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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11월 설교 시리즈 – ‘그럼에도 불구하고’>2.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초대!
본문 : 창세기 44장 33절(30~34절)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번역>
가나안 땅에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던 야곱은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서 먹을 것을 구해오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이집트에는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리로 가서, 곡식을 좀 사오너라. 그래야 먹고 살지,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창세기 42장 2절, 새번역>
이집트는 가뭄에도 거뜬히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요셉은 가뭄을 잘 컨트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팔아 버린 형들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막내 베냐민은 형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도착한 형들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당연히 형들은 요셉인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모르는 체하면서 형들을 첩자라고 몰아가며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자 형들은 자신들의 진실을 믿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소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모두 열둘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소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잃었습니다." <창세기 42장 13절, 새번역>
이 말에 요셉은 너무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뭐라고? 잃었다니! 팔았으면서도! 바로 형들이 나를 팔았으면서 잃어버렸다는 거짓말을 하다니!’ 그래서 요셉은 더욱 더 첩자라고 몰아세우게 되었고, 형들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리고는 3일이 지난 후 요셉은 형들을 찾아와 감옥에서 나올 방법을 말하게 됩니다.
당신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당신들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만 여기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나가서,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이 허기를 면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반드시 막내 아우를 나에게로 데리고 와야 하오. 그래야만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음을 면할 것이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창세기 42장 19절, 새번역>
그래서 시므온이 남기로 하였고, 나머지 형들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가지고 간 돈이 그대로 자신들의 자루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두려움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이집트에서의 일을 모두 말하자 야곱은 당연히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의 아이들을 다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잃었다. 그런데 이제 너희는 베냐민마저 빼앗아 가겠다는 거냐? 하나같이 다 나를 괴롭힐 뿐이로구나!" <창세기 42장 36절, 새번역>
르우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버지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야곱은 완강히 거절했고, 그렇게 시므온이 이집트에 잡힌 채로 시간이 계속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뭄과 기근도 더 심해지게 됩니다. 다행히 이집트에서 가져온 곡식으로 버티긴 했지만, 이윽고 그마저도 떨어지게 되자 야곱은 다시 한 번 아들들에게 이집트 행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이집트에 발조차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너무 답답해 자식들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야곱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막내를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의 어린 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창세기 43장 8~10절, 새번역>
그런데 장자 르우벤이 말할 때에는 거절했던 아버지 야곱이 유다의 말을 듣고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르우벤보다 더 믿을 만 했던 아들이 유다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유다의 말을 믿고, 막내 베냐민을, 가장 좋은 토산물과 특산물, 또한 다시 가지고 왔던 돈의 2배를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니 하나님께 맡긴 듯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 아우를 데리고, 어서 그 사람에게로 가거라.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창세기 43장 13~14절, 새번역>
그렇게 걱정과 염려를 가지고 도착한 이집트에는 예상과 다른 환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시므온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고, 요셉도 형제들을 친절하게 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베냐민을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모든 형제들을 다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든 형제들이 한 곳에 다 모이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울고 나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됩니다.
그렇게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취하도록 마시며, 좋은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더더욱 다음 날 일어날 엄청난 일에 대해서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요셉이 하인을 시켜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기분 좋게 곡식을 받아 이집트를 떠난 야곱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마 할렐루야 찬양을 드리며 감사의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행복과 평안을 불안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금새 뒤따라온 요셉의 집 관리인이었습니다.
'너희는 왜 선을 악으로 갚느냐? 어찌하려고 은잔을 훔쳐 가느냐? 그것은 우리 주인께서 마실 때에 쓰는 잔이요, 점을 치실 때에 쓰는 잔인 줄 몰랐느냐?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매우 고약하구나!' <창세기 44장 4~5절, 새번역>
형제들은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자신들은 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생각한 대로 형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소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44장 9절, 새번역>
자루가 하나씩 풀려 졌습니다. 다행히 형들 자루 어디에도 은잔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베냐민의 자루를 살펴보던 관리인은 기세등등하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꺼내게 됩니다. 그 은잔을 본 형들은 망연자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관리인이 맏아들의 자루부터 시작하여 막내아들의 자루까지 뒤지니,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다.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 <창세기 44장 12~13절, 새번역>
성으로 돌아와 요셉을 만난 형들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으니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통을 치는 요셉에게 모두가 종이 되겠노라고 체념한 듯 말하게 됩니다. 그 때도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듯 야곱의 4번째 아들 유다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또한 신기하게도 이 후의 대화에도 유다가 대변인처럼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유다가 대답하였다. "우리가 주인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44장 16절, 새번역>
그러자 요셉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요셉이 말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소. 이 잔을 가지고 있다가 들킨 그 사람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당신들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오." <창세기 44장 17절, 새번역>
하필 베냐민을 두고 떠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생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기고 떠났던 그 날처럼 베냐민을 두고 떠나면 됩니다. 그때처럼 평안하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슬픈 기억이 만든 뼈가 박힌 말이었습니다. 그날 동생을 팔고도 어떻게 그렇게 평안하게 돌아갔는지, 그동안 평안하게 살았는지, 이번에도 또 동생을 버리고 평안하게 돌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도저히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버지 야곱은 정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특히 유다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바로 자신 때문에 평생을 요셉을 그리워하면서 사신 아버지에게, 이번에는 꼭 베냐민을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왔건만, 베냐민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목숨을 다해 간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목숨과 베냐민의 목숨은 연결되어 있으니 제발 베냐민을 함께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풀어 줄 조건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44장 33~34절, 새번역>
