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6.日. 흐리고 쌀쌀
03월26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두세 차례 언뜻 눈을 떠보았던 것 같습니다. 방바닥에 줄지어 방석을 깔고 누워있는 채 올려다 보이는 감감한 천장과 둠둠한 방안에 푸르스름한 빛이 어디선가 튕겨 나와 푸른 발광체처럼 방안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소우주를 연결하는 항로航路 같기도 하고 그 항로航路를 타고 날아다니는 푸른 생명체 같기도 한 신비로운 빛의 진동振動과 파동波動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생기 있게 보였습니다. 졸린 눈꺼풀을 밀어 올려 두어 번 깜빡거리다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 새벽 3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기본적인 수면이 부족한데다가 1차 간식으로 먹었던 피자빵과 2차 간식으로 먹은 찐빵·만두에다 또 저녁공양으로 국수를 한 그릇 다 먹어치워 포만감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불편한 배의 압박에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의식의 절반은 남아있어서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번잡하고 어수선한 생각이나 느낌들이 내 주변에 꽉차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잠깐 동안 반의식半意識 상태에서 이게 꿈인가 생각을 했다가 금세 내가 공양간 차실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발광체의 정체가 미닫이 문 구석에 설치된 인터넷 모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직 미닫이 창문을 통해 밖에서 차실 안으로 옅은 기운의 미명微明이 흐릿하게 새어들고 있었습니다. 지금이 저녁7시 가량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감은 눈 안쪽으로 초록과 파랑의 중간색인 청람靑藍 같기도 하고 코발트색 같기도 한 빛의 출렁거림이 한동안 돌아다녔습니다. 어느새 잠에 들었다가 두 번째로 눈을 흘낏 떠보았을 때는 차실 안이 완전히 깜깜해져있어서 푸르스름한 빛의 율동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점점이 뿌려지는 빛의 파동 속에 푸른빛의 요정들이 날개를 칠 때마다 뽀얀 빛의 알갱이들이 꿈틀대면서 허공에 뿌려졌습니다. 빛나는 흐름은 수시로 입체적인 궤적을 따라 곡선이나 직선을 만들어가면서 번뜩이는 빛의 가루들을 유성의 긴 꼬리처럼 이어갔습니다. 대략 3,40분가량 시간이 더 흘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몸은 조금만 더 누워있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잠에 들었다가 어느 순간 눈을 스르르 떠보았습니다. 차실 안의 나를 감싸고 있는 깜깜한 공기가 너무 은밀하고 조용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만조금만 하다가 지나치게 많이 누워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실 안에 떠돌아다니는 푸른빛을 잠시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켰습니다. 그러자 차실 안의 풍경들이 순간 돌아와 내 눈앞에 어둠이전의 모습으로 정렬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둠과 빛은 부재不在와 현재現在로 이해해야할까 잠재潛在와 현재顯在로 파악을 해야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차실 안에 불이 켜지자 현란하던 푸르스름한 빛의 행렬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를 감싼 여러 개의 세상 중에 내가 시도하는 조작을 따라 원하는 첫 번째로 필요한 세상은 나타나고 두 번째, 세 번째 세상은 어디론가 숨든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오감 중 동시에 두 감각을 느끼는 것을 공감각共感覺이라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공감각共感覺이란 하나의 감각이 동시에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일, 또는 그런 감각이라는 뜻입니다. 시詩에서도 이런 표현이 종종 사용되는데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가 바로 하나의 예例가 됩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채 감싸고 있는 세상 중에서도 내가 동시에 두 개의 세상에 나타나거나 느끼거나 연관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행이론平行理論과 윤회輪廻는 과학적 이론과 종교적 논리아래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어둠과 빛은 언제나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생각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차실 여닫이문을 열었더니 공양간도 불이 꺼져있어서 어두웠습니다. 불이 꺼진 공양간은 구체적인 모습이 파악되지 않아 한없이 크게 보였습니다. 눈앞의 어둠 다음에도 두꺼운 어둠이 연이어 대기하고 있어서 어둠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공양간 한쪽 벽에 CCTV 모니터가 걸려있었습니다. 가로로 세 개, 세로로 네 개해서 모두 열두 개의 화면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낮이라면 다 컬러로 나와야할 화면이 법당안만 제외하고 흑백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색을 인식하려면 빛이 사물을 비칠 때 다른 색은 흡수해버리고 한 가지 색깔만 반사해버립니다. 