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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__녹둔도. 달 탐사 다누리. 폴란드에 무기수출-- 고구려 평양성 위치---12ok
뚱보강사 이기성
595__ 녹둔도. 달 탐사 다누리. 무기 수출, 고구려 평양성 위치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 녹둔도(鹿屯島)이다. 둘레는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1990년 무렵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33년(세종 15)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 김종서가 주도해서 개척한 6진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을 말한다. 녹둔도는 조선 세종 때 6진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그러던 중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녹둔도를 관할하던 함경도 경흥부 부사(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北京條約)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고종 26)에야 비로소 알고, 청나라측에 항의, 이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 당국자 간에 평양에서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어, 관심을 끌었으나 미해결인 채로 끝났으며, 1990년에는 직접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러시아가 녹둔도를 한국에 반환하기로 했다는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는 중인데, 요즘 푸틴 관련 가짜 유튜브 뉴스가 유행한다. [충격] 푸틴의 유언장 공개... 한국도 언급됐다고? 15년 장기집권의 비밀... 조회수가 13만회가 넘는다. 최초 공개일은 2022년 7월 21일...
한국의 첫 달 탐사선 ‘다누리’
한국의 '달 탐사'… 성공한 국가 6개뿐, 미국만 유인 착륙... ‘다누리’ 5일 심(深)우주에서 지상국과 교신... 목표대로 항행하면 7번째 '우주탐사국' 도약... 미·러 경쟁으로 달 탐사 시작, 2000년대 개화... [머니투데이] 김인한 기자가 보도했다(2022년 8월 6일).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는 1960년대 우주 경쟁으로 달아올랐다. 소련은 1957년 10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고, 1961년 4월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우주선에 태워 비행시켰다. 당시 미국은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로 규정하고 우주 기술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미국은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우주선으로 지구 궤도를 돌았고, 1969년 7월 마침내 인류 최초로 달을 밟았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지난 2022년 8월 5일, 한국의 첫 달 궤도선이 우주로 날아올랐다. 1992년 8월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쏘아올린 지 꼭 30년 만의 일이다. 서구 열강에 비해 우리의 과학기술 역사가 짧았지만, 우주개발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 온 결과다. ‘다누리’는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우주군 기지에서 미국 스페이스X의 팰컨9 우주발사체(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지상국과 최초 교신은 우주로 떠난 지 1시간 32분 만에 이뤄졌다. ‘다누리’는 앞으로 4개월 반 동안 약 600만㎞ 거리를 이동해 12월 말 달 근처 100㎞까지 다가갈 예정이다. 모든 비행이 정상대로 이뤄지면, 한국은 미국·러시아·일본·중국·유럽연합(EU)·인도에 이은 7번째 달 탐사국으로 도약한다.
--- 초창기 달 탐사는 러시아가 주도… 초창기 달 탐사는 옛 소련(현 러시아)이 주도했다. 1959년 달 탐사선 루나(LUNA) 1호를 달에 근접시켰고, 이때부터 1976년까지 LUNA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총 24회 중 15회 임무에 성공했다. 사람이 타지 않는 무인 우주선 루나 9호로는 달 착륙에 성공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주 개척에 위기감을 느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당시 유인 달 착륙 프로젝트인 '아폴로 계획'을 선포했다. 과학계에 전권을 위임한 끝에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1969년 달에 착륙했다. 현재까지 유인 달 착륙에 성공한 국가는 미국 뿐이다.
미국은 2025년까지 달에 또 한 번 사람을 보내는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단순히 달에 다녀오는 것을 넘어 장기 거주하는 게 목표다. 최종적으로 달을 거점 삼아 화성 등 심우주 탐사에 나선다는 목표다.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달 탐사에 나선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1990년 달 궤도선인 '히텐'(Hiten)을 발사했다. 당시 히텐이 달에 갔던 방식을 한국의 다누리가 참고했다. 히텐은 10번의 달 선회 비행에 나섰고, 2007년에는 달 탐사선 셀레네(일본명 카구야)를 발사해 월면 지도를 작성했다. 카구야는 달의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1년 8개월간 과학탐사에 나섰고, 2년 뒤 달 남반구에 돌진해 최후를 맞았다.
