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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1-12 가난의 축복
(2010.05.16, 주일예배)
주변의 아픔
제가 지난 월요일에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데…제가 지난번에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업시간에 제가 교수님에게 우리 다 같이 토론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질문을 했더니…어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 하나가 “예~예, 뭐 다들 그런 거죠.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까? 헤헤, 뭐 예~예.” 제가 지난번에 이런 설교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너무나 황당해서 “에이, 내가 다시는 총신에서 질문 안 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이분이 언젠가 쉬는 시간에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가려고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는데…무슨 사정이 있어서 못 갔다고…그래서 이제 국내에서라도 학위를 따야겠다고 해서…저는 그저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우리 교단에서 가장 인정해주는 그런 신학교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를 나왔다고 하면…아무도 그 사람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신학교입니다.
그래서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지난 월요일에 수업을 하는데 수업이 거의 다 끝날 때쯤 돼서 갑자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서…다들 놀래서 뒤를 돌아보는데…이분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었습니다. 그것도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아주 세게 부딪히면서…. 이 사람은 간질이었습니다. 그것도 목회자에게 아주 치명적인…그래서 목회를 아예 할 수 없는…그래서 어떤 교회도 이분을 목사로 청빙하지 않을 그런 간질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아주 큰 슬픔이 밀려오면서…그동안 이분이 했던 말이 주마등처럼 다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할 정도로 수업시간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또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못 갔다는 이유가 그제야 다 이해가 되고…또 ‘저런 몸으로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나…더구나 목사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제 마음속에서 아주 격한 감정이 요동치고…그런데도 저렇게 공부를 한번 해보겠다고 버티다가…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아주 “쾅~”하고 부딪히면서 쓰러지고….
판단의 상실
그 다음부터는 제 머릿속이 아주 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분에 대한 모든 판단이 다 정지되어 버렸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분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순간…이분이 제 마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분에게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 내내 제 마음에 아주 참담함을 느끼면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간질은 목회자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분이 목사가 됐는데…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나. 도대체 누가 저 사람을 용납해주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니까…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 제발~저분을 좀 살려주십시오. 이 살벌한 목회현장에서 하나님 제발~저분의 생명을 좀 지켜주십시오.”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듣던 학생들 전부가 다 목회자들이기 때문에…그리고 이것이 어떤 병인지를 알기 때문에…다들 마음속에 아주 큰 분노를 느끼면서…마치 예수님이 병자들을 보시고 마음속에 아주 큰 분노를 느끼신 것처럼…우리도 마음속에 아주 큰 분노를 느끼면서…또 우리 인간이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그런 죄와 고통을 느끼면서…그렇게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교실 안에서 같은 목사님들끼리…무슨 보수와 진보…그리고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또 영남과 호남…교인 수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런 식으로 갈기갈기 찢겨서…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였던 모든 것이…단 한 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는…그런 허탄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과 그것을 개혁하려는 사람 사이의 싸움이…아무 의미도 없는 허탄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 한 사람이 당한 슬픔 때문에…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고…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며…얼마나 슬프게 하는지를…우리 모두가 두 눈으로 아주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사람
우리 모두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결정적인~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변하게 했어요? 그것은 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서로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인간이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이때부터 우리는 전혀 타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늘 내 안에 있는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애를 서도 시어머니가 껄끄러운 것은…시어머니가 내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밖에 있는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집안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게 반찬이냐? 이게 풀이지 반찬이야?”라고 했을 때…이게 며느리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이지만…아들에게는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 참 까다롭네.” 하면서도 결국 밖에 나가서 고기를 사옵니다. 그래서 늦은 밤이라도 어머니에게 고기를 구워드리죠.
왜 그렇습니까? 아들에게는 어머니가 내 안에 있는 내 식구이지만…며느리에게는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그런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당신 시집온 지 벌써 몇 년인데…아직도 우리 어머니가 타인이야~. 어~. 당신 며느리가 돼 가지고 도대체 왜 그래?”
