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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2)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하나님' ‘하느님’이라는 말이 기독교의 신을 나타내는 고유명사화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뜻을 덧붙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늘님'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즉 구한말 개신교 이전부터 국내에 유입됐던 가톨릭은 ‘천주’ ‘하느님'을 사용했지만 개신교가 전파되었던 평양의 방언은 ‘하나님’이었고, 주로 이곳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됐다는 것.
우리 말 '한'은 ‘크다’ ‘전체로서의 하나’ ‘하늘’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이에 '님'을 붙여 '신'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됐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상제(上帝)로 일컫는 하늘님을 섬겨 왔으며 민족종교 천도교에서는 한울님[大宇神]을 숭배하고 있다. 대종교에서 ‘한얼님’[大魂神]은 단군의 명칭이다. 다같이 “하늘님”의 유사음이며 범신론적 하느님의 신군(神群)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는 논리도 있다. 게다가 문법적으로는 '하느님'이 맞는 셈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라면 ‘하나님’과 ‘하느님’의 구별은 서양의 일반명사 ‘God’의 표기 구별과 다를 바 없다. 영어에서는 ‘God’하고 하지만 독일어 ‘Gott’, 북유럽에선 ‘Gud’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직접적으로 라틴어 흔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유럽에서는 라틴어의 ‘deus’와 비슷한 형태의 단어를 사용한다. 즉, Dieu(프랑스), Dio(이탈리아), Deus(포르투갈), Dios(스페인) 등이 그것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신'을 그리스어 'theos'로 표기하고 있다. theos는 특정 신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다. 누가복음 첫 부분에는 '데오빌로'(신을 의미하는 데오/테오와 사랑을 의미하는 빌로/필로)라는 비기독교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신을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후 ‘theos’는 신을 지칭하는 다른 단어의 어근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략-
구약성경에서는 '엘' 혹은 '엘로힘'이 사용됐다. '엘 샷다이' '벧엘' '임마누엘'이라고 할 때 마지막 '엘'은 신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엘'은 '엘로힘'의 고대 표현이고 시적(詩的)표현이다. '다스리는 이, 강하신 이'란 뜻이다. 이 이름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보통명사로서, 일반적으로 신성(神性)을 지칭하는 동시에 어떤 때는 고유명사로서 단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아랍어에서 '알라'라고 하는 말은 ‘엘’과 같은 어원을 가진 일반명사이다. '알'이나 '엘' 모두 '신'이라는 뜻이다(개신교계에서는 기독교의 신은 엘로힘이고 이슬람교의 신은 알라로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구약의 성조들은 "엘 엘리온(창세 14,22), 엘 로이(창세 16,13), 엘 샬다이(창세 17,1), 엘베텔(창세 75,7), 엘 올람"(창세 21,33) 등 '엘' 뒤에 여러 형용사를 붙여 불렀다. '엘리', 또는 '엘 로이'는 엘로힘의 변형으로서 '나의 하느님'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었다. '엘'을 어미에 붙여 만든 이름도 있다. 미카엘(누가 하느님과 같으냐?), 라파엘(하느님이 낫게 하셨다), 가브리엘(하느님의 영웅),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등이 그것이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는 대목에서 신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여호와', '야훼', '야웨'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이 갖는 유일한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야훼라는 뜻은 "나는 나다. 나는 존재 자체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BC 3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성하심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글로 옮기지 못하고 단지 'YHWH'라고만 표기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신(神)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하는 속성 명사 '엘로힘(Elohim)'이 사용됐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 Ginta)은 이를 '퀴리오스(Kyrios)'로 옮겼다.
후대에 와서 이를 두고 발음상 문제가 생겨 '여호와, 여호수아' 등으로 발음하기도 했다. 구약성경에는 네 글자의 자음 'YHWH'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후대 학자들이 발음할 수 있도록 모음기호를 찍었는데, 아직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다. 평소 발음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어떻게 발음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율법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YHWH를 발음하지 않고 단지 '거룩한 네 글자'라고만 읽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 '여호와'는 그릇된 사투리 발음이고 '야훼'나 '야웨'가 옳을 것이라는 입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국유사 등 한국 신화들에 보이는 최고신은 천공신(天空神), 곧 하느님이며, 단군,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의 탄생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하늘에게 '상제의 명령'이나 '알, 궤'라는 형식을 빌어 탄생한다. 그래서 그 주인을 공경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한국의 무속 신앙에는 많은 신이 있으나 막연하게나마 그 배경으로 하느님이라는 최고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명칭은 선사시대 이래 우리 민족종교의 기층을 형성하는 무교에서의 최고신인 '천신, 하느님' 명칭과 부합한다. 하느님의 호칭은 통일신라 및 고려조에 이르러 삼국시대의 ‘까딪빛’ 삼신의 사상을 한데 묶어 ‘한잎’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조에 이르러 천지신명을 호칭할 때 님을 붙여 인격화하여 ‘한잎님’이라 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다님’이라 호칭했다고 하는데 결국 하느님의 명칭은 '까-딪-빛-한잎님-하느님'의 변화과정을 겪으며 형성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톨릭에서 '하느님'으로 고착되었다.
