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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첸치
-황세연(추리소설가)
4대강 사업 때 삽질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소문난 왕졸부 씨가 집에 걸어둘 폼나는 고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 허경매 씨를 찾아왔다. 허경매 씨는 유명한 고미술품 경매 대리인이다.
허경매 씨가 왕졸부 씨를 자신의 지하 화랑으로 안내했다. 고풍스런 지하 화랑에는 허경매 씨가 위탁판매 목적으로 맡아둔 수많은 고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와, 이 많은 작품들이 모두 진품인가요?
왕졸부 씨가 화랑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 아, 당연히 모두 진품이죠. 여기 진품이 아닌 안품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헤헤, 당연히 그렇겠죠. 사실, 저는 미술품 전문가가 아니라서 미술품에 대해서는 완전 까막눈입니다. 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맞죠?”
왕졸부 씨가 신윤복의 미인도 앞에서 발길을 멈추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춘향이나 계월향 같은 기생 초상화는 있어도 사대부가 여인의 모습은 채용신이 그린 최홍련의 초상화와 신윤복의 이 미인도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뭐죠?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그림은 아닌 것 같은데?”
왕졸부 씨가 동양화와는 확연히 다른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물었다.
“아, 그거요. 어느 대기업 회장 사모님이 팔아달라고 맡긴 것인데…. 그 유명한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1830)’의 작가 스탕달이 ‘스탕달 증후군’을 경험하고 나서 직접 그린 그림 ‘환각의 첸치’입니다.”
“스탕달 증후군요?”
“고미술품을 사러 오신 분이 스탕달 증후군을 모르세요?”
“제가 아까 미술에는 완전 문외한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참, 그러셨죠. 스탕달 증후군과 이 작품이 서로 연관이 있으니, 같이 설명을 드리죠.”
허경매 씨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벽에 걸려 있는 ‘환각의 첸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은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럼증, 환각 등을 경험하는 현상을 말한다.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한다. 이때 르네상스 시대에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감상할 기회가 생기는데 그림을 감상하고 난 직후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하게 된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의 실제 모델인 베아트리체 첸치는 자신을 강간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다른 가족들과 함께 공모하여 살해한 죄로 사형수가 된 미소녀인데, 귀도 레니는 베아트리체가 사형 당하기 직전에 그녀를 모델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완성했다.
스탕달은 이후 그의 저서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기오까지의 여행’에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중략)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라고 적었는데 이 때문에 명화를 보고 이와 같은 증상을 느끼는 현상에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진단명이 붙게 되었다.
스탕달은 자신의 저서에 자신이 겪은 경험을 글뿐만이 아니라 삽화로도 그려 넣어 남기려고 했었다. 스탕달은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하며 환각으로 봤던 반라의 첸치를 직접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책에 삽입하지는 않았다.
스탕달이 환각을 보고 나서 그린 그림 ‘환각의 첸치’는 이후 여러 명사의 손을 거치게 된다.
당시 베네치아에 있던 카페 ‘플로리안’은 스탕달뿐만 아니라 루소, 괴테 같은 유명인사들도 단골손님이었는데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괴테와 스탕달이 도박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스탕달은 판돈을 모두 잃고 만다. 스탕달은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 등의 소지품을 마저 걸어보지만 이마저 읽게 되자 마지막으로, 가방 속에 들어있던 아끼는 그림 ‘환각의 첸치’를 꺼내놓게 된다.
스탕달이 판돈 대신 내놓은 환각의 첸치를 본 괴테는 ‘심장이 마구 뛰고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고 곧바로 쓰러질 것 같다’며 식은땀까지 흘린다. 스탕달 신드롬의 환각을 경험한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스탕달 환각 신드롬’을 경험한 것이다.
괴테가 스탕달 환각 신드롬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이용해 스탕달은 잃은 판돈의 대부분을 회수하지만 괴테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상황이 역전된다. 도박 운이 없던 스탕달은 결국 아끼고 아끼던 환각의 첸치를 도박마왕 괴테에게 잃고 만다.
괴테는 도박판에서 딴 환각의 첸치를 당시 사랑하던 연인인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선물로 준다. 하지만 베티나는 자신을 사랑하던 또 다른 연인 베토벤에게 선물로 주고 만다. 당시 베토벤은 청각을 잃고 실의에 잠겨 작곡을 중단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베티나가 안타까워하며 ‘당신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당신보다 더 슬픈 삶을 살다간 여자도 있으니 이 그림을 보며 용기를 내라’는 의미에서 환각의 첸치를 베토벤의 화장실에 걸어준 것이었다.