--- 2000년대 들어 달 탐사 경쟁 '본격화'... 중국은 2000년대 들어 달 탐사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2003년 첫 우주비행사 배출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중국 첫 달 탐사선 창어 1호를 발사해, 달 표면 3차원 지도를 작성했다. 창어 2호가 달 착륙 예정지 지도를 그렸고, 이를 기반으로 2014년 창어 3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 이어 2019년 창어 4호가 세계 최초로 달 뒷면에 착륙하고, 2020년 달 시료를 지구로 가져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인도는 2008년 달 탐사선 찬드랴얀-1호를 발사했다. 이후 2019년 달 궤도선과 착륙선으로 구성된 찬드랴얀-2호를 발사했지만, 착륙은 실패했다. 유럽은 2003년 달 궤도선 스마트-1호를 발사한 이후, 차세대 발사 계획인 스파르탄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가 달 탐사에 나서는 이유는 우주가 과학기술을 넘어, 경제·산업의 영역으로 꽃피우고 있어서다... 존 구이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탐사시스템부국장은 "1960년대 달 탐사가 국가적 도전이었다면, 이젠 경제적·과학적 기회가 커지고 있다"며 "인간이 달로 향하는 이유는 지구를 벗어나 우리의 존재를 태양계에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폴란드에 무기수출
폴란드에 무기수출... 폴란드가 미국·독일·프랑스 제치고 한국산을 선택한 이유... 폴란드가 한국산 전차(armored vehicle)·자주포(self-propelled howitzer)·전투기(fighter jet)를 대량 구매하기로 했다. K2 전차 980대, K9 자주포 648대, FA-50 공격기 48대 등 한국 방산(防産) 사상 최대다. 수출 규모가 25조 원대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가 보도했다(2022년 7월 28일). 그런데 폴란드는 왜 미국이나 독일·프랑스가 아닌 한국과 손을 잡았을까?(join hands with Korea?). 한국산 무기 성능이 세계적 수준에 이른 데다,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나다는(have superb value for money) 이유가 있지만, 의외의 배경도 깔려 있다.
폴란드는 18세기 말,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에 123년간 분할 지배를 당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러시아와 독일이 또다시 침략을 자행했다. 그런 굴곡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수십 년 동안 독일에 우호적 태도를 취해왔다). 그랬던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계속되고 있는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는(support Ukraine in the ongoing war) 독일 입장을 지지해줬는데도, 정작 원조는 거부당했다(be denied assistance). 그사이에 불구대천의 적인 러시아와 싸워주는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지원을 퍼부은 탓에, 이번 세기 최고율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에 휘말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 지도자들은 현실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come to a consensus with the realities), 독일을 배척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take an anti-Germany stance). 게다가 기존의 독보적 유럽 군사 강국(unrivaled military might)인 독일과 프랑스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졌다(be estranged). 앞서 폴란드는 유럽연합이나 유로화(貨)에 반대 입장을 취해온 데다, 독일 북부 옛 프로이센 주민들과 강한 연대감을 보여 독일 정부의 견제를 받아왔다.