그러나 이제 입장을 바꿔서 처갓집에 갈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부인은 아무리 피곤해도 이게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댁에서는 아무리 시집살이를 해도…자기 친정에 갈 때는 눈이 아주 초롱초롱 하죠. 그 대신 남편은 어떻습니까? 명절이 되면 자기 집에서는 눈이 아주 빨개질 때까지 고스톱을 치다가…부인이 처갓집만 가자고 하면…그때부터 갑자기 피곤해지죠. 왜냐하면 아직 처갓집은 내 안에 있는 내 식구가 아니라…내 밖에 있는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남편 탓만 할 수도 없고…부인 탓만 할 수도 없는…그런 인간 본연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너와 내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와 내가 오직 타인으로만 만나면…서로 부딪혀서 상처받는 일 밖에 없습니다. “네가 왜 내 일에 간섭하고…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우리 둘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냐?” 이렇게 나오니까…만나면 싸움 밖에 안 되고…서로 고통 받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상대방이 내 안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러면 그 즉시 우리 안에서 천지가 개벽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밉던 며느리가 예뻐지고…그렇게 고통뿐이던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이제는 마치 친정어머니처럼 포근해집니다.
낯선 하나님
이제 이것을 신앙의 영역으로 좀 더 확대해봅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은…세상이 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내 식구가 되지 못하고…하나님이 늘 내 밖에 있는 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이 섭섭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 나가는 부자들의 하나님이지…나 같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도 이런 얘기를 안 하죠.
그러나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가장 파먹는 원수가 바로 이 차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차별하죠. 그래서 하나님을 거의 안 믿고 싶을 정도로 차별하죠. 또 아예 세상으로 가버려서 “하나님이 나 안 도와주셔도…내가 내 힘으로 성공할 테니까…하나님, 제발 방해만 하지 마세요. 예? 하나님, 나 하나님 잊어버리고 이제 내 맘대로 살 테니까…하나님, 제발 내 일에 방해만 좀 하지 마세요. 도대체 내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요?”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아주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도 말을 안 하지만…우리는 이런 불만으로 아주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교회 안에서도 다 같이 힘들 때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힘들 때는 “그래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드니까…우리 다 같이 위로하면서 살자. 우리 서로 살을 맞대고 비비면서 살자.” 이것이 가능한데…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사법고시에 붙거나…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100억, 200억대의 재산가가 되면…그때부터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 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타인이 됩니다. 아주 바로…아주 순식간에…타인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잘 사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지…못 나고 실패한 내 하나님은 안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리 고개가 있었을 때는…밖에서 쌀뜨물 한 바가지만 얻어 와도…이것을 사카린을 좀 넣고 끓이면…이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고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마을 입구에 있는 제 친척집을 지나가다가 슬쩍 보니까…그 어려운 시기에 제 친척은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는 걸 보면서…제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고 기분이 나쁜지…이것이 평생 제 마음에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부모가 똑같이 새벽기도를 했는데도 어떤 아들은 대학에 덜커덕~하고 붙고…어떤 아들은 재수 삼수까지 하다가 결국 안 돼서 군대 가고 말이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해서 아주 큰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는데…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고 말이죠?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제일 부러웠던 것이 서울대 빼지였습니다. 이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제가 요즘에 이런 얘기를 하면…우리 학생들한테 무지무지 욕을 먹죠. 지금은 4년제 대학이라도 가면 다행이니까 제가 무지무지하게 욕을 먹지만…어쨌든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그랬어요. 그래서 서울대 빼지를 보면 어떤 경외심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단 배지는 “자유, 정의, 진리” 이렇게 써 있었는데…서울대 배지는 “베리타스 룩스 메아” 이렇게 라틴어로 써 있고 말이죠?
해석의 문제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있는 것을…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바로 여기서 우리 한국교회 설교가 보통 세 가지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아주 전통적인 설교를 하시는 분들은…“여러분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세요.” 이렇게 설교를 하지만…이것은 우리의 현실과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상위 10%도 안 되고…나머지 90%는 일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주일 전에 우리 장모님이 수술을 하셔서 병문안을 갔는데…마침 옆 병실에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 한국교회의 너무나 전통적인 그런 기도였습니다. 이때 환자가 암환자였는데…암은 초기가 아닌 이상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분도 체중이 많이 줄어서 거의 암 말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머리도 짧게 깎고…이미 많은 각오를 하고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도 같이 오신 권사님들과 목사님이 하시는 기도 내용이 “하나님, 우리 ○○○ 집사님 반드시 낫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믿음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나서…이 환자에게 권면하는 말도 “집사님, 꼭 믿으세요. 믿음대로 되니까 꼭 믿으세요. 집사님, 알았죠?” 제가 이렇게 권면하는 분들의 마음은 이해하겠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환자에게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주기 위해서…굳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사람들의 그 심정은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문제는…그러다가 안 되면 이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믿지 않는 남편과 자식들이 전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목사님이 믿음대로 된다고 했는데…우리 어머니 왜 안 고쳐주셨냐고…그 원망이 전부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고난을 참으면…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난을 보상하고도 남을 물질적인 축복이 돌아온다고 믿는 것은…우리의 실제 현실에 맞지 않는…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면…늘 하나님이 원망스럽고…괴롭고…그래서 인생이 해석이 안 됩니다. 인생이 해석이 안 돼요.
