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원시시대부터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 왔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주검의 처리방법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에 대한 어떤 기념비적 형태로써 무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구성원의 사체 처리의 방법은 기후와 생활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장(風葬) : 사체를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놓음으로서 금수(禽獸)에게 처리를 맡긴다.
수장(水葬) : 해안이나 강변에서 물 속에 사체를 가라앉힘으로서 물고기에게 처치를 맡긴다.
화장(火葬) : 열대 지방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불로 태워서 처리하는 방식.
무덤은 그러한 사체 처리의 한 방법으로서 땅을 파고 묻는 매장의 결과이다. 이러한 습관은 인류가 동물의 생활과 다름이 없었던 시대에는 단순한 사체처리의 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으나, 차츰 인간적 지성과 감성이 열리게 되면서부터 단순한 사체처리에 어떤 기념비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매장에 의한 무덤의 형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고 하는 문제는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전기구석기시대(前期舊石器時代)로 추론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한 확인을 통한 결과 동양에서 최고의 매장에 의한 무덤의 흔적은 후기구석기시대(後期舊石器時代)로 나타났다.
무덤의 유형
무덤은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 방형분(方形墳), 원형분(圓形墳), 쌍분(雙墳),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2.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 토장묘(土葬墓), 지석묘(支石墓), 적석총(赤石 ), 석총(石塚), 토총(土塚), 전축분(塼築墳)
3. 유구의 재료에 따른 분류 : 석관묘(石棺墓), 석곽묘(石槨墓), 목관묘(木棺墓), 옹관묘(甕棺墓), 도관묘(陶棺묘(墓))
이상과 같이 대체로 세 가지 유형에 16가지 정도의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하의 내용에서 시대별로 분류하여 자세히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청동기시대의 묘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무덤 양식, 즉 묘제는 석관묘, 지석묘, 토광묘(土壙墓), 옹관묘 등이 있으며, 보통 이 중 석관묘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석묘(支石墓, 고인돌)
지석묘는 유럽에서는 북유럽에서 서유럽과 지중해 연안의 해안을 따라 확산된 거석묘(巨石墓)로서 영국, 스위스에서도 확인되고 있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의 해안지역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한편, 아시아지역에서는 남인도, 자바, 중국의 화중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해안지역과 요동반도, 그리고 함경북도를 제외하고 제주도를 포함한 우리 나라 전역과 일본의 북규슈에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지석묘에 대한 기원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그 수량과 분포밀도로 보아 지석묘 문화의 중심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나라 지석묘는 지상에서 테이블처럼 세워진 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으로 나누어지며, 또 변형지석묘(變形支石墓) 혹은 개석식지석묘(蓋石式支石墓)라는 형식의 지석묘가 있다.
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
석관묘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널리 행해진 선사시대의 매장시설로서 동북아시아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시베리아를 비롯하여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 일본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활발히 이루어진 선사묘제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석관묘의 분포는 거의 같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으로 지석묘에 비해서 매우 빈약하지만 반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매장부의 4벽과 바닥, 뚜껑을 얇은 판석으로 짜맞춘 목판 모양의 무덤으로 목판을 사용하지 않고 유해를 매장하고 있는 점에서 '석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4벽을 각각 1매의 판석으로 조립하되 두 단벽을 꽉 끼우게 깐 후 약간 두꺼운 판석 여러 장을 잇대어 뚜껑으로 덮은 것이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것 외에, 장벽은 2∼3매의 판석으로 잇대어 세운 것, 장벽의 끝부분을 할석으로 채운 것, 바닥에 판석을 깔지 않은 것, 바닥에 판석 조각을 불규칙하게 깐 것 등 세부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토광묘(土壙墓, 움무덤)
토광묘는 해방 이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묘제이다. 토광묘라는 것은 지하에 수직으로 장방형의 묘광(墓壙)을 판 무덤들이다. 이러한 무덤은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한 것이며, 철기시대인 삼한시대에 가면 이러한 토광묘는 거의 소멸하고 새로이 목관묘, 목곽묘가 등장하여 크게 유행하게 된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관(棺)과 곽(槨)의 차이이다. 쉽게 말해서 관이라는 것은 시신만 들어가는 것이고, 곽이라는 것은 시신과 부장품이 함께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곽의 내부에는 관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곽만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곽은 관보다도 규모가 큰 것이 된다.
