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석문釋門의 제자들은 불도를 성취하고 중생을 이롭게 함을 최상으로 보은하는 일이라 여긴다. 이렇게 다생의 부모님께 보답할 뿐만 아니라 무량겁 이래 사생육도를 윤회하면서 몸을 받은 일체 부모님께 보답하여야 한다. 부모님 살아계실 적에 효도 공경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 사후 영식靈識이 영원히 생사윤회의 고해를 벗어나 늘 정각에 머물수 있도록 천도해 드려야 한다. 그래서 석문의 효도는 대부분 숨겨서 드러내 밝히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록 유교의 효도는 부모님 봉양을 우선으로 삼지만, 석문의 효도는 양친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출가하였다고 해서 끝내 부모님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불문의 제도에 따르면 반드시 출가를 먼저 부모님께 여쭈어야 한다.
설사 부모님을 부탁할 형제나 자식, 조카가 있을지라도 가족에게 여쭈어 가족이 허락하여야 출가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출가한 후 그 형제가 세상을 떠나 가족이 의탁할 곳이 없으면 자신의 의발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여 부모님을 봉양하여야 한다. 그래서 장로 종이 선사는 부모님을 모시는 향기로운 종적이 전해지고 있고, (송나라 새대 장로 종이선사는 양양 사람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모친 진씨가 그를 데리고 외삼촌 집에서 양육하였다. 선사가 성장한 ㅎ수 세간의 서적을 박학하게 통달하였다. 29세에는 출가하여 종요에 깊고 밝았다. 나중에 장로사에 머물면서 모친을 방장 동쪽 방에 모시길 청하여 봉양하면서 그녀에게 염불하여 정토왕생을 구하길 권하였고, 7년이 지난 후 그 모친은 염불하면서 돌아가셨다 《정토성현록》참조) 도비선사는 아버지의 장례를 지닌 이적이 전해지고 있다. (도비선사는 당나라 황실의 종친이다. 장안 사람으로 첫돌 때 부친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19세에 전란으로 혼란해져 미곡이 매우 귀해지자 모친을 등에 업고 곽산에 들어가 자신은 곡식을 멀리하고 걸식한 음식으로 모친께 봉양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곽산의 전쟁터에 머물면서 백골 한 무더기를 거두어 모아 놓고 경전과 주문을 염송하면서 부친의 뼈가 뼈 무더기에서 나오길 기도하였다. 수일 후 부친의 뼈가 과연 뼈 무더기에서 뛰어나와 아들 면전에 모였다. 이에 그는 다른 뼈를 매장하였고 부친의 뼈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냈다. 《송고승전》참조)
그래서 경전에서 이르시길, “부모님께 공양한 공덕은 일생보처보살에게 공양한 공덕과 같으니라.” 하셨다. 양친이 건재하시면 마땅히 선교방편으로써 권유하여 그들이 재齋를 지키면서 염불하여 서방극락 왕생을 구하도록 하여야 한다.
양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자신이 경전을 독송. 수지한 공덕을 늘 지성을 다해 양친에게 회향하여 그들이 영원히 오탁 악세를 벗어나 육도생사 윤회의 고통을 길이 이별하며,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불퇴전지에 올라 미래제가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하여 자신과 타인이 함께 무상정각의 도를 성취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해야 세속의 효와 다른 큰 효이다!
[보충] 정종 제16조 해현 노화상의 큰 효심
민국 9년(1920년), 현공은 나이 20세 때 마음을 굳게 먹고 뜻을 정해 어머니께 절하고 작별인사를 하고서 동백산 태백정 운대사의 전계 노화상께 귀의하였다.
전계 노화상께서는 친히 현공의 머리를 깎아주어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법면은 「해현海賢」이라 지어주고, 자字는 「성성性誠」이라 지어주셨다. 그 후 현공은 23세 때 호북성 영보사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전계 노화상은 본래 임제종 백운선사 계파의 일대 대덕이다. 그러나 오히려 현공에게 참선을 가르친 적이 없고, 또한 경전 강설과 설법을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오직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六字洪名만 전하시면서 늘 계속해서 끊임없이 칭념할 것을 부촉하였을 뿐이었다.
민국 25년(1936년), 현공의 나이 36세에 여러 해 동안 헤어져서 살았던 큰 형이 찾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현공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생활형편이 너무나 지나치게 어렵고 고생스러워 현공은 어쩔 수 없이 큰 형을 동백산에 간소하게 안장하였다고 한다.
현공은 113세, 2013년 1월 왕생하시기 하루 전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거사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날 현공은 그 거사에게 꿈에 큰 형이 찾아와서 천도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가 안장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는 말을 들려주셨다.
이처럼 현공이 형제와의 정이 깊고 혈육의 의리가 돈독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속이 따뜻해지게 한다.
현공의 두 분 형님과 동생이 잇달아 계속해서 세상을 떠난 후, 노모의 연세가 이미 고령이 되었어도 곁에서 봉양할 사람이 없어 노화상은 그 즉시 어머니를 산으로 모셔와 보살피셨다. 1956년 음력 8월, 현공의 노모께서 별안간 느닷없이 고향 옛집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는 말씀을 꺼내시자 현공이 간곡하게 가시지 말 것을 권하였지만, 끝내 만류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노모를 모시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생산대의 채지菜地에 있는 세 칸짜리 초가집에서 잠시 머물러 사셨다.
그 이듬 해(1957년) 초가을 어느 날 저녁에 노모는 손수 만두를 빚어서 드신 후 저녁에 문 맞은편에 있는 바깥채에서 주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현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바깥채에는 모기가 너무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노모께서 말씀하시길, “그래도 어째든 내가 방안에서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 다음날 정오 88세의 노모는 자재하게 왕생하셨다.
그 당시 생활여건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워서 현공은 어머니를 위해 3일 동안 염불하신 후, 얇은 널빤지로 된 관에 노모를 간소하게 안장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 일은 언제나 현공의 마음에 걸려 어머니의 한없는 깊은 은혜에 그지없이 송구함을 느끼게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8년이 지난 후, 현공은 어머니를 위해 묘를 이장하고 묘비를 세우고자 발심하셨다. 그런데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한 일이겠는가?
묘혈을 파서 열어본 결과, 뜻밖에도 관속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안에는 단지 관을 박을 때 썼던 큰 못 몇 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일체제불의 정업淨業의 정인正因이다.
이에 연지대사께서는 “부모가 속세를 떠나야 자식의 도가 비로소 성취된다.” 말씀하셨다.
현공의 어머니는 보살이 응화하심이 마치 달마대사가 짚신 한 짝을 어깨에 걸고 계셨던 것처럼 유희신통遊戱神通하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우리들 범부의 경지로는 당연히 감히 망령되이 단정하지 못하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현공의 지극히 순수하고 진실하신 효심은 우리로 하여금 오체투지하기에 충분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우러러 흠모하기에 충분하다.
ㅡ《내불삼성영사집來佛三聖永思集》
《능엄경》 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과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에서는
시방세계의 모든 큰 보살들이 깨달음의 과위에 올라서야
염불법문의 뛰어남을 알고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들에게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가르치신다.
ㅡ인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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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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