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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의조선왕조실록
신동준
(제Ⅰ권)
1.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조는 역대 군왕의 실록을 만들 때마다 늘 4~5부를 만들어두었다. 고려조 역대 군왕의 실록이 요나라의 침공 및 홍건적의 난 등으로 인해 자주 소실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를 만들어 비공개로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했다.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 이변의 재위 때까지 약 470여 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상세히 기록돼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나라가 패망한 까닭에 사관에 의한 편재가 불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권수로 1,894권이며 글자 수는 4965만 자에 이른다. ~~~여기에는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모든 사안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런 식으로 한 왕조의 모든 사안을 꼼꼼하면서도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2. 조선왕조실록의 현주소
■ 조선왕조실록과 재조 사학
조선사 5본론은 조선의 역사를 모두 5개의 정치시대로 구분한다. 첫째, 태조 이성계 때부터 단종 때까지 진행된 사대부시대, 둘째, 세조를 시작으로 하여 연산군 때까지 진행된 훈신시대, 셋째, 중종 때부터 영종 때까지 지속된 사림시대, 넷째, 영조 즉위를 시작으로 정조 때까지 탕평시대, 다섯째, 순조의 즉위를 계기로 조선조가 패망하는 순종 때까지의 외척시대.
사대부시대는 문벌 귀족 시대를 주도했던 고려 시대의 토호(지방 세력가)들이 개국을 계기로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 정계로 몰려들면서 시작됐다. 이들이 중앙의 조정을 좌우하는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됐다. 위기감을 느낀 세조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계유정난의 궁정 구테타를 일으켰다. 나라와 왕을 위하여 공을 세운 강력한 훈신 세력이 의도적으로 육성되었다. 바로 훈신시대다.
성종의 즉위 후 김종직을 필두로 대거 중앙 정계의 요직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 기묘사화, 명종 때 을사사화 등의 피해를 입었으나 성리학의 통치이념을 독점한 덕분에 정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로써 선조가 등장하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꽃피우게 한 16세기 이후 사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림시대의 개막으로 훈신세력이 사라지자 사림파는 이후 자체 분열의 과정을 걷게 됐다. 동서 분당이 남북 분당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당쟁이 격화되고, 왕권과 왕위는 땅에 떨어졌다. 영조 때에 들어와 왕권을 강화하고자 탕평 정책이 실시되었다. 덕분에 정국은 사림시대에서 자연스럽게 탕평시대로 이행됐다.
탕평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영남의 남인 내에서 독살설이 나돌면서 국론이 양분되었다. 어린 순조의 즉위로 수렴청정은 일상이 되었다. 외척 세력과 결탁한 관원들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부렸다. 헌종 때 터져 나온 진주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민란이 잇따랐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해졌던 60년 정권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다시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로 부활했다. 이것이 바로 외척시대다.
■ 역사적 사실을 멋대로 재단하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대표적인 게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대목이다. 그는 야사에 나온 일화를 근거로 자살설을 제기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기초로 한 타살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종의 죽음은 세조실록과 숙종실록 25년 1월 2일자의 기사에 등장한다. 세조실록에는 자살로 나와 있으나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말은 없다.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슬픔을 못 이겨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6년 가까이 재위한 숙종은 재위 25년인 1699년 1월 2일,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문득 이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나섰다. “단종대왕이 영월에 유배됐을 때 금부도사 왕방연은 고을에 도착해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뜰의 한가운데에 입시 했을 때 단종대왕이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왕방연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왕의 명을 받은 사자인 봉명신인데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왕방연을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 한 사람이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얼마 후 단종대왕이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숙종실록 24년 11월 6일조의 기록이다. “상이 대신을 비롯해 단상들을 빈청에 모이도록 명했다. 노산대군의 시호를 추상 해 ‘순정 안장경순대왕’으로 하고, 묘호는 단종이라고 했다.”
단종이 영월에서 의문사를 당한지 무려 24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기사는 왕실을 포함해 조정 대신들 내에서도 자살설이 아닌 교살 또는 독살에 의한 타살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제1장]
태조
난세를 기회로 조선왕조를 열다.