폴란드는 더 이상 미국과 독일의 속국(vassal state)처럼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서방의 손에 놀아났던 끊임없는 굴욕(constant humiliations at the hands of the west)이 아시아의 선두 군산복합체 국가인 한국으로 향하게(turn towards the Asia’s leading military industrial complex) 한 것이다. 폴란드는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쏟아 부은 김에 첨단 무기로 대체해(replace them with cutting edge weapons),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bolster its military power) 심산이다. 그러면서 독일의 소리 없는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대체재를 찾아(look for alternatives to undermine Germany’s silent attack), 자급자족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한국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와 평양의 위치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은 어디인가? 하북성 노룡현? 요령성 요양?... 당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한 고구려의 수도는 북한 대동강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서지방의 평주의 평양성, 지금의 북경지역인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지역이다... 바른역사 출판사에서 2014년에 출판한 심백강 교수의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 책에서 밝혔다. 역사학 박사이고, 민족문화연구원장인 심백강 교수는 당나라 때에 편찬된 역사서 "통전"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은 지금의 북경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뚱보강사 칼럼 ‘#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에서도 심백강 교수의 학술적 대응 논문이 나왔다.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에 답한다"... 심백강 박사는 “역사상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그와는 정반대로 ‘중국대륙이 한민족의 터전, 즉 한국의 일부였다’라는 사실은 있다.”면서, 이 사실을 중국의 고대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밝혔다.
주몽은 기원전 37년 졸본천(卒本川)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동명성왕~ 마지막 보장왕 668년)를 건국하였다. 원래 이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타고난 재주와 권능으로 제압하였고, 이후 주변국들에 대한 정복 활동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기원전 19년(동명성왕 19), 부여에 남겨 두고 왔던 부인과 함께,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였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수나라 양제(世祖 楊廣, 569년~618년)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내린 조서에 나타난, 고구려와 평양의 위치...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인 [페친] Tak Kim의 글을 소개한다. 서기 612년 수 양제가 113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칠 때에 내린, 조서에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遼濊之境)를 거듭 잠식하였다. (중략)...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고 했다. 발해와 갈석 사이(渤碣之閒)라는 표현은 고조선계 국가와 중원국가의 경계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요즘말로 하면 한중국경, 한만국경과 같은 표현이다.
수나라 양제가 내린 조서 이전에도, 전국시대의 유세객 ‘소진’이 연왕을 만나 연나라의 국력에 대해서 유세할 때에도 사용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 화식열전에 "연(燕)은 갈석산(碣石山)과 발해(渤海) 사이에 있는 도회지이다(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 이어서 "...상곡(上谷)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지역은 멀고, 인민이 적어 자주 침략을 당했다... 북은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동은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의 지리적 이점을 통제하고 있다."고 하여, 고대 연나라가 동쪽으로 예맥, 조선, 진번 등 고조선계 국가와 인접하여 있음을 언급했다.
진(秦)나라가 중원 천하를 통일하고(시황제 영정(嬴政) 기원전 246년~기원전 210), 연나라 땅은 진나라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한나라, 서진(西晉), 북위, 수나라에 차례로 소속되었다. 연나라의 동쪽 땅, 즉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 등지는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다시 공손씨가 지배하다가, 위나라에 토멸되었고,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토멸하고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발갈지간'이나 '요예지경'과 같은 표현은 옛 고조선과 연나라와 같은 중원국가와의 경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때 한족 국가의 영토가 되었지만 고구려가 회복하였다. 수 양제 조서에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다'고 한탄한 데에는 이런 역사가 서려있다. 발해는 오늘날 하북성 발해이며, 갈석은 하북성의 갈석산을 이른다. 갈석산의 위치를 두고 하북성 내륙의 수성현과 발해 바닷가의 창려현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어느 경우든지 하북성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지금 요동은 만주 요하 동쪽을 지칭하지만, 수당시대의 요하는 하북성 난하로 요동은 난하 이동 지역을 의미한다. 예맥은 고대 중국인이 고조선 종족을 부르는 명칭으로, 고구려를 구성하는 예족과 맥족을 지칭하며,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조서의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의 강역이 하북성 깊숙이 발해와 갈석산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했다'는 구절은,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군사 1만 명과 함께 요서의 영주를 선제공격한 사실을 질타하는 내용이다. 북주를 멸하고, 화북을 장악한 수나라 문제는 589년 양자강 일대의 남조까지 정벌하고, 위진 남북조시대라는 혼란기를 마무리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여세를 몰아 북방의 강자로 군림하는 고구려 평원왕에게 제후국으로서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 평원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영양왕은 수나라의 침략의도를 사전에 분쇄할 의도를 가지고, 직접 말갈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공하여 수나라의 최전방 요새 역할을 하는 임유관을 기습했다. 이때 수나라 영주 총관 위충이 격퇴하였다고 하지만, 영양왕의 목적은 임유관을 점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전방 요새로서의 기능을 마비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에, 요새를 무력화시킨 후에는 퇴각했던 것이다. 임유관은 중원과 만주를 가르는 경계이자 전략적인 관문 역할을 하는 요새이다.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에 속해있는 산해관이라고 하나, 산해관은 명나라가 북경 발해사이에 명장성을 쌓은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며, 고대에는 유림관이라고 불렀고, 현재의 산해관보다는 더 내륙으로 올라가 있었다.
