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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고속버스나 휴게소에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긴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지만 스님들이 시간에 맞춰서 여느 때와 똑같이 문수선원에 도착해서 공부 준비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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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광사에서 오신 스님이 큰스님께 인사를 올리셨다.
“아 내가 갔던 보광사. 공부하러 이렇게 바람 한 번 쐬야지.” 하고 큰스님이 반가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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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큰스님의 생신 대중공양을 준비해 주셨던 구지 법화사에서 이번에는 생신 공양을 안한다고 하시는 큰스님의 전화연락을 받고 그래도 아쉬워서 스님과 보살님 한 분이 큰스님 드실 감주와 대중스님들께 공양올리실 떡을 준비해 오셨다.
여름에 반가사를 올리셨던 장호원스님들이 이번에는 비단 가사를 만들어 오셨다. 큰스님은 장호원스님들이 좋은 황도를 보내주어서 올여름 복숭아 중에 제일 맛있는 복숭아를 드셨다고 인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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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옥스님이 주신 경옥고를 잘 먹어야지.”
하고 큰스님이 웃으며 즐거워 하셨다.
혜일성 보살님의 손자 도현이 들어왔다. ‘만사형통’ ‘고진감래’ ‘어불성설’ 같은 사자성어를 다 알았다.
“야 니가 몇 살이지? 여섯 살? 학교 언제 가냐? 근데 벌써 한문 문리가 났어.”
하고 큰스님이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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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았으면 손자 볼 때까지 봐줘야지.”
큰스님은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10권씩을 한꺼번에 넣을수 있는 케이스 두 개와 보자기를 대중스님들에게 공양하셨다.
“이거 다 연구한거야. 세 번째로 완성되었어.” 하고 화엄경 케이스를 만져보셨다.
“사찰에서도 전부 그렇게 하세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뭐든지 후속 서비스를 잘해주라고 곁에 계시던 스님들에게 당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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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인사하러 올라오신 법공양실 자원봉사자분들께도 큰스님이 추석선물을 주셨다. 늘 말없이 와서 봉사하는 분들 덕분에 법공양을 잘하고 있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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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승스님, 저 스님은 뚝심좋고 머리좋고 공부하면 밤을 새워 공부를 해. 근래에 재발심을 해서 여기 나왔어.”
하고 큰스님이 제자 자랑을 하셨다.
“사판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공부하기 힘든데 잘하셨습니다.”
입승스님이 처음듣는 말씀처럼 대답하셨다. 몇 달째 두 분의 대화내용이 같았다.
“가까이 있어도 안오는 사람은 전혀 안와.” 하시는 큰스님 말씀에 “뜻이 없는데요”하고 입승스님이 말씀드리자 큰스님은 “뜻이 없으면 안오지.”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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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제자이신 지상스님이 큰스님께 드릴 송이버섯을 가져오셨다. ‘봉화 송이입니다’라고 하셨다가 ‘부석사’라고 덧붙이셨다. 스님들께는 절이 어딘지 금방 알 수 있는 랜드마크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랜드마크는 탐험가나 여행자가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에서 유래했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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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43권이 우리 손에 돌아왔다. 본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서문을 펼쳐서 천천히 마음을 담아 읽는 것으로써 간단한 점안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서문
보살마하살이 연꽃 위에 가부좌하고 앉으시니 몸의 크기가 연꽃과 잘 어울리며, 모든 부처님이 신통한 힘으로 가피하여 보살들 몸의 낱낱 모공마다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은 광명을 내느니라.
낱낱 광명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은 마니보배를 나타내고,
낱낱 마니보배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누각을 나타내고,
낱낱 누각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연화장 사자좌를 나타내었으니라.
낱낱 사자좌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광명을 나타내고,
낱낱 광명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색상을 나타내고,
낱낱 색상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광명바퀴를 나타내었느니라.
낱낱 광명바퀴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비로자나 마니꽃을 나타내고,
낱낱 꽃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꽃받침을 나타내고,
낱낱 꽃받침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부처님을 나타내고,
낱낱 부처님은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신통변화를 나타내고,
낱낱 신통변화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낱낱 중생들 가운데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부처님의 자유자재하심을 나타내었느니라.
낱낱 자유자재함으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불법(佛法)을 비처럼 내리고,
낱낱 불법에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수다라(修多羅)가 있고,
낱낱 수다라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법문을 설하고,
낱낱 법문에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금강지혜(金剛智慧)로 들어갈 법륜(法輪)이 있는 것을 차별한 말로 각각 다르게 연설하고,
낱낱 법륜으로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중생세계를 성숙하게 하고,
낱낱 중생세계에는 백만억 나유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작은 먼지 수 중생이 있어 불법 가운데서 조복함을 얻었느니라.
