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999년, 화두 타파했는데도 마지막 깨달음(究竟覺)이 안보이더라!
-화두 놓고 정토 발원한 월인 스님-
1) 월인 스님 스스로 쓴 행장 (『불교신문』)
· 1910년 전남 화순 태어남
· 1945년 전북 보석사로 출가
· 화엄사, 월명암(전북 부안), 달마산 토굴 등에서 선 수행
· 1999년 세수 90세 법납 54세로 입적
나는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경술년(1910)에 전라남도 능주, 지금의 화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참으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지요. 선친께서는 삼천리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들이 알지 못할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 살림은 말할 수 없이 기울었고, 마침내 선친께서는 금강산에서 타계하시니 그나마 밥줄을 잇던 살림살이가 파탄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두어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산을 다니며 나무를 하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
나는 산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소망을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세상살이를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싶습니다.”
선친의 피가 내 몸에 흐르는 탓이었는지 어린 나이에 가난이 싫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발원이 있어 지금껏 승단 한켠에서 불은佛恩을 축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외가살이를 하다가 스무 살이 넘어서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 시계 고치는 연장을 손가방에 넣고 전국을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도 신명 나는 일이었습니다. 주로 북쪽을 많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친이 공부하다 이승 인연을 마감했다는 금강산도 돌아다니고 보현산도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만주 땅을 가장 오래 쏘다녔습니다. 그곳에서는 일제의 병기를 들고 살상의 전장으로 끌려갈 험난한 팔자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조국 땅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해에 불문佛門으로 들어서 버렸습니다. (…) 출가사찰인 전라북도 보석사에서는 머리만 깎은 셈입니다. 정선正善 스님이 머리를 깎아 준 은사 스님인데 이듬해 화엄사로 나를 보내며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참으로 중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그 가르침도 나는 평생을 귀하게 받들고 있는 지금 머리를 깎으려는 이들에게도 “정녕 하나의 걸림이 없는 삶을 구할 자신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화엄사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첨선도 하며 지내다가 서울에서 정화불사가 대단하고 모두들 모여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화불사가 끝날 무렵에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실망했습니다. 정화불사는 갑오년(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촉매로 시작되었던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나는 그다음 해 초가을에 조계사로 갔습니다. 이미 많은 절에서 대처승들이 물러난 뒤였습니다. 조계사 앞뜰에 모인 스님들이 여기저기서 무리를 지어 수군거리는데 그 내용은 지방의 절들은 많은데 비구들의 수는 적어 서로 절을 나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화를 했으니 절을 인수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혜명을 바로 잇고 법통을 온전히 이어가기 위한 정화였는데 종국에는 무리를 지어 좋은 절들을 차지하려고만 하는 것이 이 촌사람에게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여비도 없어서 대각사에서 한 달가량 있었는데 대접을 잘해 주더군요. 한 도반이 찾아와서 나를 보더니 ”스님은 왜 여기 있으시오?” 하더군요. “갈만한 곳도 없고 여비도 없어 여기 있다”고 했더니 그 스님이 꽤 많은 여비를 주더군요.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던 터라 잘된 일이었지요.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 찾아온 곳이 월명암입니다.
와 보니 절은 말할 수 없이 퇴락해 있었습니다. 누군가 저 옆 봉우리(쌍선봉) 아래 스님들의 유골이 나뒹굴고 있다고 하더군요. (…) 눈에 보이는 대로 수습을 해 화장하고 스님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 그해 겨울에 이 묘적암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다음 해부터 월명암 법당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 신도도 없는 절에 누가 불사 시주금을 내겠습니까. 원경 스님이란 분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어설프게 만든 권선문을 들고 원경 스님을 따라나섰는데 부안군수와 군내 각 면장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들이 제법 많은 돈을 내놓았고 그런 바람에 염전하는 사람을 비롯한 지역 신도들도 십시일반으로 시주해 불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불사가 다 되기 전에 나는 소공 스님이란 분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지리산 토굴로 들어갔습니다. 워낙 세속 물정에 밝지 못한 내가 불사를 주도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불사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소사로 가버려 월명암은 다시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 후에 다시 월명암으로 찾아 기와 불사를 하고 떠났다가 또다시 80년대 중반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로 월명암을 찾은 겁니다.
해남 달마산에 토굴을 짓고 앉아 있는데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당시 (월명암) 주지 스님이 나를 데리러 왔기에 따라왔습니다. 절이 제법 격을 갖추고 선방도 있어서 결제 철이 되니 10여명의 선객들이 찾아오더군요. 나는 안거를 들며 선객들과 ’10악참회‘ 와 ’발원문‘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세간에 있건 출세간에 있건 수시로 짓는 악업을 소멸시키지 않고 어떻게 성불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몇 년 지리산의 토굴에 의지해 있다가 재작년에 네 번째로 월명암을 다시 찾아 이곳 묘적암에 거처를 정하며 “이제 나는 여기에 죽으러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도 나이이고 한 세상 남에게 큰 부끄러움 없이 정진해 왔으니 죽어서 다음 생에 더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밖에 뭐가 남아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나는 참회하고 발원하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생식을 하고 내 손으로 빨래를 하고 사는 것도 나의 덧없는 일생을 참회하며 간절한 발원의 마음을 다잡아 가기 위함입니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첫댓글 또 몇 년 지리산의 토굴에 의지해 있다가 재작년에 네 번째로 월명암을 다시 찾아 이곳 묘적암에 거처를 정하며 “이제 나는 여기에 죽으러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도 나이이고 한 세상 남에게 큰 부끄러움 없이 정진해 왔으니 죽어서 다음 생에 더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밖에 뭐가 남아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나는 참회하고 발원하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생식을 하고 내 손으로 빨래를 하고 사는 것도 나의 덧없는 일생을 참회하며 간절한 발원의 마음을 다잡아 가기 위함입니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지리산
아모리
생각해도
아리송해
너무
아리송 해
그래서
몰라 몰라
모른다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움막
붓다의
거룩한
뜻을
한 점
이라도
바라볼수
있으면
이라는
일념으로
생식을 하며
백일
기도를....
참으로
진정한
참으로...
그
옛날이
그립네요
반야봉!
지혜의
최고봉
봉우리가
만드는
그림자
하지만
그
그림자
안에서도
일점이
아닌
일
나노
조차
찾을수
없는
나의
우매함에
절망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반야봉 아래에서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