베티나의 판단은 옳았다. 며칠 뒤 베토벤은 화장실에 앉아 똥을 누다 ‘환각을 첸치’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을 작곡한다.
1927년 베토벤이 젊은 나이로 사망한 뒤 이 그림은 독일을 여행 중이던 이탈리아인 ‘주세페 가리발디’의 손에 들어간다. 베토벤이 사망한 뒤 유산을 정리하던 하인이 화장실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던 고물장수의 엿 몇 가락과 맞바꾼 것이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던 가리발디는 어느 고물상에 걸려 있던 이 그림을 보자마자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스탕달 환각 신드롬’에 빠져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를 통일시켜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 후 가리발디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 이 그림을 사들인 뒤 망명지인 프랑스로 가져가 자취방 벽에 걸어놓고 쳐다보며 조국의 통일을 꿈꾸게 된다.
1878년에 이탈리아 상선 비안카 페르티카(Bianca Pertica) 호가 제주도 근해에서 난파되어 생존자(산토리오 선원)가 구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제노바의 공작인 토마소 디 사보이아(Tommaso di Savoia)가 군함 베토르 피자니(Vettor Pisani) 호의 함장이 되어 1879년 3월 베네치아 항구를 출항하여 8월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880년 8월에 부산항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그는 과거 제주도 근해에서 조난당한 비안카 페르티카 호의 난파 구조에 감사하다는 답례를 하기 위해 일본 영사를 통해 동래부윤(東萊府尹)에게 서장(書狀)을 보내며 감사의 선물로 가문의 보물인 환각의 첸치를 같이 보낸다. 당시 제주도에서 구조된 사람이 그 공작의 장인이었는데,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한 공작이, 은인의 나라인 조선에 가장 아끼는 가보를 선물하게 된 것이었다.
환각의 첸치가 토마소 디 사보이아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주세페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벌일 때 목숨을 구해주고 선물로 받아 가보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환각의 첸치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베토벤 교향곡 9번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월드컵에서 통일된 이탈리아의 멋진 축구경기도 구경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환각의 첸치’는 유명 인사들의 손을 거치며 유럽의 문화와 정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뒤 조선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당시 조선은 반강제로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부 문물이라면 모두 백안시하던 때라 동래부윤은 상부에 ‘환각의 첸치’를 받았다는 보고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관가의 창고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각의 첸치는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죠. 그러다 10년쯤 전에 부산 모 사립대학 박물관 창고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 사립대학은 재정위기를 겪고 있던 때라 이 그림을 헐값에 경매에 내놓았고, 경매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는, 모 대기업 회장의 사모님이 사들여 보관해 오다 얼마 전에 팔겠다고 내놓은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이 그림이 그런 어마무시한 사연이 있는 명화였군요. 아, 맞다! 생각났어요. 몇 년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런 위대한 그림이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며 소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이게 바로 그 그림이었군요. 그럼 가격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얼마나…?”
“20억입니다.”
“20억? 생각보다는 약하네요?”
“그렇죠? 임자만 잘 만나면 200억은 족히 받을 수 있는 그림인데 급히 내놓다보니…”
“이 그림 제가 당장 사겠습니다. 그런데…, 좀 깎아주시죠? 집값보다 비싼 이 그림을 거실에 걸어 놓으려면 거액을 들여 집도 새로 개조해야하고, 도난방지 장치도 해야 하고, 거액의 보험도 들어야 하고… 소장하려면 부수적인 돈이 워낙 많이 들어서…”
“이런 20억짜리 미술품을 거실에 걸어둔다고요? 호호호, 역시 왕졸부 씨는 배짱도 좋으셔. 좋아요. 1억 깎아 드리죠. 방금 말 한마디로 1억 버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환각의 첸치’는 19억 원에 왕졸부 씨에게 팔렸다.
1주일 뒤.
두 명의 도둑이 거실에 명화 ‘환각의 첸치’가 걸려 있다고 소문난 왕졸부 씨의 집 담장을 넘었다. 그들은 고가의 미술품을 훔치는 전문절도범 양상군과 복사기였다.
경보기를 해제하고 무사히 집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재빨리 액자 속에 들어있던 환각의 첸치를 빼내 둘둘 말아가지고 왕졸부 씨네 집을 빠져나왔다.