2016년 5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십정품은 선정에 대한 내용이다. 선정은 맑고 밝게 깨어있는 정신 상태지만 이렇게 넉넉하고 풍요롭다. 대충대충 멍청하게 목석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선정은 먼지 하나에서부터 저 드넓은 우주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계 모든 존재를 낱낱이 분별하고 감지해서 느끼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여러분도 일상생활을 하다가 아침 햇살이 방에 들어오면 먼지들이 가득히 떠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햇빛이 들어오면 꽉찬 그 먼지들이 다 보인다.
지금 이 공간에도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햇빛이 들어오면 먼지들이 다 보여서 알면 호흡하기도 거북할 것이다.
우리들 의식세계가 선정으로 초롱초롱 성성하게 깨어있으면 여기 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감지할 수가 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선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대충 생각했던 선정과 차원이 다르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비로소 정각을 이루어서 펼치신 깨달음의 경계다. 출발부터 깨달음의 경계를 다 드러냈기 때문에 범인들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깨달음의 경계는 이와 같다’는 것을 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八
十廻向品 第二十五之六
四,十廻向
8,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57) 給侍諸佛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自以其身으로 給侍諸佛하야 於諸佛所에 念報重恩호대 如父母想하며 於諸如來에 起深信樂하야 以淸淨心으로 護佛菩提하며 住諸佛法하야 離世間想하고 生如來家하며 隨順諸佛하야 離魔境界하며 了達一切諸佛所行하야 成就一切諸佛法器니라 菩薩이 爾時에 以此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得淸淨心하야 一切智寶로 而自莊嚴하며 願一切衆生이 住善調伏하야 遠離一切諸不善業하며 願一切衆生이 得不可壞堅固眷屬하야 普能攝受諸佛正法하며 願一切衆生이 爲佛弟子하야 到於菩薩灌頂之地하며 願一切衆生이 常爲諸佛之所攝受하야 永離一切不善之法하며 願一切衆生이 隨順諸佛하야 修行菩薩最勝之法하며 願一切衆生이 入佛境界하야 悉皆得授一切智記하며 願一切衆生이 與諸如來로 皆悉平等하야 一切佛法에 無不自在하며 願一切衆生이 悉爲諸佛之所攝受하야 常能修行無取着業하며 願一切衆生이 常爲諸佛第一侍者하야 一切佛所에 修智慧行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給侍諸佛하야 善根廻向이니 爲欲證得諸佛菩提하며 爲欲救護一切衆生하며 爲欲出離一切三界하며 爲欲成就無損惱心하며 爲得無量廣大菩提하며 爲欲成就照佛法智하며 爲欲常蒙諸佛攝受하며 爲得諸佛之所護持하며 爲欲信解一切佛法하며 爲欲成就與三世佛平等善根하며 爲欲圓滿無悔恨心하야 證得一切諸佛法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그 몸으로써 모든 부처님께 시봉하며, 모든 부처님의 소중한 은혜를 갚되 부모와 같이 생각하며, 모든 여래에게 깊은 믿음과 좋아함을 일으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보리를 수호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에 머물며, 세간의 생각을 여의고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며, 모든 부처님을 순종하고 마군의 경계를 떠나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행하던 것을 알아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의 그릇[法器]을 성취하느니라.
보살이 그때에 이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 중생이 청정한 마음을 얻어 온갖 지혜의 보배로 장엄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잘 조복한 데 머물러 일체 모든 선(善)하지 않은 업을 멀리 떠나지이다. ’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권속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두루 거두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보살의 관정(灌頂)하는 지위에 이르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항상 모든 부처님의 거두어 주심을 받들어 온갖 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부처님을 순종하여 보살의 가장 수승한 법을 수행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 일체 지혜를 얻으리라는 수기를 받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여래와 다 같이 평등하여 온갖 불법에 자재하지 못함이 없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부처님의 포섭하심을 받아 집착이 없는 업(業)을 항상 수행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부처님의 제일가는 시자(侍者)가 되어 일체 부처님에게서 지혜의 행(行)을 닦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을 모시는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기 위함이며, 일체 중생을 구호하기 위함이며, 모든 삼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니라.
손해됨이 없는 마음을 성취하기 위함이며, 한량없이 광대한 보리를 얻기 위함이며, 불법(佛法)을 비추어 보는 지혜를 성취하기 위함이며, 모든 부처님의 거두어 주심을 받들기 위함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보호하심을 받기 위함이며, 모든 불법을 믿고 이해하기 위함이며, 삼세 부처님과 평등한 선근을 성취하기 위함이며, 뉘우침이 없는 마음을 원만히 하기 위함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을 증득하기 위한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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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시제불보시(給侍諸佛布施) : 몸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시봉하는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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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의 253페이지(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중간단락부터 할 차례다.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는 내용이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은 부처님이다. 모든 사람은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그대로 부처님이다. 화엄경에서 모든 부처님, 제불(諸佛)이라고 하는 말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로 봐야 한다. 나와 인연 닿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공양과 보시가 얼마나 근사한가. 깨달음의 경계에서만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다. 깨달음의 안목이 이와 같다. 깨닫지 못한 우리는 그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분별하고 차별하다가 볼 일 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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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자이기신(自以其身)으로: 스스로 그 몸으로써
급시제불(給侍諸佛)하야 : 모든 부처님에게 급시해서
어제불소(於諸佛所)에: 모든 부처님에게서
염보중은(念報重恩)호대 :무거운 은혜 갚을 것을 생각하되
여부모상(如父母想)하며 : 부모와 같은 생각을 한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뼈무더기를 보고서 절을 하였다. 수행하던 아난존자가 깜짝 놀라서 “삼계대도사께서 어떻게 뼈무더기를 보고 절을 할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 세상에 부모 자식, 형제 자매의 관계가 아니었던 생명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전부 부모처자권속, 형제자매의 인연들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노라. 그러니 저 뼈무더기 중에 내 부모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셨다.