마태오 리치 신부는 '천주실의'에서 유교경전에 나오는 상제 혹은 천(天)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절대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야훼를 천주(天主)라 번역했다. 천주의 중국음은 '도사(徒斯)'이다. 한역본 <성경직해>에 천주라는 말풀이로서 "천주는 서양의 원어로는 '도사(徒斯)'라고 하며 천주 만물의 주님이시다."(天主西土原文曰 徒斯及天地萬物之主)라 했다. 여기서 ‘도사(徒斯)’의 중국식 발음을 프랑스어 철자로 적으면 ‘teou sou’, 즉 라틴어의 'Deus(데우스)', 희랍어의 theos(테오스)'의 발음과 비슷하게 된다. 중국에 온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가 <천주실의>를 출판하면서 천주를 'Deos'의 음역으로 넣어 사용함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어 유일신 하나님(개신교), 온 세상이라는 우주적 개념으로서의 한울님(천도교), 배달민족의 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한얼님(대종교) 등 우주 창조자이며 주재자인 천주의 호칭으로 각기 불러지게 됐다. /최종편집 / 이화서 기자.
註解 ; 來世 有無의 문제는 학자의 理論에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요, 영웅의 언어 행적으로 판단할 문제도 아니다. 오직 자아의 직각으로 그것을 느낄 문제이다.
이 말이 야뢰의 개별적인 주장으로 올바르려면 ➁ 聖訓의 전 문장은 왜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분명이 來世 有無의 문제에 대한 답을 추론하고자 來世 有無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서술된 문장으로 來世 有無의 문제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제시해 놓고 이제 와서, ‘來世 有無의 문제는 학자의 理論에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요, 영웅의 언어 행적으로 판단할 문제도 아니다. 오직 자아의 직각으로 그것을 느낄 문제이다.’ 라고 말한다면,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 할 수 있다. ➁ 聖訓에 의한 판단을 제외하든가 ➂ 直覺에 의한 인식방법을 제외하여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이 될 것이다.
동학의 기본사상에는 없는 來世 有無의 문제를 억지로 논리화하려는 의도가 너무 지나쳐서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필자는 이해하고 판단하고 있다. 필자가 이해하는 동학에 있어서의 來世는 永續되는 시간과 歷史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한 인간이 살았던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생존전시대, 생존시대, 미래시대가 영속되고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한 인간은 생존시대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존전시대와 미래시대에는 나라는 인간이 없는 시대이다. 그러나 미래시대에는 한 인간이 살아 온 역사를 통하여, 한 인간의 이름으로 장생하는 시대가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동학의 내세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생존시대가 미래시대에 長生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없을 미래시대를 위하여 나의 생존시대가 매우 重要하기 때문에 熾熱하며 力動的인 삶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도교는 교도 각자에게 신념의 신앙과 종교적 4대 목적의 실현이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➃ 靈界通信 ; 영계통신은 신령문제를 직접 전문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세계 靈媒人들의 기적 사실을 들어 엄정한 비판아래서 적은 신비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고금동서에 다종다양한 수자가 있다 영혼인의 사진까지 찍어가면서 靈界의 존재를 기록한 靈界文化도 있다. 이러한 기록 중에서 나의 인상 중에 가장 깊게 느낀 바 한 조건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본래 靈界의 사실을 위에서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지식으로 판단치 못하는 것이니 민치 지식을 점문으로 하는 사람이나 또는 나 보다 백배 천배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면 가진 사람일수록 端的으로 기적적 靈界방면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現實界와 靈界의 경계선인 神秘的 鴻溝는 비례적으로 커지는 법이다. 마치 暗夜에 불을 환하게 밝혀 明의 量이 커질수록 暗의 範圍는 한층 더 확대되는 것과 같이 지식의 量이 넓을 구록 神秘的 鴻溝는 일층 深遠해 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식이 넓은 사람일수록 靈界의 사실에 대해서는 일종의 天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靈界의 사실은 지식이 零點에 있는 무식층의 순결無垢한 사람 중 靈媒的 素質을 구비한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대개 영계의 소식이 世俗 間의 무식층의 巫卜的 인물로부터 생겨 나오는 것은 이 까닭이다. 우리는 대개 그들의 저급한 인격 이상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 연구도 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하게는 狂人 또는 신경병적 작용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러한 까닭에 그 방법에 대한 量이 점점 줄어지고 質이 점점 박약해졌다. 그러므로 古代人의 역사를 보면 현대인과 같은 지식이 복잡하고 권모술수적 협잡이 없는고로 神靈界에 관한 직각적 巫卜的 문화가 主로 되었다. 古代人의 주권자가 대개 巫였던 것은 그 까닭이다. 「靈」字가 雨와 巫가 합쳐 있는 것을 보면 巫는 靈界의 통신자였든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사회는 大巫의 자격이 현대로 치면 대철학자, 또는 대과학자나 특수계급에 속한 인물들과 같았다. 점차 人知가가 발달되면서 靈界와 人界의 통신적 역할은 퇴보되었다. 少昊氏 시대에 人神이 雜揉하여 폐해가 되므로 司天而屬神하고 司地而屬人하는 役人을 두었다는 史記를 보면 그때부터 靈界와 人界의 취급을 마치 지금의 敎政分立과 같이 한 것이나 후에 世人이 지식이 고도로 발전되면서 巫卜 계급은 점차 下層으로 내려가 내종에는 七般賤役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회의 천대가 심함에 따라 巫卜의 行勢는 줄어들었고, 그것이 줄어들수록 靈界의 소식은 줄어들수록 靈界의 소식은 멀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靈界相通의 國禁이다. 이 國禁의 善惡은 별문제로 하고 어쨌든 현대인은 靈界에 대한 소식과는 水火相克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도 무의식 중에 왕왕이 靈媒가 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벙어리의 通詞와 같이 아무런 지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同級의 인간으로 취급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靈界通信과 같은 것은 미신 중에서도 가장 큰 미신으로 단념하고 인간의 靈界 存在에 대한 관념은 전연 零點에 이르고 말았다.