그 다음에 우리 한국교회의 두 번째 설교 패턴은 “여러분, 이 세상의 욕망은 다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설교는 우리 한국교회의 개혁그룹에 속한 상당히 영성 있는 분들이 하는 설교패턴입니다. 저도 이런 설교에 100% 동의하고…우리 한국교회에 이런 설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만…이런 설교도 우리의 고통을 다 설명해주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좀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그래도 좀 부족한 것이 있어요.
가난의 신학
그래서 세 번째의 해석이 필요한데…바로 이것이 제가 평생을 걸쳐 연구하고 싶은 ‘가난 한 자를 위한 신학’ 또는 ‘고통 받는 자를 위한 신학’입니다. “그럼 목사님은 부자들은 다 제쳐놓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목회만 할 겁니까?” 그게 아니라…저는 이 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그리고 전 세계의 90% 이상을 차지하는…그런 대중을 위한 신학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할 바에는 대다수의 대중들을 위한 신학을 하지…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신학을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세 번째 해석은…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가난하게 살고…억울하고…남에게 상처를 받고…힘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것이 더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쭉 한번 훑어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총 9번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원을 하나 그려놓고…“이 원 안에…이 서클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서클이 어떤 서클입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신학과 제 인생의 모든 지향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모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서클이 어떤 서클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바로 이런 서클입니다. 바로 이런 서클 안에 있어야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클은 단 하나…단 하나의 특징만 갖고 있는데…그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기 때문에…건강도 빼앗기고 물질도 빼앗기고…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다 빼앗기고…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겼기 때문에…오직 하늘을 향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 외에는…아무 것도 할 수 없는…그런 식물인간 상태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병원에 가서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숨을 쉬는 것 외에는…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 구경을 갈 수가 있습니까? 또 맛있는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 어디 밖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누가 호스만 살짝 빼도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이 세상의 모든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보다…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돈이 없고 이름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또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어서…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그저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바로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의 인종
이쯤 되면 여러분의 눈앞에…당장 세계지도가 그려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잘 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그리고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면 건강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렇게 딱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문명화된 나라가 있고…또 지구본을 놓고 보면 20-20창이라고 해서…이 세상에서 가장 못 살고 개발이 안 된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나라들은 저주 받은 나라라고…그래서 애들이 불과 10살이 되기도 전에 거의 50%가 죽고…전염병과 풍토병이 창궐하고…전쟁과 기근, 그리고 처처에 종족 분쟁으로 죽어가는 이런 나라들을 보면서…얼마나 저주 받았으면 저렀냐고…이 세상에 태어나도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이것을 먼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번 말해봅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잘 사는 선진국과 못 사는 후진국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진국 사람들이 더 죄를 많이 짓겠습니까? 아니면 후진국 사람들이 더 죄를 많이 짓겠습니까? 당연히 선진국이죠.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돈이 있어야 죄를 짓는데…후진국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싶어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굶어죽거나 아니면 병들어 죽기 때문에…후진국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남의 집 담을 넘을 수는 있어도…그래도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죠. 다들 굶어죽는 판에 이웃집이라고 먹을 것이 있겠습니까? 반면에 선진국 사람들은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밤에 도시에서 온갖 쾌락을 다 즐기거나…아니면 돈을 주고 어린 학생을 사서 원조교제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때문에 지옥을 만드셨을 때…다 같이 예수를 안 믿어도…누가 더 지옥 밑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누가 더 지옥 아랫목을 차지하겠어요? 당연히 돈이 있어서 죄를 지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놓고 보면…돈이 많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죄를 많이 지을 수 있는 선진국 사람들이 결코 축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건 영적으로 보면 완전히 재앙입니다. 이 땅에서의 쾌락을 위해서…자기 영혼을 팔아먹는 그런 재앙이에요.