옹관묘(甕棺墓, 독무덤)
옹관묘는 토광묘의 시기를 같이하는 묘제로서 지금까지 조사 보고된 예가 그리 많지 않아 수개처에 불과하다. 옹관묘는 사체(死體)를 독이나 항아리에 넣어서 땅을 파고 토광을 만들거나 또는 옹관을 넣을 만큼 적당히 땅을 파서 묻는 묘제를 말하는 것인데 관으로 이용되는 항아리나 독이 한 개로 되고 뚜껑을 막은 것을 단옹관(單甕棺), 항아리나 독 두 개의 구부(口部)를 맞추어서 뉘인 것을 합구옹관(合口甕棺), 그리고 세 개를 이어서 만든 것을 삼합구옹관(三合口甕棺)이라고 한다. 옹관들은 대체로 동향, 동남향 또는 동북향으로 놓여있었다. 이러한 장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선 이 시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수혈식(竪穴式) 고분, 횡혈식(橫穴式) 고분, 적석석곽묘(積石石槨墓)의 형태와 구조 등을 살펴보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구체적인 묘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수혈식(竪穴式) 고분
지하에 토분을 파고 매장하는 분묘형식으로서 수혈식이라는 말은 횡구식 고분에 대한 말이기는 하나, 고분의 발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원초의 분묘는 모두 수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단 토광을 파고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토광의 내벽에 대어하는 시설, 즉 목재를 사용하는 목곽(竪穴式木槨墓), 돌을 재료로 하는 석관 혹은 석실(竪穴式石室墓), 벽돌을 재료로 하는 전곽(塼槨) 혹은 전실(塼室)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무엇보다도 토광은 가장 원시적인 구조로 되어있고, 모든 형식의 시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인류가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거의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들 토광은 기본묘제(基本墓制)로서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존속시기도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돌을 재료로 하는 수혈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청동기문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형식이고, 또 하나는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형식이다. 어느 경우에나 토광을 파고 광벽에 대어서 부석(斧石)이나 천석(天錫)을 사용하여 내벽을 쌓는 구조이다. 청동기 시대의 수혈은 장방형(長方形) 석곽(石槨)의 길이가 2m 미만이 많으나 1∼2m 가까운 깊은 곳에 축조된 경우가 많다. 이 구조의 형식은 요령 지방의 요하, 대릉하 유역 지방에서 주대(周代) 이후 발달한 형식이 한반도로 유입된 듯하다. 삼국시대의 수혈식의 경우 소형의 석곽들이 경주 낙동강 유역, 부여 등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수혈식인 석곽에 비하여 깊이에 있어서 얕아진 것이 특징이다. 또 하나의 돌로 만든 수혈식은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특히 가야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우선 이것의 특징은 청동기 시대의 석조수혈식에 비하여 곽과 석실의 길이가 길어져서 어떤 것은 4∼8m 5가량 세장(細長)한 것도 많이 섞여있다. 그러나 깊이는 그 규모에 비하여 얕아지며 2m 미만이 일반적이다. 이들 세장형 석실의 원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압록강 중류의 적석총(積石塚)의 내부구조로서, 적석총 문화와 함께 남하하여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양쯔강 무역의 석실 문화가 황해를 건너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세장형 석실은 4∼5 세기에 일본 열도로 건너가 크게 유행한 것만은 사실로 인정된다. 일반적으로 세장형 석실은 수혈식 고분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횡혈식 석실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 구조에 있어서 수혈식으로 되어 있어도 목곽(木槨), 전곽(塼槨) 구조를 가진 것은 수혈식 고분의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횡혈식(橫穴式) 고분
널방벽(玄室壁, 主室壁)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가 시설된 분묘(墳墓) 형식으로서 측면에서 보면 터널식으로 되어 있어 '굴식돌방무덤'이라고도 한다. 그 형식과 구조면에서 다양한 고분인데, 보통 주검을 안치하는 널방(玄室, 主室)과 널방 앞에 외부에서 널방으로 통하는 묘길이 시설되어 있다. 또 널방은 높고 넓은 공간인데 비하여 묘길은 좁고 낮게 축조되어 있다. 널방과 묘길에 각각 널방문(玄門)과 묘길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적석(積石)을 하던지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폐쇄하였으나 추가장(追加葬)도 가능하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횡혈식고분'이라는 말은 수혈식고분의 대조어이며, 중국의 전곽분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성행하였다. 고구려가 3세기 전후의 시기 이 묘제를 채용하여 제일 먼저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며, 4세기초부터 성행하였다. 5세기에 들어서 백제·가야·신라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관을 넣는 널방과 널방으로 들어가는 묘길로 된 것이 기본적이다. 그러나 묘식의 수와 그 규모가 일정하지 않아 횡혈식 고분은 다양한 형식의 평면구조를 보여준다.