註 00 ; 鴻溝 - 큰 개천 또는 도랑을 의미한다.
註 00 ; 巫卜 - 무당과 점쟁이.
註 00 ; 靈媒 -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과 의사가 통하여 혼령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 영매술(靈媒術) -영매의 매개로 죽은 자와 산 자가 의사를 통하게 하는 술법.
註 00 ; 少昊氏 - 少昊·少顥·少皡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임금의 하나로, 황제(黃帝)의 아들로 곡부(曲阜)에 도읍하였다. 태호 포희씨(太昊庖犧氏)의 법을 닦았으며, 가을을 다스리는 신으로 받들어진다.
■ 氏의 의미와 문법적 기능.
1. 성(姓) 또는 이름 뒤에 쓰여, 그 사람을 대접하여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
2. 같은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
3.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4. 성(姓)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그 성을 대우하는 뜻을 더하는 말
5. 사람의 신분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의 뒤에 붙어, 그 대상을 높이는 뜻을 더하는 말
註 00 ; 雜揉 - 조잡하고 잘못 휘어져서 /잘못 되어서
註 00 ; 司天而屬神하고 司地而屬人 -出典을 史記라고 했지만, 어떤 사기인지 찾을 수가 없다. 하늘을 맡는 것은 신에 속한다고 하고, 땅을 맡는 것을 사람에 속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司는 어떤 일을 또는 역할을 맡는(하는 것) 것을 의미한다.
註 00 ; 七般賤役 - 조선 시대에 천한 계급이 종사하던 일곱 가지 천역. 곧 관아의 조례(皁隷), 의금부의 나장(羅將), 지방 관아의 일수(日守), 조창(漕倉)의 조군(漕軍), 각 수영(水營)의 수군(水軍), 봉수대의 봉군(烽軍), 역참의 역졸(驛卒)을 말한다.
註 00 ; 水火相克/水火相剋 - 주로 土亭秘訣에서 사용되는 말로, 水火相克 相爭無益에서 온 말이다. 물과 불이 상극이라 서로 다투어 보아도 利益됨이 없다는 뜻이다, 水火相克은 물과 불이 서로 부딪힌다는 뜻으로, 수화(水火)가 용납되지 못하는 것처럼 서로 원수 사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水火相剋의 字意
水(수) 물이 흘러가는 모양. ‘氷(빙)얼음’, ‘永(영)길다’ 등 구별에 유의.
火(화) 불꽃이 위로 솟아오르는 모양을 본뜬 형태.
相(상) 나무에 올라가서 눈으로 먼 곳을 본다는 의미에서 ‘보다’는 의미가 생겨. 후에 함께 본다는 것에서 ‘서로’와 보고 돕는다는 것에서 ‘돕다’라는 의미가 생기고, 그 일을 하는 사람에서 ‘정승’ 등의 의미가 파생됨.
克(극)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이고 있어 ‘참고 견디다’는 뜻에서 ‘이기다’는 의미가 생김.
註 00 ; 通詞 - 조선 시대에 통역을 맡아 하던 관원./여기에서는 靈界 通信者를 의미한다.
최근대에 와서 서양 학자로부터 점차 靈界通信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靈界通信의 연구가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近況 通信의 새로운 발전 가운데 과학적 철학적 理論과 일맥상통되는 점이 무엇이냐 하면 俗間(세상-오암)에서 이따금씩 神의 作戱(신의 장난-오암)라 하여 귀신을 직접 보았더니 물품은 장애물을 통해서 運送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적에 천만부당한 미신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방면의 학자는 그러한 靈媒현상을 해석하되 물질이 본래가 장애물이 아니요 일종의 氣體라는 것이다. 극단에 가면 靈인지 物의 單子인지 구별하지 못할 어떤 존재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혼인으로 보면 물체는 없는 것이다. 그저 氣體와 靈體만이 實在한 것이다. 氣體가 氣體를 相通하고 靈體가 靈體를 相通한다는 것은 결코 기괴한 일이 아니오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귀신이 물체 사이로 상통하는 것은 물체를 물체 사이로 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물질의 본질인 至氣를 물체 사이로 통하게 하는 원를리(원리를 의 誤植) 이용한 까닭이다. 물체를 至氣의 본질로 순간적으로 還元케 하였다가 다시 순간적으로 形像을 나타나게 하는 작용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영혼인이 보인다는 것도 또한 그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低級한 영혼인의 作戱라 할까 高級 靈魂人의 必要에서라고 할까. 그들이 인간에 있을 때의 현상은 現存人에게 뵈일 필요가 있을 때엔 육체의 본질―至氣를 質料로 化하여 잠간동안(‘잠깐 동안’ 이 올바른 표기-오암) 그의 현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理論이 사실이라면 과학의 극치는 究竟 靈界存在의 원리까지 설명할 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무궁본능으로 보나 또는 인간성의 본지로 보나 無限進化의 理想으로 보아서 그러한 이치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可能的으로 믿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믿게 되는 점이 인간의 靈的 價値를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P.150-154.