그렇게 반사해버린 색깔을 우리 시신경이 인식을 함으로써 바나나는 노랗다든가 수박 속은 빨갛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나나 껍질은 다른 색깔을 흡수해버리고 노란색만 튕겨내고 있고, 수박 속은 역시 다른 색깔은 흡수하고 빨간색만 반사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짙은 어둠속에서 몇 개의 하얀 처마등에 의지하는 CCTV 화면은 그래서 빛을 모조리 흡수하기 때문에 튕겨 나오는 색깔이 없어서 흑백으로 보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밝은 낮에 보는 CCTV 화면과는 뭔가가 달라 화면 안에서 비치는 흑백 공간들이 울퉁불퉁하거나 휘게 보였습니다. 움직이는 하얀 점들은 날아다니는 나방이나 날파리 같았습니다. 공양간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공양간 처마와 돌계단에 켜있는 등만 아니라면 세상이 온통 깜깜할 것 같은 하늘이었습니다. 음력29일 밤하늘은 삭朔이 되어 달이 없는데다가 깊고 두텁게 온통 자욱한 구름천지인지 어둠속에 별 하나 떠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몇 군데서 흘러오는 빛을 무시하고 어둠만을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마당 가운데서 빛을 등지고 선 채 서쪽으로 열려있는 어둠의 공간만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미미한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어둠이 내 마음의 크기만큼 허공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거대한 원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원기둥의 전체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릴 때 생겨나는 수많은 미세한 작은 알갱이들의 발광發光이 혹시 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졌으나 어둠이 먼저인지 빛이 먼저인지는 과학적으로 타당한 설명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둠이 없고 빛이 먼저라면 그것이 빛이라는 걸 어떻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태초의 혼돈이 어둠에서 시작을 했다면 그 소용돌이 속에서 뛰쳐나온 빛이 생겨났을 때 비로소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흥미로운 발상도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이란 근본이고 배경이며, 빛이란 나타난 상황이고 설치된 현상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어둠과 빛이라고 해야 혼돈과 질서의 체계에 맞는 말이 될 것도 같습니다. 깜깜한 허공중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어둠은 한 뭉텅이인데 반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낱낱의 알갱이로 보이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한 통의 원기둥이라면 빛은 낱낱으로 고정화固定化된 정육면체의 알갱이 같다는 생각을 떠올려보았습니다.
탑을 돌아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고 성우당 2층 대중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대중방 디딤돌에는 열 켤레도 넘을 만큼 신발이 놓여있었습니다. 여닫이문 창호지를 통해 밝은 빛이 스며나고 안에서 이야기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 아직 등 만들기 울력이 진행되고 있는 듯했습니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 올라서서 대중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T자 형으로 상 네 개를 이어 붙여놓고 도반님들이 이편과 저편으로 둘러앉아 시원스런 작업등 아래 펼쳐진 빛의 세상에서 팔모등에 하얀 속지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김화백님과 태평거사님이 새로 설치해놓은 LED등의 화려한 밝기는 수많은 색깔들을 불러 모아 밖의 어둠속에서 대중방으로 자리를 옮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잘 정돈된 일개미들의 협동 작업처럼 보살님들의 일사불난一絲不亂한 손놀림에서 하얀 등이 하나둘 흐르는 냇물처럼 완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위와 대중방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팔모등의 하양은 다양하게 뿜어내는 색깔들을 더욱 완벽한 색깔로 완성시키고 있었습니다. 묘길수보살님의 하늘색 스카프와 서울보살님의 주황색 티와 락화보살님의 분홍색 점퍼와 공양주보살님의 연두색 티와 묘광명보살님의 청록색 상의가 모였다 흩어지는 빛의 세례 가운데서 회오리의 중심처럼 색깔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묘광명보살님의 상의 색깔은 쉽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코발트색이라기에는 부드럽고 감청이라기에는 한 호흡 차분해지는 초록과 파랑의 중간색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등 작업이 한창인 상 주변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혼자만 느껴보기에는 아까운 광경이었으나 어쩌다 무성의하고 나태한 사람의 시선에 걸려든 빛과 색깔의 향연饗宴이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을 보려는 마음이 어둠과 빛을 통해 한순간이나마 보여주었던 신나고 화려한 세상이었습니다. 도반님들은 하얀 팔모등을 통해 울력의 충만감充滿感을, 나는 어둠과 빛을 통해 색깔과 점점이 눈맞춰보는 충일감充溢感으로 해서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