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반하다]3대째 이어온 양산 물금막걸리 김민성 대표
막~ 걸러서 막걸리라 이름 붙여진 술, 그래서 그 옛날에는 가난한 자도 마실 수 있었던 술이었다. 농번기에는 시원하게 농민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마을 축제에선 질펀하게 흥을 돋우던 ‘서민의 술’ 막걸리가 지금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런 가운데 8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그 뿌리를 지키며 막걸리의 자부심을 지켜가고 있는 이가 있다.
글 정인정(명예기자) 사진 김정민
물금주조장 장손의 막걸리 숙명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그리울 만큼 한여름 햇볕이 뜨겁던 8월 초, 양산 서리단길(양산시 물금읍 화산길)에 자리한 물금주조장에서 3대째 막걸리를 만들고 있는 김민성 대표를 만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조장을 하셨어요. 1941년에 부산 장전동에서 하시다가 한국전쟁 때 양산 남부시장 쪽으로 들어오셨고, 지금 이 자리로 옮긴 건 제가 한 살 때였습니다. 물금역이 가까워서 재료수급이나 물건을 어디론가 보내기에도 딱 좋은 위치였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죠.”
김 대표는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막걸리 영업을 시작했다. 젊고 서글서글한 성격에 붙임성이 좋았던 그에게 맞는 일이었다. 영업이나 배달일이 끝나고 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술 만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자연스레 보고 배웠고, 허리와 어깨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서 힘쓰는 일을 하며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그가 제조와 운영을 도맡은 건 1990년대 후반, 20년 정도 되었다.
“아버지가 장남이고 제가 장손이니까 한편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때는 여기가 싫어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잘 해낸다 싶으니까 물려주신 거겠죠?”
몸으로 체득한 비법, 정리 기록…2종류 생산 중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주조 비법은 그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몸소 보고 배우고 부딪히고 만들어가면서 체득한 물금막걸리만의 주조법이 그에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 대표 자체가 물금막걸리의 80년 맛의 비법인 셈이다.
“아들이 물려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주조법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기록해뒀습니다.”
물금막걸리는 목 넘김이 좋고 가벼운 듯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술 본연의 맛을 살렸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자고 일어나도 머리가 아프지 않단다.
제조과정은 간단하다. 막걸리의 시작, 어머니가 되는 주모를 만든다. 쌀과 효모, 물을 넣어서 닷새간 1차 발효를 시킨 후에, 고두밥과 물을 넣고 2차 발효. 이틀쯤 후에 또 물을 추가해 3차 발효시킨다. 이렇게 막걸리 한 병을 생산하는 데까지 약 열흘 정도가 소요되고, 한 번에 1000병~1200병 가량 생산한다.
물금막걸리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는 총 2종류다. 생막생막걸리만을 생산해오다가 지난해부터는 젊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더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사과 막걸리를 새롭게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과막걸리의 경우 마지막 발효 단계에서 100% 사과즙을 넣어 한 번 더 발효시킨다. 막걸리는 물을 섞어서 만드는 술이라 물맛을 어떻게 잡아내느냐가 관건. 목 넘김이 좋은 술맛을 내기 위해서는 더 길게 발효해야 한단다.
“좋은 재료로 만들려고 노력…자부심 갖고 지켜나갈 것”
한때는 철광 광산이 있었고 공단도 들어서면서 물금막걸리는 호황을 누렸으나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요즘은 워낙 술이 다양해지면서 대형 마트에 납품하기도 힘들어졌다. 소규모 양조장은 더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양산에도 대표적인 다른 막걸리 주조장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렵지만 좋은 재료를 써서 만들려고 애씁니다. 아무도 만들지 못하는 물금막걸리를 내가 만든다는 것,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주면 그게 자부심이죠. 집안 대대로 3대째 내려오는 거니까 지켜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