참으로 불교답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보는 관점이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 이런 안목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불교의 안목으로 볼 때 이 방안에 가득한 우리가 전부 서로의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제자매가 되었던 세월을 거쳐서 왔다.
모든 불보리 부처님이 부모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익혀서
어제여래(於諸如來)에
기심신락(起深信樂)하야
이청정심(以淸淨心)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호불보리(護佛菩提)하며: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호하며, 불보리를 보호한다.
불보리는 부처님 깨달음의 경계다. 화엄경은 그 경계를 고스란히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의 특징을 여증이설(如證而說)이라고 한다. 증득한 바, 깨달은 바를 곧이곧대로 드러내놓고 설했다는 뜻이다. 근기를 맞춰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펼쳐보인 것이 화엄경이다. 불보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잘 보호하고 아끼고 크게 드날려야 된다. 그것이 호불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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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불법(住諸佛法)하야 : 제불법에 머물러서
이세간상(離世間想)하고: 세간상을 멀리 여의고
생여래가(生如來家)하며 : 여래의 집에 살며 태어나며, ‘여래의 집에 살며’라고 해도 좋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고’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다행히 한달에 한 번씩이라도 이렇게 모여 화엄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각자 할 일이 많고 모두 먼거리에서 오시는데도 이런 시간을 내는 것은 생각해 보면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간상을 떠난 일이다. 세간에 대한 생각이 없이 오로지 여래의 집에서 여래와 함께 사는 순간이다. 생여래가다. 달리 어디서 무슨 종족을 만나서 태어나겠는가. 태어난다 한들 생각이 이와 같지 않다면 그 사람은 여래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함께 할 때 함께 여래의 집에서 사는 것이다.
수순제불(隨順諸佛)하야: 모든 부처님을 수순해서
이마경계(離魔境界)하며: 마의 경계를 떠나며
요달일체제불소행(了達一切諸佛所行)하야: 일체 모든 부처님의 소행을 요달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부처님이 하신 일을 환하게 꿰뚫고 있어서
성취일체제불법기(成就一切諸佛法器)니라 : 일체 제불의 법의 그릇을 성취하느니라. 부처님이 하신 일을 꿰뚫어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법기가 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의 그릇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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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이시(爾時)에 : 이 때에
이차선근(以此善根) 으로 : 이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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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이른 바 일체 중생이
득청정심(得淸淨心)하야 : 청정심을 얻어서
일체지보(一切智寶)로: 일체지혜의 보배로써 스스로를 장엄하기를 원한다. 일체지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모든 중생들이 모두가 청정한 마음으로써 일체 지혜의 보배로써
이자장엄(而自莊嚴)하며 : 우리들 자신을 장엄한다. 달리 금은보화를 몸에 걸쳐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평등과 차별과 이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일체 지혜로써 우리들 자신을 장엄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먹물 옷 입은 사람은 아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다. 먹물옷 입은 사람은 지혜가 출중하여서 세상사람 열 명을 합해도 저 사람들의 지혜에 못 미친다.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다’ 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먹물옷 입은 사람을 찾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가 되는 것이 먹물 옷을 입는 우리들의 의무다.
일체지보로써 이자장엄이라. 지혜의 보배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배다. 형상이 있는 보배가 아니다. 그런 보배로써 자신을 장엄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주선조복(住善調伏)하야: 잘 조복하는데 머물러서
원리일체제불선업(遠離一切諸不善業)하며 : 모든 선하지 못한 업은 전부 멀리 떠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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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불가괴견고권속(得不可壞堅固眷屬)하야 :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권속을 얻어서
보능섭수제불정법(普能攝受諸佛正法)하며 : 모든 부처님의 정법을 널리 섭수하기를 원한다.
선거철이 되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린다. 실컷 도반으로 잘 지내다가도 ‘뭐 하나 얻어 걸릴까 ’하고 유력한 데 가서 붙는다. 그런 것은 불가괴견고권속이 아니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고 공하기 이를 데 없고 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권속이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인데 뭐가 그런 의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안 믿었어야 했다. 의리도 공(空)하고 아무것도 없다. 다 공하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로운 것이다.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 섭섭한 점은 섭섭한 대로 남는다.
