疾甚褫還。拜修撰。丙申。廉察畿甸。爲直講,兵曹正郞,校理,獻納,副校理。冬。擢東萊府使。疾復作。未行而改。御醫就視。疾藥取內局。恩數之隆如此。還玉堂。兼弼善。丁酉。轉副應敎。遷舍人。超授忠淸觀察使。言舊例。公私奴婢。父良母賤。從母。母良父賤。從父。用是賤隷日蕃而良民日縮。請自今男從父女從母以均之。如公議。定爲法。疾劇乞解。宰相難之。上曰。李慶億必不欺君。蓋知遇之盛。群臣莫及也。戊戌冬。爲同副承旨。褫爲刑曹參議。己亥。還承旨。五月。孝宗昇遐。顯宗宅恤。周旋近密。裨益弘多。歷大司成,大司諫,禮曹參議。辛丑。改工曹。遭內艱。癸卯。制除。拜兵曹參議。改承旨,大司諫,副提學。甲辰。又爲大諫,副學。疏規關失嘉納。已而。爲吏曹參議。乙巳。歷大諫,大成。爲都承旨。猶階通政。爲罕有。褫爲戶曹參議。兼承文副提調。改大諫。前後參議六曹。長薇垣玉堂成均。不盡記。冬。擢漢城右尹。謂版圖有國之重。戶籍法廢。民口不見實數。請申明舊制。嚴漏籍之法。無問貴賤。悉徙邊。從之。命公草定科條。始明年丙午。著爲令。夏。改大諫。兼備局有司。以前勞進階。兼同知義禁。改大司憲,刑曹參判。出觀察京畿。所管六郵集京城待事而舊無邸。寄食坊曲。公私俱病。捐奇羨買隙地以處。出穀百餘石。令郵官遞掌斂散取贏。濟其困乏。又立雇馬法。諸驛稱便。丁未。入爲都憲。遷吏曹參判。特授刑曹判書。訟獄疑滯。剖斷無留。而用法平反。積案遂空。移大司憲。先此。義州人越境。北使來討府尹當死。而又責大臣待罪館下。右相許積。密勸上自當上詣館北向叩頭。終以罰金論。府尹得不死。聞者駭憤。兩司合辭。幷劾三公。於是竄諸言者。公入臺以爲列大臣。使君上親當僇辱。固無以逃其責。但兩相方在館下。不暇入對。事出右相。乃幷及三公。不可獨論許積。請正罪。還收諸諫流竄。正言安塾。反劾公輕改重論。上黜塾。特拜公都承旨。力辭得褫。戊申。歷憲長,宗伯,左右參贊,判戶曹。精核要會。務加節省。宂費大減。秋拜吏曹判書兼知經筵。冬。使燕歸橐。散諸從役行。李蕭然。人服其淸。己酉春。還長秋官。移宗伯。春田公捐館。公代秉銓。司諫趙聖輔銜春田公抑已。無所逞憾。捃拾微過劾公。公出江上。懇辭不獲。遂入謝又辭益力。竟解銓。拜參贊。庚戌。兼右賓客,知義禁。金澄觀察全羅。盛賓樂壽其親。諫官金錫胄劾其侈濫。澄在臺閣。刺擧不避。前後所論五十餘人。至是而群憾蝟起。謂有大贜。逮澄下獄。按驗無實。論者持之益急。遂覆按。拘繫官吏。窮詰百端。時吳始壽實代澄素有怨。銖金尺布。計會捏合。文致其罪。公以次官當讞。諸怨家蜚謀搖撼。公不爲動曰。藉令澄事有濫觴。因壽親抵罪。已非孝理所宜。況再三覆按。終無汚迹乎。遂勘以那移官物奪告身。首相積尤恨於澄。詆公私護贜吏。公乞免。積上箚指爲玩法。公以是坐罷。俄就理奪職。澄竟謫海西。冬。特敍爲工曹判書。辛亥春。改宗伯兼賓客。屢辭不許。時冊世子。公勉就。冊禮成。復出江舍。申前懇。會疾。御醫診視。賜內藥。褫爲判尹兼知經筵,義禁。力辭不獲。秋。乃起視事。壬子。歷都憲參贊。夏。復長銓。進拜右議政。坐府未滿月而感疾。祈免前後皆不獲命。明年夏。進左議政。明惠公主當下嫁孟萬澤。旣涓吉。遽卒。上意憐之。欲無停萬澤所賜爵。成其爲夫婦。公言嫁殤非禮。事遂寢。公疾久沈痼。二十餘告而後乃去位。七月晦。竟卒。自有疾。醫問不絶。續賜內劑珍膳。言聞上震悼。輟朝弔祭如禮。官庀喪。祿終三年。十一月十一日。權祔鎭川先壟。後十年甲子五月三日。遷窆于淸安茅山負乙之原。其改葬也。地部又致所須。皆爲異數。公眉宇秀朗。美鬚髥。儀度溫雅而擧止端重。平居簡言辭。不妄喜怒。當官治事。存大體。略苛細。其立於朝。則執心公正。持論和平。事無詭。隨言不苟同。尤審乎邪正而晢於是非。素守確然。無所撓奪。與春田公爲善類領袖。顯宗嘗問鄭太和。公兄弟孰優。對曰。難兄難弟。上曰。先王每稱李慶億可大用。由是眷注日隆。公常言受累朝殊遇。無絲毫補報。唯以盡瘁爲期。其爲冢宰。屛請託抑僥倖。甄品流振淹滯。愼擇牧守。搜訪才行。疏名量用。仕塗爲淸。敦於友道。不以衆好惡爲取舍。