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과 그의 시대 |
정 지 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
『바람의 사상. 시인 고은의 일기 1973-1977』(한길사) |
모든 작가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아무리 시대를 앞서간 천재도 그 시대의 특이한 기후와 토양이 키워낸 특산품일 뿐이다. 가령 독일의 천재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는 의과대학생으로 비밀지하운동에 뛰어들어 수배와 망명생활을 하면서 20대 초반의 3년 동안에 드라마『당통의 죽음』과『보이체크』, 소설『렌츠』 등 걸작들을 써냈다. 그는 약관 23세에 쮜리히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티푸스로 2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뷔히너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 것은 그가 자기 시대의 문제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치열하게 대결하였기 때문이라고 평론가 한스 마이어(1907-1998)는 말한다. 마이어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생활을 하면서 20대의 마지막 3년 동안 혼신의 열정을 쏟아 써낸 뷔히너 평전의 제목은 『게오르크 뷔히너와 그의 시대』였다. 한 천재작가를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마이어식 평전의 전범은 그 후 김윤식의『이광수와 그의 시대』(1986)로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 이 평전은 ‘조선의 3대 천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춘원 이광수의 비범한 문학적 재능이 시대와 부대끼면서 어떻게 변질되고 오도되고 소모되었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 역작으로 꼽힌다. 결국 긍정적인 인물이든 부정적인 인물이든 모든 천재 작가의 전기는 일방적 우상화를 미덕으로 삼는 위인전기나 ‘측근이 뒤늦게 털어놓은 천재 시인의 숨겨진 사생활’ 식의 야화가 아니라 『000와 그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모든 천재 작가는 그 시대의 특산품 『바람의 사상. 시인 고은의 일기 1973-1997』(한길사)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바로 ‘고은과 그의 시대’, 즉 ‘고은과 유신시대’의 증언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고은(1933- )은 1958년에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 이후 1970년대까지 ‘천재와 허무와 광기의 시인’으로 회자되었다. “시인 고은은 아마도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이다. 60년대 이래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의 그는 허무주의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살미수자, 유미주의자, 환속 승려, 청진동의 음산하고도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그런 것 속에서 꽃피어난 귀면(鬼面) 바로 그것이었다.” (김승희) 그후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천재적인 시인이며 소설가요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임헌영)로 바뀌고,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우리 시대의 시인”(김윤식)으로 규정된다. “고은의 상상력, 세계를 투시하는 예감,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 이것들이 정말 모두 한 사람에게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귀재가 우글거리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이다”(김병익)라는 찬사도 뒤따른다. 그러나 “한울님이 운명적으로 내려준 '신의 선물이요 축복'”(김준태)인 고은도 결국 시대의 산물이라는 확실한 물증을 나는 그의 일기에서 발견한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분단시대, 매판시대, 그리고 육군과 남산의 시대”(75년 11월 2일자 일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앞으로 본문 인용은 쪽수보다는 날짜로 표기한다.)를 거치면서 서서히 순수의 시인에서 참여의 시인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 스스로도 낯설어 한다. “허무의 시인이 시대의 시인이 되어버렸다. 