註 00 ; 物의 單子 -萬物의 各個 物體의 최소 단위인 원자(물리학적 용어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 온 atom )의 한 조각이다.
■單子論 -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라이프니쯔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무한분할'의 문제를 연구하여 오늘날 수학의 미분과 적분을 창시하였다. 라이프니쯔는 범신론 즉 '신은 곧 자연이다.' 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에 반기를 들어 '실체는 활동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것을 바로 '단자(monad)'라고 정의하면서 '단자'를 불멸의 실체로 보고 단자 형이상학을 주장했다. 단자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가분적인 '하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monas)에서 유래하였는데, 근원이 되는 단일한 개체를 의미한다. 고 한다. 라이프니쯔는 만물에 있어 단자가 궁극의 실체이며, 근원적으로 활동하는 힘을 가진 정신적 개체라고 주장하고 또 물질에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였다.
■ 라이프니쯔가 정의한 단자의 특징
첫째, 단자는 단일한 실재로 외부의 어떠한 영향으로도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원자와 의미가 비슷하나 단자는 크기를 측정할 수 없다는 면에서 정신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둘째, 단자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정신적인 실재인 단자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활동으로 지각을 가지며 동시에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다.
넷째, 단자는 여러 다른 단자를 지배하는 중심적인 단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단자론에 의하면 사람은 무수한 단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단자라고 했다. 이는 중심적인 단자는 우월한 단자로서 무한하게 많은 단자들의 집단을 대표하여 단자들의 통일성을 이룩해 준다는 것이다.
■ 단자론으로 설명하는 세계
그의 단자론에 의하면 무생물과 유생물들이 그것을 이루는 단자의 지각과 욕구의 정도에 따라 최하, 중간, 최상위로 구분될 수 있다. 무기물과 식물들은 최하위의 단자들로 구성되어 무의식적이거나 뚜렷하지 않은 혼란된 지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중간 단계에 속하는 단자들로 구성되며 중간 단계의 단자들은 영혼을 가지므로 기억을 하고 사고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최상의 단자는 인간의 이성적인 정신과 생생한 지각을 가지는 단자들이며, 무생물에서 동물, 인간, 신에 이르기까지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지각을 가진 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五 運命觀.
운명이란 것은 廣義로 말하면 대우주 대법칙을 이름이다.
➀ 운명이란 옮기는 것.
➁ 옮긴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
➂ 변하는데는 우연이 없고 필연적인 因果律의 법칙이 있다는 것.
➃ 因果律的 법칙은 神의 理念으로 氣化神(至氣)의 造化攝理 이래서 無事不涉 無事不命의 種子的 현상원리로 旣定되어졌다는 것.
➄ 그러므로 現象界는 질서정연하게 조화일치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수운선생은 曰 「盖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 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라고 하였다. 迭代와 盛衰는 運命의 二大綱領이다. 迭代가 없으면 盛衰가 없고 盛衰가 없으면 迭代가 없다. 迭代는 盛衰交替의 外的 階段이요, 盛衰는 迭代階段의 內容이다. 天主造化之迹이라는 것은 至氣神의 無事不涉 無事不命의 理를 가르친 것이오, 天下는 現象의 이름이며, 不遷不易은 絶對必然의 法則의 이름이며, 昭然은 普遍妥當을 의미한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운명이다. 우주적 운명은 자연계의 운명도 되며 인간계의 운명도 된다. 그러나 인간계의 운명과 자연계의 운명이 크게 다른 점은 인간은 자유의사를 가진데서 자연계 즉 우주의 인과율적 법칙을 복종하면서 자유의사의 활용으로 인하여 인간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다. 자연계는 우주율법(본능)이 정한 한도와 제약 이외에 一步도 자유롭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본능 이외에 자유의사로 활용된 지식을 이용하여 특수한 문화를 건설하였다. 예컨대 개미와 벌의 오묘한 사회생활은 萬年전이나 萬年후에도 본능의 제약 이외에 하등의 진보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千年 전후가 천양지차라고 할 만치 달라지고 진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면 자연계의 율법에 순응하고 한편으로는 자체의 자유의사를 활용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육체적 生 老 病 死와 같은 것은 천만년이 지나도 자연계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정신적 발명, 고안, 건설 등을 보면 자유의사의 덕이라 볼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계는 절대적 숙명으로 사는 자이나 인간은 숙명의 기초위에 자유의 운명 작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원칙상으로는 우주의 운명의 기초위에서 살아 가면서 作用的, 利用的, 方便的에서 자유적 변화를 가졌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 자연계의 운명과 다른 점이다. /PP.155-157.