이성계는 1335년 지금의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 고려 말 부친의 뒤를 이어 무관으로 출사한 뒤 관직이 문하시중 직위에 이르렀다. 우왕 때 우군도통사가 되어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했다. 도중에 위화도에서 회군해 정권을 장악한 뒤 공양왕으로부터 선양 형식을 빌려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즉위 후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창업의 기틀을 다졌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다. 상왕으로 약 10년 동안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비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두었다. 진안대군(이방우)→영안대군(이방과)※정종→익안대군(이방의)→회안대군(이방간)→정안대군(이방원)※태종→덕안대군(이방연). 과 경신공주와 경선공주 두 딸을 두었다. 또한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도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무안대군(이방번)→의안대군(이방석)과 경순공주를 두었다.
■ 난세의 영웅
태조실록에는 이성계의 어린 시절을 이같이 묘사했다.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 등의 용안을 갖췄다. 선태는 영특하고 준수했다. 지략과 용맹은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어릴 때 화령과 함주 사이에서 놀자 북방 사람으로서 사냥하는 매를 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일컫기를 이성계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약관 27세에 동북면병마사가 됐다.
당시 공민왕은 북원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으로 재위 18년인 1369년 12월에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로 산고 동녕부를 치게 했다. 공민왕 20년인 1371년 7월에 지문하부사에 임명됐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실록 총서>에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기록했다. “왜적이 곡식을 배에 운반하는 과정에서 땅에 떨어뜨린 벼의 두께가 한 자에 이르렀다. 포로로 잡은 자녀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2~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깍고 배를 쪼개 깨끗이 씻어서 쌀과 술 등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의 연해 지방이 황량해져 텅 비게 됐다. 왜적의 침공이래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때 이성계는 뛰어난 궁술로 적병의 예기를 꺽은 뒤 마침내 기병술을 구사해 아기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대파했다. <총서>는 당시의 전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왜구의 섬멸로 냇물이 모두 붉어져 6~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만에야 물을 마시게 됐다.” 이성계가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이끌고 나가 영접했다.
■ 중원의 혼란
원래 조선조 개국보다 24년 앞선 공민왕 17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고려가 장차 내몽골의 카라코룸으로 달아난 북원과 연결돼 장성 아래로 쳐들어올까 크게 걱정했다.
명조 주원장은 공민왕 17년 1368년 12월에 사자를 고려에 보냈다. 자신이 원나라 황제를 북으로 쫓아내 중원을 평정했으니 속히 조공하라는 내용이었다. 공민왕은 곧 사자를 보내 즉위를 축하하면서 조속한 이행을 다짐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연호를 폐기하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공민왕 18년 주원장이 고려에 칙서를 보내왔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일을 소홀히 한 채 불교에만 빠져 있다고 질책하면서 산천과 성황에 대한 제례를 소홀히 하지 말고 군비를 잘 닦아 왜구의 침략을 막을 것을 충고했다.
이는 고려를 길들이려는 속셈으로 당시 명나라는 요동을 장악하자지 못한 상태였다. 요동에는 여진족 추장 나하추를 비롯해 원나라 세력이 남아 있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공민왕 18년 고려의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있던 이자춘이 병사하고 아들 이성계가 뒤를 이었다.
■ 쿠테타와 창업
이성계의 집안이 고려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조부 이춘 때이다. 이춘은 첫 부인에게서 이자홍과 이자춘(이성계의 부친)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부인이 죽자 식솔들을 데리고 원나라 관할 하에 있는 쌍성총관부의 화주 영흥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이때 그는 쌍성총관부 총관의 딸인 조씨를 얻어 완자부케와 나하이 등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충숙왕 4년인 1335년 10월에 부친 이자춘과 모친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성계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조부 이춘은 다시 비옥한 함주 함흥으로 이주했다. 이때 간도에 있던 동적 여진족들이 대거 함주로 내려와 살게 됐다. 이들을 ‘오동(간도※두만강 건너편 남쪽의 고유지명) 이르건(백성)’이라고 한다.
