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내는 지혜로운 현모양처형의 여인이다.
내가 그녀에게 평생동안의 빚을 진 것은 26년전에 있었던 그의 탁월한 선택때문이다.
서울의 큰형님댁에서 10년간 동거하시던 부모님을 우리가 모시기로 한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그 이후 우리들의 삶이 크게 달라졌다.
여든살을 넘긴 아버지와 어머니를 4남 2녀중 막내인 우리가 모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문제를 두고서 오랫동안 고민을 하더니 두가지 전제조건을 걸었다.
그 당시 교회의 문턱을 들락거리는 수준에 머물던 선데이 크리스챤인 내가 당장 성가대봉사를 시작할 것과
매일 아침마다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규칙적으로 가정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합가하고 난뒤, 돌아가시기 6개월 전까지 복덕방일을 멈추지 않으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2년후 나에게 예배권을, 막내며느리에게는 통장을 넘겨주시고 82세의 연세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6남 2녀를 키우는 동안 일에 바빠서 자식들의 졸업식에 한번도 가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전적으로 신뢰하던
아내의 대학졸업식에 처음으로 참석하실 정도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잊을 수없는 각별한 정을 남기셨다.
" 당신이 먼저 가야, 아들네가 고생을 덜 하지요."신경통과 노인병을 달고 계시던 어머니는 자신보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사실 것을 염려하여 평소에 당신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며느리에게는 늘 미안해하셨다.
그 이후 20년동안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에 갈등이나 어려움이 따를 때마다 인내하고 서로의 사정을
배려했던 두 여인의 지혜로운 처신과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좋은 날을 만나지 못하였을 것같다.
이런 선순환의 고리가 앞으로 계속 우리 가문의 좋은 전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금 엿보여서 좋다.
아빠,엄마의 효도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모방학습할 예지를 벌써 의식하는듯한 딸과 사위가 옆에 있기때문이다.
아내는 이번 4박 6일의 베트남 팩키지여행을 가기 전에 딸에게 이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 아버지는 혼자 잘 놀터니까 외손녀를 데리고 가서 설겆이나 청소의 짐을 지게 하지말라."
아내의 부탁대로 나는 지금까지 자식들에게 전혀 불편함을 끼치거나 신세를 지지않고 홀로 서기를 잘 하고있다.
아침에는 고구마와 달걀과 과일을 혼자 챙겨먹고 친구들과 저녁밥을 먹고 퇴근하면 서로가 편안해진다.
아내가 없이 보낸 지난 토요일에는 혼자 수영천을 산책하고 민락동 유명한 콩나물국밥을 먹고 신세계백화점
교보문고에 가서 공짜로 새책을 읽고 주일은 교회에서 점심과 저녁을 국수와 누렁지오리탕으로 멋있게 해결했다.
이번에 제대로 느낀 것은 역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고 다양한 부문에 소용이 되어 인기가 많지만
독신으로 사는 할아버지는 아내의 공이 아니라면 자식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고 짐스런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맞벌이 부부가 태반인 요즈음 젊은이들이 자녀를 도우미 아줌마에게 맡기는 것 보다 그만큼의 양육비를 할머니에게
드리면 노후의 안정적인 생활비를 벌면서 사랑스런 손주들을 마음껏 돌보는 상생관계가 성립할 수있다.
집에만 오면 온갖 분탕질을 저지르고 잠시라도 신경을 놓을 수없는 긴장상태로 비상을 거는 예지가
한 주일동안이나 나의 집을 찾지 않는 것은 삶의 재미가 그만큼 사라지는 것이다.
" 오면 반갑고,가면 더 반갑다 "는 손주들이 하루만 보이지 않으면 마음은 허전하고 웃을 일이 없다.
땀과 수고가 없이는 낙과 재미가 없다는 원리를 이번에도 절실하게 깨닫는다.
부산에서 의대를 졸업하여 상경한뒤 10년동안 우리와 멀리 떨어져있던 딸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지척의 거리에서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며 앤돌핀이 팍팍나는 비타민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
새삼스럽게 그것이 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기도덕분이라 생각하며 고마움이 더 해진다.
할머니는 항상 손주들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오대감,오공주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예뻐하고 귀여워하셨다.
아이들도 할머니를 따르고 좋아하고 그 큰 사랑을 얻는 만큼 비상한 기쁨과 뿌듯한 자부심을 할머니에게 드렸다.
역시 아이들은 대가족의 울타리에서 조부모와 아빠,엄마의 사랑과 형제들의 우애를 배우면서 크면 좋다.
6.25 전쟁으로 모든 산업과 주택과 공공시설들이 파괴되고 무너진 가운데서 60년 사이에 세계에서 유례없는
민주국가와 경제대국을 일으켜세운 50대 이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형제들과의 경쟁과 다툼속에서 크고 자랐다.
나와 아내는 상당히 대조적인 성격을 가졌음으로 그로 인한 오해와 갈등과 다툼도 많았다.
내가 아내를 특히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착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다.
간혹 흔치않게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쓰와 인간적인 갈등과 불평과 원망을
아내에게 이야기하며 공감해 주고 한편이 되어 상대방을 비방하고 욕이라도 해서 화를 풀려고 한 때도 있었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다고 내가 열을내어 그 사람들을 비방하고 비난하고 분을 터뜨리면
아내는 마치 자기를 보고 그런 불만과 불평을 전이시키려는 나의 고의적인 의도로 보듯이 그렇게 듣기를 싫어했다.
나의 입장을 옹호하는 변호사의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나의 과실을 꾸짖는 냉혹한 검사로 변신하던 그녀였다.
그리고 지난 날의 나의 실수와 과오가 다시 확대되어 큰 언쟁으로 두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곤 했다.
" 응,그렇지,그래,그렇겠구나! "
이런 말 한마디면 나의 우울하고 분에 찼던 부정적인 생각이 날아갈 터인데 그런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원망이나 불평이나 미움을 자꾸만 만지면 커질 뿐이지만 처음부터 무시하고 가볍게 보면 금방 사라져버린다.
아내는 그 비결을 아는 것같다. 그만큼 내공이 되어있는 것은 다 오랫동안 부모님을 모셨기 때문이다.
막내가 부모님을 모시면서 주위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 받은 섭섭함이나 불편함들도 많았을 터인데.
아마 아내가 나만큼 그에 대한 스트레쓰나 불만을 나에게 토해 내었으면 내가 많이 힘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부모님을 모신 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우리 집안에 보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복의 근원인 부모님을 우리가 모실 수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축복의 통로가 될 수있었다고 본다.
아내의 활동범위와 친구들의 경계는 참 넒은 편이다.
교회생활에 워낙 열심이어서 봉사하고 교제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한편으로 결코 치우치지 않는다.
대구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해외여행을 같이 하기도 한다.
이번에 4박 6일의 펙키지 여행을 가게 된 것도 다 모은 돈으로 가는 만큼 가지않으면 손해라고 했다.
그들 친구들 중에는 두 달에 한번 만나서 영화를 보러가는 그룹도 있다.
작년에는 상담사자격을 따서 매달 몇번씩 중,고등학교에 가서 상담학 과목을 맡기도 했다.
원래 바쁜 사람이 할머니의 손길이 한량없이 필요한 외손녀를 옆에 끼고 살기로 된 것이니 더욱 정신이 없다.
내가 남편이라고 하지만 잠자리 아니면 얼굴보기도 힘든 인물이 된 아내를 보고 나는 또 참아야 한다.
http://cafe.daum.net/60.30 60년을 나누며 30년을 준비하자
첫댓글 잘읽고 가나이다
늘 배려하면서 사시는 내외분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멋진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