註解 ; 이돈화는 수운의 법설인 포덕문 첫 문장에서 전제한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을 운명의 二大綱領이라고 이해하고 판단하였다. 광의로 해석한 운명의 ➃와 ➄의 운명의 정의인 ‘因果律的 법칙은 神의 理念으로 氣化神(至氣)의 造化攝理 이래서 無事不涉 無事不命의 種子的 현상원리로 旣定되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現象界는 질서정연하게 조화 일치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라 보면 동양사상의 明理學/命理學에서 말하는 생명의 숨은 질서(hidden order) 와 軌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생명의 숨은 질서란 생명의 숨은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리학에서 말하는 질서에 대해서 먼저 이해를 해야 한다. 明理學/命理學에서 대 우주의 질서(秩序,/order)에는 숨은 질서(hidden order)가 있고, 겉에 들어난 질서(displayed order)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알의 씨앗에서 조그마한 싹 곧 생명이 탄생하여 여린 줄기를 지나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모습과 과정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정말 기적과 같은 현상이라고 감탄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작은 씨앗이 때가 되면 움이 트고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가. 이러한 현상들을 씨앗과 주위에 숨어있는 질서 때문이다. 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生生之理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커다란 나무는 그 작은 씨앗에 숨어있는 질서의 나타남(표현)이라는 뜻이다. 그 숨어있는 질서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되고 저런 상황 하에서는 저렇게 변해야 된다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the order of nature [things, the universe ; 자연의 이치(만물의 이치. 우주의 이치) / 大宇宙와 小宇宙( macrocosm and microcosm)이론.
숨어 있는 질서의 정체를 본체라고 하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도록 겉으로 사물이 나타나는 질서를 작용이라고 한다. 이 本體와 作用의 상관관계가 바로 체·용(體·用)의 개념이다. 체로서의 ‘나’는, 진짜 ‘나’이고, 완전한 ‘나’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온 나(全體)’이다. 용으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나’이고, 그때그때 변화하는 겉으로 나타나는 부분적인 ‘나’일 뿐이다. / 명리학과 관련된 자료에서 정리함
또 현대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수반철학과도 흡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隨伴(supervene) 이란, 隨伴하다, 附隨하여 일어나다, 잇따라 일어나다, 결과로서 일어나다, 기존 상황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하다. / 명사형은 supervenience 로 隨伴, 附隨의 의미를 담고 있다./어학사전에서 정리. /오암의 해석/ 뒤 따르다. 숨겨져 있다. 담겨져 있다(包含, 含蓄). 병발(竝發ㆍ倂發)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구조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철학에서는 모두 핵심적인 것으로, 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꺼리들에 대해 각기 나름대로 여러 해결책들을 제시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들의 근거로서 제시된 종래의 이론들은 모두 각기 문제점을 안고 있어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할 만한 이론들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이 도입된 개념이 바로 '수반(隨伴, supervenience)' 개념이고,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구조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삼는 것을 수반철학이라 하기도 한다. / 관련된 자료에서 정리함
註 00 ; 生生之理 - 모든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무성해졌다가 사라지는 자연의 이치. 이라한 자연을 일원론’의 세계로 보고, 옛 선인들은 이를 ‘생생화화’(生生化化)라 해서 ‘낳고 낳아 변화하고 변화한다.’로 이해하여 이런 자연의 이치를 ‘생의’(生意)라고 했다. 생의란 ‘만물이 태어나게 하는 이치’를 말한다. 이러한 生生化化의 이치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생생지리’(生生之理)라 했다. 즉, 만물이 서로 낳고 번식하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유의어로는 元亨利貞. 生老病死. 自然之理/관련 자료들에서 재정리함.
註 00 ; 因果律 - 원인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 다는 법칙을 말한다, 불교의 세계관은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의지와 법이란 능동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힘과,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즉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因)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果)로서 나타난다. 이것을 인과법칙(因果法則)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업(業)'이라 하며,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여기에서 인과업보(因果業報)라는 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법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이렇듯 모든 森羅萬象은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나타난다. /어학사전과 과련 자료에서 정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사회적 생활에서 인간의 가치가 나타났다. 生 老 病 死의 大苦를 피하여 六年의 격세생활(隔世生活/ 세상을 등지고 수도수련에만 전념하는 기간의 생활-오암)을 한 석가도 필경은 세상에 나와 사회를 상대로 하고 활동하였다. 이 역시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個體운명 위에 사회적 운명을 連繫하여 왔다. 사회의 대 운명이 변동될 때에는 개체의 운명은 대 운명의 渦流(소용돌이-오암) 중에 沒入하고 만다. 천재지변, 전쟁 등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大禍가 미치게 되면 個體의 운명은 그 중에 휩쓸려 하등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평화시에는 文人이 賢相이 많이 나고 전쟁시에는 武人의 名將이 많이 생긴다. 이와 반대로 평화시에는 名將 자격도 與草木同腐하게 되고 전쟁시에는 名相 자격도 採藥歌를 부르게 된다. 이것이 어떤 개체운명이 사회운명의 지배를 받게 되는 一例이다. PP.157-158.
