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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성한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여수룬
은혜를 입은 사람
창세기 6:5~8, 창세기 8:15~22 / 고신일 목사 / 2009-11-22 / 주일 낮 4부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저를 위해 염려하시고 기도해 주심 감사합니다.
아직 온전치 못하지만 오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실 줄 믿습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간 부흥회 때 은혜 받은 말씀 중에 한 본문을 택하여
받은 은혜를 되새겨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노아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 소개된 노아 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물이 마르고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먼저, 홍수심판이 있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창6:7)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며
“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창 1:31)며 만족하셨지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로 모든 사람과 동물을 쓸어버리기로 하셨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역사상 최장기 일기예보(대홍수)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노아홍수에 대해 직접 언급하셨습니다.(눅 17:26~27)
방주는 키가 없습니다.(방향이 없는 큰 배를 ‘방주’라고 말합니다)
방주 크기가 137×23×13m (농구경기장 20개 합친 크기)
300×50×30 규빗(배수량 20,000톤/용적 14,000톤)
‘규빗’은 당시 성인 남자가 팔을 편 상태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신장을 고려할 때 45센티미터가 될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방주의 크기는 규빗의 길이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사람마다 다소 오차가 있습니다.
이 면적이면 양 125,280 마리가 탈 수 있고
현재 생존하는 생물체(포유류, 조류 등) 17,600여종의 암수 한 쌍씩,
즉 35,200마리의 동물을 실어도 약 1/3정도만 차지하는 큰 배입니다.
그만큼 큰 배이기 때문에 짓는데 120년 걸렸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에 66층짜리 아파트를 짓고 있습니다.
2년 동안 땅만 파더니 요즘에서야 골조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 장비로도 땅 파는 데만 2년 걸리는데 …
1950년도에 완성된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20층짜리를 어떻게 지었는지 … 대단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종로에 있던 삼일빌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빌딩을 보고도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 농구장 20개 만한 크기의 배를 지으려 했으니
120년이나 걸렸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배를 지었고
홍수 때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했습니다.
그 홍수 심판에서 노아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홍수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요즘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정확하게 맞습니까?
맞을 때도 있지만 안 맞을 때도 많습니다.
더군다나 12일 후의 일기예보는 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2년 뒤도 아니고
120년 뒤의 일기예보를 하셨는데 … 노아는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습니다.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긴 했지만
완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건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했습니다.
노아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
연약하여 넘어지고 죄 된 세상에 살던 사람이지만 …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을 말합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이 예배의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1절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딛2:11)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성경을 들고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진노의 자녀
그러나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죽음으로 죄 값’(롬6:23)을 치러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요3:16, 엡 2:8)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요 1:12)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 … ”(롬 8:16) 한다고 했고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 ”(롬 8:17)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자녀로 예배드리는 것이 잘나서가 아니고 …
많이 배우고 똑똑해서도 아니고 …
재주가 많고 재물이 많아서도 아니고 …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부름 받은 사람들이
완벽하고 흠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많이 알아서 속회 지도자 하는 사람 별로 없고
잘 가르치는 재능이 있어서 교사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리더십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교회장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목사니까 자주 만나는 분들이 목사님들입니다.
유명한 분들, TV에 자주 나오고 책도 쓰고 …
남들이 보기에는 예수님 사촌쯤 되어 보이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있을 때는 정말 가관입니다.
할 소리 안 할 소리 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는 줄 교인들이 알아?’하고 물으면 “사돈 남 말”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목사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목사지만 하나님께서
‘신일아! 너 목사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기둥교회 담임목사지만
‘기둥교회 담임목사가 네 자리다’라는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이 길로 밀려왔습니다. 달려 왔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데도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저를 목사의 자리로 밀어 넣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어, 독일어, 윤리, 성경 … 등의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교사자격증을 땄습니다.
후에 교육대학원에 들어가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중고등학교 1급 정교사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내 갈 길이 목회의 길 밖에 없다, 죽으나 사나 이 길이 내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목회에 전념해야 하는데 …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도사하면서 … 개척하면서 … 힘들고 지칠 때면
‘선생님 할까?’하는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회를 하면서 겨울에 새벽기도 인도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날씨는 춥고, 밖은 어둡고, 교인도 없는 작은 예배실에
방석만 깔아 놓고 혼자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 ‘목회를 접을까’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은 임용고시가 있어서 선생님 되기가 쉽지 않지만 그때는 쉬웠습니다.
그래서 더 ‘선생이 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갈등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은 영어에 익숙해지고
저도 적응이 되어서 미국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올 것인가, 그냥 미국에 남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 장로님 한 분이(김진환장로)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돌아오실 때 어떤 차를 살까요?’하시더군요.
저는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장로님께서는 돌아올 것을 믿고 준비하신다니 … 그 때 그것도 부담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목회자로 살아갈 것이냐,
대학교 교수로 살아갈 것이냐 … 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그 일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제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한테도
미소를 띠어야 하고 속상하게 하는 이에게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마음에 안들거나,
잘못하면 야단칠 수도 있고, 낙제점수를 주면 되는데
교회에서는 낙제를 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낙제도 없고 … !!
마음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어 잠 못 이룰 때도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를 제게 전해 주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말로는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한번은 제 마음에 기둥교회가 싫어지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쯤 4층 예배실 뒤쪽에 낯선 남자분들이
몇 주 동안 번갈아 계속해서 우리 교회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인데 서울의 어느 큰 교회의 장로님들이
돌아가면서 오셔서 우리 교회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 마음에 ‘더 이상 기둥교회에 있기 싫다, 떠나자’는
생각이 들 만큼 속상해 할 그 때 …
제게 그 교회 담임목사를 초빙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막상 그런 전화를 받고 나니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되나 …’, ‘왜 하필이면 이때 …’
여러분, 저는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이 갈등하고 갈등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난 주간 … 조용히 … 제 자신을 돌아보니 …
그 어느 것 하나하나 … 한 순간 한 순간 …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은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지나온 모든 것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하나 없다’는 찬양이 나왔습니다.