이춘이 1342년에 죽고 얼마 안 돼 천호의 지위를 물려받은 장자 이자홍 마저 죽자 내분이 일어났다. 이자홍의 어린 아들 이교주가 대를 잇는 것에 불만을 품은 나하이가 인신을 훔쳐간 것이다. 당시 이자춘이 이를 원나라 관부에 진정을 내며 호소하자 원나라 조정은 이자춘에게 임시로 천호를 맡았다가 장차 이교주가 성장하면 물려주도록 조치했다.
당시 쌍성총관부는 비록 원나라 관할이기는 했으나 몽골인 이외에도 여진족과 고려인들이 혼거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공민왕은 원나라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 일당을 제압하기 위한 방안으로 쌍성총관부의 탈환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춘은 공민왕 4년인 1355년에 고려조의 밀사부사 유인우가 본격적인 쌍성총관부 탈환 작업에 나서자 원나라를 배신하고 고려조에 붙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성계 역시 부친과 함께 적잖은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의 나이 21세였다.
고려조의 입장에서 볼 때 쌍성총관부의 탈환은 원나라에 빼앗긴 지 99년년 만의 쾌거였다. ~~원나라의 ‘천호’에 불과했던 이자춘은 일역 고려조 중앙조정의 벼슬인 사복경에 임명되어 개경에 저택가지 하사받았다.
이자춘은 사복경에 제수된 지 6년 뒤인 공민왕 10년에 삭방도만호겸 병마사에 제수됐다. 당시 어사대에서 상소를 올려 이자춘은 본래 동북면 사람으로 병마사를 삼아서 진수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자춘은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이성계가 부친의 관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 중앙정계 진출 과정
이성계는 신돈이 처형된 공민왕 20년인 1371년 7월에 지문부사에 임명됐다. 당시 최영도 신돈의 탄압을 받아 지방 관직인 계림윤으로 좌천된 후 삭탈관직을 당했다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중앙정계에 복귀해 이성계의 직속상관인 문하찬성사에 제수됐다. 최영은 이성계보다 19세나 위인데다가 고려조의 명문거족이었다.
최영은 우왕 2년인 1376년에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 당시 홍산에서 적을 대파해 철원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우왕은 이해 8월에 이성계를 3도도순찰사에 임명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성계는 뛰어난 용병술로 아기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대파했다. 이때의 무공으로 이성계의 명성이 최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됐다. 이성계는 우왕 8년인 1382년 7월에 동북면도지휘사로 제수됐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시중 이인임이 장악하고 있었다. 최영은 이성계와 합세해 우왕 14년인 1388년 정월에 이인임 일당을 일거에 제거한 뒤 수상의 직무대리인 수문하시중이 됐다.
■ 요동정벌과 4불가론
이때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사자를 보내 쌍성총관부가 있는 철령 이북을 요동 도사의 관할 하에 둘 뜻을 내비쳤다. 이 지역은 개원로에서 관할하던 곳으로 중국인과 여진족, 몽골족, 고려인등이 혼거한 지역이므로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가 관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최영이 회의를 소집하자 백관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최영은 우왕과 함께 요동공벌을 논의했다. 이때 우왕은 최영의 집을 자주 찾던 중 이해 3월에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우왕과 생사를 같이 한 영비다.
당시 이성계는 정도전의 계책을 받아들여 새 왕조를 세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성계는 조정으로부터 요동공벌의 계책을 통보받자 곧 이에 반대하는 상언을 올렸다. 소국이 대국에 거역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게 되는 것이 셋째입니다.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궁노활은 아교가 풍어지고 많은 군사들이 역병을 앓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넷째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4불가론이다.
■ 위화도회군의 결단
이성계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성계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요동토벌에 출정했다. 이들이 압록강을 도강할 즈음 큰 비가 내렸다. 병사가 익사하자 부득불 위화도에 군막을 쳤다. 비가 그치지 않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조민수와 이성계는 곧 공벌중지를 청하기 위해 상언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지금 갑자기 대국을 범하고자 하니 종사과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겁고,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합니다. 이를 몰아 견고한 성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약할 수 없고, 공격하여도 탈취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습니다. 전하가 특별히 회군을 명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내관 김완을 보내어 전진을 독촉하고 나섰다. 화가 난 조민수는 김완을 억류한 뒤 다시 사람을 최영에게 보내 회군을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이 때를 기다려 마침내 이성계가 장병들 앞에서 반란을 선동하고 나섰다. 그리고 군사들을 회군하여 개경으로 향했다.
