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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복 저
면수 144쪽 | 사이즈 133*210 | ISBN 979-11-5634-465-0 | 03810
| 값 12,000원 | 2021년 07월 17일 출간 | 문학 | 시 |
문의
임영숙(편집부) 02)2612-5552
책 소개
양순복 시집‘B형 도시’는 양순복 시인이 명명한 새로운 도시이다. 자기 안에 갇혀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외시키며 기계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계 맺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어버린 새로운 형태의 도시로 명명하고 꼬집어 고발한다. 현대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기도 하고, 기계나 기술에 의해 소외되기도 하고, 스스로 자기를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고립되어 현대라는 소통 부재의 바다에서 각기 따로따로 떠도는 외딴섬으로 살아가고 있다.
외딴섬에서 오로지 배터리 충전된 스마트폰에만 의지한 채 진정성 없이 떠다니는 ‘발신인 모르는 편지’를 읽는 익명의 사람들, 그것에 의해 울고 웃고 찡그리며 노예가 되어 가는 사람들, 나아가서 그 사람들 자체가 발신인 없는 편지가 되어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메스를 가하고 있다.
저자소개
시인은 강동구청 공무원으로서 30년 동안 명예퇴직 시까지 바쁜 일상을 보냈으면서도, 시를 향한 애정과 열정을 이어온다. 사물의 미학을 찾는 시인의 마음으로, 시민을 대하며 봉사를 해온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인으로 수많은 파문의 흔적을 지우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 현재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복지위원과 한국시인협회, 종로문인협회, 강동문인협회, 송파문인협회 이사뿐만 아니라, 문학의봄작가회, 풀무문학 그리고 서울시 글사랑 회원으로서 꾸준히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 시집으로는 「움집 위에 핀 이슬꽃」과 다수 동인지가 있으며, 2017년 5월 8일 서울신문에 ‘그래 너도 꽃이다’를 발표하였고, 지하철 응모 시에 ‘노을이 질 때면’이 당선되어 게재되었다.
차례
시인의 말-작은 꽃잎 한 장 한 장 열리는 소리 ㆍ 4
서평-꽃이 진 후를 주목하는 시안詩眼 ㆍ 107
- 양순복 시집 『B형 도시』 _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1 별이 지지 않는 바다
별 ㆍ 14
꽃이 진 후 ㆍ 15
오월의 기도 ㆍ 16
몸짓 ㆍ 17
차茶의 향기 ㆍ 18
풀잎이 하는 말 ㆍ 19
겨울 숲학교 ㆍ 20
물새 우는 가을 저녁 ㆍ 21
어느 4월의 득음 ㆍ 22
무시래기 꿈 ㆍ 24
빈자리 ㆍ 26
새벽달 ㆍ 27
B형 도시 ㆍ 28
가을밤 ㆍ 29
별이 지지 않는 바다 ㆍ 30
사막의 밤 ㆍ 31
돋을볕 떠오르면 ㆍ 32
보름달 ㆍ 33
2 산골 동화
산골 동화 ㆍ 36
나뭇잎 길 ㆍ 37
그늘의 달인 ㆍ 38
나비에 잡히다 ㆍ 39
반전反轉 ㆍ 40
잡념 ㆍ 41
비가悲歌 ㆍ 42
여명黎明 ㆍ 43
춘설春雪 ㆍ 44
그대 별이 내 가슴에 뜬 이유를 알겠다 ㆍ 45
염장鹽藏 ㆍ 46
그런 사람 하나 있다 ㆍ 47
정오의 미소 ㆍ 48
곡우穀雨의 기도 ㆍ 49
산과 해ㆍ 50
무의도無衣島 ㆍ 51
환청幻聽 ㆍ 52
그래 너도 꽃이다 ㆍ 53
3 구름의 문장
구름의 문장 ㆍ 56
강동선사문화 축제 ㆍ 58
율곡촌에서 시를 짓다 ㆍ 59
천호역 ㆍ 60
한강 찬가讚歌 ㆍ 61
십자성 마을 ㆍ 62
천년의 기억 ㆍ 63
연안 포구의 밤 ㆍ 64
아우라지 ㆍ 65
백 년의 약속 ㆍ 66
등불축제 ㆍ 67
한강의 오월 ㆍ 68
입동 무렵 ㆍ 70
별 안에 별을 안고 ㆍ 72
4 작약이 피는 계절
작약이 피는 계절 ㆍ 75
나무 학교 ㆍ 76
나팔꽃 ㆍ 77
꽃밭의 오후 ㆍ 78
소금꽃 ㆍ 79
달맞이꽃 ㆍ 80
깻망아지 ㆍ 81
봉선화 ㆍ 82
박꽃 ㆍ 83
산유화 ㆍ 84
담쟁이 연가 ㆍ 85
별은 꽃이다 ㆍ 86
코스모스 길 ㆍ 87
뿌리는 고집이 세다 ㆍ 88
5 엄마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ㆍ 91
노을이 질 때면 ㆍ 92
자화상 ㆍ 93
무당벌레를 닮은 여자 ㆍ 94
복어의 꿈 ㆍ 95
흑백사진 ㆍ 96
낙타는 오늘도 ㆍ 97
가늠하다 ㆍ 98
어린 날, 나는 ㆍ 99
섬진강 산그림자 ㆍ 100
달항아리 ㆍ 101
무심한 계절이여 ㆍ 102
오수午睡 ㆍ 103
접시꽃이 피었습니다 ㆍ 104
산다는 건 ㆍ 105
내 안에는 언제나 바다가 산다 ㆍ 106
출판사 서평
꽃이 진 후를 주목하는 시안(詩眼)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시는 사물의 내면과의 대화이다. 사물(세계)에다 자기의 내면을 투사(projection)하고 그 세계他者로 하여금 시적 화자 대신 말하게 하거나,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동화同化시켜서 세계와 자아가 동일화를 이루게 하는 표현 장치가 시이다.