少與徐必遠,金始振善。二公與世抹摋。訾謗紛然。平生知舊。疏棄者多。獨公兄弟。相與如初。人以爲難事。大夫人誠孝備至。兄弟旣貴顯。朝夕侍傍。非公事賓客。未嘗去左右。婉愉取悅。不異嬰兒。及大夫人屬疾經歲。公兄弟日夜不解帶。藥物膳飮必親。旣喪。執禮不懈。衰經不去體。與春田公篤愛。居則同臥起行止出處。相與爲知己。仲公先卒。則居閒處獨。悲念不已。祿賜必分其家。撫諸姪如子。諸姪之事公如父。家故淸素。苞苴不入於門。泊然若寒士。蓋其出則著忠侃之節。入則敦孝友之行。奉公恪謹。律身修潔。皆人所不及。晩年。兄弟迭秉銓衡。常懼盈滿。卜築樊塘。種樹疏圃。爲休退計。卒不果。疾革。欲還舊第。終于正寢。病深不得行。屬諸子勿請諡勿樹石神道。葬祭無豐侈。嘗有擧南藥泉語者曰。惟精也。故能成天下之務。公曰。惟淡可以成天下之務。又謂所親曰。凡人之於爵祿也。其來固宜無心。其去亦宜無心。於此二者。可以得公之所存。有詩文疏箚數卷藏于家。夫人海平尹氏。監察元之之女。婦德甚備。子姓蕃衆。擧三男二女。男寅熽校理。寅炳參議。寅燁參判。女適左議政崔錫鼎,縣監洪萬迪。寅熽三男。恒坤,衡坤,嵩坤。一女適尹顯敎。側室一男。寅炳二男。瑞坤,徵坤。二女壻。金文澤,宋必煥。寅燁三男。夏坤,漢坤,明坤。一女幼。崔一男昌大修撰。女二人。洪二男。重九,重五。女五人。世堂自幼識公。非他人比。公之使燕。又備下价。周旋有素。今於爲公墓道之銘。不敢以不文辭。謹據狀敍次事行始終。系之以銘。銘曰。
鳳獜龍龜。瑞異祥奇。其生有爲。叶靈昭治。豈常介鱗。毛羽比同。人亦宜然。我見於公。蜚英盛代。振華明時。難弟難兄。吹塤吹篪。按事海邦。始結上知。宣布德意。島民歡馳。憲兵三相。湖南之事。觸威犯怒。不顧顚躓。曁曁數公。與時相背。人棄我與。終卒靡悔。勢利奔趨。獨堅素守。洪濤震蕩。中流砥柱。世道交喪。至于今日。達識遐觀。興思嗟咄。我銘載石。垂之萬億。誰其來者。不昧斯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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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明谷集卷之二十四 / 碣銘
議政府左議政華谷李公墓碣銘
穆陵在宥。有名臣曰碧梧李公諱時發。官刑曹判書。諡忠翼。繼娶申夫人生二子。吏曹判書諱慶徽。左議政諱慶億。歷事仁孝顯三朝。世稱賢公卿。議政公字錫爾。號華谷。以泰昌庚申生。七歲而孤。申夫人賢而通文史。身自爲師。日夜敎督。及長。詞華蔚然。崇禎甲申。擢庭試壯元。歷拜禮兵郞,司書,正言。孝宗特除弘文修撰。不階薦錄。人以爲華。累入玉堂春坊。以政府舍人。陞拜忠淸道觀察使。顯宗初。以承旨移大司成。又自大諫移副學。特授漢城右尹。歷畿伯,都憲,參銓。陞判刑曹。歷戶禮工判書,三四宰。前後凡三拜冢宰。兼備邊宣惠槐院提調。壬子。進拜右議政。俄陞左相。年五十有四卒。上震悼輟朝。弔祭賻賵。官庀殯窆如禮。命給祿終三年。初葬鎭川。後十年甲子。遷葬于淸安茅山辛向原。夫人祔焉。公爲人內剛而外溫。美鬚髥。神淸貌癯。與人和樂。未嘗有失色。不窮斥人過。然言辭簡重。不惡而嚴。其立朝處心持論。常主於平允。至是非邪正。所守確然。當官莅事。守憲令惟謹。存大體不苛。嬈然所在。必有規爲。可爲永久法。居家潔廉孝友。有人所不及者。然咸近自然。不假修飾。與仲氏同時顯用。爲士林領袖。當是時。士大夫多刻厲名行。言議風生。而公兄弟恬平眞素。恥爲矯激之行。識者心服。孝宗初爲正言。上封事累千言。請立志勤學。謹天戒結人心修軍政。因訟趙公翼爲賢師卞誣。非出於偏係。上優答。旌義縣監安緝。與濟州牧使金壽翼交惡。緝武人也。謂上官漁貨。爭詰不遜。道臣狀聞。特遣御史按覈。公承命往。衷其枉直而歸奏。始上意公以文武。有所左右。得奏明核無縱舍。大嘉之。勘壽翼等罪如公言。又以御史按察嶺南軍政。以推刷往嶺南。以暗行廉問畿甸。皆稱旨。