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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독서실까지 쫓아와 곤봉을 휘둘러
증 언 자 : 김수영(남)
생년월일 : 1963. 8. 4(당시 나이 18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대학생)
조사일시 : 1988.9
개 요
1980년 당시 전남고 2학년이었던 김수영씨는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 시위를 우연히 목격한 뒤로 줄곧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계엄군과 맞서 싸운다. 부상을 당하거나 연행된 적은 없다.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나는 1963년에 지금은 전남대학교 부지가 되어버린 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머님한테 들은 이야기로 외조부께서 6·25 당시 송정리 본향면에서 사셨는데 꽤 부자였다고 하신다. 외조부께서 빨치산을 도와주었다는 것 때문에 경찰에서 외조모를 죽였다고 한다.
5·18 당시 나는 전남고 2학년생이었다. 집이 신안동이었던 나는 5월에 중간고사가 있어 전남대 정문 앞에 있는 독서실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5·18은 날씨가 쾌청해, 공부도 하기 싫고 해서 자전거를 타고 전남대로 놀러갔다. 그런데 정문이 왼쪽 쪽문만 남기고 잠겨져 있고 공수부대들이 있었다. 장교로 보이는 공수는 밖에 나와 뭐 하는지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공수가 쪽문에 각 1명씩, 큰문 안쪽에는 7명이 '어깨걸어 총' 상태로 한 손에 곤봉을 들고 서 있었다. 정문 앞 다리까지 가보니 대학생들이 서너 명씩 왔다 되돌아가곤 했다. 근처 서기슈퍼마켓 앞에는 학생들 20-30명이 돌아가지 않고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50명 정도로 불어났다. 정문에서는 학생 몇이 책을 들고 가, "우리는 데모와는 상관없이 공부하는 학생으로 도서관으로 가겠다."고 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학생수가 점점 불어나자 공수 소대장이 확성기를 통해 말했다.
"휴교령이 내렸으니 돌아가시오."
"우우."
한 학생이 정문을 향해 돌을 던지자 다른 학생 50명도 일제히 돌을 던지기 시작, 쪽문에 서 있던 공수 2명이 교문 안쪽으로 철수하고 문이 닫혔다. 소대장이 학생들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했으나 학생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2, 3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교문 안에 공수 20여 명이 지그재그로 줄을 섰다.
학생들이 돌을 계속 던지면 소대장은 진압으로 해산시키겠다며 5분 안에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학생수는 오히려 계속 늘어났고 삼삼오오 짝지은 학생들이 용봉슈퍼마켓 앞까지 왔다. 계속 돌을 던지자 정문이 열리며 공수부대들이 쪽문을 사이에 두고 반원형으로 배열했다. 더 심하게 돌을 던졌으나 공수들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갑자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들은 순식간에 학생들 대열 사이로 뛰어가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차면서 진압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전남대 사거리 쪽으로 도망가는데 앞선 공수부대들은 대열을 따라잡아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나는 용봉슈퍼마켓 반대 쪽에 서 있는데 한 대학생이 도망가다가 그곳에 있던 자전거에 걸려 넘어졌다. 뒤따라오던 공수가 발로 머리를 걷어차고 손으로 자전거를 들더니 그 학생에게 던져 복부가 페달에 찔렸다. 나는 그사이 그 앞을 거쳐서 도망쳤다. 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쳤으나 용봉슈퍼마켓 쪽으로 도망간 학생들은 공수가 끝까지 쫓아가서 3명이 잡혔다고 했다.
나는 3층 독서실로 올라갔다. 주인이 셔터를 내리자 고등학생 몇 명이 우우 하며 셔터 밑으로 뛰어들었다. 4명의 공수가 독서실로 따라 올라오자 주인이 항의했다.
"여기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독서실인데 이래도 되는 거냐?"
"00, 독서실은 뭔 얼어 죽을놈의 독서실이야."
하며 뒤지기 시작했다. 2인 1조가 된 공수 중 1명이 내 학교배지를 보고 2자가 있어서 그냥 갔으나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금호고 3학년인 박영신을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너 이 새끼 일어서!"
"왜 그러느냐?"
순간 바로 옆의 공수가 다짜고짜 곤봉으로 영신 형의 머리 정수리를 내리쳤다. 형은 곧바로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고 형의 노트와 책에 피가 쫙 번졌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번 휘 둘러보고 나가버렸다.