횡혈식 고분은 모두 묘길을 구비하고 있는 구조 형식상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묘길의 위치 및 크기는 서로 다르나 그 수는 대개 하나이다. 묘길의 위치에 따라, 널방 앞의 중앙부에 있는 양수형(兩袖形), 널방의 좌우 어느 한쪽 벽에 편재된 편수형(片袖形), 묘길과 널방이 같은 너비로 묘구까지 되어있는 수무형(袖無形) 등으로 구분한다. 묘실은 지하·반지하·지상으로 축조하였는데, 지상에 축조한 고분이 대부분이며 지하에 축조한 고분은 극히 드물다. 묘실은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돌로써 축조하였다. 크기가 별돌 정도의 막돌로 쌓은 것, 거친 자연석으로 쌓은 것, 다듬은 석재로 규모 있게 축조한 것, 판석으로 쌓아올린 것, 그리고 부분적으로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것 등이 있다. 규모가 크고 묘실 내부를 호화롭게 장식한 고분(壁畵古墳)은 축조재료가 정밀하게 다듬은 돌 또는 판석인 경우는 직접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묵서(墨書)하였지만, 다른 경우에는 모두 묘실의 내부를 회를 발라 처리하였다. 묘실의 벽은 수직으로 곧바로 올라간 것과 곡면을 이룬 것이 있다. 묘실은 판석을 큰돌로 쌓을 경우는 벽이 수직으로 처리되지만, 자연석(副石)으로 쌓을 경우에는 천장가구의 형식에 따라서 벽이 수직 또는 곡면을 이루게 되며, 또한 묘실의 위치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 묘실의 천장은 축조방법의 측면에서 구분하면, 납작천장 평천장(平天障), 꺽음천장, 활천장, 모줄임천장 등 네 형식이 있다. 묘실의 시설로 중요한 것은 널받침대, 돌문, 덜기둥, 배수시설 등이다.
돌무지돌덧널무덤(積石石槨墓)
석곽(石槨)의 구조로만 본다면 일반 석곽묘와 같으나 분구(墳丘) 내에서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일반 석곽묘는 지면 아래에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사면벽에 기대어 돌을 쌓아 곽을 만드는데 비하여, 돌무지돌덧널무덤은 지면 위에 돌을 쌓아서 내부가 일반 석곽과 같은 형상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석상태에 있어서 내면은 수직으로 올라갔으나 외면의 의지할 벽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적석부의 폴이 풀어지면서 곡면을 이루게 되었다. 이 점에서 일반 석곽과 구별되고 또 석곽의 외형이 같은 석총과도 구분된다. 그러므로 돌무지돌덧널무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면 위에 축조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돌무지돌덧널무덤은 주로 낙동강 유역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 고분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분이 능선상 또는 구릉 돌출부의 높은 위치에 축조된다.
둘째, 한 분구 내에 적어도 2기 이상의 주체시설이 들어간다.
셋째, 분구축조법에 있어서는 먼저 축조된 석곽 만의 소형 분구를 만들고 그 다음에 석곽이나 다른 주체시설이 추가될 때마다 기존의 분구를 포함하는 대형의 분구를 형성하여 나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넷째, 여러 주체시설 가운데 중심이 되는 대형의 석곽 1기 혹은 2기 정도가 적석석곽의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개석은 수매의 판상석을 사용하고 단벽 1벽은 개석을 놓은 뒤 밖에서 쌓은 횡구식(橫口式)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다섯째, 축조 연대는 4∼5세기경에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구조형식을 갖춘 돌무지돌덧널무덤은 낙동강 유역 지방에만 특징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대동강, 한강, 금강 등지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일단은 문화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묘제(墓制)
이 시대에 이르면 정치·사회·문화 등 각 분야가 고루 발전하고 특히 국가형태를 갖추면서 권력지배층에서는 그 신분의 과시를 위하여 궁궐·저택·복식 등을 호화롭게 치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무덤에 대해서도 전시대와 다른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적석총과 벽화고분, 백제에서는 전실분과 판석조석실분, 신라에서는 적석봉토분, 그리고 가야에서는 장방형 석실분 등이 그것이다. 이하에서 각국의 구체적인 묘제를 고찰해 보겠다.
고구려의 묘제 (1)
고구려의 적석총은 지면을 고른 다음 약 1m 정도의 단을 쌓고 그 위에 태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분구를 형성한다. 분구의 외형은 시대에 따라 계단식으로 3∼5단의 방대형 또는 절두방추형이 많다. 매장주체시설은 석관식에서 횡혈식 석실로 발전하였다. 규모는 대형이 40m 이상, 중형이 20∼40m, 소형이 15∼10m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 적석총은 주로 압록강 유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중국 영토인 환인현, 고력묘자촌, 집안현, 통구 등지에 수천 또는 수만기가 밀집되어 있다. 또 그 대안인 북한의 시중군, 자성군, 평양 황산 등지에도 분포되어 있다. 시기상으로는 환인현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다음이 통구의 것이며 평안도의 것이 가장 나중의 것이다. 초기에는 강변의 산허리에 축조되다가 차츰 평지 강변으로 내려왔다. 한강 유력인 서울 석촌동의 것은 4∼5세기의 계단식 적석총이다.