大司憲趙公錫胤以非罪特罷。公爭之。上大怒。辭旨極嚴。命栫棘鏡城。踰年放還。居數年。以正言筵對。上召公使前。玉色溫然曰。耽羅按事甚公正。予用爾嘉。往時嚴譴。是予聲色太遽。予悔予過。爾其無懲前事。益勉方來。顧謂筵臣曰。李某之父爲誰。大臣對曰。是宣廟朝名臣李時發之子也。先是仲氏以玉堂論事忤旨。錮且經歲。至是始命甄敍。異數也。其後公患怔忡。在告久。命御醫診視。賜藥劑珍膳。又問仲氏曰。爾弟病近比何如。往者南踰海北竄塞。病源祟此。由予致之。其前後寵遇如此。嘗應旨條陳六事。仍論主第宏麗。言甚剴切。有曰古之人君。躬履艱難。有抱氷握火之志者。必不留心於此。上嘉納。命撤主第五十間。顯宗初朝而問領相鄭太和曰。李某兄弟孰優。對以難兄難弟。上曰。先王稱慶億可大用。自是眷遇日隆。其按藩。聽斷公勤。恒以敦薄俗戢貪吏祛積弊修武備爲要。在湖西。以私賤娶良所生從父役。出於俗謬。請自今男從父女從母。定爲絜令。在畿營。斥俸餘搆舍。以館六驛夫馬。捐穀百餘石。斂散取贏。以濟其乏。創雇馬法。以資遞立。驛路稱便。行之至今。其爲京兆。以版籍多疏謬。請申明舊制。漏籍者嚴其律。其理刑獄。一出於明愼。不受請托。其秉銓。抑僥倖。淸品流振淹滯。尤致意東宮僚屬。常加遴選。愼擇外官。牧伯之職。人不敢私求。篤於交友。苟心所與。不以衆好惡爲取舍。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與時詭趨不能隨人俯仰。爲當路所擯。諸名流所嘗親密。浸以疏絶。獨公兄弟相保母變。卒與之終始。由是學士大夫益賢之。噫。自黨議益盛。朋友道益偸薄。相激以名。相招以權。生平相慕悅相推重。謂若骨肉兄弟然。以死生相爲者。一言不相入。棄之若厲。甚至相排擊若寇讎。此其視公兄弟。爲何如也。金觀察澄以喜彈射多怨。爲諫官所劾。謂其托宴需饕貨。將致贓律。公以知義禁按治。以爲壽親而獲罪。非聖世事。引觀過知仁平奏之。爲倖相積所詆。被逮削職。公不以爲意。內行純篤。事大夫人。志物兼至。與仲氏朝夕左右。非公事賓客。不去側。祿俸餽遺無敢私。侍疾致憂。居喪無違禮。與仲氏同居。盡湛和之樂。及沒哀甚。每念出涕。有得必分。毋乏其祀。平居不問家人產業。不修垣屋。被服如寒士。於世味紛華。泊然無所好。好讀書。旣貴。猶日取中庸朱子書。誦數不怠。晩年有退休志。卜築鷺江之南。爲終焉計。因位遇益重。未及遂而遽歿。公每病世之挽誄碑碣多溢美。疾甚。謂諸子曰。吾致位卿相。而無功業可紀。愼勿求挽詞。毋請諡。毋樹墓碑。葬祭簡而毋豐。以明吾志。嗚呼。此可以觀公矣。夫人海平尹氏。賢相斗壽之曾孫。監察元之之女。婦德甚備。事姑事君子。盡其道。處妯娌無間言。訓子女有法。御婢僕。嚴而惠。爲一世婦女師範。子男三人。子壻二人。俱籍文譜。長寅熽弘文校理。次寅炳謁聖狀元。與兄同榜。官止觀察。次寅燁今爲兵曹判書。方柄用。二壻議政崔錫鼎持平洪萬迪。校理三男。恒坤,衡坤,嵩坤。女一人。觀察二男。瑞坤,運坤。女二人。判書三男。夏坤進士狀元。漢坤,明坤。女一人。崔氏婦一男昌大。今廣州府尹。女二人。洪氏婦三男。重九,重五,重一。女四人。錫鼎早贅公門。辱視遇甚。得事公十年餘矣。出而觀其行業。入而覵其閒燕。雖無所識知。亦可謂粗得其一二。庶幾乎和而不流。淡而不厭者焉。仲季並美。蔚爲煕代名臣。其比宋景文,韓忠肅兄弟。未易軒輊。謂古今人不相及。殆非知言也。嗚呼。崧高江漢。必本諸周宣之德。則此奚獨公之賢哉。亦有以覩夫先王之盛。傳曰。是以論其世也。錫鼎於是重有感焉。公慶州人。遠祖文忠公諱齊賢。以德業文章。顯于麗季。世稱益齋先生。五代祖諱黿。號再思。朴醉琴彭年之外孫。遊沾畢齋門。文行著稱。被戊午史禍。申夫人。卽中宗朝名相文景公用漑之後。考承旨應榘。成文簡高弟。以器識行義。見重於時。昔南秋江孝溫嘗稱再思之賢曰。內外兩家之美。鍾於一人。不佞於公兄弟亦云。銘曰。