양순복 시인은 주로 자연을 객관적 상관물로 하여 자연에 자신을 투사하거나 반대로 자연에서 삶을 읽어내고 삶의 지향점을 밝히는 혜안을 지닌 시인이다.
양순복의 시는 따뜻하고 밝고 긍정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들이 간과하기 쉬운 사물의 이면을 그 사후事後, 死後의 의미까지 천착하는 깊이 있는 시안을 지니고 있다.
2. 꽃이 진 후를 주목하다
꽃잎이 이슬에 젖는 건
젖은 발로 달려오는
별빛 때문일 거야
꽃 진 그 자리에
서둘러 새잎 돋우는 건
푸른 그늘이 되고 싶은
열망 때문일 거야
꽃잎 하나둘 떨구는 건
지워야 할 기억보다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서
묻는 늦은 안부일 거야
- 「꽃이 진 후」 부분
3월부터 피는 꽃들이 4월이 되자 한꺼번에 다 피어나 온통 황홀한 꽃동산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꽃 앞에서 우리는 꽃이 피어 있는 상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노래하기는 쉽다. 그러나 양순복 시인은 꽃이 피었을 때의 황홀함과 아름다움에 취하기보다는 꽃잎 하나둘 떨구며 꽃이 진 후에, 늦은 안부를 묻는 시인이다. 젖은 발로 달려오는 별빛을 받아 이슬에 젖는 꽃잎을 바라보며 눈을 맞추는 시인이다. 피어 있는 꽃만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꽃 진 자리에 새잎이 돋아 타자들에게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고 싶은 잎의 열망에 눈을 맞추는 시안을 지니고 있다. 꽃이 진다는 것은 꽃의 죽음死이지만, 꽃이 진 자리에 새 잎이 돋아나고, 더욱이 새 생명 잉태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꽃잎의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을 지속시키는 우주적인 역사이다. 양 시인은 이러한 새로 돋는 잎과 새 생명이 보고 싶어서 꽃 진 자리에 ‘늦은 안부’를 묻고 있다.
단칼에 목 잘려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노
푸른 눈물 흘리며 저항 한 번 못하고
제 살 꿰매면서
오로지 좋은 시래기가 되기 위해서는
이 앙다물고 참아야 한다고
목줄기와 목줄기 줄에 엮인 채
설한풍雪寒風 기나긴 밤 서로 토닥여가며
가려운 줄기 벽에다 비비고 문지를 때
바스락바스락, 버럭버럭, 소리쳐 봐도
누렇게 야위어만 가던 빛
삭풍에 얼었다 녹았다
그 누구 따스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수십 번 비우고 또 비우고 나서야
또 하나의 꿈을 이루었나니
- 「무시래기 꿈」 부분
「무시래기 꿈」도 꽃이 진 후의 삶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오직 뿌리만을 살찌워야 한다는 일념 아래 푸른 줄기를 세우면서 비와 바람, 천둥과 먹구름을 받아내던 날들은, 출산과 육아는 물론이고 자녀교육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자신을 돌아볼 여유라곤 없던 젊은 날의 삶이다. 그런데 ‘단칼에 목 잘려 나’가듯이 젊은 날은 가고 푸른 눈물 흘리면서 노년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젊은 날처럼 푸른 삶은 아닐지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직면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시래기’가 되기 위해 제 살을 스스로 꿰매기도 하고, 세상의 찬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눈바람 부는 긴긴 겨울밤에도 서로 토닥여 가며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젊은 날의 서슬 푸르던 결기와 오기를 수십 번 비우고 또 비우고 나서 이루어 낸 또 하나의 꿈, 그 이름은 ‘조선의 무시래기’이다.
푸르던 꽃의 시간을 지나서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낸 누런 무시래기 – 무엇이든 품어 안을 수 있는 따스한 색깔, 된장이건 나물이건 생선조림이건 그 어느 것에도 몸 섞어 깊은 맛을 우려내는 무시래기, 꽃이 졌다고 낙망하지 않고, 목 잘린 상황을 탓하지 않고 꿈을 이룬 무시래기의 삶은 그대로 우리들의 삶, 고난과 질곡의 역사를 견뎌내어 오늘의 발전과 풍요를 이루어낸 우리 조선인의 삶에 대입된다.