적석총이 압록강 유역에서 성행했을 때 3세기 무렵에 중국에서 횡구식 석실분이 들어와 고구려식 벽화고분이 성행하게 되는 바 외형은 흙으로 쌓은 방대형의 분구이다. 벽화는 활석으로 석실을 쌓고 그 위에 회를 두껍게 바른 다음 그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후기에는 판상석 표면을 물갈이하여 그 위에 벽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벽화고분은 무덤의 구조와 기림의 내용에 따라 초기·중기·후기의 3기로 나눈다. 초기의 것은 피장자(皮葬者)의 초상화·행진도·수렵도 등 풍속도, 중기의 것은 풍속도와 사신도(四神圖), 후기의 것은 사신도만 그리거나 사신도와 장식 그림을 그렸다. 이런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통구 지방에서 20여기, 평양지방에서 20여기 등 모두 6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안악 3호분, 대안 덕흥리의 것은 덕으로 쓴 명문이 있어서 연대를 알 수 있다. 이런 벽화고분은 백제의 영역인 공주 송악기 1호분, 부여 능산리 1호분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갔다. 고구려 적석총이나 벽화고분들은 모두 이전에 도굴되어 처녀분은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부장유물(副葬遺物)은 그 잔품 이외에 완전한 것이 없다.
고구려 묘제(2)
고구려는 낙랑·대방의 고지를 흡수하는 한편 요동지방을 통하여 삼국중 가장 먼저 중국의 문물에 접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고분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고분은 대체로 수도였던 환인, 통구,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는데 크게 석총과 토총으로 나눌 수 있다.
(1) 석총(石塚) : 고구려 본래의 무덤으로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과 평양까지 퍼져 있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초기에는 땅위에 방형으로 냇돌을 깔고 중심부에 동침(東枕)의 목관을 안치한 후 다시 그 위에 단을 이루면서 돌을 쌓아 덮은 것으로 관대(棺臺)의 위치가 지상에 있고 관대에 벽이 없어 평평한 관을 쓴 것이 특징이다. 2∼3세기가 되면 위치가 육지쪽의 대지나 산기슭으로 올라가면서 제1단 주변을 평평한 판석으로 돌려 외관이 기단처럼 보이게 한다. 후기에는 석총이 더 발달하여 내부에 석실이 생기는 석실적석총(石室積石塚)이 되는데 통구지방의 장군총(將軍塚)은 가장 정리되고 발달한 것이다.
(2) 토총(土塚) : 4세기 후반이 되면 석실총의 수가 줄어드는 대신 토총이 건조되기 시작하고 5세기 초에 이르면 본격적인 축조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고구려 지배층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묘제(墓制)를 채용한 것으로 중국에서 배워온 외래적인 요소이다. 토총은 돌로 쌓은 현실을 봉토로 덮은 것인데 석총과는 달리 바닥을 반지하 또는 지하에 둔다. 현실에는 단실(單室), 삼실(三室)도 있으나 전형적인 형식은 규실(圭室)과 그 앞에 전실(前室)을 둔 2실형식이다. 현실의 벽은 할석(割石) 혹은 후기에는 판석으로 축조하였는데, 할석의 경우는 표면에 회를 바르고 판석에 직접 돌위에 벽화를 그렸다. 모든 토총에 벽화가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50여기에 불과하다. 벽화고분은 구조·벽화내용에 따라 삼기(三期)로 구분할 수 있다.
1) 전기(4세기후반∼4세기경) : 양쪽에 측실(側室)이 달린 전실과 그 뒤에 붙는 주실(主室)로 구성되는 T자형이며 전실에 측실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천장을 3구로 나누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측실에 부부의 초상화가 있는 것이 통례이며 회칠한 벽면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주·암주·황·황토·녹청 등 광물질 물감과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 동수묘, 감신총, 약수리고분, 천왕지신총 등이 있다.