고구려 영양왕의 요서공격은 수당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차 고·수전쟁은 수 문제가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王世積)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하북성 임유관(臨渝關) 전투 등에서 승전을 거두어 물리쳤다. 수 양제가 아버지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전 국력을 기울려 2차침공을 감행했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다. 위에 수 양제의 조서는 이때 침공의 명분으로 내린 조서이다. 또한, 전군을 하북성 북경 남서쪽 탁군(涿郡)에 집결시키고, 좌우 12군에 각각 진격로를 하달했다. 수나라 시대의 탁군의 위치는 북경에서 남서쪽으로 140km 거리에 있는 보정시 부근으로 추측한다.
수 양제가 하북성 탁군을 집결지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수나라 영토 내에서 고구려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전략거점이자, 수도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최단 경로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607년 수 양제가 동돌궐을 직접 방문하고 계민가한과 만났을 때에, 마침 고구려 사신도 동돌궐을 끌어들여 수나라에 대항하고자 방문 중이었다. 고구려 사신에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라 일러라'고 위협했다. 이처럼 탁군은 섬서성 장안(현 서안)에 도읍지를 두고 있던 수나라가 고구려로 향할 때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자, 고구려에 근접해서 위협할 수 있는 전략거점이었다.
만약에 수나라의 공격목표가 북한 대동강 평양이라면, 하북성 탁군은 평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략적으로 1차 집결지가 될 수 없다. 1차 집결지는 압록강을 도하하기 직전 단동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때 진격로 상에 등장하는 지명은 수나라 탁군에서 고구려 평양 사이에 존재했던 명칭이나, 오늘날 한반도 안에는 없다. 이것은 고구려의 수도가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로,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𦖮)·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진격로에 나타난 지명 가운데,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소위 한사군(요즘은 한군현으로 부름)의 현토, 낙랑, 임둔이 나오고 대방, 개마도 나온다. 강단사학은 이 지명들을 모조로 한반도로 몰아넣었는데, 그렇다면 수나라 군대가 신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최단거리 직공로를 피해서, 함경북도 개마고원과 황해도(대방)를 돌고 돌아서, 평양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평양이 한반도의 낙랑군에 위치했다면, 공격목표가 진격로 상에 위치하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좌12군의 진격로상에 등장하는 조선은 낙랑군 조선현으로 낙랑군의 치소가 위치했던 곳인데,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다. 강단사학에서는 이 조선현을 오늘날 북한 평양으로 추정한다. 이런 논리라면 평양을 정벌하기 위하여, 평양이 위치한 조선현을 지나갔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된다. 이 지명들이 모두 하북성의 요동, 요서에 있어야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수 양제의 조서에 나타난 대부분의 지명은 하북성에 위치한 낙랑군에 소속된 25개 속현이거나, 대방군 속현의 명칭과 일치한다.