“환각의 첸치가 팔리면 반은 확실히 내꺼다.”
복사기가 훔친 환각의 첸치를 살피며 흐뭇한 표정으로 양상군에게 말했다.
“어디 그 뿐이겠냐…”
“그 뿐이 아니면?”
“우리는 앞으로 가짜 환각의 첸치를 몇 개 더 그릴 거야. 미술품 위조는 이 바닥에서 복사기 네가 최고니, 너는 내일부터 진품과 똑같은 가짜를 몇 개 더 만들어야해.”
“위조? 진짜가 이렇게 있는데 귀찮게 위조는 왜 해?”
복사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이런 바보! 환각의 첸치를 이렇게 우리가 훔쳤으니 내일 아침부터 신문과 방송에서 환각의 첸치를 도난당했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댈 거 아냐. 그때 우리가 위조한 환각의 첸치를 들고 돈 좀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진짜라고 속여 팔아먹는 거지. 미술품 좋아하는 일본과 중국 사람들에게도 몇 점 팔고… 수출을 해서 딸라를 벌어 애국하는 거지.”
“아하! 그러니까, 가짜를 여러 개 팔아 진짜 하나를 팔았을 때보다 몇 배 많은 돈을 벌자 이거구나. 역시 너는 이 업계 최고의 지성이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판을 벌이면 위험하지 않을까?”
“간이 그렇게 작으니 네가 아직도 좀도둑 소릴 못 면하는 거야. 이번에는 우리가 교도소에 가고 싶다고 해도 갈 수가 없어요. 환각의 첸치 도둑맞았다는 건 천하가 아는 사실이 될 텐데, 우리에게 장물을 산 어떤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문가에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을 받으려 하겠냐? 또 가짜라는 것이 탈로 났다고 해도 어떤 미친놈이 경찰에 신고를 하겠냐고? 작물을 산 것이 경찰에 알려지면 자기도 쇠고랑 찰 게 뻔한데…”
그날, 양상군은 환각의 첸치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하룻밤 보관한 뒤 다음날 점심 무렵 가짜를 만들어 내라며 복사기에게 건넸다.
그런데 양상군이 복사기에게 그림을 넘기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예, 양상군입니다.”
“나다, 이 양상군자야!”
전화를 건 사람은 복사기였다. 목소리로 보아 상당히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복사기, 왜 그래?”
“이제 도둑질로는 부족해 나에게까지 사기를 치냐?”
“무슨 말이야?”
“네가 아침에 건네준 환각의 첸치, 가짜잖아 자식아! 진짜는 어디로 빼돌렸어? 그걸 빼돌리려고 그 그림을 어젯밤에 바로 나에게 안 건네고 오늘 오후 늦게서야 가져와 나에게 건넨 거잖아?”
“뭐야, 가짜? 가짜라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혹시, 너야말로 환각의 첸치를 혼자 차지하려고 수작부리는 거 아냐?”
“이 도둑놈! 끝까지 오리발이네.”
“이 자식아, 허튼 수작 그만두고 당장 환각의 첸치 진품, 내게 도로 가져와. 안 그러면 경찰에 확 자수해 버린다. 내가 자수하면 너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래, 자수하려면 해봐 이 도둑놈아! 도둑질한 것을 또 도둑질하는 도둑놈은 도둑놈도 아니다, 이 도둑놈아!”
그렇게 말싸움을 하던 두 도둑은 몇 시간 뒤 경찰에 체포되었다.
환각의 첸치를 훔쳐간 도둑들이 잡히자 경찰은 도둑들에게 회수한 환각의 첸치를 원 소장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왕졸부 씨를 불렀다.
“내 환각의 첸치, 환각의 첸치 어디 있습니까? 무사하겠죠?”
왕졸부 씨가 경찰서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왕졸부 씨에게 그림을 판 허경매 씨도 도난당한 그림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왔다.
최 형사가 도둑들에게서 회수한 환각의 첸치를 가져와 왕졸부 씨에게 건넸다.
“어디 보자!”
왕졸부 씨는 즉석에서 작품을 펼쳐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엔 별 이상이 없군요. 어떤 손상도 없고….”
“도둑놈들도 이게 얼마나 귀중한 작품인지 아는지라 보관에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사인하고 집으로 가져가시죠.”
“어? 그런데 이거 우리 거실에서 도단당한 환각의 첸치, 진품이 맞습니까?”