바람은
바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나무는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고
등과 등을
어깨와 어깨를 서로 기대
알몸으로 호호 입김 불어가며
극한 추위를 견뎌내는 것
- 「겨울 숲학교」 부분
꽃 피고
꽃 진다
몸살 앓아눕거나
아쉬운 마음 저미지 말자
- 「어느 4월의 득음」 부분
「겨울 숲 학교」도 꽃이 진 후의 겨울나무를 노래하고 있다. 봄이 오면 또 꽃을 피우고, 꽃 진 자리에 새순 돋우고 가지를 뻗어 가겠지만, 그 꽃이 진 후의 가을, 잎이 모두 떨어진 후의 겨울에도 나무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어깨와 어깨, 등과 등을 서로 기대어 알몸으로 극한 추위를 견뎌 나간다. 그것은 「어느 4월의 득음」처럼 꽃 피고, 꽃 진다고 몸살 앓아눕거나 아쉬운 마음 저미지 않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이다. 꽃이 피는 황홀함 뒤에는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삶으로 피워내는 또 다른 꽃, 또 다른 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 인간소외 소통 부재와 그 극복
1807년에 헤겔은 정신의 활동으로 창조된 사물이 자립하여 창조자에게 대립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부정되는 개념으로 ‘소외疏外’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 후로 마르크스와 에리히 프롬에 이르러 소외의 개념이 더욱 확대되었다. ‘현대인들이 사회적으로 겪고 있는 온갖 병적인 것들’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인간성이 상실되어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리는 현상’이라는 뜻으로 인간소외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개념이 되었다. 인간이 자기들의 생활을 풍부하려고 만들어 낸 물질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얼른 보기에는 물질적 풍요 속에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발달된 기계화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자유로운 창조의 길을 포기한 무기력한 존재이며, 외부의 권위에 무조건 순응하는 자동인형이 되어 가고 있다. 더욱이 첨단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롭고 편리한 기계를 사용하면서, 그 기계나 기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기계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의 기존 가치로부터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 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고립감 무력감 등으로 소통 부재를 느끼면서 더욱 기계에만 의존하게 되어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섬을 갖고 산다
그 섬에서 발신인 없는 편지를 읽는다
전동차 문이 열리고
우르르 안으로 뛰어드는 성미 급한 사람들,
자리에 앉거나 서거나
각자의 섬에 불 밝혀 놓고
혼자서 웃고 울고 너스레를 떤다
“이 섬에서 저 섬을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터리 충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섬을 부려놓고 다시 싣는 전동차는
습관처럼 낯익은 멘트를 흘려보내고
타인의 우체통에 담긴 발신인 없는 편지를
이 섬, 저 섬에다 수없이 부려놓는다
도시의 바다는
발신인 없는 편지를 실어 나르며
언제나 소란스럽고 분주하지만
나는 그 섬을 떠나지 못한다
※ B형 도시 : 기존의 도시에 대비되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 각자의 섬에 갇혀 이웃과 단절되고 기계에만 의존하는 현대인의 도시.
- 「B형 도시」 부분
‘B형 도시’는 양 시인이 명명한 새로운 도시이다. 자기 안에 갇혀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외시키며 기계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계 맺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어버린 새로운 형태의 도시로 명명하고 꼬집어 고발한다. 현대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기도 하고, 기계나 기술에 의해 소외되기도 하고, 스스로 자기를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고립되어 현대라는 소통 부재의 바다에서 각기 따로따로 떠도는 외딴섬으로 살아가고 있다. 필자도 「호모 모빌리쿠스」라는 시에서, 손에 전화기가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하여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모바일 인간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이 시도 외딴섬에서 오로지 배터리 충전된 스마트폰에만 의지한 채 진정성 없이 떠다니는 ‘발신인 모르는 편지’를 읽는 익명의 사람들, 그것에 의해 울고 웃고 찡그리며 노예가 되어 가는 사람들, 나아가서 그 사람들 자체가 발신인 없는 편지가 되어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메스를 가하고 있다. 손안의 거인 전화기로 사이버 공간에서 낯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을 찾아 헤매다가 벌어지는 사회문제들, 충동적인 범죄들, 점점 더 외딴섬이 되어 가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 전체가 외딴 바다가 되어 가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새삼 짚어 보게 하는 울림이 큰 작품이다.