대방군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서기 209년에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대방, 열구, 남신, 장잠, 제해, 함자, 해명 등 7개현을 떼어내 설치한 군이므로, 원래는 낙랑군이었다. 둔유현을 하북성 창려현으로 추정하면, 그 이남의 천진 일대가 대방군이다. 수나라 대군은 탁군에서 출발해서 하북성 낙랑군을 거쳐 요동으로 향했던 것이다. 고구려 수도 평양은 물론 낙랑군, 대방군이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음은 중국인의 손으로 기록한 수나라 군대의 진격로에 나타나는 지명이 명확하게 증명해 준다.
마침, [페북]에 한사모 대표, 세계한민족 공동체회의 대표인 Tak Kim 님이 ‘일본이 조작한 내용으로 우리가 배운’ 고구려 평양의 위치가 한반도내에 있는 평양이 아니고, 중국의 북경지역이라는 주장의 글을 올렸다.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은 어디인가? 하북성 노룡현? 요령성 요양?... 당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한 고구려의 수도는 북한 대동강의 평양이 아니라, 요서지방의 평주의 평양성, 지금의 북경지역인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지역이다.
심백강 선생은 당나라 때에 편찬된 역사서 "통전"의 기록을 소개했다. 통전의 기록에 따르면, 북위시대에 장수왕 15년 고구려가 요서의 평주에 도읍을 정한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당나라가 멸망시킨 고구려의 평양성은 요서 평주에 있던 평양이었고,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안동도호부 또한 대동강유역이 아닌 요서 평주에 설치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평주는 북한의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 북쪽의 조하, 즉 조선하 유역에 있던 요서의 평주를 말한다.
고구려 패망 후 평양을 한반도로 이전
668년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나누고, 이를 관장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도호부사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요서 평주에 있던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나라가 망한 평양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설인귀를 피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가서 정착했다... 망한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할 때, 요서에서 사용하던 수도 ‘평양’이라는 지명도 가지고 가서, 정착한 지역 이름을 그대로 ‘평양’이라고 했던 것이다... <<정개양잡서 5권 조선고>>에 따르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 여리에 있게 되었다"... 이때에 요서에서 사용하고 있던 수도 평양이라는 지명도 가지고 갔다. 고구려와 북한 평양을 연관 짓는 것은 고구려 멸망이후에 형성된 관념이고,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의 전성기 고구려의 수도는 북한 평양이 아니라, 당연히 옛 고죽국 평주 노룡현이다.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주 수도가 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추가해보자. ①지나 대륙으로 요서지방을 경략하는 전성기의 고구려가 후퇴해서 궁벽한 한반도에 수도를 두는 것은, 전략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결정이다. ②북한 평양이 수도였다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고구려군은 압록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았을 것이다. 당 태종은 압록강은 고사하고 요하를 넘고, 요동반도를 경유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당 태종이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지었다는 '요성망월'이라는 한시가 전하는데 '요수'를 오늘날 요하로 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 후 안시성에서 패하고, 퇴각할 때에 발해연안의 진흙길에서 '몸소 진흙탕에 빠진 수레를 밀었다'는 고생한 기록이 전부이다. 당 태종이 가장 가까이 접근해서 패전한 곳이 양만춘 장군이 지키던 안시성이었는데, 안시성은 요동성 부근에 위치했고 한반도에 위치한 성이 아니다.