주위 학생들이 영신형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고 나는 형의 피묻은 노트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따라 나갔는데 그때까지도 택시를 못 타고 밖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학생(27, 28세 가량)이 다가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영신 형은 무의식 상태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누가 일신슈퍼마켓 쪽에서 택시를 잡아오자 그 대학생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며 택시비와 치료비로 보태 쓰라고 했다. 영신 형은 머리를 12바늘이나 꿰맸다고 한다.
한 대학생이 공중전화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일신슈퍼마켓로 안내했다. 슈퍼마켓에서 잔돈을 꿔다 주고 전화내용을 들었는데, "일 터졌다. 애들한테 빨리 연락해서 오라고 해라"였다. 전화 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했다.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독서실로 돌아가 책가방을 정리해 집에다 두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나왔다. 2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전남대 사거리에서 무리지어 투사의 노래를 부르며 30분 정도 왔다갔다하더니 스크럼을 짜고 시내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광주역전파출소에 돌멩이를 던지고 시청을 통해 계림동으로 빠져나가 계림파출소를 부쉈다. 시위대의 달려가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여학생들은 점차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대열은 시민관 앞에서 저지 해산당하고 10-20여 명이 잡혀갔다. 대열은 터미널과 전남여고 쪽으로 두 갈래가 되었다. 대열이 해산됐다.
"도청앞으로 모입시다."
3시쯤에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는데 가톨릭센터에서 도청까지의 도로는 시위대가 없이 조용했다. 화분, 보도블럭, 쓰레기통 등 깨어진 조각들이 널려 있었고 차는 다니지 않았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사거리에서 제일고 앞을 내다보니까 공수부대들이 타고 있는 트럭 10대가 있었다. 지프차 1대에 공수 몇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날은 귀가했다.
20일 오후에 MBC방송국에 갔었는데 셔터가 내려진 문에서 시민들이 문을 열라고 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한 청년이 군용트럭을 몰고와 트럭으로 셔터를 들이받았다. 셔터가 찌그러져 반쯤 올라가자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가지고 들어간 뒤에 바로 불이 났다.
20일 저녁 광주역을 공격하다
20일 저녁 광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중간 부근에 서 있는데 어디선가 최루탄이 터지는지 매운 냄새가 났다. 광주고속터미널 앞 주차장에서는 닫힌 철망문을 사이에 두고 시민들이 문을 열라고 달그락거리자 안에서 정비공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왔다. 시민들이 차를 내놓지 않으면 문을 부수겠다고 하자 자기들은 책임자가 아니니 물어봐야 된다며 5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2분 만에 나와, "맘대로 해버리쇼."라는 말을 전하자 우우하고 몰려들어가 고속버스 7대를 시민들이 가지고 나왔다.
시민을 가득 태운 버스가 광주역을 돌파한다며 광주역을 향해 달릴 때 나와 같이 차를 탄 사람들은 커튼을 찢어 입을 가렸다. 공수부대들은 광주역 오거리 사이 사이에 서 있다가 차가 오면 길을 터주면서 최루탄과 돌을 던졌다. 첫번째는 유리창에 금이 가고 두번째는 유리창이 깨지며 최루탄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탄 버스는 운전석 반대 쪽에서 날아온 최루탄이 운전석 정면에 떨어졌다. 중앙고속 터미널을 향해 급커브를 튼 차가 전봇대에 부딪히며 멈췄다. 나는 유리창으로 뛰어내려 현재 북광주 전신전화국 뒷편을 통해 대한통운 앞으로 갔다.
아저씨 한 명이 드럼통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아줌마가 팔을 잡고 들어가자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다 죽어가는데 내가 집에 들어가서 어쩔 것이냐?"
"저 개새끼들 다 죽여버린다."
고 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아저씨가 아줌마를 설득해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것을 지켜본 우리는 와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런 상황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통운 앞 도로에 지방에서 올라온 일반 화물트럭이 오자 시민들이 차를 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모두 쉽게 내주었는데 여수에서 무를 싣고 온 아저씨 한 분이,
"내가 가서 저것들을 깔아버리겠다."
며 광주역을 향해 돌진했다. 광주역에서는 군인들이 쏘는 신호탄이 다다다다 소리와 빨간 불꽃을 내며 날아다녔다. 그런 상황이 밤새 계속되었고 나는 새벽 3시에야 귀가했다.
