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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진으로 무너지고 기울어진 부라나탑의 오늘날 모습. 고대에는 이 탑이 평원의 등대와도 같이 여행객과 순례자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진 권오형 |
| 이태백의 시 몇 수 읽은 것만으로 그를 제법 이해하는 것처럼 자만했다. 양귀비를 흠모한 남자임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혼자 기뻐했다. 그러다가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당나라 땅이 아닌 서역, 천산 너머 쇄엽성이라는 사실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 비로소 시인이 양귀비를 친애하는 이유가 짐작 갔다.
“운명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시험할 뿐이다. 아이러닉하게도 인간은 그런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정자
그걸 본 것만으로도 키르기즈스탄 여행의 보람이 있는 이식쿨 호수를 뒤로 하고 다음날 오쉬로 가기 위해 비쉬켁으로 돌아가는 길. 살구나무 빼곡 우거진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싶은데, 일행 중 누군가는 쉬이 배가 고픈가 보다. “양고기 케밥 먹고 갑시다.” 그렇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금강산도 식후경’이 진리다. “시원한 맥주는 없을까?”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가련한 채식주의자인 필자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다 저 살자고 사는 세상이다. 이를 악물고 나도 살아남아야 한다. 근처에 카자흐스탄 발하시 호수로 흘러드는 추강(the Chuu River)이 흐르는 토크목 못 미쳐 휴게소에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케밥집이 있다고 가이드 아만이 추임새를 넣었다. 모두들 눈이 빛난다. 안 봐도 군침 도는 걸 눈치 채겠다. ‘불쌍한 양!’ 나는 홀로 알라신의 자비를 빌었다.
점심을 먹고 토크목 남서쪽 12km 지점에 있는 부라나 탑을 보러 가는데 누군가 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여기에서는 낙타 탈 수 없을까?” 배부르니 허튼 소리로 소화를 시키려나 보다. “초원과 산악국가인 여기는 낙타가 없어요. 라다크나 인도, 파키스탄 이런 데 가면 태워드리지요.” 못 미더워하는 눈치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가 말했다.
“원래는 높이가 40m였지만 지진으로 허물어져 현재는 21.7m만 남아있는 부라나 탑은 10~11세기 이 일대에 카라한조 위구르 제국의 수도인 발라가순(Balasaghun)이 들어섰을 때 지어진 것이랍니다. 그 전에는 唐의 安西4鎭의 하나이기도 했던 碎葉城, 현지어로는 수이압(Suyab)성이 이 지역 소그드인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구요. 물론 지배세력은 돌궐이었지만요. 우리가 오늘 양고기 점심을 먹은 이 동네가 역사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장소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미각에 홀려 역사와 그에 따른 인간의 운명은 외면했겠지만…. 그런데 중앙아시아 낙타와 아라비아 낙타가 어떻게 다른지들 아세요?” 대답이 없다. 무더운 날씨에다 식곤증으로 모두 절반은 눈이 감겨있었다. 나는 부득이 홀로 생각에 잠겼다.
몽골 고비사막에서 낙타를 보았을 때
고백하건대 몽골 고비사막에서 낙타(temu)를 보았을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저걸 탈 수 있을까. 파키스탄 촐리스탄 사막에서의 뼈아픈 경험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사나이가 이걸 못 타랴. 겁 없이 당당하게 낙타 등에 올라앉았지만 낙타가 몸을 일으킬 때의 출렁임과 똑바로 선 낙타 등과 지면과의 거리가 예상 외로 멀었기 때문이다. 낙타는 사정 봐서 성큼성큼 걷는다 하겠지만 보폭 또한 장난이 아니어서 걸음을 뗄 때마다 내 몸은 앞뒤로 요동을 쳐야했다. 청바지를 입은 내 엉덩이는 도저히 낙타 등을 견딜 수 없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다급한 비명을 지르고 이내 낙타 등에서 철수 할 때의 떨떠름한 심사는 겪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것이다.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의 단봉 낙타 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몽골과 중앙아시아 초원 및 사막지대에 서식하는 쌍봉낙타는 박트리아 낙타(Bactrian came)라 불린다.
칭기스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Temujin, 帖木兒)이다. 서양학자들은 이 이름의 의미를 ‘ironmaker(대장장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temu’는 낙타를 가리키는 몽골말이다. ‘-jin’은 인명접사. 결국 소년 테무진은 ‘낙타돌이’였다. 몽골 초원과 고비사막, 알타이분지에는 박트리아 낙타(Bactrian camel)로 불리는 쌍봉낙타가 산다. 칭기스칸의 큰아들 조치(Jochi)는 ‘호랑이’다(물론 ‘손님’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7세기 초엽 서돌궐제국(Kara Turk Khanate)의 통 엽호 카간(Tong Yabghu Khagan, 재위 618~628년)도 ‘호랑이’다. 그는 쇄엽성에 行宮을 세웠다. 참고로 ‘호랑이’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말은 ‘범’이고, 인도말은 ‘바그([bagh])’다.