③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내린 조서에 나타난 고구려와 평양의 위치... 서기 612년 수 양제가 113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칠 때에 내린 조서에 고구려의 위치를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고 했다. 발해는 오늘날 하북성 발해이며, 갈석은 하북성의 갈석산을 이른다. 지금 요동은 만주 요하 동쪽을 지칭하지만, 수당시대의 요하는 하북성 난하로, 요동은 난하 이동 지역을 의미한다. 예맥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예족, 맥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모두 하북성과 내몽골을 일컫는 명칭이다. 고구려 영양왕 시기에 말갈군사와 함께 요서지역을 먼저 공략한 사실을 질타하는 내용으로, 수당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만약에 수나라의 공격목표가 북한 대동강 평양이라면, 하북성 탁군은 평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략적으로 1차 집결지가 될 수 없다. 1차 집결지는 압록강을 도하하기 직전 단동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북성 탁군을 집결지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고구려 수도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최단경로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수나라 당시에 탁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것은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④수나라 군사의 주 전투지역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이었다. 당나라 때 편찬된 <자치통감>에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라는 당시의 풍자시가 전하는데,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는 노래이다. 당시의 평양이 북한 대동강이었다면 수나라 별동대 30만이 평양성 30리 밖에 진을 쳤다고 하므로 주 전장 터가 오늘날 평안남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래에서는 요동에 가서 죽지 말라고 했다. 당나라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 하북성 난하 동쪽지역이다. 즉 고구려는 난하 이동에서 남만주 요하지역을 포괄하는 요동에서, 수나라 군사를 저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평양은 절대로 한반도에 위치할 수 없다.
⑤수 문제가 장강(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남조의 진을 멸하고, 중원을 통일하고 나서 고구려 영류왕에게 신하로서 칭신할 것을 요구하며 협박편지를 보냈다.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장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한 능력으로, 요수를 끼고 있는 고구려를 짓밟을 수도 있다는 내용인데, 고구려의 수도가 북한 대동강가에 위치했다면, 편지에 요수를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와 중심지가 요수에 위치했기 때문에 '고구려 = 요수'라는 의미로 '요수가 넓다한들', 즉 너희 고구려는 요수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나라이므로 수나라에 신하국으로서 복속하라는 의미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⑥고구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자들은 모두 요서지역의 공손씨, 당나라, 한나라로 망명했다는 것은 고구려 수도가 요서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다는 반증이다. 만약 대동강 평양에서 내분이 일어났다면, 압록강을 넘고 만주 요동반도 하북성을 지나서 중원으로 멀리 가야한다. 가까운 신라, 백제를 두고, 먼곳으로 망명할 이유가 없다. 연개소문 아들 남생 역시 당나라로 망명했다. 신라로 망명한 기록은 고구려 패망이후에, 보장왕의 후손이 귀순해 왔다는 기록뿐이다.
⑦살수가 청천강이라는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 내용이 틀렸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북한 청천강이 아니고, 대능하나 남만주 요하의 지류로 보아야 할 것이다. 30만 명의 별동대가 평양성과 가까운 살수에서 대패하고, 2700명이 살아남아 하루밤낮을 도망쳐 요동성에 도착했다고 한다. 살수가 청천강이라면, 아무리 말을 타고 축지법을 쓴다고 해도 하루밤낮에 천 킬로가 넘는 요동성까지 달려갈 수 없는 거리이다. 더구나 패잔병들이 죽도록 밤낮을 뛰어도 100킬로도 채 갈 수 없다. 평양이 요동성과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⑧우리가 삼국사기를 토대로 배우는 고구려사는 실제 역사의 반도 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김부식은 대륙 고구려사를 생략하고, 신라중심의 남방사, 즉 한반도내의 고구려 백제 신라 교류사 중심으로 기록했다. ⑨반면에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기록된 고구려사는 반도 교류사가 거의 없고, 대륙국가와의 교류사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즉 북방사 중심이다.
