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변천에 따른 아디다스의 마케팅 전략
1900년에 출생한 아돌프 마슬러(Adolf Dassler, 이하 아디)는 1924년 두 살 위 형인 루돌프 다슬러(Rudolph Dassler)와 함께 ‘Dassler Brothers Shoe Factory Herzogenaurach’라는 신발 공장을 설립했다. 동생 아디는 조용하고 예민한 개발자였고, 형 루돌프는 외향적인 성격의 세일즈맨이었기에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경영했다. 이때 회사에서는 그의 가족을 포함한 12명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제작하는 가내수공업 수준의 중소기업이었다.
창업한 지 85년이 지난 지금 아디다스는 108억 유로의 매출을 기록하는 유럽최대의 스포츠 기업이 되었고, 현재 아디다스 그룹은 리복(Reebok), 골프 장비업체인 테일러 메이드(TaylorMade), 그리고 수영용품 업체 아레나(Arena)를 소유하고 있다.
유럽 스포츠의 확대와 함께 스포츠 용품회사도 발맞추어 성장해 왔다. 그 중에 스포츠용품의 대명사가 된 아디다스의 마케팅 방법은 전통적으로 일류선수에게 아디다스 신발로 우승하거나 승리하는 방식을 택해왔고 성공적이었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25년, 아디는 대장장이였던 그의 친구 크리스토프 젤라인의 도움을 받아 못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러닝 스파이크를 개발했다. 스파이크를 단 러닝화는 트랙과 필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아디는 처음으로 이 신발을 선보였다. 그리고 1932년 LA 올림픽에서 아서 조나스가 아디의 운동화를 신고 육상 100m에서 동메달을 땄다. 이때부터 아디의 회사는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에 직접 뛰어들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거의 모든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이 아디의 운동화를 신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선수들의 요구에 따라 아디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육상스타가 미국의 제시 오웬스라는 것을 안 아디는 바이에른에서 베를린까지 직접 차를 운전해 선수촌에 찾아가 오웬스에게 스파이크 달린 경기화를 보여주며 시합에서 신어주길 요청했다.
오웬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흑인인 오웬스가 아디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4개의 종목(100m·200m·400m 계주·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
아리안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히틀러가 관전하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더욱 통쾌한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오웬스가 신은 경기화 '다슬러 슈즈'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판매고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세계 각국의 국가대표팀이 아디의 운동화에 관심을 표했고, 아디의 신발 사업은 번창하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전까지 매년 2만 켤레의 운동화를 판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오웬스에게 아디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어준 것에 대해서 금전적인 보상은 없었다. 세계 100미터 기록보유자인 유세인 볼트가 그때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돈방석에 앉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오웬스를 포함해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다슬러의 신발을 신은 선수들이 따낸 금메달은 40여 개에 이르러 상품 인지도를 세계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된다.
1947년에 동생과 분리해 별도의 회사인 퓨마를 설립한 루돌프가 사업적으로 실패한 것은 독일 축구대표 감독과 언쟁을 벌이면서 사이가 나빠지고, 이런 상황에서 1954년 월드컵에서 아디다스가 독일 대표팀에 운동화를 공급하게 되면서이다. 당시 서독은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이기고 우승하였고, 아디다스의 상품 가치를 퓨마 수준으로 끌어올린 발판이 되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남자 100m 우승자인 독일의 아르민 하리는 원래 아디다스를 신었습니다만, 이재에 밝았던 하리는 경기 전 아디에게 보상으로 돈을 요구했다. 당시로서는 선수에게 용품 사용으로 인한 돈을 지불한 적이 없었지만, 루돌프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스포츠 마케팅 사상 최초로 선수에게 돈을 주고 용품을 공급한 사례로 기록된다.
한편,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결승전에서 펠레의 활약으로 브라질이 3번째 우승하며 쥴리메컵을 영구 보유하게 된 경기였다. 그런데 스포츠 마케팅 역사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결승전 중에 일어났다. 경기 시작 바로 직전 펠레가 주심에게 신발 끈이 풀렸다며 양해를 구하고, 펠레가 자신의 축구화 끈을 다시 매는데 TV카메라가 펠레가 신은 축구화를 비췄던 것이다.
축구 황제 펠레가 신은 '퓨마' 로고가 선명한 축구화가 전세계에 방송을 타게 된 장면이었다. 펠레가 신은 '퓨마 축구화'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이 장면은 펠레가 퓨마로부터 당시 12만 달러라는 거금을 받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장면이었다. 알려진 바 없지만, 당시 TV카메라 감독도 수입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스포츠와 상업주의가 서로의 이해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임을 알려준 계기였다.
2006년 독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본선 조추첨 식장에서 ‘아디다스(adidas)’의 마케팅 역량이 집중되었다. FIFA월드컵의 공식 스폰서이자 독일 대표팀 후원업체인 독일계 스포츠 메이커 ‘아디다스’는 조추첨 행사를 자사 홍보 무대로 활용했다. 일단 조추첨 메인 행사 못지 않게 펼쳐진 것이 바로 그들이 제작한 역대 월드컵 공인구에 대한 소개와 대회 공식 축구공인 ‘팀가이스트(Teamgeist)’에 대한 홍보가 하이라이트였다.
이때 독일 축구 스타 발락이 나와 전세계 30억 인구가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있는 본선 조추첨 식장에서 볼 트래핑을 보여주며 “아디다스가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라고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조추첨 첫 순서였던 축구 스타들의 월드컵에 대한 기자 인터뷰에서도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아디다스 모델들이었다. 지단, 베컴, 카카, 네스타, 발락 등이 등장했지만 나이키 모델인 호나우두, 호나우딩요, 앙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것은 아디다스와 FIFA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아디다스는 독일, 스페인, 준우승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등의 공급자였다. 라이벌기업인 퓨마는 우승국 이탈리아를 비롯해 스위스. 파라과이, 폴란드 등 11개 국가에 용품을 지원했다. 나이키는 브라질을 비롯하여 한국과 4강국 포르투칼, 히딩크의 호주 등에 용품 공급사였다. 전 세계 스포츠용품 회사의 부동의 1위 기업 나이키도 축구에 관한한 아디다스에 뒤져 점유율 30%로 2위이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어, 아디다스는 번창하고 있는 반면 퓨마는 고전하는 브랜드가 되어 구찌(Gucci)의 소유자인 프랑스 재벌기업 PPR의 손에 들어갔다.
아디다스가 스폰서를 하고 있는 유명 프로 클럽들은 레알 마드리드, 첼시, 리버풀, 마르세이유, 바이예른 뮌헨, 벤피카 등이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공식축구공인 ‘자불라니(Jabulani)’ 도 아디다스가 제작했다.
참고로 1949년에 아디다스(adidas AG)로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회사이름 아디다스가 ‘All Day I Dream About Soccer’의 약자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창업자의 이름 아돌프(Adolf)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Dassler에서 ‘Das’를 합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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