과연 무엇이 불가괴견고권속일까? 제불정법이 그것이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위불제자(爲佛弟子)하야: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도어보살관정지지(到於菩薩灌頂之地)하며 : 보살의 관정의 지위에 이르기를 원한다.
머리에 물 부어 주는 것을 관정지라고 하고 그것이 법운지(法雲地)다. 관정지는 제일 높은 지위이고 십지다. 모든 중생이 다 거기에 이르기를, 십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상위제불지소섭수(常爲諸佛之所攝受)하야 : 항상 모든 부처님의 섭수한 바가 되어서, 모든 부처님이 섭수하는 바가 되어서
영리일체불선지법(永離一切不善之法)하며 : 일체불선지법을 멀리 영원히 떠나기를 원하며, 선하지 않은 법은 영원히 떠나기를 원한다. 과거에 어리석고 몰랐을 때는 실수를 해서 불선한 일을 했다. 그러나 부처님 슬하에 와서 부처님 법을 배워서 철이 들고 진정 부처님 권속이 되었다면 일체 불선지법을 영원히 떠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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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수순제불(隨順諸佛)하야: 모든 부처님을 수순해서
수행보살최승지법(修行菩薩最勝之法)하며 : 보살의 최승지법을 수행하기를 원하며, 보살의 가장 수승한 법은 보살행이고 이타행이다. 이타행 중에서도 법으로써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행이 최승지법이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또 일체 중생이
입불경계(入佛境界)하야: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서
실개득수일체지기(悉皆得授一切智記)하며: 다 일체 지혜의 기 받기를 원한다. 우리가 수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일체 중생도 수기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 문수선원에 놀러온 도현이 만한 어린 사미가 제기차기를 하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절의 노스님이 공부하느라 끙끙대면서 성문 사과(四果)를 그렇게나 얻고 싶어 하였다.
“노스님 뭐 그렇게 끙끙댑니까? 내가 성문사과를 드릴 테니까 받기나 잘하십시오.” 하고 사미가 말하였다. 천진한 노스님은 “아 그래? 네가 그러면 나에게 성문사과를 한 번 줘봐라.” 하고 아주 공손하게 그야말로 큰스승 밑에 머리를 조아리듯이 대여섯 살쯤 되는 어린 사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미는 자기가 차고 있던 제기를 뱅뱅 돌려서 노스님 머리를 탁 때리면서 말했다.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제기를 훼훼 돌려서 노스님 머리를 탁 때리면서 말하였다.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었다.”
또 노스님의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었다.”
네 번째로 어린 사미는 노스님의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였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 노스님이 성문사과를 다 얻었다.
선요에서 고봉스님은 ‘역불출자일개신자(亦不出者一箇信字) 그 모든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이 한 글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이 또한 믿음이라고 하는 한 글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노스님은 평생 공부하면서 순박한 마음으로 살아왔고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라는 분별도 없고 ‘저 아이가 무슨 수기를 주겠나’하는 의심도 하나 없었다. 아이의 말만 믿고 그대로 머리숙여서 ‘그래 준다 하니까 수기를 받자’는 마음 하나가지고 머리를 대고 네 번 얻어 맞음으로써 성문 사과를 얻었다. 그런 기록이 있다.
여기도 일체 지혜의 기별, 정확하게는 ‘지혜의 기별 주는 것을 얻기를 원하며’ 라고 하였다.
일체지는 부처님이 터득하신 지혜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다 얻기를 원한다. 줄 수 있는 사람, 수기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여제여래(與諸如來)로: 모든 여래로 더불어
개실평등(皆悉平等)하야: 다 여래와 똑같이 평등해서
일체불법(一切佛法)에: 일체 불법에
무부자재(無不自在)하며 : 자재하지 아니함이 없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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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실위제불지소섭수(悉爲諸佛之所攝受)하야 : 모든 부처님이 다 섭수하는 바가 되어서
상능수행무취착업(常能修行無取着業)하며: 항상 능히 취착이 없는 업 수행하기를 원한다.
부처님이 섭수해 준다면 그 어디에 집착하고 취착하겠는가? 그런 업은 있을 수가 없다.
집착으로부터 고(苦)가 생기고 온갖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가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도 생명에 대한 애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 역시 자꾸 연습하여 집착을 떨치는 훈련을 할 수가 있다. 여러 스님들도 자동차를 여러 번 바꾸었을 것이다. 한 5년이나 6년 10년쯤 타면 아무리 안 바꾸려고 해도 차는 여기저기 고장나고 탈이 나서 30만원이나 50만원쯤 받고 폐차하는 일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그냥 가져가라 해도 안 가져 가는 경우도 있다. 폐차할만한 차를 그냥 가져가기만 해도 아주 고마운 일이다.
우리 몸에 대해서도 그쯤 생각해야 된다.