별끼리 소리 없이 만나는 밤에
우리도 반짝이는 별꽃이 된다
별 안에서 별을 찾는 사람들
눈먼 도시는 밤마다 별꽃 축제를 열고
나도 그중 하나 별 헤는 여인이 되어
이름 없이 지는 별 하나 품고 산다
별은 별끼리 모여 별자리가 되고
별자리와 별자리가 모여 별나라 되고
별나라에 그대의 황궁이 있다면
환궁의 심장에 큐피드 화살 쏘아 올려
그대 가슴에 새겨진 사랑 하나 품고 사는
사랑의 별자리를 하나 새겨 놓고 싶다
행여,
그대 차가운 눈빛에
긴 꼬리 달고 투신하는
긴 꼬리 별똥별이 되어도 좋다
- 「별 안에 별을 안고」 부분
양 시인은 외딴섬이 되어 가는 인간소외와 소통 부재를 고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극복을 기원한다. 양 시인의 시의 오브제(objet)가 별, 식물 등이고, 식물 중에서도 꽃과 나무가 많은 것은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인간은 물론이고 세상 만유와 소통을 원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소외는 인간다운 자기의 본질을 잃고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좇으며 기계나 기술의 노예가 되어 가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섬에 갇혀서 타인의 눈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즉자적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대자적 삶으로의 인식과 변화가 필요하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여우의 입을 빌어 말하는 ‘서로 길들이기’, 즉 ‘관계 맺음’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이 세상 모든 소외와 소통 부재는 다 극복될 것이다. 에리히 프롬도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실현하는 자율적 인격이 되어야 하며, 인간이 본래 소유하고 있는 창조적 활동이나 사랑이 작용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시인은 「별 안에 별을 안고」에서 이 세상 모든 이(타자들)를 ‘별’로, ‘반짝이는 별꽃’으로 치환해낸다. 별은 소외된 인간들과는 다르다. 혼자 반짝이는 것이 아니고 별끼리 모여 별자리가 되고 별자리끼리 모여 별나라가 된다. 혼자 외따로이 있을 때의 별빛보다, 함께 모여 반짝일 때 그 별빛은 더욱 빛나고 멀리 가는 빛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 가슴에 새겨진 사랑으로 승화된다. ‘관계 맺음’의 최고 지향점은 사랑이다. 더 나아가서 시인은, 그대가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 소통 부재의 대상인 ‘차가운 눈빛’이라 해도 그 눈빛에 ‘긴 꼬리 달고 투신하는’ 별똥별이 되어도 좋다고 한다. 이처럼 시인은 ‘너’로 제유提喩되는 소외된 인간의 문을 열고자 자신을 전부 던지기도 한다. 일찍이 「B형 도시」에서 가슴 저린 인간소외와 타인의식을 느꼈기에 자신이 별똥별로 산화하여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 희생을 즐겨 감수하겠다는 결의로 읽힌다. ‘별 안에서 별을 찾는’ 사람, 타인을 자신의 섬 안에 들여놓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읽힌다.
‘사람이 꽃이 되고/꽃이 사람이 되는/하양 분홍 부드러운 미소’(「코스모스길에서」), ‘갈등 많은 이 세상/소통의 문 열어놓고’(「등불축제」) 등에서도 사람과 자연의 소통과 동화, 소외의 극복 등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4. 생명공동체와 자기 성찰
양순복 시의 또 다른 한 축은 자연을 오브제로 하는 생명존중, 생명공동체 의식과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자기 성찰의 시가 차지하고 있다.
칠십 평생
이산 저 골짜기 짊어지고 다니느라
허리가 산 능선이 된 할머니
억새 지붕 처마 끝엔
수십 년 세월 흔적이 쌓여 있다
검둥이와 몇 마리 닭이 가족인데
암탉을 쫓는 수탉과
어미 닭을 졸졸 따라다니는 병아리들
춘삼월
누가 거들지 않아도 싹 틔우는 나무와 꽃들
마당 한쪽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 심으며
“나 죽고 떠나더라도 꽃 잘 피우고
튼실한 열매 맺고 잘 살아야 한다”
동화책 한 줄 읽어본 적 없는 할머니가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매일 그려가며 받아쓰고 있다
- 「산골 동화」 전문
삶에서 동화를 읽어내는 눈이 따뜻하다.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려가며 받아쓰고 있는 산골 할머니의 삶을 한 편의 동화처럼 훈훈하게 그려낸다. 검둥이와 몇 마리 닭과 봄마다 싹 틔우는 나무와 꽃들을 가족 삼아 살아가며,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마당 한쪽에 복숭아나무를 심는 할머니를 등장시켜 생명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생명존중의식을 보여준다.
