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봉과 부봉이 조화롭게 솟아오른 산수경석입니다. 봉우리 사이엔 물 고이는 오목한 호수도 있습니다.그걸 기준한다면 억지나마 물고임석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남한강 절단석 청석에 베이비 오일을 발랐더니 이렇게 검어졌습니다. 새로운 패턴으로 깎은 좌대엔 투명 수성스테인을 10여차레 발랐습니다. 덕분엔 이번 좌대는 그런대로 보아줄만 합니다.
나무를 깎으며 연장을 쓰다 보면 자주 다치곤 합니다. 좌대 하나를 만드는데도 손에 상처가 끊이질 않습니다. 간단히 긁히는 경우도 있지만, 드릴 날에 살이 파여 나가거나 손톱이 부러지는 일도 허다합니다. 순간의 통증은 참을 만하지만, 손에 물을 묻히지 않을 수 없어 상처가 자주 덧나고 결국 항생제를 먹는 일은 참 불편합니다. 연장에 다친 상처는 일반 상처보다 몸이 더 버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나아지지 않고요.
안전장갑을 끼자고 다짐하지만, "잠깐 하는데 뭐 어때?" 하는 방심이 문제입니다. 손은 수기 시술을 하는 저에겐 무엇보다 소중한데, 이렇게 부주의한 순간들이 반복됩니다. 수석 카페에 가면, 많은 사람이 다친 경험 끝에 스스로 좌대 제작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장갑, 토시, 앞치마를 제대로 갖추고 작업하지만, 환자가 오면 이 모든 걸 벗고 손을 씻은 뒤 진료의자에 앉아야 하니 번거롭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상처 없이 지낼 수 없습니다. 불운과 상대적 빈곤, 비교와 열등감 속에서 관계로 상처받고, 탐욕, 화냄,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상처를 자초합니다. 풍요를 추구하기보다 결핍을 채우려 애쓸 때, 잃어버린 것을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며 아파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상처의 긍정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 속에 빠져 있을 땐 이런 긍정적 해석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죠. 상처를 곱씹다가 되레 덧나 가슴앓이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무엇으로 그리 아파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상처는 흘러간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내 삶의 이력서이고, 내가 지나온 길의 이정표입니다. 상처가 훈장은 아니지만, 격렬한 전투를 치른 명예로운 퇴역서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지금도 소리 없는 전쟁 상태에 있다지만, 이렇게 무사히 건너온 현재는 그 자체로 도강 작전의 성공입니다.
상처는 어떤 방향으로 우회하라는 신호이자, 무엇을 배워야 할 때라는 메시지입니다. 삶은 끊임없이 만회하고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다행히 큰 상처를 피하거나 극복하며 저는 이 길에 다다랐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안전지대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이곳이 최선의 선택지라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에게 일어날 사건들을 끌어당깁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좋은 일을, 부정적인 생각은 나쁜 일을 부르죠. 그렇기에 힘든 시간조차도, 결국은 내가 부정적인 판단과 느낌으로 만든 결과라는 걸 깨닫습니다.
한때 아들이 진로에서 의외의 선택을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로서 걱정되어 다그쳤지만,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하면, 옳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으니 그것으로 내 옳음을 판단할 거야.”
그 논리엔 더 할 말이 없어, “건강 조심해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때로는 자식을 믿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상처는, 감당할 수 있을 때 되돌아보면 선물이었습니다. 수많은 난관이 방호복이 되어 나를 보호하고, 사랑받고 인정받을 기회로 이끌어주었죠. 지금 내 손의 상처도 나에게 닥칠 어려움을 미리 대신 겪는 것이라고 믿어봅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길을 열어줍니다. 나는 상처가 열어주는 새로운 시간을 걸어갑니다. 더 이상 고통 없는 시선으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봅니다.
상처 하나로 새 삶을 통째로 바꾸는 길, 그 길을 나는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