낯설다. 낯설다. 아주 낯설다.”(75년 11월 13일)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70년대로부터.” (장시 『萬人譜』1권의 ‘작자의 말’) 허무의 시인에서 시대의 시인으로 허무와 방랑의 시인이 역사의 요구에 눈을 뜨게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 계기와 단계가 있었다. 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197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태일 분신사건(1970년 11월 13일)은 그를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낸 강력한 충격이었다. “평화시장 헌책방을 돌았다. 문득 생각났다. 전태일이 쓰러진 곳이 어디일까 하고 청계천 저쪽을 보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73년 6월 12일) “아침 청진동 다방에서 옆자리 젊은이들이 전태일을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몰래 들었다. 나와 똑같은 의미도 주고받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73년 12월 14일) 1972년 10월의 유신선포로 박정희의 종신독재체제가 확립되고 73년 8월에는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어 국내로 끌려온다. 그러자 10월 이후 대학생들의 데모가 잇달아 일어나고 한국, 동아, CBS 등 각 언론사 기자들과 편집인협회가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나서면서 개헌논의의 물꼬가 터진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74년 1월 7일에는 문학인 61명이 개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고은은 박태순의 권유로 여기에 동참한다. 그는 다음날(1월 8일) 남산(중앙정보부) 요원과 만나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본래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신념이라기보다는 상식이라고 말했다. 나도 이제 정치적인가. 맞지 않는 양복 같다.” 그날 오후 5시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시킨다. “암흑이 시작되었다.” 문인 성명에 참여한 정현종은 신문사에서 쫒겨나고, 안수길, 백낙청, 김윤식, 이문구 등 서명 문인들은 남산에 끌려가 자술서를 쓴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시오. 이곳에 오는 길은 죽음의 길일 수도 있소”라는 수사관의 엄포에 일초(一超) 선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결심을 한 목숨 아닌가요.”(74년 1월 26일) 문인간첩단 사건과 긴급조치 9호, 민청학련 사건, 지학순 주교의 체포,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등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고사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시인 고은은 은유를 거부하고 직설의 문학을 선언한다. “「서울신문」의 내 글 암시뿐이었다. 언론 자유, 표현의 자유는 지금 사치인가. 내 생애 안에 표현의 자유가 있을 것인가. 찾아야 할 자유는 공짜의 자유가 아니다. 시의 깊은 골짜기에 남겨진 모든 둔사(遁辭)들을 불태워버려라. 은유의 나약함에 길들여지지 말라. 예술은 때때로 직설로 돌아가야 한다. 문학은 자주 비문학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야만에 대해서 야만이거라. 호수의 고요는 태풍의 바다에 에워싸인 허망이다.”(74년 9월 10일) 이 같은 의식의 전환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결성(74년 11월 14일)과 문인 101인 선언(11월 18일), 민주회복국민회의 참여(11월 27일) 같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의 할복은 고은에게 또 다른 충격을 준다. “아 나도 언젠가 배를 가르든지 몸을 불태우든지 해야 할 것이다.”(4월 13일) 그는 경찰의 봉쇄를 뚫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김상진 추모집회에서 추도시를 낭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곡동 자택에 김상진의 상청(喪廳)을 차리고 49재를 지낸다. 77년에는 김상진 추모의 밤과 2주기 추도식을 주도한다. 