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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의 해묵은 현안인 도청 이전을 다룰 경북도의회 도청이전특별위원회가 1992년 7월13일 첫 회의를 하고 있다. 이날 특위의 임시위원장은 경북도의원 중 최연장자인 문경 출신 정승도 의원이 맡았다. <영남일보 DB> |
1992년 7월13일. 이날은 경북도 청사이전과 관련해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날이다. 경북도의 해묵은 현안인 도청 이전을 위한 공식적인 기구가 주민대의기관인 경북도의회에서 처음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경북도의회가 1991년 7월8일, 30년 만의 지방자치제 부활로 출범한 지 1년쯤 지난 날이었다.
지방의회는 1·2공화국 시절 3대에 걸쳐 9년간(1952년 4월~61년 5월) 운영된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역이 된 제4대 경북도의회 의원 87명은 상당수가 고위관료, 재력가, 전문직업인 출신이었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30대의 명문대 출신들도 포진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역구 국회의원들과 비교해도 크게 비중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스펙과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4대 경북도의원들은 재선, 3선을 거친 후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진출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4대 경북도의원들은 무보수 명예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지방자치제의 조기정착을 위해 많은 공부를 했으며, 일정한 성과도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중앙정부는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반쪽짜리(단체장은 임명제로 존속)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지침’과 ‘관례’를 들이대며 지방의회를 원격조정하려 했고, 집행부 공무원들도 의회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여 회기 때마다 문제시되곤 했다.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분위기 속에서 경주상공회의소 회장 출신인 손경호 의장과 구미지역 재력가인 문대식 부의장, 안동지역 유지인 김경종 부의장을 사령탑으로 뽑은 경북도의회는 개원하자마자 경북도의 구심적 역할을 할 새 도읍지 선정문제를 꾸준히 논의해 왔다. 그러다가 개원한 지 1년이 된 92년 7월13일, 드디어 새 도읍지 선정문제를 다룰 공식기구인 도청이전특별위원회를 처음으로 가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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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지사 주관으로 지방의회 개원 이튿날인 1991년 7월9일 대구시 남구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제4대 경북도의원초청 만찬회’에서 의원들이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실상 처음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역이 된 제4대 경북도의원 87명은 스펙과 역량이 대단히 뛰어났다. <영남일보 DB> |
후보지 출신 의원은 배제 갈등
결국은 무기명 투표로 선출
구미서 스타트 유치전쟁 확산
‘南富北貧’단어가 회자되기도
#1. 위원장 선임부터 불꽃 튀는 격돌
이 당시 정국은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긴장 상태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5년 단임제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다섯 달 뒤(12월18일) 치러질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3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의해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가 격돌을 벌이고 있었다. 집권당과 민주세력의 합당, 통일국민당의 출현 등으로 출렁이는 정치적 파고에 경북도의회도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를 같이한 도청이전특위 위원 21명은 예상대로 첫 안건인 위원장 선임 문제에서부터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다. 특위 위원장을 배출하는 시·군이 도청유치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취재기자들은 ‘지방의회가 출신지역의 이익에 너무 함몰돼 소지역이기주의에 빠져든다’며 연일 비판기사를 쓰던 때였다. 사실 지방의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출신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렇게 비판받을 이유가 없었다.
특위 임시위원장은 최연장자인 문경 출신 정승도 의원이 맡았다. 그리고 특위의 원활한 회의진행을 도울 전문위원으로는 최영조 서기관(현재 경산시장)이 임명됐다.
특위 회의실은 위원장 선임 안건이 상정되자마자 불꽃 튀는 토론장으로 변했다. 먼저 상주 출신 김광정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비교적 소장파에 속하는 그는 “도청이전 위원장 선임 문제에서 핵심적으로 짚어야 할 부분은 지금까지 도청이전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구미, 포항, 경주, 의성, 안동, 영천지역 출신 의원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과 같이 기업인 출신이면서 후에 영주시장을 역임하게 되는 권영창 의원도 “특위는 최종적으로 도청이전지역을 선정해야 되는 중요한 위원회이기 때문에 도청유치지역에서 위원장이 나왔을 경우에는 편협적으로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해당지역 출신은 제외하고 위원장과 간사를 선출해서 그야말로 도청유치 작업이 객관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경북도 부지사 출신이 위원장에
특정지역출신 위원장 배제론에 대한 반대의견은 주로 노장파 의원 쪽에서 나왔다. 포항 출신 김옥득 의원은 “특위는 성격상 도청을 이른 시일 내에 옮기는 준비를 해달라고 집행부에 요청한 후, 이전작업을 의회가 지원하기 위해 구성한 것이다. 특위가 이전 후보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위원장은 출신지역에 관계없이 회의진행을 원만하게 하는 사람이 적임자”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울진지역 기업인 출신인 주기돈 의원도 “앞으로 특위가 도청이전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공청회도 여러 번 해야 할 것이고 학계나 각계각층의 의견도 수렴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바로 그것이지 지금 당장 도청을 어디에 옮기자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 위원회를 잘 리드해서 움직여 나갈 수 있는 분이 위원장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특위 위원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결국 첫 회의부터 몇 번의 정회를 거듭한 끝에 위원장을 무기명 투표로 뽑기로 했다. 투표 결과 경북도 부지사 출신인
김각현 의원(안동)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김각현 위원장은 수락연설에서 “도청이전특위가 첫날부터 이렇게 진지하게 출범하는 것을 보니까 앞으로 경북도의회가 하는 일들이 잘 추진되리라고 믿는다. 아까 위원들께서 말씀하시던 문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는 오로지 여러분의 뜻에 부응해서 일을 해 나가겠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특위 위원들이 너무 지역의 이기적인 문제에 집착을 하는 일은 조금 삼가줬으면 한다. 지역의 주민에 대해서도 많은 설득과 이해를 해 주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1994년 11월8일 의사봉을 울진 출신 주기돈 의원에게 넘겨주기까지 특위를 매끄럽게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위 간사선거도 역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됐으며, 후에 전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는 칠곡 출신 송필각 의원이 선임됐다.
