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해에 벚꽃이 한창이라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진해 군항제를 한번도 가본적은 없지만 내게있어 진해 군항제는 항상 마음 한구석 지워지지 않는 쓰라린 기억으로 떠오르는 말이다.
‘83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ROTC장교로 임관한 나는 광주 전투병과학교로 4개월의 교육을 받으러 떠나게 되었다.
최초 1개월은 외출도 않되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두 번째 달부터 일요일 시내 외출이 허락되었다.
새봄을 맞이한 광주시내는 온통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으며 지나는 행인들의 모습엔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이제껏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었던 대학과 가정이란 둥지를 벗어나 군이라는 낯선 생활을 시작하는 우리들만 유독 불안한 봄을 보내고 있었다.
광주 거리엔 그당시 한창 유행하던 김수희의 ‘멍에’와 ‘못잊겠어요’가 곳곳에서 흘러 나왔는데 어쩌면 서글픈 우리의 마음을 그리 잘알고 꺼이꺼이 대신 울어주는 것 같던지...
시내 외출이 허용되자 나는 생전 처음 와보는 광주시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싸돌아 다녔으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친구들,가족들,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낯선 거리에서 왜 헤매고 있는지 공연히 서글픔이 밀려왔다.그런 사정도 모르고 봄꽃은 왜 또 그리 화사하기만 하던지...
서울로 전화를 해서 이곳 광주까지 담주 일요일 찾아오겠다는 연인의 약속을 받아낸 나는 오로지 그녀를 만날 생각에 한주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마음 설레이며 매일의 혹독한 훈련을 버텨나갔다.
드디어 일요일 나는 일찍부터 광주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한달여만에 보게 되는 그녀였지만 내게 있어 그시간은 정말 몇 년과도 같이 길고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약속시간이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질 않았다.서울서 내려오는 버스가 문이 열리면 나는 내리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를 찾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곧 나타나겠지 하던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되더니 종국엔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녀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한시간이 훨씬 지나자 나는 그만 시무룩한 마음으로 돌아서고 말았다.야속한 사람,이렇듯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맘도 모르고...
부대로 되돌아가는 택시안에서 그런 얘길 했더니 택시기사는 광주엔 고속버스 터미널이 두군데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광주고속(지금의 금호고속) 터미널과 중앙고속 터미널이 각각 다른 곳에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급히 차를 돌려 중앙고속 터미널에 도착하니 벌써 약속시간으로부터 두시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때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그녀는 없었다.그러면 그렇지 하는 자조적인 생각을 하자니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목이 메어왔다.
그래서 터미널 지하에 있는 다방에 들어가서 목이나 축이고 가야지 하는 생각에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나는 하마터면 놀래 자빠질 뻔 했다.거기 그녀가 그 큰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그녀의 커다란 눈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낯선 광주의 허수룩한 다방에서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두시간만의 만남이었다.
꿈인가 생신가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와락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달래며 그녀 앞에 앉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우리 둘은 어떻게 된 사연인지 자초지종을 묻기에 바빴다.
연신 눈물을 훔치며 야속하다는 듯 눈을 흘기며 입을 연 그녀는 광주에 터미널이 둘인 것은 전혀 몰랐고 서울서 중앙고속을 타고 내려보니 내가 없더라는 것이다.
네시간을 넘게 달려왔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그냥 서울로 돌아갈까 하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잠시 쉴겸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이다.물론 손에는 서울로 출발할 버스표를 미리 끊어 쥐고는.
다소간 흥분된 감정을 누그러뜨린 우리는 비로서 차분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의 얘기인즉 이곳에 온 것은 집에다는 친구들과 진해 군항제의 벚꽃놀이를 간다고 하고 왔다는 것이다.
진해 군항제!!!
그날의 비껴간 우리들의 약속과도 같이 그후로도 우리 두사람의 인연은 집안의 반대로 인해 끊어질 듯 이어지 듯 하면서 순탄치 못했으며 결국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하고 끝나게 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진해 군항제는 내겐 아픔의 단어가 되고 말았고.
