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 의 법문
다시 쓰는 한국불교 유신론 不然 李箕永 지음
같은 『화엄경』에서는 신(信), 해(解), 행(行), 증(證). 또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 사람이 사람답게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자기완성을 꾀하는 네 가지 단계 또는 다섯 가지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도 제일 처음에 강조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을 십신(十信)이라고 헸습니다. 열 십(十) 자는 원만구족(圓滿具足), 모자람이 없이 다 갖춰졌다는 뜻입니다. 나는 불교의 이 믿음이란 말의 해석이 교회에서 쓰이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 믿음의 뜻을 더 광범하고 깊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맹목적 귀의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치가 통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겁을 주니까 믿지 않을 수 없어 따라간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나 맑고 바른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 양심을 불교에서는 청정한 마음, 맑고 깨끗한 마음, 아집에 물들어 사리사욕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잘나지도 못한 자기를 아주 잘난 것처럼 생각하고 거동하는 망상(妄想)이 없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는 마음이란 이런 청정함이 용솟음치는 마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믿음을 의미하는 인도의 원어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슈랏다아(sraddha)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라사아다(prasada)라는 것입니다. 프라사아다란 ‘온전히 빛나다’라는 말에서 나온 ‘맑디 맑은 마음’, ‘환희에 찬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슈랏다아는 ‘그 무엇, 또는 그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는 뜻입니다. 무엇 또는 어떤 사람을 마음속에서부터 신뢰하고 공감하여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가 슈랏다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또는 부처님을 믿는다 합시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편협하거나, 맑지 못하거나, 사납거나, 증오에 차 누구를 미워하거나, 그래서 언제나 싸울 태세에 있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얼마나 내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깊고, 지혜롭고, 자비로운지를 스스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보며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게끔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맑은 마음을 믿고 그 마음과 내 나음이 하나가 되도록 마음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번영과 행복이 거기에 저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1987년 12월 『대우가족』
육도윤회(六道輪廻)
불교에서는 중생이 마음의 욕심 때문에 나쁜 행위를 일삼으며 살다 보니 이에 상응하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에 살게 되는 것이라 하고, 하늘 나라와 인간 세계란 두 가지 생활 약식 말고도 네 가지의 다른 좋지 않은 생존 양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육도(六道)라 하기도 하고 육악도(六惡道), 여섯 가지 좋지 않은 삶의 방식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중생(衆生)이란 말이나 마찬가지 뜻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이란 말이 갖가지 원만치 못한 생이란 의미로 해석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육도를 불교의 고유한 용어로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人), 천(天)이라 불러 왔습니다. 처음에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어떤 일정한 장소나 일정한 모양을 하고 태어난 일정한 부류의 동물들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었던 조선시대 부녀자들로서 불교를 믿고 글을 남긴 사람들 중에 육도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윤회(輪廻)도 그러한 여섯 가지의 하나인 고정된 어떤 세계에서 고정된 어떤 다른 세계로 태어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생각한 예가 많았습니다. 물론 생각이 단순한 민중들에게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기고,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도리를 가르치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간략하고 분명해서 효과적이기는 했겠지만, 그러한 방식은 영혼이라는 어떤 불변의 실체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 불교의 근본 진리에는 어긋나는 설명이 됩니다. 육도윤회란 과연 어떻게 설명을 해야 옳을까요? 이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낳은 성자(聖者) 원효대사의 설명에 의거하여 오늘 우리 시대의 용어들을 쓰면서 그 요점만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이 아니라 육도 속에 들어와 그 속에서 헤매고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려고 그 생활 전부를 바치는 ’깨달은 중생‘, 즉 보살의 생활은 어떠한가를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인간이란 생물만이 아니라, 그밖에도 갖가지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불교의 육도윤회는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 한 이야기요, 교훈입니다. 중생이란 말도 사실은 그렇다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앞서 열거한 육도 중생의 하나로서 인(人), 즉 인간이 꼽힌 것을 보았지만, 사실 우리들 모두가 그냥 무조건 다 여기에 꼽힌 인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하기도 매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중생은 여섯 가지 길, 그 길들을 왔다갔다하여, 때로는 사람 구실을 할 경우도 있고, 또 참으로 축복 받은 경우에는 천상의 존재처럼 사람의 경지를 넘어서는 그런 행운과 행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마음가짐의 잘못 때문에 수라나 축생, 아귀, 지옥 등의 좋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이고 스스로 고통 속에 빠지며, 또 다른 사람들을 같은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한번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 한평생 전체를 위의 여섯 가지 삶의 길 가운데, 좋지 않은 길만을 골라 가며, 순간순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악순환만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컬어 윤회라 하는 것입니다. 윤회는 순간마다 앞의 순간에서 뒤의 순간으로 진행될 수 있고,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모래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로 그 앞 순간을 전생(前生)으로 보면 좋을 것이요, 바로 그 뒷 순간을 후생(後生), 또는 내생(來生)으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