이제 고은은 시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행동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74년 10월에는 동아, 조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사의 기자들이 자유언론선언에 나서고, 뒤이어 동아일보 광고탄압으로 익명의 격려광고가 이어지면서 “어느 의미에서 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익명의 시대로 특징지었다.”(『기자협회 10년사』, 1975) 뒤이어 언론자유 투쟁을 벌이던 동아, 조선의 기자들이 대량 해고되면서 일종의 재야 지식인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그 연결고리가 바로 고은이었고, 그의 화곡동 집은 그 아지트가 되었다. 이 시절의 신산고초를 함께 겪은 작가 이문구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러면 이때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사생활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화곡동 자택도 책이 반을 차지한 서재 한 칸 외에는 언제나 만인에게 공개된 상태였다. 실천 문인, 해직 교수, 해직 기자, 해직 근로자, 학생운동가, 수배된 인사, 출옥한 양심범, 양심범 가족들이 먹고 자고 쉬어가는 민주 대합실이자 민주의사당이요, 무료 여인숙이었다. 그래서 택호도 화곡사(禾谷寺)로 통하였다.”(‘5세 신동의 50년. 고은’, 『이문구의 문학동네 사람들』) 1970년대, 고은의 글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분출한 결과 이 일기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정치적으로 유신시대로만 규정돼온 1970년대의 문화사적․ 생활사적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 73년 서울의 변두리 화곡동으로 이사하면서 시인은 연탄과 쌀, 소주와 원고지를 생활필수품으로 조달하면서 가정부(식모)의 도움으로 누추한 노총각의 삶을 살아간다. 생활사적으로 보면 1970년대는 연탄 난방 시대였으므로 때로는 홍이섭 같은 저명한 역사학자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일도 일어난다.(73년 3월 4일) 그리고 전화가 없어서 출판사나 동료들은 급한 일이 있으면 같은 서울 시내에서 전보를 친다. 75년에야 전화가 개설되지만 이제부터는 도청을 통해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게 된다. TV도 시인에게는 갈등의 원천이 된다. “TV를 보았다. TV를 보면서 TV를 욕하면서 TV와 싸우면서 TV에 끌려가 TV에 완패 당했다. 라디오까지가 인류의 행복이고 자전거까지가 인류의 미덕이다. 그것을 넘으면 인류는 더 노예가 된다. 군중이 되고 만다” (73년 7월 7일). 시인과 기계문명과의 불화는 운명적이다. 고은은 아마 이 시대에 다른 직업 없이 글만 써서 먹고 산 거의 유일한 자유문필가로 기록될 것이다. 신문 연재소설을 쓰지 않고 원고료와 인세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원시적인 방식으로 방바닥에 엎드리거나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볼펜이나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잠시 타자기를 배우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한 자 한 자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육필로 원고지를 채워가는 가내수공업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100매 이상을 쓰는 일이 허다하고 때로는 기자가 기다리는 동안 즉석에서 원고지 2, 30장을 써주기도 한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에세이, 평론, 평전, 시나리오, 희곡, 노래 가사 등 문학 전 장르에 걸쳐 폭발적인 생산량을 과시하여 한 해에 서너 권의 저서를 내놓는다. 오로지 육필노동으로 집도 사고, 가계를 꾸려가고,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동생의 병수발을 하고, 어디 그뿐이랴, 숱한 문우들과의 술값, 밥값을 감당하고, 투옥 문인들의 옥바라지까지 해낸 그의 놀라운 원고 생산력은 타고난 글재주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분출한 결과일 뿐이다. 이 궁핍한 시대를 헤쳐갈 그의 생계수단은 바로 온몸으로 밀어붙이는 글쓰기 노동밖에 없었다. 이문구가 ‘고은의 청진동 시대’라 명명한 1970년대에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청진동·관철동 일대의 출판사와 잡지사, 신문사, 그리고 빈대떡 골목과 해장국 골목의 술집들이었다. 그의 일기에 나오는 대로 적어보면, 민음사와 신구문화사, 『한국문학』,『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심상』, 『문학사상』, 『세대』등의 잡지사, ‘사슴’과 ‘낭만’, ‘나폴레옹’, ‘가락지’, ‘열차집’, ‘실비집’, ‘물문집’ 등의 술집, ‘세진’, ‘귀향’, ‘귀거래’ 등의 다방, 재수생들의 싸구려 밥집인 ‘촌밥집’ 등이다. 