반면에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사로처럼 개가 그 헌데를 핥고…지나가는 개가 막 내 상처를 핥고…예수님처럼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어서…아주 쪼그만 방 안에서 다섯 식구가 한데 엉켜서 자고…평생 동안 내 이름 하나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TV에서 가난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볼 때마다…‘저 사람들이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천국에 훨씬 더 가깝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더 쉬운 천국을 주셨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선진국 사람들에 비해 지옥불도 훨씬 덜 뜨겁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 목사님, 돈 있다고 다 죄를 짓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더 높아집니다. 풍선을 불어가지고 힘껏 쥐어짜 보십시오. 그러면 그냥 내버려두면 안 터질 것이…풍선 옆구리를 이렇게 힘껏 쥐어짜면…“빵~”하고 터지면서…그 안에 있는 공기가 밖으로 힘껏 분출됩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평소에는 안 찾던 하나님을 힘껏 찾을 수밖에 없고…또 그 고통이 일평생 계속되는 무명의 설움으로 지낸 고통이라면…또 그 고통이 일평생 몸이 아파서 그저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라면…그때 분출되는 하나님을 향한 에너지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면 힘든 사람들은 다 그러냐? 그렇지는 않죠. 그래서 세상이 살기 힘들수록 더 술을 먹고…더 부패하고…더 방탕한 사람들이 많죠.
물물의 교환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그렇게 끝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적인 물물교환이라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저 하늘의 영역에서는 영적으로 파산할 가능성도 그만큼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회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새벽기도도 잘 나오던 사람이…회사 매출이 200억, 300억 이렇게 막 뛰니까…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다가…어느새 회개가 불가능한 강퍅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도 경매에 넘어가고…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라면 하나 사먹으려고 해도 지갑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먼저 확인을 해야 되고…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 가고…그 자리에서 죽을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하늘의 이슬과 기름짐이라는 풍성한 은혜의 선물이 내려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에…우리에게서 하나를 거두어 가시면 다른 하나를 주시고…또 우리에게서 물질을 거두어가시면 영의 선물이라는 더 좋은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렇게 하시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나쁜 것을 거두어가시고…반대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다가 교회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쓸쓸하게 죽어도…이분의 인생이 이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 목사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서…이 목사의 십자가의 삶을 발판으로 삼아서…이 목사의 아들들에게 더 많은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쓸쓸하게 죽어도…그 아들들은 이 세상에 남아서…아버지가 못다 이룬 영적인 일들을 다 이루어냅니다. 그러니 이런 삶은 실패가 아니죠. 오히려 자기 아들들을 통해서 미래를 기약하는 더 풍성한 삶이죠.
상실의 축복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상실”에 대해서…그래서 돈을 잃어버리고…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경제적인 든든한 버팀목을 잃어버리고…명예를 잃어버리고…건강을 잃어버리고…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이제는 이걸 완전히 거꾸로 생각해서…오늘 말씀에 나오는 산상수훈처럼…우리 인생에서 상실이 더 큰 축복이고…우리 인생에서 안 되는 것이 더 큰 축복이고…우리 인생에서 이름 없는 것이 더 큰 축복이고…우리 인생에서 돈이 없고 백이 없고…가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더 큰 축복이고…이런 모든 것이 하늘나라에서는 거꾸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프리카 사람들이나…우리 사회의 무시 받는 사람들에게…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몹시 당황하고…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당신 지금 제 정신이냐는 소리를 해도…저는 아주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당신들 더 배고프십시오. 당신들 더 많이 외로우십시오. 당신들 더 많이 무시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아주 큰 상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는다면 하늘에서 아주 큰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이 땅의 사람들과 완전히 역전된 신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많이 파산한 때가…반대로 가장 많은 영적인 복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시고…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우리 목사님이 정신이 이상해지셨구나.” 이런 생각 마시고…이런 말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이 오늘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핍박하고…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너희에게 복이 있나니…기뻐하고 즐거워하라…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여러분이 현재 당하는 고난을 감사하시고…“산상수훈의 복” 즉 이 세상에서 “상실의 복”을 누리는 것을 감사하시고…즐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십자가 길을 가는 것 때문에…이 땅에서 더욱 고생하고…이 땅에서 더욱 이름 없는 것이…하늘에서 더욱 큰 상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중국에 서베드로 선교사입니다.
이해주 목사님 연락처를 부탁 드립니다.
옛날 한교회를 섬겼던 선교사입니다.
제가 전화번호를 아는데 부천소정교회 닫으시고 나서 번호가 바뀐것 같습니다. 저도 연락을 좀 하고 싶어요.
선교사님께서 이해주 목사님 연락처를 알게되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