21일 도청 앞 발포
21일 아침 8시경에 광주역에 가보니 군인들은 없었고 뒤집힌 채 부서지고 불탄 차만 8대 있었다. 분수대와 가로수에 부딪힌 차 등은 대부분 일반 트럭과 군인 지프차였다. 곳곳의 전화박스에, '부처님 오신 날 2시 집합'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도청 앞에는 태극기로 덮인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인 사람'이라 했다. 시위차량을 타고 무등경기장 쪽 롯데제과 앞으로 갔는데, 롯데제과 앞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안에서 나온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하여 안에 있는 식품을 다 달라고 3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자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있는 빵, 계란, 콜라를 지나가는 차마다 조금씩 분배했다. 계란을 실은 트럭이 있어 차째로 가져가 려 하자 롯데제과 직원이 만류해 계란만 나눠주었다.
금남로로 나가니 시민들이 김밥, 우유, 빵 등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나도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김밥 2개, 우유 1개, 콜라 2개를 내 몫으로 받아 먹고 전일빌딩 앞으로 가다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나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야단을 치셨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열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소독만 해주고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도청 앞에는 2, 3명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용감한 몇 사람이 접근하여 시체를 빼가지고 오면 박수를 쳤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사람들이 시체를 상가 통로를 통해 후문 쪽 식당 담 밑에 나란히 뉘어놓았다. 그런데 전일빌딩 뒷골목 쪽에서 공수부대들이 몰려와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게 저지하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서 끄집어갔다. 나는 동구청 옆 건물 다방 옥상(4, 5층)에 올라가 있다가 공수부대들이 철수한 후 내려와보니 시체 2구도 없었다. 그 자리에 양철문이 덮여 있었다. 양철문을 들어보니 시체가 있던 자리 사방 1미터에 피가 흥건히 고여 두부 두 개의 크기로 응고되어 있고,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저런 죽일 놈들이 없다"며 흥분했다.
21일 오후 전남대 정문 쪽에서도
그날 오후에 전남대 정문 쪽으로 갔더니 담을 따라 1개 대대 정도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열라며 데모를 하는데 군인 지프차에 대형 촬영기를 단 민간인(기자라고 했다)이 들어오자 시위대열이 길을 터주었다. 다리 한 가운데서 촬영을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자식 간첩이다."
"저 자식 끌어내려!"
"아니예요. 저는 간첩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끌어내렸다. 시위대열 선두에 선 사람이 공수에게 휴전을 요청하여 그 사람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갔고, 공수 한 명이 왼쪽 쪽문을 열고 데리고 들어갔다. 공수와 민간인이 악수를 하자 시위대열의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 사람은 수위실 뒷쪽으로 끌려갔다.
다시 데모가 시작됐고, '전두환 찢어죽이자', '계엄령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살인마들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들은 또 최루탄을 쏘았으나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왼쪽 담을 무너뜨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남대 사회대 건물 자리에 위치한 대학원 앞에서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공수부대가 후문을 향해 S자를 이루며 뒤로 후퇴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군인들이 집결하여 대반격을 가했다. 시민들이 외쳤다.
"도청으로 갑시다."
나는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27일 새벽의 총소리를 들으며
22일날 오후 전남대 운동장에 갔는데 군인들이 철수하고 난 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밥솥을 걸었던 자국과 휘발유가 드럼통에 반쯤 남아 있었고(드럼통 4개) 텐트는 걷어서 불살라져 있었다.
도청 집회 참석을 위해 각동마다 50-200명 정도가 나왔다. 무슨 동이라고 씌어진 깃발을 가지고 있으면 차가 와서 태워 도청 앞으로 갔다. 분수대 위에서는 아무라도 발언할 수 있는 자유토론회가 열렸다.
한번은 백운동에서 나주 가는 길목으로 지프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논두렁을 가리키며, "저기도 있다."고 해 가보니 남자 시체 8구가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삼촌을 찾으러 전남대, 조선대, 적십자병원 영안실에 갔는데 전남대병원에 있는 시체들 얼굴에 페인트 칠이 되어 알아보지 못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
27일날 새벽, 헬기 소리에 잠이 깨어 옥상에 올라가보니,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목숨만은 보장한다."는 소리와 함께 비라가 뿌려졌다. 도청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30분 정도 났고 한참 동안 TV가 나오지 않았다.
5·18 이후에 넝마주이나 구두닦이 등 연고지 없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됐고 갱생원도 거의 폐쇄되다시피 했다. 아무리 진상규명, 진상규명 하지만 사망자의 숫자를 정확히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라 본다.(조사.정리 김혜형)[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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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주고 아껴주는 웃음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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