■ 회군과 황포가신
정도전은 우왕 9년인 1383년 가을에 함주에 있는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이성계의 군대가 기강이 잡히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성혁명이 성공할 것을 확신했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처음으로 만난 지 불과 5년 만인 우왕 14년, 1388년 5월에 구체화된 위화도회군은 조선판 진교병변이다.
■ 최영의 제거
요동토벌군이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가는 데 19일을 소비하고 위화도에서 14일을 머물렀다는 것은 회군의 명분을 찾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토벌군이 회군한 지 불과 9일 만에 우왕을 쫓아내고 개경에 입성한 것도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무려 19일이나 소요한 것과 대조된다. 그럼에도 고려사와 태조실록등은 오히려 이성계가 개경으로 내려올 때 일부러 사냥을 하면서 속도를 늦췄다는 식으로 기록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반란군이 개경에 입성할 당시 조민수는 흑색 대기를 세우고 이성계는 황색 대기를 세웠다. 그러나 최영의 군사도 만만치 않았다. 조민수의 군사는 영의서교에서 최영의 군사에게 크게 패했다. 이때 이성계의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이나 포위하자 최영의 군사들이 궤멸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우왕이 영비및 최영과 함께 팔각전 안으로 숨어들자 곽충보 등이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냈다. 최영은 일단 고봉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등지로 유배됐다가 창왕이 들어선 후 개경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이때의 기록 “태조가 최영에게 이러한 사변은 나라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일어난 것으로 부득이 한 일이오. 잘가시오 라고 했다. 이에 서로 마주 보며 울었다.”
■ 혁명 동지의 축출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한 후 또 다른 군벌인 조민수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위화도 회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도통사였다. 그러나 조민수가 맡은 좌군도통사가 더 위였다. 두 사람은 회군 도중 고려조의 왕씨 종친 중에서 한 명을 전정해 새 군주를 옹립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이루지 못했다. 조민수는 우왕이 근비 이씨에게서 얻은 창왕을 내세웠다. 당시 창왕은 9세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근비 이씨는 이인임의 형제인 이림의 딸이었다. 조민수가 창왕을 천거한 것은 과거 이인임의 천거를 받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명성이 높은 온건파 신흥사대부인 이색과 이승인 등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이성계 일파의 급진적인 개혁방안을 위험시한 까닭에 조민수의 주장을 혼쾌히 받아들였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의 잠정적인 합의로 일단 창왕이 우왕 14년인 1388년 6월에 공민왕비인 정비의 교서를 받는 형식으로 왕으로 즉위했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 일파의 주장으로 곧 보위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됐다. 창왕은 부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 여흥군으로 옮겼다. 이후 우왕이 다시 강릉으로 멀리 간 뒤 창왕 원년인 1389년 12월에 아들 창왕과 함께 살해된 점에 비춰 창왕에 대한 이성계 일파의 압박이 매우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수는 평민으로 강등되어 창녕으로 유배됐다가 이듬해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군사변란의 속성
개국공신 세력은 정몽주의 살해를 계기로 고려를 지지하는 온건개혁파 세력을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1392년 7월에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말 충혜왕 복위 3년인 1342년에 홍복도감의 판관으로 있던 정운경의 3남 1녀 가운데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가 일하던 개경과 외가가 있는 충청도 단양 가운데 한 곳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개경 동남방에 있는 지금의 북한산 부근에서 살았다. 그의 호 삼봉은 삼각산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정도전의 조상은 경상도 봉화의 토착 하급 향리였다. 정운경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그는 젊었을 때 지금의 경북 안동인 복주에서 봉록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정팔품의 사록을 지내던 7세 연상의 이곡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정도전이 고려 말 삼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부르는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부친 때 맺어온 친분 때문이었다.