2) 중기(6세기) : 전실의 크기가 장·폭 모두 축소되어 현실과 같은 크기로 되는 평면 여자형(呂字形)이다. 전실의 측실이나 감(龕)에 그려졌던 주인부부상은 주실정면(북벽)으로 옮겨지고 전실에는 부속건물이 그려져 현실이 주인채, 전실이 바깥채처럼 되어 있다. 그림의 필치가 자유로와지지만 아직도 입체감이 없이 평면적이며, 전기의 특징적인 문양인 괴운문대(怪雲文帶)가 없어지고 조잡한 당초문대(唐草文帶)가 나타난다. 전기고분이 주실을 혼전(魂殿)으로 보고 있는데 비하여 중기는 고분을 현실의 재현 또는 연장으로 보려는 경향이 뚜렷하면서 도교·고구려 고유의 토속사상이 가미되어 신앙·사상의 혼합이 특징적이다. 무용총·각저총이 유명하다.
3) 후기(6세기말∼7세기 전반) : 전실이 없는 단실묘가 유행하면서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을 쓰는 경우가 생기고, 벽에 회칠을 하지 않고 석면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형식도 나타난다. 전기부터 나타난 사신(四神)이 천장면으로부터 주벽(主壁)으로 내려와 전공간을 차지하고 색이나 선이 화려하고 숙달되었으며 수(隨)미술의 영향도 보인다. 우현리삼묘, 진파리 1·4호, 집안이나 호남리의 사신총등이 유명하다.
이상의 고구려 고분은 합장이 가능한 구조이므로 도굴이 용이하여 남아있는 부장품이 거의 없고 유리된 채집품 몇점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파리 1호출토의 금동투작관형금구(金銅透作冠形金具) 금동관으로 신라, 백제에 떨어지지 않는 높은 수준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묘제(墓制) (1)
백제의 무덤은 수도의 이전에 따라 서울·공주·부여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특징이 있다. 서울 지역은 적석총과 그밖에 토축묘·토광묘·석실분 등이 있다. 토축묘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을 지면 아래 토광 속에 설치하지 않고 분구 중에 마련했다는 점이다. 토광묘는 거의가 간단한 토장형식이며, 석실분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의 형식을 띠는 것이 있는데 내부는 막돌로 횡혈식석실로 쌓은 궁륭상천장식인데 연도가 남쪽 벽에 잇대어 시설되었다.
공주 지역에서는 서울과 같은 형식의 횡혈식석실고분(橫穴式石室古墳)이 송산리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치나 소학동 등지에는 서울 중곡동의 것과 같은 횡혈 또는 횡구식의 장방형석실분들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낙동강 유역에 많은 세장형 장방형석실분보다 고식(古式)이다. 재료는 납작한 막돌을 골라서 쌓기도 하고 깬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공주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무덤의 양식은 전축분(塼築墳)으로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을 들 수 있다. 벽돌을 구워서 횡혈식으로 석실을 쌓고, 천장을 터널식으로 축조한 삼국시대의 무덤은 이곳 밖에는 없을 것이다. 대동강 유역지방에는 한대(漢代)의 영향을 받은 전실분(塼室墳)이 몇 기 남아 있으나, 송산리의 전실분의 경우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6호분은 벽돌 벽면에 진흙칠을 하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렸다. 무령왕릉은 벽돌 쌓는 방법, 벽감(壁龕)의 위치와 수, 전면관대 등에서 6호분과는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무덤은 매지권(買地權), 즉 지석이 나타나 피장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출토된 진묘수·양식·순금관제식·귀걸이·목제베개 등 약 2,600여점의 유물들은 연대가 뚜렷하여 무덤문화 비교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무덤의 구조와 주변 지형을 미루어 풍수지리에 의해 무덤이 선정된 듯하다.
부여 지방의 횡혈식석실은 대개 판상석으로 조성된 바 이것을 세분하면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능산리 2호분인데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천장은 터널식인 무령왕릉과 같다. 또 하나는 평사천장(平斜天障)으로서 부여지방 무덤 형식의 주류를 이룬다. 나머지 하나는 능산리 1호분의 벽화 형식으로서 큰 판석을 곱게 물갈이하여 조립하고 평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송산리 6호분처럼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세 유형의 횡혈식 판상석실분은 모두 지하 깊이 내려가기 때문에 배수로에 신경을 썼다. 부여지방에서는 1971년에 화장묘의 유구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불교식으로 화장한 다음 그 채와 뼈를 골호(骨壺)에 담아 땅 속에 묻는 인도식 장법이다. 이러한 화장묘는 사찰 경내 혹은 그 주변에서 자주 발견된다.
백제의 묘제(2)
백제는 고구려유민들이 한강유역에서 세운 나라로 초기의 고분이나 유물들이 고구려의 것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475년 고구려의 압력으로 공주에 천도한 이후에는 중국 남조(南朝)와 친선관계를 맞아 중국문물을 활발히 받아 들였다. 538년에는 부여로 다시 서울을 옮겼으나 곧바로 삼국의 혼란기를 맞게 된다. 묘제도 각각 시대적인 변천을 반영하고 있으며 고분중심지도 세군데에 몰려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식의 복장용석실(複葬用石室)계통 묘제이고 입구가 남향인 점도 고구려와 같다.