#3. 구미에서 도청유치운동 첫 스타트
사실 경북도청 이전문제는 1981년 7월1일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도청유치 작업에 뛰어든 지역은 구미다. 88년 12월15일 구미시 개발촉진협의회가 도청유치추진분과위원회를 공식기구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년쯤 뒤인
89년 11월22일에는 안동지역 발전협의회가 창립총회를 열면서 도청유치문제를 쟁점으로 들고 나왔다.
경북도내 각 지역별로 도청유치추진위원회가 결성된 계기는 대구지역 한 일간지가 90년 1월 경북도청 구미이전 확정설을 보도하면서부터다. 이 신문은 도청이전 예정지로 ‘구미시내 인동지역, 선산군 고아면, 칠곡군 신동·천평 일대’라며 구체적인 장소까지 명시해 보도했다. 구미에서는 당시 유력정치인이 도청유치에 앞장서 있던 상황이었다.
구미지역에서 도청유치를 위한 움직임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경북도내 다른 시·군들도 적극적으로 도청유치운동에 뛰어들었다. 포항시는 90년 1월16일 새해 들자마자 ‘포항지역 경북도청유치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시는 90년 2월2일 ‘안동지역 도청유치 추진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경북 중부권을 대표하는 구미시와 동부권을 대표하는 포항시, 북부권을 대표하는 안동시가 가장 먼저 도청유치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안동에 이어 며칠 뒤(2월7일) 의성군이 ‘경북도청 의성유치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영천시도 91년 6월20일 ‘영천지역 도청유치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4. ‘南富北貧’이라는 신조어도 회자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1
년 7월8일 개원한 경북도의회가 ‘도청이전’이라는 이슈 속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청이전 문제가 경북도의원들에겐 지방자치 실현의 첫 과제로 등장한 셈이다.
‘경북도청 구미 이전설’이 갑자기 신문에 보도되자 포항과 경주, 영천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거셌지만 특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권 주민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신문보도가 나간 다음 날 바로 안동지역민들은 경북도청유치 추진위 결성준비에 들어갔고, 일주일 뒤인 18일에는 안동KBS에서 안동지역 도청유치의 당위성을 주제로 대토론회가 열렸다. 그리고
2월2일, 드디어 안동지역 도청유치 추진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후에 ‘경북북부지역 도청유치 추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안동지역 도청유치 추진위원회는 청와대와 정부, 국회, 언론사 등에 탄원서를 배포하는 한편, 이 내용을 신문광고로 싣기도 했다.
‘남부북빈(南富北貧)’이라는 단어가 이 당시 회자되던 신조어였다.
이동석 안동지역 도청유치 추진위원장은 언론기고문에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은 광복 후 지금까지 철저하게 소외돼 왔다. 한 평의 공장조차 없고 고속도로 역시 전혀 뚫리지 않은, 전국에서 가장 미개발된 지역이다. 안동·임하댐의 건설과 길안보 건설로 30여년 동안 타 지역의 희생양이 돼 왔다. 지금 경북 북부지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도청을 조속히 유치하는 길밖에 없다. 도청이전은 기형적인 경북도의 남북 간 균형을 바로잡고 ‘남부북빈’ 현상으로 인한 지역갈등과 이질감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에 15·16·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게 되는
안동 출신 권오을 의원은 당시 경북도의회 청원 1호로 ‘경북북부권의 도청유치’를 접수했으나 도의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글=심충택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공동기획:경상북도개발공사
첫댓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공들인 정성의 댓가.
맞습니다. 국가나 지방정부나 조직에서의 성과나 모든 것이 화합하고 희생하고 함께 공들일때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