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니는 삶에 대하여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바로 보기 위하여 길을 되짚는 것입니다. 늘 길 앞에서 흔들렸던 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나온 길은 절대로 두 갈래로 뻗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한 길을 고르기 위해서 한 길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몇 갈래의 길에서 또 길을 찾겠지만, 어차피 길은 내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거나 외롭지는 않습니다. 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하늘이 어둑어둑 해지면 비로소 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내 안에 어둠이 밀려오면 밝은 나의 길이 거기에 있음을 아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듯이 사람에게 하나의 길이 나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에게도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물길이라고 하고, 꽃길이라고 하고, 향기의 길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다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함께 가는 불길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 안에 그들 있고, 그들 안에 내가 웅크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하나의 꽃으로 핍니다. 너와 내가 한 송이 꽃이 되는 세상이 ‘큰 어우러짐(大同)’입니다. 이 대동(大同)의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은 나뉨이요, 흩어짐이요, 갈라짐이요, 찢어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우주의 꽃을 같이 보며 살아가는 ‘더불어삶’이어야 합니다. 이 삶은 느린 것이고, 이 삶은 노는 것이고, 이 삶은 가는 겁니다.
요즘 초록이 지친 산을 오르려고 많은 이들이 단풍처럼 울긋불긋하게 옷을 차려입고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땀을 흘리고 목청을 돋우고 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을 대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고자 자신의 마음을 오만하게 합니다. 산이 열 길 바위 하나만 곧추 세우면 사람이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함을 알지 못합니다.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안기는 겁니다. 산에 안겨서 산이 들려주는 어울림의 가락을 듣는 것입니다. 물소리, 새소리가 어울리는 것을 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산은 하나의 소리만을 꺼내거나 풀어내어 음악을 만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산에 오르려고 작정을 하면 산의 우주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듣다가 내려오는 기계적인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산은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산은 노니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노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즐거움을 모릅니다. 노닌다는 말은, 놀다와 거닐다가 하나 된 말입니다. ‘논다’는 것은 신명을 다하여 노는 것도 의미하지만,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모르고 살듯이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누구와의 관계에서 나와 너 있음을 구분하지 않고 물이 흐르고 멈추면서 생명을 키우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준다거나 더 가진다는 것도 없이 살게 됩니다. 장자는 이러한 마을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떤 함도 없는 마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사는 것을 ‘노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노님은 느리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느리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이고, 오랜 시간을 서로 따스하게 지내는 마음입니다. 이 노님은 내 삶을 위하여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내 앞을 위하여 조바심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이니, 늙음은 하늘의 이치이고 헤어짐은 땅의 순리입니다. 그렇지만 끝은 없습니다. 하나의 죽음이 사랑을 일으키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자를 오랫동안 슬프게 담지 않고, 새로이 오는 생명을 간절하게 기다리기에 지구는 늘 초록의 삶입니다. 노닌다는 것은 담백(淡白)한 것입니다. 물처럼 흐르고 통나무처럼 꾸밈이 없고 흰 바탕처럼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산에 가서 느낀다면 그것이 ‘산행(山行)’이 됩니다. 산은 노니는 곳이고, 산에는 내 영육이 드는 곳(入山)입니다.
조선 중종 때 슬픔이 많았던 선비 송익필(宋翼弼1534~99)이 있었습니다. 송익필은 서출 출신이었지만 김장생,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 정홍명(鄭弘溟) 등을 배출한 예학(禮學)의 남상(濫觴)이 되는 분입니다. 그는 산을 거닐며 쓴 시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山行(산행)
山行忘坐坐忘行 (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 (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 (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 (각귀기지우하쟁)
산을 거닐며
산에 노닐다가 앉는 일, 가는 길 잊고,
말 쉬게 하고 솔 그늘에서 물소리 듣네.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가니,
다 멈출 곳 있는데 어찌 저리 다투는가.
산을 거닌다는 것은 풀과 나무와 나비와 말을 나누고 마음을 섞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인(先人)들은 등산(登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거닌다는 것은, 앉아 있는 것도 잊고 가는 것도 잊는 것처럼, 나를 벗어 던지고 자연의 품안에 안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이 나를 다독이며 물소리를 내어줍니다. 물소리에는 낮음의 소리, 어울림의 소리, 맑은 소리, 흐름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내려놓고 버리겠습니까. 자연은 그렇게 내 안에 들어와 사는 어머니입니다.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은 산을 떠난다 해서 부쳐진 이름이 속리산(俗離山)이지요.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연의 마음이요 하늘의 마음입니다. 그 안에서 어찌 빠름을 논할 것이며 무엇의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빨리 가기를 좋아합니다. 남보다 먼저 가고, 남보다 먼저 오르고, 남보다 먼저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옆에서 우는 벌레의 몸짓을 들을 수 있겠으며, 발 앞에서 피는 꽃의 고운 눈매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가다보면 머무는 곳이 있고 헤어지는 때가 있고 떠나는 날이 있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인데도 순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가려고만 합니다. 너무 다투며 살면, 너무 높아지려고만 하면 죽음 앞에서 울음이 커지는 것을 아직 모르고 그렇게 삽니다. 산다는 것은 노는 것이고, 가는 것입니다. 논다는 것은 더불어 산다는 것이고, 간다는 것은 순리에 맞게 산다는 것입니다. 애써 자신만을 위하여 오르고 높아지려 한다면 아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생의 시 한 편을 더 보겠습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떤 변화의 일도 두렵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아무 것도 갖고 살지 말라는 산의 말씀을 들으니, 사슴과 놀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끔은 비 내리고 가끔은 눈 내리는 일이 일생의 길인데, 피하려고만 하면 되겠습니까. 더위를 피하려거든 더위 속으로 가라던, 추위를 피하려거든 추위 속으로 기어들라던 동산(洞山)스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주어진 길에서 노닐 줄 알아야 합니다. 그대가 나였으니 애써 피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날마다 소박(素朴-아무런 꾸밈도 없으니)하니, 노니는 곳이 다 하늘나라입니다.
山中(산중)
獨對千峯盡日眠 (독대천봉진일면)
夕嵐和雨下簾前 (석람화우하렴전)
耳邊無語何曾洗 (이변무어하증세)
靑鹿來遊飮碧泉 (청록래유음벽천)
산에서
외로이 천 봉우리 보니 졸음 겨운 해는 지는데,
저문 산 계곡에 낀 안개가 비를 안고 내려오네.
세상의 삿된 말이 없으니 어찌 귀 씻을 것인가,
푸른 사슴과 노닐면서 맑은 샘물을 떠 마신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