① 한성(漢城)시대(3세기초∼475년) : 성동구 광나루, 가락, 석촌동 등 강변충적평야나 낮은 구릉에 산재하고 있는데 적석총과 일반 봉토분이 있다.
적석총은 방형3단의 계단식으로 그 내부를 진흙으로 다져 올라가는 판축법(版築法)을 써서 메웠는데 외형은 환인이나 독로강유역의 기단식(基壇式)적석총과 같으면서 판축·적석등 이질적인 요소가 섞인 것으로 고구려이민들이 현지장법을 가미한 새형식의 무덤이다.
봉토분은 다시 토광묘와 석실묘로 나눌 수 있다. 토광묘는 땅위에 구멍을 파고 목곽을 매장하는 간단한 형식인데 봉토 표면 가까이에 돌이나 기와를 한겹 깔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가락동 2호분은 토광묘의 좋은 예이다. 석실묘는 방형(方形)석실의 남벽중앙에 입구와 이도( 道)가 있는 고구려식 석실묘로서 천장을 나무로 덮은 예도 있는데 서울 중곡동, 화성군 백곡리에 유적이 알려져 있다.
② 웅진(熊津)시대(475∼538) : 공주(公州)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의 구릉에 모여있는데 서울지방이 평지와 구릉에 혼재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 시기에는 적석총이 없어지고 고구려계의 방형석실묘, 장방형석실묘가 등장하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영된 전축분(塼築墳)이 새로운 묘제로 나타나는데 구릉에 위치한 입지조건으로 현실에 배수구 시설을 한 것이 특징적이다.
방형석실묘는 구릉남면경사에 장형평면의 광을 파고 남벽 한쪽에 치우쳐 이도가 있으며 현실의 4벽은 상부에서 내경(內傾)하여 천정부를 좁히고 정상부에 한 장의 판석을 덮는 궁륭형(穹 形)으로 서울지방의 석실분전통을 이어받은 고구려식 단실형분이다.
장방형석실묘는 길이 3m정도의 크기에 남쪽벽에 짧은 이도가 붙은 횡혈식(橫穴式)으로 천정(天井)의 구조에 여러 가지 형태가 보이는데, 상류층의 분묘로 애용되었다가 부여로 넘어간 듯하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전축분은 장방형터널식 현실(玄室)과 이도가 남쪽에 달려 있으며 벽에 등감(燈龕)을 만들었다. 백제와 중국남조와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묘제이다. 송산리6호분은 이 지역의 유일한 벽화전축분으로, 벽화를 그릴 부분에만 진흙을 바르고 사신을 그렸다. 1971년에 발견된 무녕왕릉은 묘지를 비롯한 각종 부장품이 발견된 것으로 백제미술의 수준을 말해주는 자료이며 삼국미술편년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③ 사비시대(538∼660) : 부여지방의 능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인데 구릉남사면에 남북으로 긴 장방형 석곽(石槨)을 쌓고 남벽중앙에 이문과 이도를 가진 석실분이다. 1호분은 남면위에 직접 그린 사신도(四神圖)로 유명하다.
이외에 옹관묘(甕棺墓), 화장묘(火葬墓)가 보이며 특히 영산강하류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대형옹관은 한 봉토안에 합구식(合口式) 옹관 여러 개를 합장하고 관외에 토기류를 부장하고 있다.