註解 ; 이돈화는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동학의 삶의 태도와 방향 그리고 목적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이)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정의한 것을 철저히 믿고, 인간은 사회적 공동의 삶에서만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지자인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사회)에 태어나 살아가는 하지만, 세상과 사람들을 등지고 타락한 시대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고행을 감수하면서 까지 수행에 힘쓰는 삶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단지 동시대의 같은 공간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삶은 사회적 공동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추구해서는 안 되는 삶이란 뜻인가? 또는 가치 없는 삶이란 것인가? 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사회적 삶만이 가치가 있어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이고 이에 벗어나는 삶은,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이 세상에는 사회적 인간만 있어야 하고 도덕적 윤리적인 개인의 차별적 삶은 추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군자나 성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 것인가.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반 사회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중에는, 그 시대의 정신과 그 사회의 흐름을 역행하여, 세상으로부터 온갖 박해로 인아여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찬 주장을 하여 그 시대 그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후세에 萬人의 尊崇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스승님들이신 신, 성사님 모두가 이에 속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Man is a social animal). - 화폐 공동체로서 ‘사회’의 탄생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이론가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975.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오암)다. 그녀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서유럽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되고 있음에 주목하고, 고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던 ‘사회적인 것’이 근대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이란 고대에 엄격하게 나뉘어 있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깨지면서, 과거 사적 영역에 머물렀어야 할 것이 공적인 의미를 획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병권, 2012, 화폐, 마법의 사중주, 187쪽) / 原始保險之史的硏究 田中靜夫 著 東京: 交通經濟社出版部, 昭和7[1932] 재인용.
/그는 인간을 정치적인 동물(Men are by nature, political animal/ 인간은 선천적으로,/본래,/태어나면서부터 정치적인 동물이다-오암.)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모여들어 사회를 만들고 정치를 하는 것은 그들이 본능적으로 絶對善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치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저 "정치학"에 쓰여 있는 구절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다. 만일 국가가 사회 없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의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집단 즉 사회를 이루고 산다. 그런 사회로서 가장 작은 단위는 가정이고 그 다음은 부락, 촌(村), 시(市), 학교, 직장, 정당(政黨),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우리가 이런 사회에 쓸 만한 인재가 되려면 우선 사회의 일원(一員)이라는 분명한 자각을 가져야 한다. 에서 출발되었다. / 관련 자료들에서 종합 정리
註 00 ; 生老病死의 大苦 - 불교의 四聖諦(苦諦, 集諦, 滅諦, 道諦)의 하나인 苦諦는 現實世界의 참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凡夫의 生存은 괴로움이라는 眞理이다. 苦는 生·老·病·死 의 四苦이며, 또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離別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根本인 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取蘊苦, 五陰盛苦:生存에 대한 執着)의 넷을 더하여 八苦라고 한다. 여기서 自然現象으로서의 生·老·病·死가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生·老·病·死가 괴로움인 것이다. 그럼에도 生·老·病·死는 人生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自己存在의 基盤이다./ 관련 자료들에서 정리.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그 색이 생기어 수· 상· 행· 식이 생기고 나면, 색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수· 상· 행· 식에서도 해탈하지 못한다. ‘그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슲어하며·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과 같은 커다란 고통의 덩어리에서 해탈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이것을 색의 발생이라 하며, 수· 상· 행· 식의 발생이라 한다. 어떤 것을 색의 소멸[識滅]이라 말하며,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소멸[滅]아라 하는가? 많을 것을 듣고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의 발생과 색의 소멸과 색의 음미와 색의 재앙과 색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고 사실 그대로 안다. 사실 그대로 알기 때문에 색을 즐기지 않고, 색을 찬탄하지 않으며, 색을 지나치게 애착하여 즐기지 않고, 또한 미래의 색을 들어내지도 않는다. 수· 상· 행· 식에 대하여서도 역시 폭넓고 자세하게 말할 수 있다./ 彼色生, 受·想·行·識生已, 不解脫於色, 不解脫於受·想·行·識. 我說彼不解脫生·老·病·死·憂·悲·惱·苦純大苦聚, 是名色集, 受·想·行·識集. 云何色滅, 受·想·行·識滅? 多聞聖弟子如實觀察色集·色滅·色味·色患·色離, 如實知. 如實知故, 不樂於色, 不讚歎色, 不樂著色, 亦不生未來色; 受·想·行·識亦如是廣說./ 『雜阿含經』 15, 17. 轉法輪에서
註 00 ; 색(色 rupa) - 불교용어로서 색깔과 모습을 말함. 불교에서 색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으로 정신적 존재의 총칭인 명(名 nāma)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어근을 분석해 보면 '파괴되는 것',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형체를 지니고 생성되어 변화하는 물질현상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는 질애(質碍)와 변괴(變壞)의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질애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변괴란 끊임없이 변화하여 마침내 소멸한다는 뜻이다. 현상세계 전반을 취급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색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5근(五根), 즉 5개 감각기관인 내색(內色)과 5경(五境) 즉 감각기관의 대상인 외색(外色), 미세한 색인 세색(細色), 미세한 색과 아주 상반된 거친 색인 추색(麤色), 명상의 결과로 생긴 색인 정과색(定果色)과 행위의 결과로 생긴 색인 업과색(業果色) 등이다.
색의 전체적인 용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색깔, ② 색깔과 형체는 색깔과 형체를 지닌 모든 물질적 존재로 시각(視覺)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이 경우 색깔은 현색(顯色), 형체는 형색(形色)이라고 한다. ③ 사물의 형체·모습, ④ 물질 일반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생성·변화시키는 물질적 현상으로, 이 경우 五蘊 중의 색온(色蘊)에 해당되며 나머지 수·상·행·식(受想行識)의 四蘊은 명(明)을 말한다. ⑤ 마음의 반대인 물질, ⑥ 육체, ⑦ 청정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인 색계(色界). ⑧ 집착 또는 색욕 등이다. /다음백과에서 정리함.