나뭇잎 뒷면에는
울긋불긋 이어진 나무의 이력이
여러 갈래 그물맥으로 이어져 있다
햇살과 바람과 천둥 울음과
비의 이력을 담은 여러 갈래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온
내리막 가파른 길목에서
손바닥 지도를 펼치고
잠시 머뭇거린다
단풍이 든다는 건,
뿌리의 힘으로 넓힌 그늘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빈 가지로 남기 위함이다
푸른 성자聖者가 되어
지경새의 보금자리를 품기 위함이다
- 「나뭇잎 길」 전문
양순복 시인의 시의 오브제들은 주로 자연이다. 시인은 이러한 자연 오브제를 통해 아름다운 생명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언뜻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나뭇잎 뒷면에 새겨진 그물맥 이력은 곧 시적 화자가 아이들과 함께 걸어온 ‘내리목 가파른 길목’의 이력이기도 하다. 화자가 손바닥 지도를 펼치고 잠시 머뭇거리듯이, 나무들도 ‘햇살과 바람과 천둥울음과 / 비의 이력을 담은’ 한 생애의 길을 지나서 마침내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 ‘빈 가지’로 남기 위해 단풍이 든다. 울긋불긋, 힘들었던, 그래도 아름다웠던 생애의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서서 지경새의 보금자리를 품어내며 ‘푸른 성자聖者’의 꿈을 꾸는 것이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나뭇잎 길’이다. 모든 생명이 가슴 한쪽을 비워내어 서로에게 생명이 깃들 자리를 내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꽃 진 자리에 푸른 싹 틔우는
봄 나무에게
빈 가지로 오래 기다려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 희망을 배운다
짙푸른 잎사귀 맘껏 뽐내는
여름 나무에게
어둡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푸른 그늘 되어주는 배려를 배운다
- 「나무학교」 부분
풀잎은,
별빛이 밤새 흘려놓은 눈물방울도
한 송이 이슬 꽃으로 피어나라고
살랑살랑 키를 낮추며 말한다
어서, 어서 웃어봐
눈물은 뚝
- 「풀잎이 하는 말」 부분
시인은 나무를 스승 삼아 배우는 ‘나무학교’의 학생이다. 나무학교를 통해 기다림에서 오는 희망과 소외된 이웃에게 푸른 그늘로 손을 내미는 배려와 공동체 의식을 배운다. 비움에서 오는 더 큰 채움의 진리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웃사랑을 배운다.
「풀잎이 하는 말」에서 시인은 타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허리를 굽혀서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풀잎에 눈을 맞추고, 키 작고 하찮은 풀잎이 크고 따뜻한 가슴으로 베푸는 사랑을 읽어낸다. 그런가 하면 ‘응달진 골짜기에 숨어서’(「그래 너도 꽃이다」) 피어나는 작은 꽃을 두 손으로 감싸주고자 하는 측은지심으로 소외된 존재에 관한 관심을 기울이며 자아화自我化 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여명黎明」에서는 ‘비탈에 서 있는 나무들 / 어깨를 기대어 / 잘 잤느냐고 /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며 / 숲이 되는 시간’ 등에서 이웃사랑과 공동체 의식, 긍정의식을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이 서로서로 깃들 자리를 내어주며 어깨 겯고 살아가는 생명존중, 생명공동체 의식과 더불어, 양순복 시인은 자연에서 삶을 읽어내고, 자연에서 배우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시 세계를 보여준다.
푸드덕,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새 한 마리
행여
가던 길 되돌아 나올까
기다리지만
쏜살같이 날아가는 시간은
언제나 직진
한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는
지워지지 않는 잔상
- 「산다는 건」 부분
시간의 속성은 직진이다. 되돌아오지 않는다. 느끼는 사람에 따라서,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 그려진 시계처럼 축축 늘어져 있기도 하지만,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는 달리 시간은 언제나 직진만이 있을 뿐이다. ‘허공을 가로질러’ 새 한 마리 날아가듯이 빨리도 흐르는 시간이다. 산다는 건 그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허공에 남아 있는 시간의 잔상을 어떻게 붙잡아 요리할 것인가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산다는 건’이라는 제목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을 직시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제 몸 깃들 집을
짓지 못한 것이 아릿한데
누구 탓이더냐
오늘도
내 탓이라 여기며
격랑의 세태를 헤쳐 일어나
짙은 깻잎 향 은은하게 퍼지는
생의 환희를 음미하려무나
- 「깻망아지」 부분
‘깻망아지’, 듣기만 해도 깻내음이 고소하게 풍겨올 것 같은 귀여운 이름이다. 살이 통통 오르고 귀여운 모습의 깻망아지는 보호색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깻대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깻잎을 갉아먹고 사는데, 고치를 만들지 않고 흙 속에서 번데기 단계로 월동한다고 한다. 시인은 이런 깻망아지의 생애에 유의하여, 깃들일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도 아니고 ‘내 탓이라 여기며’ 자신을 성찰한다. 그러면서 격랑의 세태를 헤쳐 일어나 생의 환희를 음미하기를 스스로에게 기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새벽달」에서는 새벽달을 보면서 ‘부릅뜬 눈 하나가/나를 째려본다’라고 하여 자신을 돌아본다. 「그늘의 달인」에서는 ‘이순耳順의 길목에’ 서 있는 단풍나무를 자아와 동화시키면서 나무의 사계절을 통해 자아를 성찰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5. 가족사랑과 내 고장 사랑
양순복 시인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비롯하여 여성의 힘, 엄마의 사랑 등을 통해 가족사랑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시인이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내 고장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밑거름 듬뿍 넣어주고
애지중지 사랑의 손길로 가꾸시더니
다시는 못 보실 거라는 걸
예견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앞마당 환하게 불 밝혀 놓고 기다리는
분홍빛 접시꽃 두 포기
두 분이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 「접시꽃이 피었습니다」 부분
접시꽃은 시골집 어디에나 피는 정겨운 꽃이다. 시인은 고향 집 앞마당에 피어 있는 정겨운 접시꽃을 보면서 부모님 그리움을 노래한다. 지난봄 이 자리에 앉아서 소박한 웃음 나누시던 두 분은 아마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을 하직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두 분이 밑거름 듬뿍 넣어주고 애지중지 사랑의 손길로 가꾸어 온 것은 분홍빛 접시꽃으로 표상되는 사랑하는 자식들이다. 두 분이 함께 떠나간 빈집에서 불 밝혀 놓고 기다리는 접시꽃의 마음에 자녀의 그리움을 의탁해서 사랑을 읊어내고 있다.