백제묘제를 통권하면 횡혈식석실묘로 고구려와 통하고 화남(南南)지방에서 들어온 중국계전축분도 있다. 유물은 거의 도굴되어 없어졌으나 무녕왕릉출토품에서 보듯이 고구려를 통한 북방문화와 중국남조와의 교류를 통하여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신라의 묘제(墓制) (1)
신라 무덤양식의 특징은 돌을 쌓아서 이루는 적석형인데, 이런 적석봉토분 또는 적석목곽분은 경주의 도림지와 그 주변 산기슭, 그리고 안강·창녕 등지에서만 발견되었다. 분구가 거대한 단곽식(單槨式)과 작은 다곽식(多槨式)의 두 종류가 있다. 단곽식은 지면 위에 높이 1m 정도의 단을 쌓고 그 위에 원목으로 목곽을 설치한 다음 사면과 상부를 사람머리 크기 정도의 냇돌로 쌓아 방대형의 적석부를 축조하고 그 표면에 봉토를 덮어서 원형의 분구를 만드는 형식이다. 목관 내에는 목관 하나의 부장품을 담는 상자를 설치하고 목곽과의 공간에 토기 등을 배치한다. 금관종이 이 형식에 속한다. 다곽식은 한 분구 안에 여러 개의 매장시설을 만드는 형식인데 지면을 파고 설치하기도 하고 분구 안에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 적석봉토분에는 시체를 안치하는 주곽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부곽이 따로 설치되는데 대개 부곽은 머리쪽 바깥에 둔다. 경주 시내에는 2기의 원형분이 서로 이어져 표주박 모양을 한 쌍원분이 약 20여기가 있다. 광개토대왕의 호우가 나온 호우총, 은령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석적봉토분은 두껍고 크게 쌓아올려 석실분과는 달리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이들 적석봉토분은 고구려로부터 내려온 적석촉 기본이 되고 5세기경 원형봉토분이 들어오면서 봉토가 입혀져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에 이르면 경주 시내의 평지에 쓰던 무덤은 인근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서 들여온 불교사상, 풍수지리사상의 영향과 중국식의 제도 변혁, 왕권의 수립 등의 영향으로 무덤도 외래형식인 횡구식으로 바뀌게 된다. 또 한 소형의 간단한 석곽묘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신분이 낮은 계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신라의 묘제(2)
신라지역은 청동기, 초기철기시대를 통하여 청동기문화의 선진지역으로서 북방적인 성격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보수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 지역의 고분은 석곽묘와 적석목곽분, 석실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석곽묘는 미추왕(味鄒王)릉 지구에서 보듯이 냇돌로 벽을 쌓고 천장은 몇장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봉토 주위에 호석렬(護石列)을 돌렸다. 경주지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묘제로 적석목곽분이 보급되었을 때에도 일부 계속 조영되었다. 축조방식에 따라 수혈식(竪穴式)과 횡구식(橫口式)이 있는데 전자는 4벽을 먼저 구축하고 관을 위로부터 넣고 개석을 덮은 것이며, 횡구식은 3벽과 개석을 완성한 다음 옆에서 관을 넣고 한 벽을 막는 방식인데 전자가 주로 낙동강 서안의 가야지역에 분포하는데 비하여 낙동강 동안의 신라지역에서는 횡구식이 유행하였다.
적석목곽분은 구덩이를 파고 목곽을 넣은 뒤 목곽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봉토를 씌운 것으로 경주지방 고신라고분(古新羅古墳)의 한 특색이다. 유해가 묻히는 주곽외에 부장품을 넣는 부곽(副槨)이 나란히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곽이 하나인 것을 단곽식, 두 개이상을 다곽식이라 하며 두 개 고분이 겹쳐진 것을 표현분(瓢形墳)이라고 한다. 금관·과대( 帶)를 비롯하여 화려한 부장품을 내는 것은 다 적석목곽분으로 거대한 봉토가 덮여있어 도굴이 어렵기 때문에 부장품이 잘 남아있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호우총,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잘 알려진 고분들이다.
신라말기가 되면 횡혈식석실묘가 등장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된다. 평면방형의 현실을 부정형할석으로 쌓아올리고 4벽을 내경시킨 다음 천정석을 올려 놓았으며 이도가 남벽동쪽에 치우쳐서 붙어있다. 양산 부부총, 경주 쌍상총이 유명하다.
통일신라에는 경주지구에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분묘가 많이 등장한다. 분묘 주위에 12지신상(支神像)을 돌린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호석(自然護石)의 가공호석(加工護石)의 단계를 거쳐 발달한 것이다. 진덕왕릉, 경덕왕릉, 김유신묘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불교의 강한 영향을 받은 묘형식으로 화장묘(火葬墓)가 있다. 주로 경주지방에서 발견되는데 지하 50여 cm에서 아무 구조없이 단독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며 남산에서 발견된 한 화장묘는 석제외함속에 녹유호(綠釉壺)를 안치한 예도 있었다.