이러한 여러 업소들을 연결하면 70년대 전반기 한국문학의 개념도가 그려질 터인데, 크게 보면 박태원의 구보 씨가 노닐던 1930년대 경성의 동선과 최인훈의 구보 씨가 거닐던 1970년대 서울의 동선이 모두 이 지도 위를 맴돌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해직기가와 해직 교수, 실천 문인, 학생운동가 등이 이 개념도의 주변부 곳곳에 둥지를 틀고 소규모의 출판사를 차리면서 문학의 영토도 그 외연이 확장된다. 고은은 청진동시대의 순수문학 장르인 시와 소설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에세이와 평전, 평론, 한시 번역과 주석 등에서도 엄청난 생산량을 기록하며 이러한 영토 확장에 앞장선다. 작가나 예술가의 평전, 논픽션이라 불리는 현장 보고서, 노동자의 자전적 회고록,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시각과 안목을 일깨우는 계몽적 평론과 에세이 등, 고은이 말한 ‘비문학’의 영역이 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출판계의 신세계로 등장한다. 아울러 김민기, 양희은의 민중가요와 오윤의 민중판화, 임진택, 채희완의 마당극 따위 민중문화운동의 씨앗은 이미 70년대의 토양에서 발아하여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1976년 12월 1일자 일기에는 신생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청년사의 한윤수가 등장한다. “민청학련사건 출신의 청년사 황윤수(한윤수의 오기)가 왔다. 『논픽션 총서』에 내가 쓴 「김관식 평전」실린 것 가져왔다. 고료 사절했다. 시금치죽과 소주를 함께 마셨다.” 일초 선생의 무심한 한 줄의 잘못된 기록(또는 출판사 교열담당자의 실수인지도 모른다. 77년 1월 27일자 일기에는 한윤수로 표기되어 있다)이 흐릿한 기억의 회로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70년대 후반의 청년사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의 청년사 시절(1976-1980) : 민중적 이미지 굳어져 1976년에 문을 연 출판사 청년사는 사직공원 앞 내수동 골목의 허름한 2층 사무실에 세 들어 있었다. 저녁 무렵에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허름한 사무실에는 인류학 강사인 박현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최민, 화가 오윤, 그의 누나인 오숙희, 한윤수의 친구인 김성겸, 구연철, 안승원, 최준석, 그리고 극작가 안종관과 시인 정희성 등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 이밖에도 한국일보를 거쳐 나와 같은 통신사 외신부에 근무하던 김태홍, 최민의 동생인 한국일보 기자 최욱과 그의 친구인 시인 김창범, 번역가 겸 소설가 이원방, 카톨릭 원주 교구에서 일하는 김헌일, 한윤수와 같은 외교학과 출신이면서 외교와는 절교하고 소설가와 사진작가의 길을 준비 중인 김대식 등이 청년사의 단골들이었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5년 동안 활발하게 책을 낸 청년사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와는 달랐다. 우선 출판한 대부분의 책들이 이론서나 창작물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나 논픽션이었다. 첫 작품인『판초 빌라 전기』(구스만 저, 최준석 역, 1976)에 뒤이어 1977년에 내놓은 책이 ‘청년사 논픽션 선집’ 3권인데, 1권이 『암태도 소작쟁의』(박순동의 「암태도 소작쟁의」, 이부영의 「윤용하 평전」, 이정환의 「사형수 풀려나다」 등 3편 수록), 2권이 『식민지 야화』(계훈제의 「식민지 야화」, 정옥진의 「혼혈아 학교」, 고은의 「김관식 평전」 등 3편 수록), 3권이 『벽지의 하늘』(황석영의 「벽지의 하늘」, 오소백의 「현장에 산다」,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 주창길의 「소리를 들려주마」 등 4편 수록)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월간 『신동아』에 실린 논픽션들을 당시 이 잡지사에 근무하던 윤무한의 주선으로 단행본으로 엮어낸 것 같다. 이론서는 『농민』(에릭 울프 저, 박현수 역, 1978)이 유일하고, 청년사를 먹여 살린 베스트셀러『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H. F. 페터스 저, 김성겸 역, 1977)도 루 살로메라는 매력적인 여성의 전기였다. 