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분 아래 석실이 있다. 쌓은 돌은 자연석을 활용했고 깊이 1.6m 폭 2m 넓이 1m 이며 봉분위 자란 소나무가 30년은 넘어 보인다. 석실 앞이 뻥 뚫린 것 보니 도굴범이 파헤친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유적의 흔적 하나는 남아 있겠지........
석실 쌓은 돌에 이끼 낀것보니 도굴된지 50년은 지났겠다. 가공석 없이 자연석 돌로만 쌓은 것 보니 신분이 그렇게 높아는 보이지 않지만 그시대의 생활사 면모는 짐작할 수 있을 자료니까 관할청에서는 추가적 고분군 조사분석 서둘러야 할것이다.
돌덧널 덮개돌도 보이고 토기 파편조각 하나도 현지에서 발견하였다. 해발168,5m구릉지이며 무덤은 동남향 향했다.
장산정상에서 동북쪽끝 지점으로 다시 서북쪽 운봉산 정상을 향하면서 고촌 실로암 중간 산능선 구릉에서 찾은 고분이다.
돌덧널무덤은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성행하였고 굴식무덤이 보편화되는 6세기 중엽에 쇠퇴하였으며, 그 뒤로는 최소형의 배장(陪葬)용으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돌덧널무덤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할석이나 냇돌을 사용하여 벽체를 수직으로 쌓고 뚜껑돌을 덮은 단순한 구조의 단장(單葬)용이므로, 추가장용으로 만들기 위해 폭을 늘리고 천정부를 좁힌 굴식무덤이 급격히 확산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동남부지방에서 가장 성행한 무덤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의식을 베푸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흔적이다. 이스라엘 카프제 동굴 유적에서는 중기 구석기 가족 또는 동료로 보이는 성인 여자와 아이를 의도적으로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성인 여성의 뒤꿈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두 손이 인상적인 이 무덤은 소박하지만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그러다 구석기 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죽은 자를 위한 장식과 사후의 삶을 위한 부장품들을 함께 묻게 된다.
이러한 무덤 가운데 유독 흙이나 돌을 쌓아 올린 분구를 크기에 관계없이 고분이라 지칭한다. 우리 역사 초기의 지석묘·석관묘 같은 무덤의 등장이 계급과 국가의 탄생과 직결된다면, 삼국 시대 고분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웅변하는 기념비적 조형물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수왕, 백제의 중흥 군주 무령왕, 신라를 진한의 패자로 올려놓은 군주들의 시대에 조영된 고분군은 ‘고분 시대’라 부를 만큼 그 시대의 국력과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문왕조에 신라 재상이 장산국[내산국]에 온천을 하러 온 기사가 있는데,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해운대 온천도 동래만큼 유명세를 누렸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장산국은 장산을 중심으로 한 해운대와 기장 일대에 자리 잡았던 소국으로 볼 수 있다. 4세기로 보이는 해운대구 반여동 고분군,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고분군, 철마면 고촌리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참고 : 부산역사문화대전>
첫댓글
뚜겅돌은 없어진지 오래다. 이지역 당시의 무덤 형태 이랬을까? 일제강점기 왜놈들이 도굴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여섯번째 사진의 덮개돌 아래에는 공간이 있다. 살짝 긴장이된다. 무엇이 나올까?
0은 빈자리지만,비어있지 않은 숫자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등으로 자연생태계에도 빈자리가 드문드문 생겨나고있다.무덤의 덮개돌 아래 공간도 오래전의 0과 마찬가지로 빈자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어있지 않으며, 비어있어서도 안된다.
한.일 고대사의 진실 복원해야 할 첫번째 과제로 기장족희 신공왕후의 단서를 찾아보자, 장산국의 후손 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