가야의 묘제(墓制)
낙동강 유역과 가야지역인 남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토광묘, 장방형 석실묘, 석관묘, 옹관묘 등이 있으나, 이 지역 특유의 무덤 양식은 장방형 석실묘이다. 이 무덤의 위치설정은 삼국의 경우와는 달리 독립된 구릉이나 능선 정상부의 돌출된 곳을 택하였으므로 아래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이룬다. 이 대표적인 예로는 대구 불로동, 고령 지산동 및 본관동, 함안 말이산, 고성 송악동 등의 고분군들이다. 이런 고분들의 분구형상(墳丘形象)은 대부분 원형봉토분이고 전방후원분도 소수 끼어 있다.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좁고 긴 장방형 석실로서 수혈형과 횡구식이 있고 갠돌이나 막돌 등 약간 편평한 돌로 쌓았다. 한 분구에는 대개 2기의 석실이 있는데, '이(二)'자형 또는 '정(丁)'자형으로 배치된다. 어떤 것은 석실 둘레에 수십기의 소형 석실이 배치된 예도 있었다. 이 무덤들 역시 후장으로 토기, 철검, 옥제장신구, 금제장신구 등 다양한 부장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무덤으로는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송악동 1호분, 본관동 및 말이산 고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 시대에는 횡구식석실, 석곽묘, 토광묘, 회곽묘(灰槨墓) 등이 채용되었다.
① 횡구식석실 횡구식석실은 막돌로 연도 없이 축조하였고 평천장이다. 개성부근의 왕릉들과 지방의 귀족묘 등이 대개 이 형식을 택하였다. 여기에는 목관을 사용한 신전장(身展藏)이 많으나 간혹 화장묘도 보인다.
② 석관묘 석관묘의 경우는 슬레이트를 잘 다듬어서 표면에 사신도를 선각(線刻)하고 묘지명을 묻은 경우도 있다. 석곽묘는 소형토광묘와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된 형식으로 지하에 비교적 깊게 장방형의 광을 파고 우두(牛頭)의 큰돌로 1단 또는 2단으로 네 벽을 쌓고 판상석으로 천장을 덮었는데 강화 외포리와 논산 득원리의 석곽묘가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길이 2m, 너비 1m에 높이 60~70cm 정도이다.
③ 토광묘 토 광묘는 전통적인 목관용 토광이다. 석관묘나 토광묘 중에는 머리 부위의 측벽에 부실을 만들거나 광벽에 벽장 같은 감실(龕室)을 만들어 부장물을 넣은 것도 있다.
④ 회곽묘 회곽묘는 고려 말기에 비롯되어 조선시대에 성행한 형식이다. 토광 안에 생석회로 곽을 만드는데 겨우 관을 안치할 정도로 한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어느 형식이거나 분구는 토총이 주류이며 그 형상은 원형 또는 장방형인데 방형의 경우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두른다. 진주 평거동의 정씨(丁氏)네 무덤들이 그 좋은 보기이다.고려의 석실벽화분은 벽면에 회를 발라 고르게 하거나 판상석의 면을 잘 갈아서 그 위에 풍속호, 사신도, 별자리그림 등을 그린다. 특이한 예로 거창 둔마리 고분의 경우는 석실이 동서 2실로 되어 천녀상(天女象)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전대에 비해 두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사사이 더욱 철저해진 점이고, 또 하나는 부장품이 박해진 것이다. 금은옥석으로 만든 장신구가 거의 없어지고 대신 동경과 자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불교의 생활화와 북방계문화의 영향이 증대된 까닭인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전통형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새로운 지도이념인 유학사상으로 보완되어 진다. 석곽묘는 거의 자추를 감추고 석시도 거대한 석곽 또는 석관형으로 변하였다.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토광묘가 일반화하고 고려시대에 이어서 풍수지리사상이 더욱 보편화했다. 부장물로는 백자 등 자기가 주로 애용되었다. 외형은 초기의 원형과 장방형에서 중기 이후에는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하고 묘비가 일반화하며 고관의 무덤 입구에는 신도비가 서게 되었다.
개항이후
이 시대에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매장법을 계승하여 원형토광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기.읍 또는 마음의 공동묘지에 화장장을 설치하여 화장을 권하기도 하였다. 산간오지나 도서 등 일부에서는 매우 드물 게 초분 이라 하여 사체를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두었다가 육탈 후에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으나 당국의 강력한 단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광복 후 특히 6.25 사변을 겪고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무덤형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장방형의 낮은 분구, 분구 둘레에 장대형의 호석을 두르는 등 원형분 일변도에서 모양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내부는 여전히 토광의 전통법이 고수되고 있다. 근래에 국토이 이용과 개발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묘지 문제가 정책상의 한 과제가 되어 가족묘지 또는 개별묘지의 단위면적을 극도로 제한하고 공원묘지의 권장이용도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불교의 영향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 변화로 무덤을 축조하지 않고 화장, 산골(散骨)하는 새로운 장법도 증가하고 있다.
출처: http://hyunsookim.pe.kr |
첫댓글 대공포님 언제부터 무덤에 대한 연구를 했을꼬,대단하외다, 이건 大進에서 필요한자료이구만 퍼담습니다,
귀한 자료를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대공포님, 德岩님 장마철 건강유의하시고 좋은 일 많이 있으세요.
귀중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