猗嗟忠翼。穆陵名卿。有二子賢。遹大厥聲。溫溫我公。行簡居貞。公廉敏惠。持以潔淸。歷職三朝。爲國榦楨。弗朋以隨。弗權以傾。友服其信。民誦其平。王曰叔仲。孰斯重輕。相君曰都。難弟難兄。和而能守。貴而不盈。位極三事。休有令名。詒我後人。又食其贏。宅兆云吉。氷世攸寧。墓詞無溢。秪述平生。<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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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明谷集卷之二十八 / 行狀
華谷李相國行狀
公諱慶億。字錫爾。自號華谷。慶州人。始祖謁平。新羅祖王赫居世佐命大臣。是六部大人之一也。世爲名族。至諱金書。當麗祖之世。娶金溥王女。官三韓功臣中原太守。至諱瑱。檢校政丞。封臨海君。是生文忠公諱齊賢。用文章德業。爲高麗名相。世稱益齋先生。入我朝。有諱尹仁。平安道觀察使。生諱公麟。昌平縣令。娶朴醉琴彭年女。擧丈夫子八人。第三曰黿。禮曹佐郞。號再思堂。與金先生宏弼遊金佔畢宗直之門。罹甲子士禍。逮中廟中興。贈承政院都承旨。是爲公之五代祖也。高祖諱渤。贈承政院左承旨。曾祖諱憬胤。贈吏曹參判。兩世遘家難不仕。祖諱大建。成均進士。端雅好學。弱冠遊太學。人目之以館中顏子。不幸早世。贈議政府左贊成。崔簡易岦銘其墓道。考諱時發。號碧梧。才望重一世。文科判書。累贈議政府領議政。妣貞敬夫人高靈申氏。承旨應榘之女。擧二男一女。公其季也。以萬曆庚申九月二十二日丙申生。碧梧公方以贊畫使鎭西關。是夜夢。一皤然老人來告云生貴子。其以二字錫名。卽公之諱也。碧梧公書報夫人曰。疇昔之夢甚非常。生男也。宜以是名。使來而門弧已設。公生而穎秀超邁。先公鍾愛甚。七歲。先公捐館。大夫人慟不欲生者數矣。顧公與仲氏在髫齔未自立。大夫人撫而歎曰。吾捐吾生以從逝者。則誰與衛諸孤而俾有成也。於是節哀思屛組紝。精專其志。日夜以提誨公兄弟爲事。公聰悟異凡。不勤程督。而有日就之效。十歲。與仲氏出就外傳。學業大進。十七。遭丙子之難。避兵流落六七年。甲申九月。中別試初試。未及殿試。遂擢庭試狀元。仲氏公又登別試。長弟唱第以榮大夫人。時人莫不嘖嘖艶稱。以爲稀世事。例授成均館典籍。移禮曹佐郞。時昭顯世子新喪。公以該郞。斟酌禮文。動中規則。其時卿相皆歎奇之。未久。觸孝廟潛邸導辟坐罷。經年乃敍。除兵曹佐郞。陞正郞。丙戌冬。爲養得扶安縣。縣邊海。素稱饒物產。公律身廉白。治以簡嚴。居三年。焯有聲績。適與方伯不相協。投印而歸。民爲勒碑追思。己丑冬。敍復禮曹正郞。庚寅。移授侍講院司書。參修仁廟實錄。俄拜司諫院正言。時孝廟新卽位。公上封事條陳十餘事。略曰。竊惟治道有本而莫先於立志。夫志者萬事之根柢也。自古及今。未有志不先定而能成其事者。歷觀古昔人君。孰不願治。然而或安於積久之弊而不能自振。或惑於衆多之論而莫適所從。或始銳而不克于終。此皆由於志不立也。伏覩殿下毓德春宮。四方延頸。正位乾極。萬民拭目。渙發辭令。無非惠恤之音。引接儒臣。日講義理之學。亦嘗於筵中敎之曰。當以三代爲準。當是時。群下之望殿下。亦不在三代下矣。惟其求治太急。事或無漸。人心動搖。禍釁旁生。聖意遂沮。不復自勵。以爲專守常規。可以無事。喜怒任私。好惡靡常。致令君子無所恃而罔盡其忠。小人有所窺而欲售其奸。因循玩愒。大小悠悠。曾未閱歲。氣象頓變。此無他。莫非殿下有爲之志不誠故也。昔秦孝公見擯會盟。因思振作。遂得衛鞅。與謀國事。變革舊章。一國譁然。猶且斷然行之。竟伯西戎。以千乘之國。致一時富強之業。其所樹立如此。今殿下以聰明睿智之資。守祖宗丕基。思復三代。而其可不堅定聖志乎。臣願殿下確守有爲之志。終始不撓。惟以聖人之訓爲必當從。先王之治爲必可法。必期致世。如三代之隆。規模條理。默定於睿算之中。使遠邇臣民。曉然知聖意所向。則天生一世才。自足了一世事。將見在廷策勵。巖穴畢臻。各盡其心。大小率職而萬事理矣。又曰。言路之開塞。國家之興喪係焉。自古聽諫之主。不獨爲來天下之善。亦所以通上下之志也。殿下卽阼之初。上自朝紳。下至草茅。