사자를 이름으로 쓴 사례도 있다. 안록산이 그러하고, 8세기 초반 安國(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왕이었던 툭샤다는 동생을 볼모로 당 현종에게 보내는데, 이름이 아르슬란(Arslan>Ruslan)이었다. 이는 투르크어로 ‘獅子’를 뜻한다. 영국 왕 리차드(Richard) 앞에도 ‘사자왕’이 수식어로 붙는다.
이렇듯 사람들은 짐승의 명칭으로 본명이나 별명을 짓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조폭의 별명에는 쌍도끼니 회칼이니 하는 섬뜩한 이름도 있지만, 시라소니, 돼지, 매, 독사, 불독 같은 것들도 있다. 한편 옛적 우리나라에서 귀여운 손자가 태어나면 할머니는 이웃에게 ‘우리 강아지’를 자랑하고 다녔다. 점잖은 양반 할아버지는 ‘이 녀석이 우리 집 家豚’이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고대에는 畜名으로 官名을 삼는 경우가 많았다. 부여가 그랬다. 부여는 가축을 잘 기르고 목축을 하며 번식을 잘 시켰다 한즉, 각기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음이다. 『後漢書』 夫餘國列傳에 “그 나라에서는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지어 馬加, 牛加, 豬加, 狗加가 있는데, 諸加는 따로 四出道를 주관한다”고 했다. 궁금증은 남는다. 이들 각각이 어떤 일을 하는 벼슬아치인지? 四出道는 무엇인지? 수 천 년 전 사람들도 조직이 있고 책임자가 있었다. 달리 말해 오래전부터 계급사회가 존재한 것이다. 또 諸家의 ‘諸’는 어떤 짐승을 말하는지? 혹 오기는 아닐까? 여섯 가축이 아닌 이유도 궁금하다. 들은 바를 적다보니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諸加를 포함해도 다섯이다. 대개는 사육 내지 방목하거나 환경 속에서 친숙한 짐승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부여의 관명에 羊加가 없는 것은 이들이 양 유목민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다시 말해 부여의 주거지가 양 유목에 적합한 스텝지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였을까.
몽골에서는 가축을 관장하는 직책이 있었다. 和尼齊(honichi)는 羊(호니)을 관장하는 벼슬아치다. 또 말을 관장하는 이는 摩哩齊(morichi), 낙타를 관장하는 자는 特黙齊(temuchi)라고 했다. 모두 주변에 존재하는 짐승들이다. 이름을 지을 때는 친숙한 것에서 따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칭기스칸의 아명은 대장장이 보다는 낙타돌이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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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인도 북서부 잠무-카시미르주에 속한 라다크 누브라 계곡의 낙타 무리.사진출처 http://en.wikipedia.org/wiki/Bactrian_cam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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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학자의 의무는 예사롭게 보지 않고, 자꾸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의심이 본분인 것이다. 또 그래야 학문이 발전한다. 과거의 지식을 답습해서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열린 학문이란 바로 과거 혹은 기성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여러 가지 異表記가 있은즉 음차자임이 분명한 ‘朱蒙’은 부여말로 ‘善射者’, 즉, ‘명궁’이란 말이라고 사서는 전한다. 이 말이 우리말과 일본말에 남아 각기 ‘동무’와 ‘도모’로 쓰인다면 믿을까. 마유목민들은 대부분 활을 잘 쏘지만 특히 솜씨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몽골秘史』에 나타나는 몽골의 인명에도 ‘名弓’이 흔하다. Borjigidai-mergen, Dobun-mergen에서의 ‘메르겐’이 명궁을 나타내는 말이다. 인종의 용광로 중앙아시아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언어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 똑 같은 물 혹은 강을 놓고 나라마다, 종족마다 표현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식하게 말해 하나의 시니피에(signifie´)에 여러 가지 시니피앙(signifiant)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인종의 혼성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는 여러 말이 겹쳐 쓰이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은 江이나 水를 ‘-ab’이라 했다. 돌궐인들은 ‘su’라고 했다. 따라서 Kara-su는 黑水이며, Punjab은 五河라는 말이다.
이쯤에서 다시 묻자.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의 始發인 월지의 원 거주지는 어디였을까.말을 알면 역사가 보이고 문화, 종족적 기원이 보인다. 얼마 후 우즈베키스탄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월지의 한 갈래를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康國(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의 왕의 姓은 본래는 ‘溫(on)’이며, 月氏人이다. 과거에 祁連山 北쪽 昭武城에 거주하다가 흉노의 피습으로 서쪽으로 ???嶺(파미르)을 넘어 그 나라에 이르렀다.”
비록 간략하지만 위의 구절을 읽으면 월지가 고향을 떠나 이주하게 된 사연과 그 경로, 최종 도착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On’을 姓으로 쓰는 월지의 부족(혹은 씨족)이 살았던 곳이 昭武城임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나머지 역사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온’이 무슨 뜻의 어느 종족의 말이며, 漢語로 표기된 ‘昭武’의 음과 말뜻, 그리고 그 말의 기원을 파악하면 된다. 차차 해결하자.