여러 스님들도 항상 그렇게 법문을 하시지 않는가?
‘운전수는 새 차 갈아타면 되는 거다. 우리 몸의 운전수는 따로 있으니까 이 낡은 몸은 벗어던지고 새 몸을 받으면 되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냐?’
불교 공부하면서 진정으로 그 이치 하나만 터득해도 불법 만난 공덕이 있다.
그 취착심 하나만 없어도 얼마나 그 사람이 훌륭하겠는가. 거기에 무슨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무취착업이다. 취착이 없는 법을 항상 수행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상위제불제일시자(常爲諸佛第一侍者)하야 : 항상 모든 부처님의 제일가는 시자가 되어서
일체불소(一切佛所)에: 일체불소에서
수지혜행(修智慧行)이니라 : 지혜의 행을 수행하기를 원함이니라.
제일시자 하면 얼른 떠오르는 분이 아난존자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도 사실 시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아난존자가 워낙 오래했고, 또 뛰어난 시자였으니 우리는 부처님 시자로 아난존자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아난존자가 제일시자이고 아난존자 같은 시자가 없다. 재빠르고 총명하고 시자 노릇을 하면서도 한 번도 다른 권세를 휘둘러 본 적도 없고 ‘빽’을 행사해 본 적도 없다. 참 모범적으로 시자노릇을 잘 했다.
일체 불소에서 지혜의 행을 닦기를 원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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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급시제불(給侍諸佛)하야 : 모든 부처님을 급시해서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선근 회향하는 것이니
위욕증득제불보리(爲欲證得諸佛菩提)하며: 모든 부처님의 도리를 증득하고자 하며
위욕구호일체중생(爲欲救護一切衆生)하며 : 일체중생을 구호하고자 하며
위욕출리일체삼계(爲欲出離一切三界)하며: 일체 삼계를 출리하고자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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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욕성취무손뇌심(爲欲成就無損惱心)하며 : 손뇌가 없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하며
위득무량광대보리(爲得無量廣大菩提)하며 : 한량없는 광대한 보리를 얻기 위함이며
위욕성취조불법지(爲欲成就照佛法智)하며: 불법을 비추는 지혜를 성취하고자 하며
위욕상몽제불섭수(爲欲常蒙諸佛攝受)하며 : 항상 모든 부처님의 섭수를 입고자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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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득제불지소호지(爲得諸佛之所護持)하며 : 모든 부처님의 호지하는 바를 얻고자 함이며
위욕신해일체불법(爲欲信解一切佛法)하며 : 일체 불법을 믿고 이해하고자 함이다.
수행에 대해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은 늘 하는 말이지만 신(信), 믿음이라고 하는 그 첫단계에만 잘 머물러도 불법수행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다.
해행증(解行證)은 너무 욕심 낼 것도 없고 욕심낸다고 될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믿음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어도 그 믿음이 튼튼하면 그 위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화엄경 십신법문에도 믿음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간절한가. 현수품은 믿음에 대한 법문인데 법문을 다 끝낼 무렵에 마지막 게송쯤 가면 정말 믿음을 그렇게 간절하게 높이 찬탄을 해놓았다.
우리는 신해행증 신해행증 하지만 해행증을 굳이 넘볼 것도 없이 불법을 믿고 이해하는 정도에만 제대로 안주하고 있어도 훌륭한 불자다. 위욕신해(爲欲信解)다. 믿고 이해하는 것에 제대로 안주하고 있고 그에 대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훌륭한 불자이고 수행자다.
위욕성취여삼세불평등선근(爲欲成就與三世佛平等善根)하며: 삼세제불로 더불어 선근이 평등함을 성취하고자 하며
위욕원만무회한심(爲欲圓滿無悔恨心)하야 : 회한이 없는 마음을 원만하고자 해서
증득일체제불법고(證得一切諸佛法故)니라 : 일체 제불법을 증득하고자 하는 까닭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앞에서 모든 부처님에게 시봉하는 보시를 했고, 그 다음에 회향의 입장에서 원을 세웠다. 늘 자기 수행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58) 國土와 王位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布施國土一切諸物호대 乃至王位라도 悉亦能捨하고 於諸世事에 心得自在하야 無繫無縛하며 無所戀着하며 遠離惡業하야 饒益衆生하며 不着業果하며 不樂世法하며 不復貪染諸有生處하야 雖住世間이나 非此處生이며 心不執着蘊界處法하야 於內外法에 心無依住하며 常不忘失諸菩薩行하며 未曾遠離諸善知識하며 持諸菩薩廣大行願하야 常樂承事一切善友니라 菩薩이 爾時에 以此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爲大法王하야 於法自在하야 到於彼岸하며 願一切衆生이 成佛法王하야 摧滅一切煩惱怨賊하며 願一切衆生이 住佛王位하야 得如來智하야 開演佛法하며 願一切衆生이 住佛境界하야 能轉無上自在法輪하며 願一切衆生이 生如來家하야 於法自在하야 護持佛種하야 永使不絶하며 願一切衆生이 開示無量法王正法하야 成就無邊諸大菩薩하며 願一切衆生이 住淨法界하야 爲大法王하야 現佛出興하야 相繼不斷하며 願一切衆生이 於諸世界에 作智慧王하야 化導群生하야 無時暫捨하며 願一切衆生이 普爲法界虛空界等諸世界中一切衆生하야 作法施主하야 使其咸得住於大乘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成具足衆善之王하야 與三世佛로 善根齊等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布施王位하는 善根廻向이니 爲欲令彼一切衆生으로 究竟住於安隱處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국토와 일체 모든 물건들을 보시하며, 내지 왕의 지위도 모두 버리며, 모든 세상일에 마음이 자재하여 얽힘도 없고 속박도 없고 그리워 애착함도 없으며, 나쁜 업(業)을 멀리 여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업과 과보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법을 좋아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태어나는 것을 탐하지 않으며, 비록 세간(世間)에 있으나 여기에 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와 십이처(十二處)에 집착하지 않으며, 안의 법이나 밖의 법에 의지하지 아니하느니라.