진해 군항제에 벚꽃이 만발하다는 소식을 접하니 갑자기 ‘83년의 이맘때가 생각나고 더불어 그녀가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선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매년 군항제를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마음은 먹지만 이제껏 그리하지 못했다.올해는 과연 갈 수 있으려나?
사무실 창밖으론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그 희고 고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그꽃을 지켜 보자니 마음은 마치도 그 옛날 광주시절의 봄날로 되돌아간 듯 설레인다.
올봄은 희망이 넘치고 기쁜 일이 많이 생기는 그런 좋은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무실 책상에서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한껏 펴며 봄날의 노곤함과 졸음을 쫓아내본다.
(참고:이글은 2004.3 윈드버드에 올린 글이며 현재 광주의 고속버스 터미널은 한곳으로 통합되어 있슴.)
첫댓글 훈장님,괜찮애요?? 폴새 두번째로 이 글을 올리신다면...하긴 훈장님이 그때 그녀와 헤어졌으니..지금 집에 계신분의 낭군이 되셨겠지만서두..쪼매 걱정됩니당!
'에효~이 눔의 글땀시 어제밤 집사람과 한바탕 했다는..'ㅋㅋㅋ 이런 글이 올라와야 합니까?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그리고 이곳은 저의 아내가 모르는 저만의 놀이터이지요.^^*
추억속의 그녀도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훈종님을 떠올리실 겁니다. 보고싶다는 간절함 까지는 아니래두.....뭐랄까 아련함 같은거....
저도 가끔은 우연이라도 길에서 한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 반,아님 그냥 소중한 추억으로만 간직하고픈 마음 반,그렇네요.아무래도 후자가 더 낫겠지요? ㅎㅎ
저도 83년에 광주로 왔는데...그때 충장로 어디쯤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나팔님 그때만 해도 충장로 우체국 앞은 웬만한 사람 다 만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만남의 장소로 유명했지요? 지금도 그런지 궁금하네요.이 글에서의 그녀와 그날 충장로 어느 까페에 갔던 기억이 납니당.^^*
츠암나~(포시즌님 버전..) 나는 이런 글 여그다 못올리는데...누구때문이라고는 차마 말못함~~
그래서 부부가 한 공간에 있슴 좋은점도 있고 불편함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근데 수사모님은 이런 정도는 다 이해해주시는 든든한 친구이자 후원자이실 것 같은데요.
촴눼 ㅎ 오늘도 낼도 변함없이 한다는데 ㅎ
H.P 하면 되는거 아니였나? 요?
햐~그때 핸드폰이 있었으면 뭔 걱정이었겠습니까요? 아심시롱 약올리시는거지용? ㅎㅎㅎ
극소수의 사람만 무전기같은 cell-phone을 90년도쯤 부터 썼다는..값이 200만원을 홋가했다는..모토로라에서 나왔다는...그땐 차라리 car phone이라고 차에 전화를 장착하고 다닌 사람이 많았답니다.대중화된것은 삼성도 만들기 시작한 92년도쯤이 아닐지...
훈장님 지금 진해 군항제는 끝이 났고요 어제 쌍계사 가는 여행 계획이 취소 되었답니다. 벚꽃은 이제 서울이 절정이고요 남도엔 모두가 지고 없어졌자는 전언입니다. 내년을 기약하시셈.
지금 짝꿍이 되어있는 그녀 이야긴줄알고 읽다가...부럽사옵니다~ㅎㅎㅎ이렇다할 연애도 몬해보구 밥만 축내고 살고있는 소인의 처지로는...
ㅋㅋㅋ 미소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당...^^*
훈장님의 애틋한 사연이 가슴이 아리게 하네요.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비껴가는 인연 속에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진 사람이 있겠죠. 그래서 가슴 한 켠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살짝 숨어있을 수도 있겠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