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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시험을 통과하라
다니엘 3 : 1-18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사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사회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거나 육체적인 고통을 겪거나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나라에서 살고 있기에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홀로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을 가면 신앙생활 자체가 힘이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도 눈에 띠는 핍박은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은연중에 행해지는 압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1.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분명한 뜻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의 세 친구가 신앙 때문에 불 시험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왕은 두라 평지에 거의 30미터나 되는 자신의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거기에 절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상의 낙성식에 나라의 모든 고위관리들을 다 소집하여 성대하게 치르면서 자신의 신상에 절할 것을 선언합니다. 5절입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다니엘 3장에는 절하라는 말이 11번 이상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고 신으로 경배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왕은 그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인지 경고하는데요. 6절입니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 왕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이겠다고 하는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선언이 있은 다음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습니다. 7절입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니라.” 그렇게 왕의 신상 앞에 절한 사람들이 모두 다 마음으로부터 왕을 신으로 섬겨서 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명을 어겼다가 풀무 불에 던져질 것을 두려웠기에 겉으로만 절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 왕의 금신상에 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왕이 어떤 명령을 몰랐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이 바벨론 온 땅에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왕궁의 고위 관리였던 그들은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대로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라는 것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는 자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굳건한 믿음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죽음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당당함과 신앙의 결단을 보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은 감탄하기만 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는데요.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금신상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에게 신상은 바벨론에 세워졌던 것 같은 신상은 아닐 것입니다. 가끔 청주를 가다보면 주덕을 지나서 음성으로 가는 길에 미타사라는 절에 큰 불상이 하나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요. 그런 것이 우리들에게 신상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분명한 우상이기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그런 것에 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신주단지처럼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들의 우상은 좀 더 까다롭고 은밀하게 감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념일수도 있고 자녀일수도 있고 지식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비싼 보석, 명품 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우상은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절하거나 경배하지 않기에 교묘하게 숨겨 있어서 우상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으로 머리를 숙이고 절하지 않아도 우리의 내면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있다면, 혹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시대의 문화를 타고 우리들에게 다가오는데요.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서 소비의 신을 광고합니다. 쇼핑 중독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자꾸 홈쇼핑 같은 것에 눈길이 머물고 있다면 소비의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스타연예인들을 보면서 화려해지고 싶은 유혹이 들어서 외모에 신경을 쓰면서 얼굴성형, 몸매 가꾸기 등에 자꾸만 관심이 기울고 있다면 세상 신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서 성적인 욕망을 부추겨서 젊은이들을 정욕의 신에 빠져들게 하는데요. 젊은이들이 성적인 유혹을 받으면 육욕에 불이 붙어서 맑고 순수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치 불가마에 들어간 것처럼 긴장이 풀어지게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앞에 풀무 불이라고 하는 시험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 앞에도 모양을 달리한 갖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시험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떻게 해서 불 시험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악의를 가지고 그들을 참소하는 악한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이처럼 어디에나 믿는 사람들을 참소하는 사람들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참소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힘겨워 합니다. 그렇다면 왜 갈대아 사람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왔는데 갈대아인인 자신들보다 오히려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서 그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봤는데 그들의 직무나 일에서는 아마도 흠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다니엘의 세 친구가 일하면서 비리를 저지르거나 불법 뇌물이라도 받았다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갈대아 사람들이 그때까지 두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모함하려 했지만 그들의 순결한 삶으로 인해서 책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 6:3-6에서 갈대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그렇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들의 일에서 도무지 부정이나 흠을 발견할 수 없는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다니엘과 친구들을 시기하면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을 안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갈대아 사람들은 때는 이때다 하고 왕에게 찾아가서 다니엘을 참소하면서 왕의 심기를 살살 긁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갖은 아부를 하면서 왕을 높입니다. 누군가에게 과하게 아부하고 그를 높이는 것은 대부분 순수하지 않고 뭔가 그 사람에게 얻어내길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과도하게 칭찬할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갈대아의 간신들은 왕을 하늘 위로 띄워 놓고 그를 선동하면서 왕이 명하기를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극렬하게 타는 풀무 불에 던진다고 했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왕명을 우습게 여기는 일이며 왕을 기만하는 행위이니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하면서 왕의 노를 격동시킵니다. 간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느부갓네살은 분노하여 당장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붙잡아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왕은 세 친구가 뛰어난 인재이기에 그들을 살리려고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면서 한쪽으로는 그들을 회유하고 한쪽으로는 협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가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그것은 내가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주겠다. 이제라도 너희가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가 언제든지 악기소리가 울려 퍼질 때 내가 만든 신상에 절하면 좋겠다. 하지만 너희가 내말을 듣지 않고 내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질 신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왕은 세 친구들에게 극렬히 타는 풀무 불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 시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다가옵니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타락한 세상에서 살기에 다양한 시험을 당합니다. 