註 00 ; 아함경(阿含經/ āgama)- 불교 초기의 경전 모음이다. "아함"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번역(飜譯)된다. "아함"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된 가르침"으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지고 계승된 것을 뜻한다. 즉, 《아함경》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성전(聖典)을 가리킨다. 실제로는 고타마 붓다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다. 유사한 가르침이 남방불교에서는 팔리어로 전수되어 니카야(Nikāya 部)라는 명칭으로 불린 데 대해 북방불교에서는 산스크리트로 '아가마'라는 명칭이 전수되었고, 이것을 중국에서 번역한 것이 아함경이다. 오늘날 불교연구에 있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는 경전으로서 학문적 연구에 대응할 수 있는 이 경전을 빼놓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아함경의 기원은 BC 4~3세기로 추정된다. 석가모니 입멸 뒤 100년 무렵부터 교단이 양분되면서 시작된 부파불교시대에 각 부파는 과거의 전승에 입각하여 자파의 독자적인 경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함을 아함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시작된 관례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로 대승불교가 흥하여 대승경전이 제작되기에 이르자 아함·아함경은 소승불교·소승경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후일 대승 불교가 일어나자 아함(阿含)은 소승(小乘)이라고 천칭(賤稱)되어 중국 등의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이르러 원전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의 《4부(四部)》와 한역 대장경의 《4아함(四阿含)》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원시 불교의 진의(眞意)를 구명하려는 경향이 생겨 뛰어난 성과를 가져왔다.
한역된 《4아함(四阿含)》은 다음의 《장아함(長阿含)》·《중아함(中阿含)》·《잡아함(雜阿含)》·《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종의 《아함경(阿含經)》을 가리킨다:
① 長阿含經은 디가니카야(Dῑgha-nikāya 장부/長經)에 대응되며 내용이 긴 30개의 경을 포함한다.
② 中阿含經은 마지마니카야(Majjhima-nikāya 중부)에 대응한다. 중간 길이의 222개 경을 포함한다.
③ 增一阿含經은 앙구타라니카야(Aṅguttara-nikāya 증지부)에 대응되며 교리에서 구사되는 숫자에 따라 473개의 경을 序品을 제외한 1~11법으로 집합·정리했다.
④ 雜阿含經은 상유타니카야(Saῑṁyutta-nikāya 상응부)에 대응되며 다른 아함에 수록되지 않은 小經 1,362개의 짧은 경들을 모은 것이다.
이밖에 별역 잡아함과 단권 잡아함을 포함한다.《4아함》은 불교 교단이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에 이미 주로 형식상으로 분류되어 대개 모든 부파가 그 원형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이들 한역(漢譯) 4아함의 각각은 서로 다른 부파에 의하여 전하여진 것들이다. / 위키 백과와 관련 자료에서 정리
註 00 ; 受·想·行·識 -經에 의하면, 五蘊의 受, 想, 行(思)은 '觸'에서 발생한 새로운 의식 상태이다. 그러면 이러한 意識狀態는 왜 나타나게 되는가? 그것은 인식된 내용에 相應하는 존재가 '實在한다'고 느끼는 '觸'의 의식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된 내용에 相應하는 존재가 實在한다는 느낌(觸)이 없다면, 우리는 인식된 對象에 대하여 苦樂의 감정을 느끼거나(受), 그것을 대상으로 思惟하거나(想), 그것과 실천적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思)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중생들이 存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五蘊'은 바로 識이 對象으로 구성한 觀念일 따름이다./ 관련 자료에서 정리.
註 00 ; 與草木同腐/草木俱朽- 『開闢』 通卷 24卷/1922. 「民衆의 巨人=孫秉熙先生의 一代記」에서