危言正論。日陳於前。間或有狂妄之說。而言路則可謂開矣。夫何近日以來。含默成風。再下求言之敎。中外寂然。如使朝無闕遺則已。世不唐虞。安得至斯。人知殿下之志。在於虛文而無實用。故皆以爲上疏陳忠。都是空談。是殿下失信於萬。民也。可不懼哉。又曰。館學儒生。尊事先儒。請擧盛典。不卽允許。實出於聖意之愼重。而搆虛詬辱之徒。亦且包容。不斥其非。以致國是靡定。擧一世章甫莫知趨向。至於領府事趙翼之前後申辨。只出於痛師門之受誣。何嘗有偏係之私。而殿下累示厭薄之色。使白首老臣不安於朝。何殿下待大臣。反不如辱賢之悖士乎。又曰。臣願殿下存心精一之學。涵養本源之地。應物接事之際。猛加省察。絶去將迎。廓然大公。推誠御下。使言路洞開。是非歸正。以致上下交孚之吉。又曰。嗚呼。國家當變故積衰之餘。水旱荐臻。乾文示警。民生有倒懸之急。國家如綴旒之危。卽今天命人心去就離合之機。惟在於殿下之一念。可不思所以上弭皇天之怒。下慰兆民之望乎。爲國之道。最忌委靡苟安循常。初若無事。及其危亡猝至。匡救無策。臣每觀晉魏趙宋之季。君無桀紂之暴。臣無亂惡之罪。而日就不振。竟蹈慘禍。未嘗不痛惜以爲後世人主之一大鑑也。誠願殿下勿以架漏牽補。姑爲目前之計。及是時。修明政事。固結人心。以爲祈天永命之圖。上優旨褒答。辛卯。除成均館直講。復拜正言。其七月。以按覈御史。承命濟州。時濟州牧使金壽翼與判官安緝相失。遂馳啓請罪。上以濟是海外絶區。要得公忠剛介之士。按其寶狀以處之。朝議咸曰。無如李某賢。遂命公。公聞命卽行。至則窮覈事原委。通判武人也而廉謹。憤壽翼縱妾漁貨。至於按劍庭詰。而枉多在府伯。公不以剛柔爲吐茹。執彼此曲直衷裁之。仍詢訪民瘔苦。會耋老觴于公堂。宣布朝廷德意。蓋自金淸陰尙憲奉使耽羅之後。島民始見王人。而公儀度簡而能禮。施措誠而得體。人皆仰望。欽歎歡欣。抃躍頌說。久而不衰云。十月復命。初上或慮其以文武爲左右。及覽公奏狀。指次明詳。靡所縱入。按事無絲毫盭。於是上大加稱賞。論金壽翼等罪。一依公所奏。又令廟堂採施所陳人瘼事宜。多所罷行。公之受知孝廟。蓋由於此。先是上幸陵寢。中途炬熄。橋梁又圮拆。致御乘蹶。上驚怒。命憲府奏當京畿監司兪㯙罪。時趙樂靜錫胤長憲府。勘以公罪。止奪告身。上以擬律太輕。特罷趙錫胤。又上命兵曹。勿用精抄軍。充行幸衛士。兵曹判書朴遾實面承王旨。不果奉行。事覺。乃歸罪吏胥。曹吏受刑訊將死。公時爲正言。論此兩事曰。憲府奏當太輕。雖有其失。必不爲兪㯙用意。低昂其間。且先王實錄垂完。不合附諸新手。勿用精抄軍事。朴遾親承上敎。而未及傳宣。及其生事也。推諉吏胥。該吏不敢首實。枉受嚴刑。朴遾可拿問。而錫胤之罷可還。趙公以兼帶大提學。方修仁廟實錄故公云然。於是天威大震。批旨極嚴。因下敎政院曰。正言李某。爲先遞差。諸承旨登對請還收。上益怒。謂諸承旨曰。兪撤事。予亦非謂其故犯其罪也。身爲道臣。不能檢飭。至於炬絶橋斷。令君擧狼狽。論其罪罰。何爭公私字乎。今者李某敢請還收趙錫胤。而大提學亦請勿出其代。其意果安在哉。朴遾至請拿問。此亦可怪也。上又曰。罷職薄罰。李某何敢汲汲救解乎。若少有尊朝廷之意。不得乃爾。且實錄。乃萬世公論。李某何敢以錫胤爲宜專任。又下敎曰。侮君弄法之徒。非人臣所可容護。而前正言李某敢以罷職薄罰爲過。至請還收。鷹鸇之逐鳥雀。固如是乎。人臣之道。可謂掃地矣。此是護黨之習。不可不嚴治杜截。李某其安置北邊。以重國法。以肅王綱。仍督責禁府曰。李某定配單子。何其不卽入啓耶。又敎曰。李某到配。若不及定限日子。押去羅將。難免重究。其嚴飭以送。又召致羅將差備門。問程途。刻期限二十二日到配。又令本道驛聞到配日子。王府以鏡城擬配所。命卽日發送。時季冬天寒。大雨雪以風。不敢頃刻滯留。威怒之震疊。行遣之嚴急。卽位後未嘗有也。人皆惴惴危慄。公夷然就路。離京十八日。到配所。道臣卽狀聞。大臣及臺臣爭之。強命量移于洪川。公到鏡城僅二十餘日矣。其明年二月。始疏釋。時仲氏春田公方宰湖南之高山。大夫人在其官所。遂自洪川。往覲大夫人高山。仍僑住益山邑村。取其覲省之便。