믿지 않는 시댁 식구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믿지 않는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믿지 않는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믿는 자에게 시험이 다가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불론 연단하셔서 단단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7에서 믿는 자들이 당하는 시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하시고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시험이 눈앞에 있지만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이 있었기에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시험을 당당히 맞서게 되었는데 우리도 이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어떤 시험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단호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대가를 지불하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시험이 오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 영적으로 어리고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넘어지게 됩니다. 특별히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눈앞에 활활 타는 풀무 불을 지펴놓고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그때 담대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위기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고민하다가 살기 위해서 눈감고 그래 한번만 절하고 넘어가자 라는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타협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지소적인 타협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이 중요합니다.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이 처음 직장의 회식자리에 갔다고 합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은 교회에 다녀서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하자 상사들이 압력을 행사하며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회유하기를 이번은 입사해서 처음 회식이니 이번만 한 잔 마시면 다음부터는 절대 술 권하는 일이 없을테니 이번만 마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래 이번 만이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다라고 타협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번에는 지난 번에도 마셨는데 뭘 그렇게 빼라면서 지난 번 한번을 마신 것을 빌미로 계속 압박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처음 한 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타협하지 아니하고 절대로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왕이 우리를 풀무에 던져 넣으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실 것이요 만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왕의 신들을 섬기거나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믿음의 고백을 말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말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는 것까지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어서 받을 복은 잘 계산하는데 하나님을 믿기에 치러야 할 대가는 계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예수 믿으면 형통하고 잘된다고 하는 이야기에는 열광하는데 예수 믿으면 좁은 길을 가야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면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에는 시큰둥합니다. 복은 받고 싶은데 신앙 때문에 손해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앙은 풀과 나무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나중에 불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다 타버려서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데 그 대가가 경제적인 손해일수도 있고 사람들의 오해와 냉대일 수도 있습니다. 심하면 자신의 생명을 믿음 때문에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의 기독교역사를 보면 믿음 때문에 순교의 대가를 치룬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들은 자신의 순교의 피를 흘리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순교자들은 위대한 믿음의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당장 순교당하는 것은 그래도 낫습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 계속 고문당하고, 상처받고, 아픈 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대가를 기꺼이 치렀습니다. 필립 샤프라는 사람이 쓴 교회사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뜨겁게 달궈진 쇠사슬에 묶여 지글지글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사람들은 채찍에 맞아 뼈가 드러날 지경이 되었다. 순결한 처녀들이 포악한 검투사들이나 사악한 포주들에게 넘겨지기도 했다. 수백 명의 회심자들은 벌겋게 달은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로 탄광으로 직행했다. 어떤 사람들은 눈알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불이 천천히 타는 바람에 온몸을 뒤틀며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관절과 관절이 꺾어지고 비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소금과 초를 쏟아 부어 목구멍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종일 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고문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진실된 신앙고백으로 이런 고통을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견뎠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이런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복음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향이요. 소아시아 7교회가 있었던 터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터키는 1000년이 넘게 기독교를 믿었으나 현재 터키의 그리스도인은 0.3%에 불과하고 이스람이 98%를 차지하는 이슬람 국가인데요. 3년전인 2007년 4월 18일에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500Km쯤 떨어진 지방도시 말라티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46세의 독일 선교사 킬만 게스케, 36세의 터기 현지의 목사 fp자키 아이든, 그리고 32세의 평신도 우루 육셀 세 사람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슬람 과격파 청년 다섯 명이 총과 칼과 밧줄을 들고 들이닥쳤습니다. 이 청년들은 세 시간이 넘도록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의자에 밧줄로 묶고는 끔찍하게 고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알라를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하라고 하면서 세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협박하고 고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고문과 협박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게 되었는데요. 칼만 선교사는 156번이나 칼에 찔렸습니다. 레자키 목사는 99번이나 찔렸습니다. 우루 형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찔렸습니다. 청년들은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조각조각 잘랐습니다. 손가락도 자르고, 코와 입과 항문과 생식기도 도려냈습니다. 가장 심한 것은 다른 형제가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한 것입니다. 세 명의 형제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양쪽 귀에 이르기까지 목이 잘려서 순교했습니다. 청년들은 이 모든 광경을 휴대폰으로 녹화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이 청년들이 경찰에 붙잡혔는데 나이는 열아홉에서 스무 살 남짓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자 그들은 알라신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레자키 목사의 장례식은 그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던 터기의 제3도시 이즈미르에서 열렸는데요. 그 장례식에 터키에 있는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고 참석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언제 어디서나 과격파의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레자키 목사의 장례식에는 이슬람 과격파들이 와서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녹화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 다음엔 네 차례다라는 협박문을 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터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위험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도 죽여라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냈고 엄숙하게 레자키 목사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장례식에서 레자키 목사의 사모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참 뜻이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나의 삶에 그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쓴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남편의 순교의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모님은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을 용서합니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주소서.”