항상 모든 보살의 행을 잊지 아니하고, 모든 선지식을 멀리 여의지 아니하며, 모든 보살의 광대한 행과 원(願)을 가지고 일체 훌륭한 벗들을 항상 섬기기를 좋아하느니라.
보살이 그때에 이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 중생이 큰 법왕이 되어 법에 자재하여 저 언덕에 이르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불법(佛法)의 왕이 되어 일체 번뇌의 원수를 꺾어 소멸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래의 지혜를 얻어 부처님 법을 연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경계에 있어 위없이 자재한 법의 수레를 운전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 법에 자재하며 부처님의 종성을 보호하여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무량한 법왕의 바른 법을 열어보여 그지없는 모든 대보살을 성취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청정한 법계에 머물러 큰 법왕이 되어 부처님이 출현하심을 나타내어 끊어지지 않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세계에서 지혜의 왕이 되어 중생들을 교화하며 잠깐이라도 버리지 말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법계와 허공계의 모든 세계에서 일체 중생에게 법을 보시하는 시주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 대승(大乘)에 머물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선업(善業)을 구족한 왕이 되어 삼세(三世) 부처님과 선근이 평등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왕의 지위를 보시하는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구경까지 편안한 곳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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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國土)와 왕위보시(王位布施) : 국토와 왕위를 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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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보시국토일체제물(布施國土一切諸物)호대 : 국토 일체 제물을 보시하되
내지왕위(乃至王位)라도 : 내지 다른 것도 많지만 왕위라 하더라도
실역능사(悉亦能捨)하고 : 다 또한 능히 다 버리고, 버리고는 ‘보시하고’ 이런 뜻이다.
어제세사(於諸世事)에 : 모든 세상사에
심득자재(心得自在)하야 : 마음이 자유자재함을 얻었다. 왕위까지 버릴 수 있다면 세상사에 자유자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자유자재한가.
갑갑할 때 한 번씩 ‘나도 왕년에 서역의 일개 납자였는데 한 생각 잘못해서 왕의 집에 떨어져서 마음에도 없는 왕노릇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읽으면 시원하다.
순치황제는 역사적인 인물이고 청나라 때 스님이니까 우리와도 시간상의 거리가 얼마 안된다.
실제로 경험한 분의 말씀이니 얼마나 시원한지 말도 못하다.
‘만리의 이 강산은 한 판 노름 바둑이라’ 천하를 다스린다고 해봤자 마치 한 판의 바둑과 같다고도 표현하였다. 중국천하가 얼마나 넓은 땅인가. 그 천하를 다 다스린다 하더라도 ‘그까짓 한 판 바둑두기인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 하느냐’ 마음이 이쯤 되어 버리니까 왕위도 다 버려버리고 세상사에 자유자재함을 얻었다.
이런 도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은 한 번도 생각 안해보고 우리는 왜 모두들 그렇게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다.
무계무박(無繫無縛)하며 :계에 얽힘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무소연착(無所戀着)하며: 연연해서 집착하는 바도 없으며
원리악업(遠離惡業)하야 : 악한 업을 멀리 떠나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며: 중생을 요익케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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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착업과(不着業果)하며 : 그 업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아니한다. 아무리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공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 과보에 대해서는 조금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불락세법(不樂世法)하며 : 세상 법에 대해서 즐겨하지 아니하며
불부탐염제유생처(不復貪染諸有生處)하야 : 모든 존재의 태어나는 바 곳에 물들지 아니한다. 제유생처라고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온갖 생명이 태어나는 곳을 다 말한다.
