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이러한 시위행렬에 앞장서서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연행되었다. 다시 백여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들이닥치자, 일본 헌병을 발포하였고, 그는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뒤편에 있던 통나무 몽둥이로 주재소의 담장과 장지문을 부수며 계속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으로부터 제지를 당하자 헌병 분대장과 헌병 보조원 등을 구타하는 등 애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8·8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1·1112·1113·111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