왕졸부 씨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
“이건 가짭니다, 가짜! 진짜처럼 정밀하게 위조한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뭐예요? 그럴 리가…?”
최 형사가 인터넷을 검색해 컴퓨터 모니터에 환각의 첸치 사진을 띄웠다. 진품 환각의 첸치가 부산 모 대학 박물관 창고에서 발견되었을 때 찍은 해상도 좋은 사진이었다. 사람들은 모니터 속의 환각의 첸치와 도둑들에게서 회수한 환각의 첸치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꼼꼼히 비교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환각의 첸치를 몇 달 동안 소장하고 있었던 허경매 씨였다.
“저는 이 그림이 가짜일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사진과 그림이 완전 똑같잖아요. 저는 이 작품이 왕졸부 씨에게 팔리기 전까지 몇 달 동안 소장하고 있는 동안 이 그림을 수천 번도 더 들여다봤는데, 그때의 그림과 이 그림이 무엇이 다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군요.”
최 형사였다.
“왕졸부 씨, 혹시 이 작품이 벽에 걸려 있던 것과 어디 다른 데라도 있습니까?”
“생긴 거야 완전히 똑같지만…, 느낌, 느낌이 꽤 다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문가들에게 한번 감정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만약 이 그림이 진짜라면 감정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왕졸부 씨의 말대로 감정을 받아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림을 훔친 도둑 중에 한 명이 솜씨 좋은 고서화 전문 위조범 양상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쯤 뒤 몇 명의 감정위원들이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경찰서로 모여들었다. 어젯밤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온종일 각종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세간의 관심이 쏠려있는 명화였기에 연락을 받은 감정위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온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정밀감정결과는 의외였다. 경찰이 도둑들을 잡고 회수한 ‘환각의 첸치’는 진짜와 너무나 똑같이 복제한 안품이었다.
최 형사는 환각의 첸치 진품을 찾아내기 위해, 유치장에 갇혀있던 양상군과 복사기를 데리고 나와 취조를 시작했다.
“양상군, 복사기! 너희들이 위조한 환각의 첸치, 감정전문가들도 맨눈으로는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특급 복제품이더군. 이 정도의 위조품을 만들 수 있는 솜씨 좋은 사람은 국내에 몇 명 안 된다는 거 너희들이 더 잘 알지? 복사기 네가 한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이겠어? 진품은 어디 있지? 빨리 바른대로 말 못해!”
“전 절대 범인이 아닙니다. 저 양상군자, 저 자식이 범인입니다. 저 놈이 어젯밤 보관했다 오늘 오후에 가져온 환각의 첸치가 너무나 진짜 같은 위조품이어서 저도 처음에는 진짜인줄 알았는데, 위조 작업을 하려고 여러 각도에서 밝은 빛을 비추다보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짜였던 거죠. 고서화 위조를 밥 먹듯 하다 보니 저도 미술품을 보는 눈이 감정전문가 뺨칩니다만 너무 잘 만들어진 가짜여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던 거죠. 저 양상군이 밤사이 진품을 빼돌리고 위조품을 내게 건네준 거라고요. 이 환각의 첸치 안품은 어젯밤부터 제 손에 들어오기 전인 오늘 낮까지, 저놈이 실력 좋은 누군가를 시켜 진품을 보고 진품과 똑같이 베끼게 했을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환각의 첸치를 훔친 그대로 잘 모시고 있었고, 그림을 복사기에게 늦게 건넨 이유는, 밤늦게까지 도둑질하랴 훔친 그림 지키랴, 밤에 한숨도 못 잔 탓에 늦잠을 잘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림을 오전이 아닌 오후에 복사기에게 넘기게 된 것입니다. 억울합니다.”
그때, 짜장면 배달을 왔다 호기심이 생겨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국집 여자 배달부가 끼어들었다. 환각의 첸치 모델인 베아트리체 첸치와 나이도 비슷할 것 같고 외모도 닮은 듯한 미소녀였다.
“혹시, 이 도둑 분들이 어젯밤에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을 훔친 건 아닐까요?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하룻밤 만에 이렇게 훌륭한 가짜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순간 양상군이 중국집 배달부를 보며 피씩 웃었다.
“모르시는 말씀. 저 복사기는 이런 위조품을 하룻밤이 아니라 반나절이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정말이야 복사기?”
최 형사가 복사기에게 물었다.