秋。蒙敍除兵曹正郞。不就。冬。仲氏公內遷弘文館校理。癸巳春。公亦還京第。公屬從耽羅還。旋有北關之行。居恒自言數月之內。南登漢拏。北臨長白。男兒壯觀。無出余右。復拜兵曹正郞。冬。以按察御史。往嶺南。察一路軍政。時上方勵志於修攘。申明科條。鍊卒伍繕器械。少有疏虞。輒以重律繩之。守宰聞繡衣將命。莫不相顧惕息。公按行列邑。顓尙寬裕。不事苛嬈。使戎務無闕。服習有方。其善敹不勤。坐作不如法者。紏擧無所避。甲午竣事還。稱旨。拜正言,司書,兵曹正郞。一日上召公賜對。玉色溫然。仍敎曰。爾曾奉使耽羅。按事甚得公正。予實嘉之。往時嚴譴。是予聲色太遽。予悔予過。爾無懲。益勉方來。以補不逮。仍問于筵臣。李某之父誰也。左相元斗杓對曰。是宣廟朝名臣李時發之子也。時仲氏在經幄。論事忤旨。命銓曹勿付職。且經歲矣。特命甄敍。以示眷遇之意。奬諭諄諄。是日入侍諸臣。無不灑然改容。夏。復拜正言。因水災應旨上封事。請上勤學正心。求賢詰戎。立紀綱破朋黨。疏末又陳奢侈成風。主第宏麗。其言明剴痛切。上覽疏嘉歎。賜以優批。立命撤去主第五十間。其冬。特旨拜弘文館修撰。臺臣以不階薦錄。事出格外爭之。上答曰。近來弘錄極混雜。闒茸居多。全無圈點簡選意。爾等何必駭視君上之命。而獨歸重以弘錄爲名者乎。良可歎也。未數日。臺啓旋停。公屢辭不獲。出謝恩命。先是公名入於本館錄。及至都堂會圈。有忌之者。少一點不得與。物論稱惜。至是膺聖簡。人皆以爲華。一日上於經席。招問仲氏公曰。爾弟之病。近復如何。怔忡尙爾否。仍命賜御藥。又敎曰。使速瘳而入侍焉。乙未秋。又以推刷御史。往嶺南巡歷未半。疾甚遞還。復拜修撰。丙申。又以暗行御史。廉察畿甸。自成均直講,兵曹正郞。移弘文校理。又自獻納。移副校理。冬。擢拜東萊府使。舊痾復作。大臣陳病難赴任狀。卽許遞。仍命御醫就私第視疾。藥物取給於內局。蓋異數也。復入玉堂。兼弼善。丁酉。以副校理。陞副應敎。遷議政府舍人。秋。又擢拜忠淸道觀察使。其治以敦薄俗戢貪吏爲要。國俗私奴婢從其母爲賤奴。娶良妻則又從其父屬賤。用是私賤日蕃而良民日縮。識者病之。公狀陳其弊。請男從父役。女從母役。俾公私俱便。又請先試一道。推行於八路上令廟堂覆啓允之。有營將病不任事。公馳啓請遞。廟議疑其圖免不許。上曰。李某盡心國事。必不循私。竟遞之。公瓜期已迫。舊患復谻。申狀乞還。上亦令備局覆啓。廟議難其遞。上又曰。李某必不欺君。特命遞還。其和遇之盛。群臣莫能及也。戊戌冬。拜承政院同副承旨。遞授刑曹參議。己亥。復爲承旨。夏五月。孝廟禮陟。顯宗卽位。當宅恤之初。周旋近密。裨益弘多。時同春宋公浚吉爲國子祭酒。誘掖多士。輪日講學。於是大司成缺。博選時望。朝議屬于公。遂拜大司成。移大司諫,禮曹參議。辛丑。爲工曹參議。夏遭大夫人憂。癸卯制除。拜兵曹參議。移承旨,大司諫,副提學。甲辰。又自大諫移副學。時上答群臣疏章。多失平語。至有侮君蔑視之敎。公疏言此乖聖人中和之發。又非明君使臣以禮之道。上嘉納。遞爲吏曹參議。乙巳。又歷大司諫,大司成。爲都承旨。世以階通政知申事爲極選。遞授戶曹參議。兼承文副提調。又拜大諫。前後歷六曹參議。長諫院,玉堂,國子不盡記。冬。擢拜漢城府右尹。我國戶籍法。久廢無其實。公以爲版圖有國所重。而今八路民戶人丁。不知實數。何以爲國。不可不申明舊制。遂筵白請講行。特嚴漏籍之律。毋問貴賤輒徙邊不少貸。上命公草定科條。自丙午式年爲始。著爲絜令。夏。移拜大諫。兼備邊司有司堂上。又以知申時嘗藥勞。賞加一階。兼同知義禁。又拜司憲府大司憲刑曹參判。兼司譯提調。出爲京畿觀察使數月。銓曹啓請拜副學。以北使將至。道臣不可遷。相臣白仍之。其治類湖西。畿有六郵。恒輳集京師而素無邸。各竄閭巷間寄食借宿。爲弊不貲。公捐營俸奇羨。買隙地構舍。以館各驛夫馬。又斥給營穀百餘石。使郵官遞掌斂散。取贏餘以濟其饑乏。其後又刱雇馬法。驛遞皆稱便。至今賴焉。丁未。入爲都憲。遷吏曹參判。亡何特拜刑曹判書。曹多疑訟滯獄。積久未決。公輒櫛爬辨析。積案遂空。用法務平反。移長憲府。先是北使來。