수주세간(雖住世間)이나: 비록 세간에 머물지만
비차처생(非此處生)이며 :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심불집착온계처법(心不執着蘊界處法)하야 : 마음으로 오온(五蘊) 십팔계(十八界) 십이처(十二處)의 법에 집착하지도 아니해서
어내외법(於內外法)에 : 안과 밖의 법에
심무의주(心無依住)하며 : 마음에 의지해서 머무는 바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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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불망실제보살행(常不忘失諸菩薩行)하며 : 항상 모든 보살이 행해야 할 행에 망실하지 아니한다. 불교의 궁극 목적은 보살행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남방에 가서 법문하고 온 스님들 법문을 들어보면 한국사람이 미얀마나 태국 같은 데 가서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면 그쪽 남방스님들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인데 왜 부처님이 설하지도 않은 대승경전을 그렇게 숭상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럴 때 그 한국스님은 ‘그때 봤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불멸 삼백년 이후에 결집되고 한 경전이 진짜 부처님 말인 줄 니는 봤냐? 대승비불설이 부처님설이 아닌 줄 느그는 봤냐?” 하면 꼼짝도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우리는 대승불교라고 하면서 소승행을 하고 그쪽 사람들은 소승불교라고 하면서 대승행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지만 대승불교나 선불교권보다 보살행을 열 배 백배는 훨씬 더 한다. 소승 불교라고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물론 교리만 가지고 따지자면 대승불교를 따라올 수가 없다. 그런데 실천이 없는 교리만의 이치는 입만 가지고 떠드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이론에 국한된 것이다.
실제로 교육이나 의료 모든 분야에서 대사회적으로 하는 일은 그쪽 사람들이 대승적인 보살행을 더 많이 한다.
우리는 대승 여래보다 뛰어난 조사선(祖師禪)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 행은 소승불교를 하고 있다. 평생 아니 세세생생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삶이다. 자기만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한 번도 대승행을 발 벗고 나서서 할 기회가 없다.
전에 나와 같이 선방에 같이 있던 스님들이 가끔 해제중에 찾아오면 ‘내가 한 방 터지기만 하면 크게 대승행을 할거니까 기다리라’고 한다. 몇 년을 기다려야 되겠는가. 자기만 위하는 업만 계속 쌓는데 그것이 될 일이겠는가?
매일 매일 우유를 짜서 이웃집 한 집 두 집씩이라도 보시를 해야 한달쯤 지나면 한동네에 다 돌아가게 우유를 보시할 수가 있다. 그 우유를 한 달간 모았다가 한꺼번에 짜려고 하면 우유가 말라버리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경전에는 일제히 그렇게 이야기를 다 해놓았다.
내외법에 있어서 모든 보살의 행을 망실하지 아니하며
미증원리제선지식(未曾遠離諸善知識)하며 : 모든 선지식을 일찍이 멀리 떠나지 아니하며
지제보살광대행원(持諸菩薩廣大行願)하야: 모든 보살의 광대한 행원을 가져서
상락승사일체선우(常樂承事一切善友)니라 : 항상 즐겁게 일체 선우를 받들어 섬기느니라. 선우 는 선지식이다. 일체 선우를 섬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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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보살이
이시(爾時)에 : 이시에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이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그렇게 선근을 닦고 자기 선근 닦는 것으로 만 끝나면 안되니까 이것으로써 회향을 한다. ‘중생이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고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정행품에서도 늘 ‘당원중생(當願衆生) 마땅히 중생이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오로지 화두는 일체 중생이다. 나는 없고 일체 중생이 잘 되기를 몸과 마음과 뜻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끊임없이 원하는 것이다.
*
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이른 바 일체중생이
위대법왕(爲大法王)하야 : 대법왕이 되어서
어법자재(於法自在)하야 : 모든 법에 자재해서
도어피안(到於彼岸)하며 : 저 언덕에 이르기를 원한다. 피안은 저언덕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일체 속박, 일체 번뇌,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된 곳이다. 거기에는 일체 문제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 언덕에 이르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성불법왕(成佛法王)하야 : 부처님의 법의 왕을 이루어서
최멸일체번뇌원적(摧滅一切煩惱怨賊)하며 : 일체 번뇌의 원적을 꺾어 소멸하기를 원하며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주불왕위(住佛王位)하야 :불왕위에 머물러서 대법왕이나 불법왕이나 불왕위나 거의 다 같은 뜻이다.