“뭐…,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림을 하룻밤 만에 위조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교도소에 가 있는 놈들까지 합치면 국내에만도 열 명 이상 될걸요. 또, 우리 같은 위조 전문가들이 아닌 모사품 전문가들도 있고….”
그러자 중국집 배달부가 다시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부터 가짜, 아니, 모조품이 거실 벽에 걸려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진품 대신 똑같이 복제한 모조품을 전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저는 집값보다도 비싼 명화를 거실 벽에 떡하니 걸어뒀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듣고 보니 아가씨 말도 일리가 있네.”
최 형사의 말에, 거실에 환각의 첸치를 걸어놨다 도둑맞은 왕졸부 씨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모조품을 도둑맞은 거라면 신고나 했겠습니까? 모조품이 몇 푼이나 한다고…”
“왕졸부 씨!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환각의 첸치에 거액의 보험을 들어두셨죠?”
“예. 그렇긴 합니다만…”
“환각의 첸치를 도둑맞았다고 신고를 하셨으니, 진품을 찾지 못하면 거액의 보험금을 타게 되겠군요?”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서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 거실에 걸려있던 것이 모조품이거나 위조품이었다면 내가 아니라 나에게 이 그림을 판 허경매 씨가 범인일 겁니다. 저는 그림을 사다 그대로 벽에 걸어놓은 죄밖에 없습니다. 환각의 첸치를 살 때 전문가를 불러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왕졸부 씨의 말에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 있던 허경매 씨가 화를 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왕졸부 씨! 저야말로 그림을 팔 때 전문가를 불러 진품인지 위조품인지 확인을 시키지 않은 것이 원통하군요. 저처럼 신용 하나로 이 일을 수십 년 동안 해온 사람이 고객이 팔아달라고 맡긴 진품은 빼돌리고 위조품을 팔아 넘겼다는 거예요? 허참 기가 막혀….”
경찰서에 모여 있는 4명의 용의자들은 모두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을 하고 있었다.
“양상군, 복사기, 왕졸부, 허경매 씨! 범인은 분명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누가 진품을 빼돌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죠? 자수하세요, 지금 자수하면 선처하겠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환각의 첸치를 닮은 중국집 배달부가 다시 끼어들었다.
“아하, 저는 누가 범인인지 알겠어요! 분명 이 분들 중에 한 분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자장면 그릇을 찾으러 와서 누가 범인인지 말씀드릴 테니, 범인께서는 그 전에 자수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사람 중에 누가 범인일까?
답과 설명:
환각의 첸치 진품을 빼돌린 범인은 왕졸부 씨다. 왕졸부 씨가 사기를 칠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짜 환각의 첸치는 전문가들까지도 가짜라는 것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 만든 위조품인데, 자신은 미술품에 완전 문외한이라는 말을 했고 미술품에 대한 무식함을 드러내는 행동을 해온 왕졸부 씨가 경찰이 도둑들에게서 회수한 환각의 첸치를 보자마자 가짜라고 단정하여 말하고 감정을 받아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수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이 도둑들에게서 회수한 환각의 첸치가 도난당했을 때부터 이미 가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졸부 씨는 환각의 첸치 진품은 금고에 넣어두고 진짜와 똑같이 생긴 모사품을 그려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도둑을 맞자 거액의 보험금을 탈 욕심으로 환각의 첸치 진품을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경찰이 도둑들에게 회수한 가짜 환각의 첸지가 자신의 수중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가짜임이 밝혀져야 보험금을 탈 수 있기에 그는 경찰서 안에서 그 그림이 가짜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감정을 받아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첫댓글 <계간 미스터리> 2015년 여름호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홍보용으로 올립니다..
정말 어렵게 풀었어요. 답을 안 보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유혹을 이겨냈군요...^^ 대단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라고 답을 붙여놓은 겁니다...^^
이상한 점은 눈치챘는데 범인은 다른 사람 생각했네요 ㅡㅡ
쉽지 않아요. 추리퀴즈 쉽다는 사람들....존경스럽습니다...^^
환각의 첸치 란 작품이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인가요?
http://blog.daum.net/wwg1950/5175
오자 있네요... 그림을 훔친 도둑 중에 한 명이 솜씨 좋은 고서화 전문 위조범 양상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상군이 아니고 복사기인데...
저도 이 답과 같이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게 그... 정황증거이지 확증은 아니지 않나요? 궁금하군요. 혹시 내용 중 다른 확증이 될만한 내용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