자신이 남을 테니, 자신이 종이 될 테니,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유다입니다. 유다는 모든 형제 앞에서, 그리고 요셉인지 모르지만 요셉 앞에서, 지난날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며, 그 결과로 찾아온 이 현재의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달게 받겠다는 생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다의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바로 이 말 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드디어 자신에 대해서 밝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창세기 45장 1~2절, 새번역>
요셉은 유다 형의 진심 어린 회개에 응답한 것입니다. 유다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고, 예전에 알던 그 유다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아버지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자신이 대신 죽어서라도 책임을 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유다의 마음을 보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게 되고, 자신이 겪어 온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계획이었음을 말하며 형들을 위로하게 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4~5절, 새번역>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꿈의 사람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꿈을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의문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사실상 창세기 후반부는 요셉의 이야기인대 유다의 이름이 더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갑자기 유다가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창세기 후반부일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이 아닌, 야곱에서 유다로 이어지는 것이 이해가 가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리고 잘 아시는 것처럼 바로 이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오게 되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동안 유다가 걸어온 행보가 지금과 너무도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런 주인공이 될 만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찬송과 감사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유다는 사실 그 이름값을 조금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먹은 장본인입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창세기 37장 26~27절, 새번역>
아주 그럴듯한 말로, 마치 형제요 피붙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말하며, 은 스무 냥에 팔아버렸습니다. 유다는 당시 인신매매범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약속의 땅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고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아둘람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설상가상 거기서 이방 여인과 결혼합니다. 태어난 장자도 이방 여인 다말과 결혼을 시킵니다. 하지만 그 장자가 얼마나 악했는지 하나님이 벌을 내리기까지 하십니다. 자연스레 당연하게도 장자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의 신앙교육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창세기 38장 7절, 새번역>
그리고 최악의 장면은 이것입니다. 얼마나 악한 유다인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유다의 아내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죽고 난 후, 곡을 하는 기간이 끝나자마자,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가서 그는 욕정을 보이며 음란한 마음을 품으며 창녀를 찾게 됩니다. 그때 딤나로 올라간다는 말을 들은 며느리 다말이 창녀 행세를 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전혀 자신의 며느리인지 알지 못한 채로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게 됩니다. 정말 성경에 등장해서 설명하고는 있지만 도무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그 다말이 유다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고, 다말은 유다의 아들로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되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고스란히 기록됩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태복음 1장 3절A, 새번역>
창세기 38장까지의 유다와 오늘 우리가 44장에서 만나고 있는 유다는 분명히 같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무엇 때문에 그가 이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같이 살게 되었는지, 어떠한 계기로 소위 막 살던 유다가 이제는 이렇게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자신이 모든 가족을 대신하여 희생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득 예수님의 이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마태복음 16장 26절, 새번역>
아무도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놓을 생각조차 못 할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동생을 살려 보내려고 했던 유다의 모습은, 앞으로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충분히 연결해 볼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의인보다는 죄인에 가까웠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세상의 방법대로 살던 유다였습니다. 동생을 구덩이에 던지고도 그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잔혹함을 가진 인간이었고, 동생을 팔아버린 것에 조금의 죄책감도 갖지 않던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기 일쑤였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윤리와 도덕은 무시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죄인이었고, 악인이었고,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살아온 그대로 인생을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런 유다에게 오늘 요셉이 계획한 사건을 통해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 앞에서 회개할 기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말할 기회,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행히 유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래서 이 모든 일의 해피엔딩을 만들어 내는 다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악인에다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수많은 죄인들은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와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유다를 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 또한 유다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한 너무도 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구제불능인, 정말 제 멋대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사람, 그 존재가 인간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장 24절, 새번역>
하지만 과거의 그 유다가 아닌 변화된 유다를 통해 요셉의 가족은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꿈에도 그리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고센 땅에서 가뭄과 기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아버지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장 8~10절, 새번역>
그래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약속대로 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됩니다. 도무지 저런 유다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창세기 44장 이전의 유다의 모습과 동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라도 창세기 44장 이후의 유다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은혜의 초청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다를 보면서 메시아가 나올 조상이 되는 지파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축복이 요셉이 아니라 이런 유다에게 흘러가겠습니까? 동일합니다.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서 예수가 흘러가겠습니까? 죄인인 나에게서 어떻게 그런 일이 펼쳐지겠습니까?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늘도 꿈꾸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죄인이 의인의 길에 들어서도록 이미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마치 유다가 자기의 방법대로 살던 것을 청산하고, 아무리 많은 죄악 속에 있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희생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오히려 요셉과의 일화 속 주인공이 되어 의인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 시대의 모든 유다들에게 권합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의인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됩니다. 죄인임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유다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 곳곳에 예수님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화해의 현장, 용서의 현장, 은혜의 현장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그 어떤 과거를 가졌다 하더라도,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하나님을 멀리 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일으켜 세우십니다. 새롭고 산 소망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걸음 돌이켜 여호와께 돌아갑시다.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결단 찬양 – 은혜 아래 있네 +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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