득여래지(得如來智)하야: 여래의 지혜를 얻어서
개연불법(開演佛法)하며 : 불법 열어서 연설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주불경계(住佛境界)하야: 불경계에 머물러서
능전무상자재법륜(能轉無上自在法輪)하며: 능히 가장 높은 자유자재한 법륜 굴리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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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생여래가(生如來家)하야: 여래가에 태어나서
어법자재(於法自在)하야: 법에 대해서 자유자재해서
호지불종(護持佛種)하야: 부처의 종자를 보호해 가져서
영사부절(永使不絶)하며 :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개시무량법왕정법(開示無量法王正法)하야 : 한량없는 법왕의 정법을 열어 보여서
성취무변제대보살(成就無邊諸大菩薩)하며 : 가없는 제대보살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큰보살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모든 중생이 궁극에는 모두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고 보살마하살이 되기를 원한다. 화엄경이야말로 ‘전국민의 보살화 운동’이다. 모든 국민이 보살이 되자는 것이다.그래도 우리나라가 보살이 제일 많은 나라다. 가나오나 전부 보살이다. 이런 것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보살이라는 말이 잘못됐다. 보호할 보(保)자 절 사(寺)자 보사다’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그러면 남자 신도들은 보사를 안하는가? 스님도 보사를 한다. 그런 견해는 보살이라는 말뜻을 잘 모르니까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해서 억지로 꿰어 맞추는 이론이다. 견해가 좁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그럴 것이 없이 전국민 보살화 운동이 화엄경이다. 전국민이 이리 가도 보살, 저리 가도 보살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 가도 보살이고 천주교에도 보살이 많다. 불교보다 보살행 하는 사람은 그쪽이 더 많다. 그들의 교세는 교리로써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의 교리가 우수하다고 큰소리 칠 것이 절대 아니다.
교리가 밥먹여 주는가?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가 우수하면 입으로만 우수한 것이고, 실제로는 몸으로써 우수한 일을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교리와 상관없이 보살행을 잘하니까 사람들이 공감하고 보살행으로써 유지하는 것이다. 얼마나 세상에 기여를 많이 하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보살 보살하는데 보살행을 우리가 제대로 해야 된다.
*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주정법계(住淨法界)하야: 청정한 법계에 머물러서
위대법왕(爲大法王)하야 : 대법왕이 되어서
현불출흥(現佛出興)하야 : 부처님이 출흥하는 것을 나타내어서
상계부단(相繼不斷)하며 : 계속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기를 원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 여기도 부처님이 나오셨다 저기도 부처님이 나오셨다’ 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어제세계(於諸世界)에: 모든 세계에
작지혜왕(作智慧王)하야: 지혜의 왕이 되어서
화도군생(化導群生)하야: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해서
무시잠사(無時暫捨)하며 : 한 순간도 잠깐도 버림이 없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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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보위법계허공계등제세계중일체중생(普爲法界虛空界等諸世界中一切衆生)하야 : 널리 법계와 허공계와 같은 모든 세계 가운데 일체 중생을 위해서
작법시주(作法施主)하야 : 법시주가 되어서,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의식주를 시주해서 의식주 문제를 도와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시주하는 것에 늘 중점을 둬야 한다. 부처님은 법시주자였지 의식주 문제를 시주한 분은 아니었다. 물론 부처님이 다 버리고 출가를 했으니 재산이 있을 까닭이 없다. 출가한 사람이 재산이 있을 수가 없고, 있었다면 모범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부처님에게 재산이 있었다면 아마 탈탈 다 털어서 전부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의식주법’ 이렇게 해야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식주가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했듯이 법을 시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법공양 법공양’ 하는 것도 법시주자가 되고자 해서 법시주 하는 것을 좀 흉내내고 본받고 있는 셈이다.
사기함득주어대승(使其咸得住於大乘)하며 : 그들로 하여금 모두 대승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기를 원한다. 대승은 많은 사람들을 싣고가는 큰수레다. 한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싣고 가겠다고 하는 큰마음이다. 그런 큰마음에 머물기를 원한다.
일체 중생이 제발 그런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참 어렵다.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승같이 어려운 것이 없다.
우리 중생들 한분 한분이 다 가지고 있는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대승심(大乘心)임에도 불구하고 대승행(大乘行)은 참 어렵다. 거기에 감정이라는 것이 대입이 되어서 그렇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오온(五蘊)을 나[我]라고 우리가 습관들이고 집착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성구족중선지왕(得成具足衆善之王)하야 : 모든 선을 구족한 왕이 되어서
여삼세불(與三世佛)로 : 삼세불로 더불어
선근제등(善根齊等)이니라: 선근이 제등하기를 원할지니라. 삼세부처님하고 궁극에는 모든 중생이 선근이 같아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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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보시왕위(布施王位)하는: 왕위를 보시하는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선근회향이니
위욕영피일체중생(爲欲令彼一切衆生)으로 : 그들로 하여금 일체중생으로 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구경주어안은처고(究竟住於安隱處故)니라 : 구경에 안은처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니라. 모든 생명이 다 편안한 안은처에 머물게 하고자 한다. 편안하게 사는 것은 많이 가져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사는 그 원리를 터득해서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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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亦不出者一箇信字...고맙습니다 _()()()_
不着業果~
當願衆生 如是廻向~~
혜명화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스님과 보살님 한 분이 큰스님 드실 감주와 대중스님들께 공양올시(?)리실 떡을 준비해 오셨다.~
~큰스님이 25, 6년 전 은해사에서 용학스님과 공부하(?)한 제자 자랑을 하셨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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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