⑩고구려사는 두 번에 걸쳐서 대륙사가 인멸되었다. 242년(고구려 동천왕 16) 고구려가 위의 랴오둥(遼東) 지방을 공략하여 쌍방간에 공방전이 벌어지자, 유주자사 관구검이 현도군의 근거지에서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침입년도는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으로 <관구검기공비>에는 244년으로 기록되어있다.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비류수강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크게 승리하여, 위나라의 6천의 군사를 사상케 하였다. 여세를 몰아 동천왕은 진격했지만, 관구검의 결사 항전에 1만 8천의 병사를 잃고 패퇴하였다. 이로 인해 동천왕은 겨우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환도성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관구검은 환도성을 점령하고, 동천왕은 남옥저로 달아난다. 이를 안 관구검은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시켜 추격케 하였다. 신하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항전하는 사이 동천왕은 남쪽 낙랑 지역까지 후퇴하였다. 추격병의 추격이 이어지자 유유(紐由)가 거짓 항복을 하는 척하다, 위나라 군의 장수를 죽였다. 유유도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 일로 인해 위나라 군은 혼란을 일으키고, 이를 틈타서 동천왕이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다.
첫 번째는 관구검이 침공하여 역사문헌을 약탈해 갔고, 중국 역사가들은 이 문헌을 토대로 취사선택하여 자기들 입맛대로 동이전, 예맥, 숙신 부여사를 기록했는데, 우리는 1차 사료가 아닌, 중국인들이 가공한 2차 사료인 중국 문헌을 보고, 왜곡된 고구려사를 공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번째는 당나라에 멸망당한 이후에, 중국인은 대륙 고구려를 지우기 위하여, 당나라에게 치욕을 안겨준 전쟁사와 수많은 지명을 조작하여,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⑪대동강 평양의 낙랑유물은 한국사를 반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고구려, 고조선 역사를 조작하기 위하여, 대부분 일제가 북경 골동품가에서 수집한 것임이 판명된 상태이다. 고구려, 고조선의 유적 유물이 일부 나왔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고구려,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작된 유물 몇 개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서울이 북한 평양일수는 없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잊혀진 문헌기록과 유물발굴을 통해서, 대륙 고구려사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환단고기>> 책에 유일하게, 패주하는 당 태종을 추격해서 연개소문이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진격해서,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내고 국경을 다시 정했다고 했고,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은 상처로 인하여 사망했다고 분명이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지나 문헌은 물론 <<삼국사기>>등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환단고기>> 기록이 황당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중국인들이 중화사관 입장에서 역사를 지웠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당 고종은 당 태종의 아들로서, 측천무후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때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재목이 되지 못했고, 고구려는 당 고종의 원정군을 물리칠 여력이 충분했지만,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나 패망한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고구려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연개소문은 유언으로 연남생을 포함해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3형제의 단합과 우애를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 3형제는 극심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권력투쟁에서 밀린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해 나라를 배신했다. 연남생과 그를 따르는 세력은 그들의 칼날을 고구려로 돌렸다. 견고하던 요동 방어선의 성 일부도 이에 가세했다. 당나라는 요동에 그들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침략할 수 있었다. 이어 더해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던 연정토가 그를 따르는 세력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며 고구려의 내분은 더 커졌다. 2년 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됐다. 나당 연합군은 이전보다 수월하게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다. 704년 간 존속한 고구려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녹둔도(鹿屯島), 두산백과.
[참고] 가짜 뉴스? ‘푸틴의 유언장 공개’...
[참고] [머니투데이] 김인한 기자, 2022.08.06.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4779800
[참고]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2022.07.28.
[참고] Tak Kim, 한사모 대표, 세계한민족 공동체회의 대표. 2022-05-25.
https://www.facebook.com/takkim1244
[참고]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 심백강 저, 바른역사 출판사, 2014년 11월 12일.
http://www.yes24.com/Product/Goods/15157712?pid=123482&cosemkid=nc14913577469658759
[참고] ‘우리는 싸워보지도 않고 중국 동북공정에 졌다’... 중국을 닮아가는 고조선 건국연대, 이찬구 편집주간, 2022.10.14.
[참고] ‘#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 뚱보강사, 2022.07.19. 조회 18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2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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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__녹둔도. 달 탐사 다누리. 폴란드에 무기수출-- 고구려 평양성 위치- 뚱보강사 이기성 경기칼럼 Lee Ki-sung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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