한낮 오후
한 뼘쯤 고개 내민 반달이
창밖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길 떠나간 자식 기다리다
핼쑥해진 어머니가
낮달 되어 다시 오신 건지
그날의 어머니 한숨 소리
나뭇가지에서
가느다랗게 새어 나온다
- 「흑백사진」 부분
처마 끝에 등불 밝혀 놓고
마루 끝에 앉아
자식들 기다리시던 어머니
어서 가거라
해 저물기 전
어서 가, 식구들 잘 건사하거라
서쪽 하늘 노을 속에서
그날의 쓸쓸한 어머니가
자꾸만 손짓하신다
- 「노을이 질 때면」 부분
어머니의 자식 향한 사랑은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이다.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는 부모의 사랑을 열 가지로 설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자식이 다 큰 성인이 되어서까지 염려하는 어머니 마음을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에 실어놓았다. 자식들은 다 크면 저 혼자 자란 줄 알고 부모님의 사랑과 염려를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나가도, 들어와도, 먼길 떠나도, 자기 일에 바빠서 부모님의 기다림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이 먼길 떠나고 나면 돌아올 때까지 문간에 기대어 기다리고 계신다. 시인의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나 툇마루에 걸터앉아 대문간만 바라보는 어머니,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행여 내 자식 발걸음 소린가 바짝 귀를 세우는 어머니, 그러다가 실망하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런가 하면 멀리 타지로 출가한 딸을 맞아 반갑다가도 해 저물기 전에 어서 가서 식구들 잘 건사하라고 아쉬움 감추고 등을 떠미는 것이 어머니 마음이다. 저세상 가시고 나면 ‘그날의 쓸쓸한 어머니’ 마음을 챙기지 못한 자신을 탓해도 이미 때늦은 후회다. 이것이 모든 자식 된 사람들의 공통 심정일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 사랑은 ‘멀리 가시었어도’ ‘산처럼 바다처럼’(「오월의 기도」) 내 안에 담겨 있어 언제나 느껴지는 ‘큰 여울’이다.
어깨에 진 짐이 버거워
등이 굽어버린 여자
(중략)
노랑 검정 보석을 등짝에 붙여
한껏 사치를 부려보아도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치장
두루뭉술해진 허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일터로 나가야 하는
무덤덤한 여자
- 「무당벌레를 닮은 여자」 부분
가족을 건사하고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끝없는 집안일과 날마다 일터로 나가야 하는 직장 일을 양립시켜야 하는 한국의 여성 – 주부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버거운 짐을 지고 등이 굽은 무당벌레, 짐짓 화려하게 치장해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무당벌레에 여성의 삶을 환치하여 효과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무거운 짐에 등이 굽어 버린 무당벌레도 ‘잔다르크보다 강한 / 여자가’ 될 때가 있다(「엄마라는 이유로」). 왜냐하면,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녀만 생각하며 자녀를 위하여 아파도, 괴로워도 참아내는 ‘엄마’는 가히 신적인 존재이다.
강심이 맑아지는 오월이면
한강이 하늘에게 묻는다
누가 더 푸르게 빛나고 있는지
하늘은 말없이
그저 흰 구름 한 점 띄우고 웃는다
강가에 물새 둥지 트는 오월이면
한강이 나무에게 묻는다
누가 더 따뜻이 품어주고 있는지
나무는 흔들림 없이는 중심으로
긴 팔 내밀어 춤을 춘다
- 「한강의 오월」 부분
시인은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현재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강동구와 송파구에서 오랜 공직생활을 해 왔다. 위의 시는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에 대한 예찬 시이다. 하늘-나무-소년-교각-시인 등의 소재를 옮겨가면서 한강이 주는 여유와 아름다움, 생명 키우기, 신비로운 세계와 자유에 대한 희구 등을 노래하여 한강을 예찬하고 있다. 「한강 찬가讚歌」에서도 ‘나의 한강/우리의 한강’을, 함께 희망과 사랑의 꿈을 꾸는 서울의 큰 얼굴로 예찬하고 있다.