모든 과정 속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잠16:9)
제가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말을 잘해서 …
완벽하고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악평하고 혹평합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 절하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몰아버립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산 잉어로 불리는 ‘코이’(Koi)는 어항에서 5~8cm 정도 자랍니다.
하지만 작은 연못에서는 25cm까지 자랍니다.
더 큰 연못에 넣고 키우면 45cm까지도 자랍니다.
그리고 더 큰 호수에서는 최고 1m까지도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양원석, 『비전의 씨앗을 열정의 땅에 심어라』, 해피비전. 참조>
그런데 사람 가운데도,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값있게 쓰시고자 하는데
스스로 어항에 갇혀서 ‘나는 능력이 없어, 재주가 없어, 돈이 없어’하면서
큰물에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작은 어항에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청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코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작은 어항 속에 가둬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저요, 부족하고 허물 많아 부끄럽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 …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홍수가 멈추고 땅에 물이 마르니까 …
하나님께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새로운 삶은 예배부터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사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앞에 보여진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는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가 흐르는 부요한 땅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홍수가 쓸어 가버렸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아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았을 것입니다.
당장 먹어야 하고 / 입어야 하고 / 식구들이 머물 자리도 있어야 하고 …
그러나 노아는 그 모든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배였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예배는 ‘내 모든 삶의 새로운 시작이 예배’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돈 좀 벌고 나서 …, 건강이 회복되면 … ,
한가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 그때 예배의 자리에 찾겠다고 말합니다.
예배가 먼저가 아니라 삶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천국을 소망으로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일보다 … 무엇보다 …
예배가 우선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처럼 예배를 최우선으로 삼는 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예배를 귀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해를 보내는 것도, 한 해를 맞는 것도 예배하면서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지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통을 하나씩 드렸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힘쓰며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의 글과 예물을 감사통에 넣자고 했습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약 4천 여개의 감사통이 나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온 감사통은 10% 정도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 지난 다음 날 월요일,
재정부원과 직원들, 교육전도사님들이 모여 감사통을 따서 정리했습니다.
눈물로 쓴 감사의 내용과 함께 드려진 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지 동전을 모아 내는 동전통이었습니다.
감사통이 아니었습니다. 동전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면서 정말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느낄 때 …
감사의 표현을 위해 동전을 찾았습니까.
그냥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을 넣은 것 같습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예배자로 살자는 뜻에서 감사통을 나눠드렸던 것입니다.
동전통으로 나눠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한다는 것은
바른 신앙상태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입니다.
노아는 홍수 후 아무 것도 없는 진흙 바닥에서
새로운 시대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노아도 예배를 소홀했을 때 실수를 했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홍수가 끝난 뒤에 … 노아는 포도농사를 했습니다.(창9:20)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고 그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렸다는 기록은 없고
많이 마셔 포도주에 취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농사가 잘 되어 기분이 좋았는지 노아가 포도주를 많이 마셔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창9:21)
여러분, 노아가 벌거벗고 잤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취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지만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목회자 세미나 때문에 속초에 갔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순서대로 방 배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인천의 어느 목사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목사님이 홀랑 벗고 자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아니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쳤더니
자기는 하나라도 걸치면 잠을 못 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같이 쓰자고 해서 2박 3일 동안 같이 있다 왔습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아들 함이 보았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창 9:22)
의도적으로 본 것인지 그냥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봤으면 잘 감춰주던지 다른 사람들이 천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자식이지 …
나가서 다른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하체를 봤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 9:23) 했습니다.
아버지의 실수를 알게 되었지만 …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후에 그 일을 알게 된 노아는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의 아들(가나안-창9:22)을 저주합니다.(창 9:25~27)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후손이 저주 받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함이 아버지의 허물을 얘기한 것 때문에 함의 후손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변 사람들의 허물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감에 불타 그 허물을 지적하고 사람들에게 공개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지적 받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속으로 ‘너나 잘해라’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춰내 지적하기보다
사랑으로 용납하고 덮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함은 아버지가 실수로 옷 벗은 것만 이야기했습니다.
노아가 날마다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실수했을 뿐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 … ”(창 6:9) 했습니다.
노아가 매 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면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은 평생을 의인으로 완전한 삶을 살아온
아버지의 실수를 삶의 전부인양 동생들에게 떠들어 댄 것입니다.
일반적인 논리로 볼 때 함은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본 대로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사실을 말하는 것 … 보이는 대로/본 대로 말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모습 보이는 대로 판단하신다면
저는 이 강단에 서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 …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했습니다.
함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덮지 못했습니다.
사실에 사랑이 더해지지 않으면 함과 똑같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가 왜 그 모양이냐’, ‘목회자가 왜 그래’라고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함입니다.
목회자가 / 신학자가 … TV에 나와 교회를 비난하고,
언론과 하나 되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사랑이 더해지지 않으면 함과 똑같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것 …
지금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 … 지금까지 지내온 것 …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은 사람으로서의 신분을 잘 ~ 지켜야 합니다.
자기만족과 자기 즐거움에 취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
본 사실대로 말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떠들지 말고
그 사실에 사랑을 더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확인하여
은혜 받은 자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혜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으로 세워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하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사는 우리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땀 흘리고 애썼습니다.
노력하여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성도들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십일조, 감사헌금, 일천번제, 건축헌금 …
성도들의 이름과 적힌 기도제목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9년 11월 22일 주일낮4부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