졸음에 겨워 힘들어하는 좌중을 재촉해 차에서 내린다. 부라나 탑이 눈앞이다. 볼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다. 참 황량한 풍경이다. 바깥 기온은 섭씨 40도에 근접한다. 선블록으로 양산을 펴들고 차에서 내려 햇볕 속을 걷는다. 탑 주변의 발발(balbals)도 더위에 녹아내릴 기세다. Balbal(‘조상’이라는 뜻) 혹은 baba라는 石人像은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흔히 보는 돌하루방과 흡사한데, 스키타이, 흉노, 몽골 등 유목민들의 무덤(kurgan) 주변이나 꼭대기에 세워졌다. 우리네 조상 무덤에 石獸, 石柱, 石燈 따위의 石物 외에 石人像을 세우는데, 무슨 연고가 있지 싶다. 심심파적으로 발발의 수를 헤아리며 걷다보니 코딱지만한 박물관에 이 근방에서 발굴된 유물이 엉성하게 전시돼 있다. 가난한 나라의 문화재 관리 실상이 여실히 보인다.
이태백의 고향 碎葉城 가는 길, 그 쓸쓸함과 황량함
한여름 키르기즈 초원은 겁나게 덥다. 그래도 부라나 탑 꼭대기에 올라갈 필요는 있다. 과거 소그드인들이 살았던 드넓은 초원지역의 광대함을 실감할 수 있다. 곧 가게 될 쇄엽성의 유허, 악베심이 어딘가 눈대중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과연 거기는 이태백의 고향이 맞을까.어떤 중국학자는 이태백의 고향을 투르판이라고도 하는데….
塞下曲 변방의 노래 五月天山雪,無花祈有寒. 5월에도 눈 쌓인 천산엔 꽃은 없고 추위만이 있을 뿐. 笛中聞折柳,春色未曾看. 절양류 피리 소리 들려오지만 봄빛은 아직 찾을 길 없다. 曉戰随金鼓,宵眠抱玉鞍. 새벽엔 종과 북소리 따라 싸우고 밤에는 말안장 끼고 잠을 자노니 願將腰下劍,直爲斬楼蘭. 허리에 찬 칼 뽑아 곧 바로 누란왕을 베려 하노라.
杜甫와 더불어 唐代를 대표하는 시인 정도로만 나는 이태백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 몇 수 읽은 것만으로 그를 제법 이해하는 것처럼 자만했다. 양귀비를 흠모한 남자임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혼자 기뻐했다. 그러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당나라 땅이 아닌 서역, 천산 너머 쇄엽성이라는 사실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있는가. 비로소 시인이 양귀비를 친애하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술에 취해 노골적 애정시를 지은 연유도 알만했다. 또한 그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의 후손 고선지장군을 칭송한 까닭도 이해했다.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詩聖 이태백은 701년, 지금으로부터 1311년 전 현 키르기즈스탄 땅 악베심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성이 李氏인 것으로 미루어 의당 漢族일 법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음이다. 여기는 소그드인들의 중심 무대였기 때문이다. 누가 아는가. 그가 장사 수완 뛰어나기로 이름났던 소그드인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기실 그의 조부는 장사에 능한 사람이었다. 소그드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명칭만 기억하자. 낯선 이름 소그드, 한자로는 粟特 혹은 束毒 등으로 기록된 유목집단.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잠시 기다려보자.
만주벌의 패자 고구려가 그 명운이 다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668년) 리더십이 말갈의 수장 乞乞祚榮(후일의 大祚榮)에게 넘어간 뒤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당나라는 안심하고 서방 정벌 혹은 서역경영에 진력하고 있었다. 천산을 넘어 초원지대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것이다. 야만스런 늑대족(渤海人)의 땅 만주는 생산성도 낮고, 사람살기에도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다. 전혀 돈벌이가 될 만한 사업장이 아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저희들끼리 살고 그러다 싸우게 둬도 뭐 크게 손해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척박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서역경영의 중심 안서도호부의 관할과 천산 너머 초원지역은 사뭇 달랐다. 그곳은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국익과 직결된 유혹의 땅이었다. 그 중심에 쇄엽성이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고대 실크로드 상의 주요 교역도시 쇄엽성의 오늘날의 지명은 악 베심(Ak Beshim)이다. 키르기즈스탄의 수도인 비쉬켁 동방 50km, 토크목으로부터는 서남서 방향으로 약 8km 떨어진 추강 계곡 내의 평원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자어 ‘쇄엽성’은 뜻과는 무관한 당시 현지음 Suy-ab의 음차자다. Suy-ab (Persian: سوی آب)은 페르시아어로 ‘물 [강]가의 (도시)’라는 뜻이다. ‘皇城 혹은 軍營 (ordu)의 도시 (kent)’ 라는 의미의 Ordukent라고도 불렸다. 상업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이름이다. 정확히 쇄엽성(碎葉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더위에 그곳을 찾아가는 재미는 유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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