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우리의 눈과 입과 귀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당했더랬다. 뭐든 알고자 물어보면, 어른들은 '넌 알 필요 없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고, 호기심에 가득 차 뭔가 보려 할 찰나에 '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눈을 가려버렸다. 뭐, 아이들이 보고 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그런데 이상한 건 어린 아이들이 하는 말조차도 무시해버리는 어른들의 태도였다. 진지한 이야기에도 웃어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깡그리 잊어버리는 그들의 태도에 얼마나 격분했던가. 브래드 실버링 감독의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Lemony Snicket's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이하 <레모니 스니켓>)은 모든 상황이 불리하게만 돌아갔던 바로 그 '어린 시절'을 담아내고 있다. 보들레어가(家)의 세 남매-바이올렛(에밀리 브라우닝 분), 클라우스(리암 에이켄 분), 써니(카라/샐비 호프만 분)-는 화재로 부모를 잃게 된 순간부터 이상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여행의 목적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겁나 먼 친척 올라프 백작(짐 캐리 분)을 따돌리기 위함이다. 올라프 백작이라는 이 위인은 아이들의 재산을 탐내서 그들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다.
희한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어른들이 세 아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라프 백작에게로 아이들을 안내한 형사 포는 올라프 백작의 위협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아이들만 차에 놔두고 가게에 들렀다는 죄목을 붙여 올라프와 아이들을 떼어놓는다. 게다가 자상한 몽티 삼촌 역시 세 남매의 말을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뱀 전문가는 분명 올라프 백작인데, 이를 알 턱이 없는 몽티 삼촌은 속아 넘어간다. 급기야 아이들은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는 이 말을 믿지 않고 엉뚱한 이유(자신을 모함하려는 세력의 손길이라고 생각한다)를 들이대며 올라프 백작을 의심한다. 신경과민증세를 보이는 정신 나간 조세핀 숙모 역시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장으로 변신한 올라프 백작을 알아보지 못한다. 결국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지, 애들 무시하다가 저렇게 될 줄 알았어. 안타깝게 죽고 마는 어른들을 보며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는 것은 애들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그들의 무신경한 태도 때문이다. <레모니 스니켓>은 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이야말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여타 작품들이 아이들을 어른들의 부속품처럼 취급했었다는 점을 기억해보면, 아이들의 지위는 이 작품에서 확실히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레모니 스니켓>이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는 사실도 명백해진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라 생각하면 <레모니 스니켓>은 동시에 잔인한 영화다. 영화는 오프닝씬을 통해 그리 녹록치 않은 작품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안전하게만 보이는 동화적인 세상은 갑자기 어둡고 습한 늪지대 같은 공간으로 변해버리고, 영화는 '결코 너희(관객)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것 마냥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배경을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팀 버튼의 영화들(<크리스마스의 악몽>, <유령수업>, <슬리피 할로우>)에서 미술 컨설턴트로 활약했던 릭 라인리히다. 그가 고딕양식으로 재현해낸 영화의 공간은 정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법하다. 을씨년스런 냄새를 풍기는 것이, 마치 기분 나쁜 B급 고전 호러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배경도 그러한데, 해맑게 웃어야 할 아이들은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레모니 스니켓>의 아이들은 상황을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지만, 결말을 놓고 생각해보면 결코 즐겁지 않다. 아이들은 단지 세상의 한 부분을 알았을 뿐이며, 그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 것이란 암시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해리 포터>시리즈도 점점 어두워져 가는 마당에, <레모니 스니켓>의 등장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형제의 무시무시한 동화책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흡입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환상적인 비주얼을 감상하며 즐기는 데엔 손색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