킬만 선교사, 레자키목사, 우르형제가 순교하고 난 다음에 터키의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다고 신앙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이면 죽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것이며 믿음을 지키며 살겠다고 영적인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많은 선교사들과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은 유서를 써놓고 믿음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터키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믿음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들의 고통에 비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은 대다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조금 더 벌지 못하는 것, 자존심이 약간 상하는 것,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 잘난 척하고 활개치고 다니지 못하는 것, 친구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 정도 때문에 고민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생명까지 다 거두어 가신다고 할지라도 복음 때문에 그 어떤 손해와 어려움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감당하겠다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 원하십니까? 그 말이 진정이시라면 제가 좀 오늘 강하게 이야기하더라도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터키의 형제들의 순교영상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쓰라리고 아픈데 오늘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경제적인 손해를 보고라도 하나님만 섬기기로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손님 때문에 라는 핑계를 대지 말고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십시오. 손님 몇 명을 받는 것이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것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헌신이 아닙니다. 또 애경사가 있어서 다녀와야 한다는 핑계도 이젠 그만두어야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자신이 맡은 봉사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가족들의 눈치가 무섭고 자기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그 역시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헌신이 아닙니다. 애경사를 챙겨야 하면 미리 갔다 오면 됩니다. 그게 안되면 주일 1부 예배라도 드리고 가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하면 다 되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또 자녀들을 돌봐주러 간다는 핑계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장성한 대학생 자녀들을 챙겨주기 위해서 주일을 빼먹고 가는 것은 그 자녀가 우상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신앙교육이 아닐뿐더러 참다운 자식 사랑도 아닙니다. 자녀에게 나는 하나님보다 네게 더 중요하다는 산교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헌신이 아닙니다. 또 집안 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라는 핑계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이 없다 바쁘다 일이 있다는 이런 저런 핑계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데요. 그런 이유를 들어보면 거의 다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바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시간은 다 냅니다. 아무리 바쁜 부모도 자식이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해보십시오. 바쁘다고 안갈 사람이 있습니까? 만사를 제처 두고 갈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는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합니다. 그런데 정작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만나는 데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헌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의 고백을 흉내만 내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고 기도하거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찬양을 아무리 많이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우리가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시험을 만났듯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시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키고 신실하게 살아가면 악한 세상이 그것을 이상하게 보고 참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 정직한 자들을 욕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을 비판하듯 세상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그 참소와 공격 그리고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분명한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결단이 확고해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확고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면 결심만 하면 다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고 고통 받는 것을 싫어해서 믿음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라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하고, 믿음 때문에 욕을 먹고, 믿음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고, 믿음 때문에 자존심도 상하며, 믿음 때문에 생명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성도가 순교의 피를 흘리며 대가를 치렀던 것처럼 오늘날 터키에서 복음 때문에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앙은 무늬만 있을 뿐이지 참 생명이 없습니다. 참 생명은 대가를 지불할 때 그 안에서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섬기려는 굳은 결단을 가지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어떤 대가라도 치루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혹 아직 이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오, 하나님 제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비록 지금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만 위한 헌신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담아서 먼저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면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 순교자 삶이라는 찬양을 함께 찬양하면서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과 지금도 믿음 때문에 핍박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지구촌의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길 원합니다.
-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은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은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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