以邊民越境採蔘。歸罪灣尹。事將不測。且責大臣。使待罪館所。右相許積獨請對密勸上自當。於是上詣館所。北向叩首。終以罰金論。聞者莫不駭憤。於是兩司合辭擧劾。而以獨論積。爲有黨目之嫌。遂並及三公。上命竄諸諫臣。公以爲泛論則身爲大臣。使君父親當僇辱。領左相亦不得逃責。第其兩相方待罪館門外。靡暇入對。又不知密勸事。獨右相可劾。今乃並論三公。欲掩黨目之嫌。是豈論事允當之體乎。及是公以憲長連啓。而去領左兩相。只論積。仍請還收諸諫臣流竄者。正言安塾以輕改重論反劾公。上下嚴旨。遞安塾職。黜補耽羅屬縣。特拜公都承旨。公情勢難安。控辭甚力。上諒其意。許遞。戊申。又歷大司憲,禮曹判書,議政府左右參贊。拜戶曹判書。戶曹掌金穀。費煩而務劇。公精核要會。務加節省。未數月。宂費大減。經用不匱。秋。進拜大冢宰。兼知經筵承文院觀象監宣惠廳掌苑署提調。冬。差冬至使赴燕。諸所得橐中藏。盡分諸一行官役。及其歸也。行李蕭然。人皆服其淸操。己酉三月復命。拜刑曹判書。移禮曹判書。其六月。仲氏公以冢宰捐館。公代仲氏。復秉銓。時司諫趙聖輔摭公赴燕時觀燈事劾之。先是仲氏在銓。惡聖輔附離形勢。躁競無檢。抑不用。以此深嗛之。至是專逞私憾。人莫不非之。而上亦竟不允。公旣被劾。卽出江上。連章懇辭不獲。遂入謝。又出城辭益力。得遞拜參贊。庚戌。兼世子右賓客,知義禁府事。時全羅監司金澄爲母設宴。金淸城錫胄以諫官劾澄宴需侈濫。請罷職。澄前在臺閣。刺擧不避權貴。前後所論凡五十餘人。於是群憾因之修郄。乃請拿問。査其宴需金帛。及査啓上。無侈濫可抵大罪。論者持金澄益急。謂前査多爽。又請更査。逮繫官吏。百端窮詰。至以銖銀尺布。搆成罪案。欲置贓律。時判義禁亦曾見彈於金澄。嫌不讞奏。上命次官議罪。公當其事。諸家蝟起蜚謀。設巧撼搖。無不至。公不爲動。乃與同僚相議曰。藉令金澄宴需有濫觴。因壽親抵罪。已非孝理所宜。況今再三覆按。終無汚跡。不可以贓律繩之。以其那移會簿物。從輕擬律。似合於觀過知仁之義。遂勘以奪告身。領相積亦嘗累爲澄所劾。於公會。大言斥公不避親嫌。私護贓吏。澄卽公中表兄弟。國法無相避。物論皆以爲不可以疏屬之故。創法外嫌避。公亦嘗慨然曰。安有孝理之下。爲親設宴而獲罪乎。況且乘時搆煽。必欲中傷。尤非淸朝美事。雖有中表戚誼。法無應避。畏衆怨而不當讞奏。非直也。遂擬以輕律。大爲積所詆。公陳疏乞免金吾。上答以溫批。積又上箚斥以玩法。語深峻。命罷公職。俄又就理奪告身。金澄謫海西。公出獄。僑居鷺江村舍。冬。特命敍復工曹判書。又拜禮判。兼世子賓客。累辭皆不許。時將行王世子冊禮。公入城過冊禮。又出江舍。申前懇乞解諸任。適患寒疾。遣御醫診視。賜內藥。遞爲漢城判尹。兼知經筵義禁。又帶槐院太僕宣惠瓦署提調。章疏頻繁。終不許副。秋。入城供職。壬子。爲都憲,參贊。夏復長銓曹。章累上。批旨隆厚。公乃出供仕未幾。進擢右議政。累辭始拜。公坐府纔廿餘日。感疾彌留。累引疾控免而不獲命。明年夏。進拜左議政。時明惠公主將嫁新安尉孟萬澤。有吉日而公主夭逝。上意憐之。欲仍存都尉爵秩。成之爲夫婦。公引邴原所論嫁殤非禮事。陳其不可。事遂寢。病涉夏沈痼。呈告二十餘度。始得遞。例判中樞。竟以癸丑七月晦。卒于皇華坊寓舍。春秋五十有四。自感疾。上屢遣醫診視。續賜內劑珍膳。及訃聞。上震悼輟朝三日。遣近臣致弔賜祭。官庀殯窆如禮。仍命給祿終三年。其十一月十一日。權厝于鎭川草坪先兆。其後十年甲子五月三日。永窆于淸安茅山辛向原。上聞其將改葬。命該曹優給葬需。終始隱卒之典。皆異數也。公性溫雅端重。言辭簡寡。體瘦勁。眉宇秀朗。美鬚髥。平居不妄喜怒。雖在僕隷。未嘗疾言呵叱。亦不窮斥過失。其當官理職。存大體務簡約。掃除一切煩苛。宅心公正。持論和平。事無詭隨而不至於激。言無苟同而不及於礉。當其權衡人物。黜陟賢不肖。一視其人。未嘗以黨目有所偏。愛惜人才。雖賤必收。至或是非邪正所在。直前無所諱。素守確然。不爲親故形勢所撓奪。一時儕友莫不斂袂而推重焉。與仲氏同時立朝。蔚爲善類領袖。自辛卯耽羅之役。奉使稱旨。受知孝廟。遭遇之盛。