사람이 아름다운 터
서울의 심장
가슴마다 이는
행복의 공동체 태양 같은 열기
선사 문화 사랑 축제 한마당엔
사람마다 벅찬 가슴에 따스한 바람이 분다
모두 함께 축제 한 마당에서
눈빛 마주치며 미래를 여는
강동의 희망
- 「강동선사문화축제」 부분
서울의 동쪽,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강동구에는 선사유적지가 있다. 6천 년 전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문화 초기 단계의 마을 유적으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발견되어 여러 차례의 발굴 단계를 거쳐서 선사유적지로 재탄생된 역사 공간이다. 강동구에서는 1996년 제1회 선사문화축제를 시작으로 해마다 가을이면 온 구민이 참여하는 축제를 열어 오고 있다. 양순복 시인은 이러한 선사문화축제를 소재로 강동의 역사와 선인의 숨결을 되살리면서 강동 사랑과 강동의 희망을 벅차게 노래한다. 같은 맥락에서 「천호역」 「십자성 마을」 등의 작품을 통해 강동의 중심인 천호역과, 강동 사람들의 순하디 순한 마음, 그리고 고귀한 희생을 바치고 돌아와 정주하고 있는 ‘십자성 마을’ 사람들의 희망찬 삶을 노래하고 있다.
6. 꿈꾸기와 실험 의식
시인은 꿈꾸는 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팍팍한 현실 저 너머의 이상을 향해, 이곳 아닌 저곳을 향해, 오늘보다는 내일을 향해 꿈꾸는 자이다. 시인이 꿈을 꾸고 있기에, 그 꿈을 언어로 표현하는 시를 통해 독자들은 현실의 메마른 삶을 위무 받고 더불어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를 통해 전 세계를 꿈꾸게 하는 자이다.
독을 품고 사는 것이 살길이라 믿었던,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려온 하루가
복어처럼 부풀고 있다
불룩한 배를 한껏 내밀며
기지개를 켜보지만
배에 품은 독은 무엇으로도 빼낼 수 없다
복어도 가끔은 꿈을 꾼다
하늘 한가운데를 헤엄치며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하늘 물고기가 되고 싶은 꿈을
- 「복어의 꿈」 전문
복어는 독을 품고 사는 것이 살 길이라 믿었다. 실제로 복어는 그가 알, 내장, 난소 등에 품고 있는 독으로 인해 생명을 건진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복어도 자기가 품고 있는 독을 빼내고 싶은 것이다. 독을 다 빼내어 버리고 불룩한 배가 한껏 가벼워져서 하늘 한가운데를 구름처럼 날아다니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몸을 버리고, 자신 속에 들어 있어서 남을 해칠지도 모르는 독을 다 빼내어 버리고 가볍게 날아다니는 ‘하늘 물고기’가 되고 싶은 꿈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싶은 시인 자신의 꿈꾸기의 표출이다.
나무의 촉수는 민감하다
가을이면 모든 수식을 떨구고
헐벗고 가난한 수도자처럼
꼿꼿이 서서 묵상을 한다
우주 어디쯤 미래의 봄을 꿈꾸려는지,
마른 가지 끝마다 수은주를 달고
거센 바람에도
몸통이 단단히 야물어지는 건
끊임없는 두레박질로 퍼 올리는
뿌리의 고집 때문이다
- 「뿌리는 고집이 세다」 부분
웃다가
울다가
제 자리 맴돌다
스르르 잠드는
별은 꽃이다
나는 밤마다
그 별을 안고 꿈을 꾼다
- 「별은 꽃이다」 전문
땅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 그 뿌리의 힘, 뿌리의 노동, 뿌리의 겸손, 뿌리의 배려, 뿌리의 꿈, 뿌리는 고집이 세다. 뿌리의 꿈은 나무의 꿈이며 나무의 꿈은 시적 화자의 꿈이며, 시적 화자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으로 확장된다. 그 꿈으로 하여 우리들은 인생을 살 만하다고 느끼고, 억센 바람 앞에서도 ‘몸통’을 여물게 하여 좌절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별은 땅의 꽃이다. 시인은 별을 안고 꿈을 꾼다. 울다가 웃다가, 제자리 맴도는 삶이라도 별을 안고 꽃을 안고 꿈꿀 수 있어서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시인은 ‘강물 속에 잠겨 버린/수초 같은 어린날 내 꿈들을’(「섬진강 산그림자」) 찾아서 ‘보랏빛 꿈을’(「어린날, 나는」) 꾸던 유년을 찾아 섬진강을 건져 올린다.
저 ⏏과
저 를 보면 알 것 같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들 모두
영원한 만남도
영원한 이별도 없다는 것을
- 「산⏏과 해」 전문
양순복 시인은 몇 편의 시에서 실험의식을 보여준다. 「산⏏과 해」에서 산을 ⏏으로, 해를 로 표기하는 등 사물의 형태를 기호로 나타내어 강조하는 포멀리즘formalism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단순한 표기이기는 하지만 그냥 문자로만 표현한 다른 작품보다 눈길을 끌게 하면서 ‘영원한 만남도/영원한 이별도 없다’는 우주적 진리를 주제로 내세운다. 섬 또는 점을 *으로 표기한 「무의도無衣島」도 이런 시도 중의 한 편이다.