『판초 빌라 전기』의 무대가 멕시코였는데 뒤이어 나온 『산체스네 아이들』(오스카 루이스 저 , 박현수 역, 1978)과 『산체스네의 죽음』(오스카 루이스 저, 구연철 역, 1979)도 멕시코 빈민의 구술자서전이었다. ‘미국 인디안 멸망사’라는 부제를 가진『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디 브라운 저, 최준석 역, 1979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미국의 서부개척사가 사실은 인디안 원주민들의 학살과 추방의 역사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보고 들은 인디언은 백인이 만든 가짜”라는 것을 이 책은 처음으로 당시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일깨워줌으로써 리영희의『전환시대의 논리』나 송건호의『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못지않게 유신시대에 청년들의 의식 전환에 기여했다는 말을 나는 여러 사람들한테 들었다. 청년사가 내놓은 또 다른 역작은 이오덕 선생의 교육에세이『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1977)와 뒤이어 그가 펴낸 농촌 아이들의 동시 모음집 『일하는 아이들』(1978)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1979) 등 농촌 아이들 시리즈였다. 청년사 주변의 도시형 인텔리들은 이 책들을 통해 농촌 아이들의 고달픈 일상과 진솔한 목소리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특히 한윤수와 오윤, 박현수, 김대식 등은 이오덕 선생이 근무하는 경상북도의 산골 분교까지 내려가 농촌 현장을 여러 차례 탐방하곤 하였다. 이런 경험을 연장하여 김대식은 잠시 창신동 달동네에 방을 얻어 노가다 일을 하며 현장 사진을 찍고 소설 습작도 하고, 브레히트의「연극론」을 한국 최초로 번역하여 친구들에게 돌리기도 하는 등 고달픈 자유문필가 생활을 헤쳐갔다. 이 무렵부터 단순 투박하면서도 옹골찬 오윤 특유의 목판화들이 4․6판으로만 일관한 청년사 책들에 표지화나 삽화로 실리면서 어느새 청년사의 민중적 이미지로 굳어졌다. 특히 『농민』의 표지화인 보리의 도상은 오윤 목판화의 걸작이었는데, 이후 청년사의 로고로 책등에 출판사 이름과 함께 찍히게 되었다. 청년사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금 직전에 오윤에게 손목을 잡혀(삐쩍 마른 사람이 웬 손아귀 힘은 그렇게 센지!) 우이동 그의 집까지 끌려가지 않은 친구들은 없을 것이다. 그는 최민과 더불어 1979년 한국미술사상 최초의 민중미술 그룹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가장 한국적인 민중의 도상’을 목판화로 새겼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술과 노래와 친구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1986년 40세를 일기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청년사 친구들은 하나같이 벽초 홍명희의『임꺽정』애독자들이어서 일상의 대화에서도 곧잘 이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곤 하였다. 그러니 『임꺽정』복사본을 통독하지 않고서는 대화에 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오윤의 별명은 청석골 오두령의 본명인 오개도치가 되었고, 안승원은 청석골 졸개들의 점호 대목에 나오는 순 조선식 이름인 안되살이로 불리곤 하였다. 청년사의 저녁 술자리는 때로 엉뚱한 일탈을 낳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광화문 뒷골목에서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가 “안주가 이게 뭐야? 여수에 가면 이 돈으로 싱싱한 회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데 말이야” 하고 호기를 부리다가, “그래 쇠뿔은 단숨에 빼야지, 당장 여수로 갑시다”하고 한 밤중에 서울역으로 몰려가 여수행 야간열차를 타고 2박 3일 잠행을 하는 식이었다. 한윤수, 안승원, 안종관, 정희성, 최민 등이 나중에 쫄쫄 굶어가며 서울역에 도착하니 차비가 없어 누구는 걸어서, 누구는 친구나 마누라에게 전화를 해서 가까스로 집에 들어갔다는 뒷얘기들이 들려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월간잡지 『대화』 등을 통해 유동우의『어느 돌멩이의 외침』,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 석정남의『‘공장의 불빛』,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 같은 노동자 수기들이 노동현장을 생생하게 중계하여 지식인 독자들에게 파장을 일으켰다. 한윤수도 이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1980년 초에 10대 노동자들의 수기와 일기를 엮은 『비비람 속에 피어난 꽃』을 겁도 없이 2만부나 찍어냈으나 신군부의 검열에 찍혀 지하로 잠적하는 바람에 청년사도 한 동안 동면기에 들어갔다. 이로써 광화문 청년사 시절은 끝나고, 30대 전반부의 ‘기쁜 우리 젊은 날’도 속절없이 1980년대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