冠絶群僚。顯廟在宥之初。中朝而問首相鄭太和曰。李某兄弟孰爲優。鄭相對以難兄難弟。仍下敎曰。先王每稱李某可大用。自是眷注日隆。公常曰。吾受累朝殊遇。無絲毫補報。唯以盡瘁爲期。居官臨事。務盡其誠意。雖劇任繁務。未嘗毫有慢憚色。其爲冢宰也。每歎仕路淆雜。屛請托抑僥倖。淸品流振淹滯。愼擇牧守。籍記蔭吏。有聲績者。次第調敍。尤致意於初入仕。以爲生民休戚。係於守令。守令之賢不賢。實由初仕之得人。搜訪一時才行之士。疏名冊子。量能授職。春坊賓僚。加意愼簡。不以時勢輕重有所撓。牧伯人不敢私求。官方爲之一淸。敦於友道。不以衆好惡爲取舍。少與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善。二公與世抹摋。訾謷者衆。親友多排根。而獨公兄弟交誼不少渝。人以爲難。公早孤。事大夫人。誠孝備至。旣壯。愉婉如童齔時。常與仲氏朝夕侍傍。非公事賓客。不暫時離側。致其融洩之樂。凡祿俸饋遺。悉以奉大夫人。有所用。必請焉。大夫人屬疾經歲。公曁仲氏。日夜不解冠帶。藥物膳飮。必親嘗視。或爲諧笑戲謔。取悅大夫人。無不至。及丁憂執喪。一遵禮節。衰絰不去體。未嘗離廬次。與仲氏迭往墓所。朝夕臨。風雨不廢。旣服闋。與仲氏恒同處。和怡湛翕。迥出常倫。盤羞有異味。輒相分。及仲氏沒。內除踰年。猶抱深戚。居閑處獨。涕泫然。悲念不已。每過仲氏門。必爲之慼然疚懷。勅前導毋爲呵辟聲。常時廩祿。得必分之。以恤其祀。撫養諸姪。勤勤訓誨。人不見與己子間。諸姪事公。亦如仲氏存也。孝友之行。人皆歎服。推之睦婣。亦盡其誠意。從母年老孀居。家甚貧。公事之甚謹。衣食必相周。從母有急。則取資如外儲然。家故淸素無產業。輒丐貸以供給。平居不問有無。苞苴不入門。餽遺稍過節。輒却不受。於紛華侈靡。泊然無所好。居處衣食若寒士。每戒諸子女斥奢從儉。以故一家諸子弟婦女。雖盛宴會。不敢服珠翠錦綺。雖素嗛公者。亦一口稱其淸儉。公雅恬於勢榮。視世之汲汲趨競者若浼。晩年名位隆盛。兄弟迭秉銓衡。恒以滿盈爲懼。與仲氏相對。輒相戒曰。不如早退。以免大戾。嘗卜築于鷺江之樊塘。種樹疏圃。以爲終焉計。顧天眷彌摯。位益重。不得便決退伏。而公遽沒矣。不佞嘗擧藥泉南相國語曰。惟精也。故能成天下之務。公聞而應之曰。惟淡可以成天下之務。斯言也嘿契道妙。非循襲前人語。又嘗敎不佞曰。凡人之於爵祿也。其來固宜無心。其去亦宜無心。可見其超然於得喪之際。而於此二者。亦可以得公之禖韻矣。公每哂世之挽誄碑碣。多溢美無實。疾革。屬諸子曰。吾受國厚恩。致位卿相。而無功業可紀。愼勿求挽詞。勿請諡。勿樹石神道。葬祭亦從簡約。毋豐侈。以徒悅人目爲也。又曰。若不考終于正寢。而皐復於寓館。未免爲遺恨。試舁我還舊第。俾以禮終。雖以疾甚不得行。而其不欲斯須違禮之意。可槩見矣。公文才天得。早登科第。雖不復治筆硏。以詞翰自居。而詩律淸緻。一時騷墨諸公。亦多推許。有詩文疏箚數卷藏于家。夫人海平尹氏。名相斗壽之曾孫。監察元之之女。祥順而莊重。衷和而外方。婦德甚備。事姑盡其誠。奉君子無違則。處妯娌無間言。訓子女有法。御婢僕嚴而惠。名家婦女。慕以爲法。晩年福德愈盛。子姓蕃衆。孝養備至。嘗從往長男杆城郡。二子同擢文科。設聞喜於官舍以娛之。季子以前任翰林同侍。榮觀赫然。歌詠播傳。一世人爭心艶而樂道云。少公一年生。享年七十有四。擧三男二女。男寅熽初筮蔭仕。至郡守。晩擢文科校理。寅炳魁文科。與其兄同榜。今爲弘文館應敎。寅燁亦文科。今爲黃海道觀察使。女適右議政崔錫鼎,司僕主簿洪萬迪。校理三男恒坤,衡坤,嵩坤。女一人。側男一人。應敎二男瑞坤,徵坤。二女適金文澤,宋必煥。觀察三男夏坤,漢坤,明坤。女一人。曰一男昌大修撰。女二人者。崔氏婦出也。二男重九,重五。女五人者。洪氏婦出也。錫鼎少而入甥館。深被覆露。今髮已種種矣。於公之平生。自謂粗得其一二。謹序次公官歷事始終。爲行狀。亦不敢曼辭以誣逝者云。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