간밤,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가
찻상을
마주하고 앉아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나누던
정담情談을
나는
밤새
들었답니다
또
또르
또르르
귀또르르르
-「환청」 전문
귀뚤이의 노랫소리(울음소리)를 시행의 형태를 통해 점점 강조하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경쾌한 청각적 울림으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들어 주던, 그래서 지음知音이라는 단어를 생성하게 한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를 끌어와서 주제의 깊이도 함께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내장을 빼낸 붉은 고등어 속살에 대고
아내가 굵은소금을 팍팍 뿌려댄다
제발 돈 좀 벌어오라며 바가지 긁힐 때마다
버름해진 김 씨의 심장도 덩달아 따갑다
염장을 지르는 사람이나 뿌리는 사람이나
속 쓰리기는 마찬가지다
평생 변변한 직장 한번 못 얻은 눈칫밥으로
오십 평생 살아온 김 씨의 가난도
소금밭에서 간간이 절여져 왔다
- 「염장鹽藏」 부분
눈빛으로 향기로
햇빛의 등을 통통 튕겨 나오는
꽃밭의 오후
흰 분꽃,
분홍 봉숭아꽃
선홍빛 칸나
키 작은 채송화
따가운 침묵은 견딜 수 없다고
흐드러지게 웃어댄다
- 「꽃밭의 오후」 전문
김 씨는 아내가 고등어 속살에 굵은소금을 팍팍 뿌릴 때마다 자신의 심장이 덩달아 따가움을 느낀다. ‘제발 돈 좀 벌어오라며 바가지’ 긁는 아내의 ‘염장 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살갑게 고등어 가시를 발라 밥 위에 얹어 주어도 도무지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염장鹽藏은 식품을 소금에 절여서 오래 가도록 하는 저장 방법이다. ‘염장’과 ‘염장 지르기’의 동음이의同音異義를 통해 우리말이 주는 묘미를 한껏 살려, 평범한 소시민의 사람살이를 한 편의 재미있고 아픈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다. 「꽃밭의 오후」는 ‘눈빛으로 향기로’ - 시각과 후각의 공감각적 이미지, ‘햇빛의 등을 통통 튕겨 나오는’ - 촉각적 이미지와 활어법의 사용, ‘따가운 침묵’의 아이러니 기법 등 언어의 자유로운 운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러한 표현기법으로 흐드러지게 웃어대는 꽃밭이 눈앞에 그려지며 독자도 함께 밝은 마음으로 미소 짓게 된다.
이처럼 양 시인은 몇 편의 시에서 언어의 자유로운 운용을 통해 새롭게, 낯설게 하는 실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7. 나가며
양순복 시인은, 꽃이 피어있는 화려한 시기가 아니라 꽃이 진 후를 주목하는 시안詩眼으로 남들이 간과하기 쉬운 사물의 이면을 그 사후事後, 死後의 의미까지 천착하는 깊이 있는 시 세계를 보여준다.
‘B형 도시’는 양 시인이 명명한 새로운 개념이다. 자기 안에 갇혀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외시키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인간소외와 소통 부재의 도시로 명명하고 꼬집어 고발한다. 고발에서 끝나지 않고 나아가서 관계 맺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한 인간 소외의 극복을 노래한다.
양순복 시의 또 다른 한 축은 자연을 오브제로 하는 생명존중, 생명공동체 의식과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자기성찰의 시가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시를 통한 꿈꾸기로 독자들을 함께 꿈꾸게 하는 등, 따뜻하고 밝고 긍정적이다.
시인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비롯하여 여성의 힘, 엄마의 사랑 등을 통해 가족 사랑을 노래하고, 시인이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내 고장 사랑의 지극함을 보여준다.
양 시인은 또한 사물의 형태를 기호로 나타내어 강조하는 포멀리즘(formalism)기법, 시의 각 행에 음절 수를 점점 더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점층법, 동음이의어의 사용, 공감각적 이미지와 아이러니 기법 등,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언어의 자유로운 운용으로 새롭게, 낯설게 하는 실험의식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표출되고 실험 의식까지 더한 양순복 시인의 시가 앞으로 깊고 넓게 확장되어 더 좋은 시 세계로 탄생되기를 기원한다.
본문 일부
몸짓
봄이 되면
앞다퉈 터지는 꽃망울도
꽃 진 자리 새잎 돋우는 나뭇가지도
허공에다 드리울 새로운 꿈을 찾는다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연초록 이파리와
속살속살 나른해진 뿌리로
기지개 켜며 쭈욱 뻗어간다
봄은,
땅 위에서도
땅속에서도
매우 분주하다
천호역
빗살무늬 출렁거리는
천호역
흙처럼 순하디순한
천호千戶의 마음들이
하늘을 닮아
몸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네
사랑과 인생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린 천호역은 언제나
나그네도 반기는
강동의 중심
가슴을 열고
정겨움과 환한 미소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모두
강동의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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