前略 - ‘二十歲前後의當時는 先生의 一生에잇어 甚히危險한期이엇다. 그가一種의志를得하지못한 逸民이되어 酣嬉淋漓(감희림리-오암이 삽입)의悲態로써 一生을終할가 그러치아니하면 背에 萬里鏡을負하고 手에不平의刀를執하야 城을掠하고 富를奪하는 一黨의豪賊이될가 그러치도아니하면 이것저것을다모르는한낫의村中悖子가되어 一生을與草木同腐하는者가될가 이와갓튼몃가지의臆測은 當時의父老가當時의先生을秤量한바이잇슬것이다.-以下略./ P.77.中間.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고인(古人)들은 흔히 현준(賢俊)과 재덕(才德)으로 조정(朝廷)에 있지 못하고 산야(山野)에 묻혀 불우하게 지내는 것을 근심하며 탄식(憂嘆)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 재덕이 그 생전(生前)의 벼슬살이에나 적합할 뿐 후세를 위해서 구명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생전에 크게 쓰이지 못하고 초목(草木)과 함께 썩어 죽은 뒤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 진정 그 사람을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할 만한 일이냐. / 古人多以賢俊才德。不得居於庙堂。處於山林草野。爲失所而憂歎。若其才德。只合於生前任職。不足爲後世所明。則生前不得顯用。與草木同腐。無遺蹟於身後。實爲其人可憂歎也。/仁政 23卷. 용인문 사(用人門 四)
註 00 ; 酣嬉淋漓(감희림리) - 구양수(歐陽修)의 석비연시집서(釋祕演詩集序)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마음속에 쌓인 뜻을 풀 수 없게 되자 벼슬도 없는 시골 노인들을 따라 다니며 술에 잔뜩 취해 쓰러져도 그 노인들은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 無所放其意(무소방기의) 則往往從布衣野老(칙왕왕종포의야노) 酣嬉淋漓(감희림리) 顚倒而不厭(전도이불염) 予疑所謂伏而不見者(여의소위복이불견자)
註 00 ; 採藥歌 - 만법전(萬法典) - 채약가(採藥歌)의 전문
송학산(松鶴山) 구름 속에 학(鶴) 탄 손님 오건만은 지재차산(只在此山) 좋은 복(福)을 운심부지(雲深不知)뉘알소냐 송하동자백우선(松下童子白羽扇)에 채약(採藥) 곳만 갈처주니 삼십육궁도시춘(三十六宮都是春)에 불로초(不老草)를 뉘알소냐 가이 없다 진시황(秦始皇)은 동남동녀오백인(童男童女五百人)을 서(徐)씨 배에 가득 싣고 삼신산(三神山)에 보내놓고 아방궁(阿房宮)에 조을면 소식(消息)올 가고 대타(苦待)가 불사약(不死藥)은 아니오고
허송백발(虛送白髮) 돌아오니 만고영웅(萬古英雄) 좋은 몸이 한번 죽음 못 면(免)하고 한 길 없이 돌아갈 때 금옥경방삼천궁녀(金玉瓊房三千宮女)어이잊고 죽었는고 만고영웅혼(萬古英雄魂)이라도 한번 간 뒤 소식(消息)없네 채약(採藥)갔던 서(徐)씨배는 삼신산(三神山)에 약(藥)을 캐여
한 배 가득 높이 싣고 범피중류(汎彼中流) 떠나오며 불로가(不老歌)를 부를 적에 서왕모요지연(西王母瑤池宴)에 벽도(碧桃)따서 싣은 배가 한무제승로반(漢武帝承露盤)에 이슬 받아싣은 밴가 이태백(李太白)의 백화주(百花酒)에 달를 건져 실은 밴가 적벽강추야월(赤壁江秋夜月)에
소동파(蘇東坡)를 실은 밴가 심양강명월야(潯陽江明月夜)에 백락천(白樂天)을 실은 밴가 일월강벽파상(日月江碧波上)에 서(徐)씨 실은 조화(造化)배라 삼신산불사약(三神山不死藥)을 일광선(日光船)에 가득 싣고 사십팔장노(四十八將櫓)를 저어 순풍(順風)에 떠건마는 어느 뉘가 안단 말가
어언간(於焉間) 배를 대고 진시황(秦始皇)을 찾아가니 황천객(黃泉客)이 오래(吾來)로다 만고영웅진시황(萬古英雄秦始皇)도 죽고 나니 쓸데없네 만고영웅호걸(萬古英雄毫傑)들아 사후영웅(死後英雄) 누구인고 생각(生覺)하니 슬픔이라 불사약(不死藥)을 걸머지고 운산벽은(雲山僻隱) 찾아들어 깊이깊이 갈마놓고 술 한잔 취키 먹고 정신(精神)을 가다듬어 사면(四面)을 살펴보니 전(傳)할 곳이 어느 곳고
삼강오륜(三綱五倫) 어느 곳고 적선적덕(積善積德) 어느 곳고 선남자(善男子)가 그 누구며 선녀인(善女人)이 그 뉘인고 사면(四面)이 적막(寂寞)한데 누굴 만나 전(塡)해줄고 어이어이 관음관음(觀音觀音) 삼강오륜(三綱五倫) 발켜내여 적선적덕도덕가(積善積德道德家)에 삼십육궁(三十六宮) 봄이 들어 죽은 나무 꽃이 피고 죽은나무 잎이 피고 죽은 나무 열매 열어 재봉춘절(再逢春節) 돌아왔네 무궁무궁당래천지(無窮無窮當來天地) 무궁무궁관음경(無窮無窮觀音經)을 구불절송(口不絶誦) 외워가며 만팔천세(萬八千歲) 놀아보세 / 관련 자료에서「採藥歌」만 발췌.
註 00 ; 만법전(萬法典) - 娑婆世界의 敎主이신 釋迦佛의 靈山會上이 終決된 當來世는 彌勒尊佛이 敎主되여 龍華會上이 展開된다. 現在 우리나라 彌勒敎와 上帝敎는 密接한 關聯을 가진 까닭도 後世를 渴望하는 信仰이라 하노라. 萬法典에 담겨있는 內容에 詳祭하면 歌詞, 比訣, 呪文, 藥名, 食糧, 敎訓等은 擧皆 仙敎가 彌勒敎를 讚誠하는 信仰에 出發한 것이라고 思料된다. 그러한 훌륭하고 壯한좋은 敎法을 作者나 綸輯者가 末詳하여 遣憾千萬이다. 或風說에 依하면 震默大師의 編輯이라하나 於理에 不當한 訛傳이다. 祖師는 生死에 解脫하고 因果에 無關하여 明心見性한 道人으로 人天因果의 敎理에 該當할수 없는 證言이다. / 西紀 一九八六年 二月 二十二日 第二代 國會議員等覺法師 朴性夏 의 만법전간행서(萬法典刊行序)에서 발췌.
------------------------------------------------東學之人生觀 註解書 14-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