정운경은 26세 때인 1330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해 상주목 사록에 제수된 뒤 밀성군 지사와 상주목 사록을 지내다가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고려사 양리전의 기록에 따르면, 정운경은 당시 드문 청백리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모계는 집안 배경에 문제가 많았다.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세족 우현보의 일족에 김전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어 자신의 종인 수이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해 딸 하나를 낳았다. 뒤에 김전은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의 처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는 그 딸을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인 우연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땅을 주었다. 우연은 딸을 하나 낳아 정윤경에게 보냈다. 훗날 정윤경은 벼슬이 형부상서에 올랐다. 정운경은 아들 세 명을 두었다. 정도전이 그의 맏아들이다.” 정도전은 젊어서부터 당시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당시 정몽주를 비롯해 이승인, 이존오, 김구용 등 훗날 성리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뛰어난 인물들이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과 함께 공부했다.
정도전은 공민왕 11년에 진사시에 급제해 충주의 사록을 거쳐 정7품인 통례문지후로 승진했다. 이때 공민왕이 신돈을 총애하자 정도전은 이에 실망한 나머지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했다.
마침내 공민왕이 1371년 신돈을 죽인 뒤 대대적인 성균관 개혁을 단행했다.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정몽주와 이승인 등이 교관으로 임명됐다. 이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정도전도 이들의 천거로 정7품의 성균관 박사가 됐다.
정도전은 우왕 9년인 1383년 가을에 지금의 함흥인 함주에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조선 건국 1년 전인 공양왕 3년인 1391년 정월에 종래의 오군 제도를 혁파하고 산군도총제부를 만들었다. 도총제사에 이성계, 좌군총제사에 조준, 우군총제사에 정도전이 각각 취임했다. 정도전은 반혁명 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해 4월, 정도전은 이색 및 우현보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공양왕은 정도전의 말을 좇아 이색을 다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우현보 만은 용서했다. 우현보의 손자인 우성범이 공양왕의 사위였다.
■ 건국공신의 몰락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반대 세력이 최후의 반격을 했다. 대사헌 김주와 형조의 관원들이 정도전을 탄핵하고 나섰다. 공양왕이 정도전을 평양부윤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사헌부와 형조의 탄핵이 거세지자 다시 관직을 박탈하고 귀양을 보냈다. 관직에 있던 정도전의 두 아들도 서인으로 강등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간관을 총동원했다. 정도전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공양왕은 정몽주 등과 협의해 정도전을 영주 봉화에서 체포해 지금의 예천인 보주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이방원이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조영규 등 자객 네댓 사람을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뒤 대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의 시신을 개성의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당시 이방원은 26세였다.
이방원의 과감한 조치는 위기에 빠진 이성계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몽주가 제거되자 공양왕은 곧 정도전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충의군에 다시 봉했다. 이해 7월 17일, 정도전은 마침내 조준 및 남은 등과 합세해 대소신료 52명의 뜻을 담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공양왕으로부터 국보를 얻어낸 뒤 이를 들고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475년간 유지된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고 새 왕조가 탄생했다.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됐다가 다시 강원도 간성으로 옮겨진 뒤, 다시 3년 뒤에 삼척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죽었다.
조선왕조 창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개국 초기에 정책 결정과 관료 인사, 국가 재정뿐만 아니라 군사 지휘, 교서 작성, 역사 편찬 등 새 왕조 경영에 필요한 모든 요직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원과 맛서는 바람에 나이 57세가 되는 태조 7년인 1398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성계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하라고 명하자 남은이 바로 절제사의 사병 혁파를 건의했다. 이는 정도전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었다. 이성계가 이를 혼쾌히 받아들였다.
위기에 몰린 이방원이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거사 날짜를 8월 26일 새벽 2시 무렵으로 잡았다. 실록은 당시 정도전이 서얼 왕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방원이 선수를 쳐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것으로 기록해놓았다.
8월 26일 밤 정도전은 남은과 심효생 등과 함께 왕자들을 죽이기 위해 지금의 서울 중구 중학동인 송현 소재 남은 첩의 집에 모여 모의를 했다. 이성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여러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뒤 병사들을 동원해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이방원은 시위패라 부르는 사병이 이미 혁파되어 군대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처남인 민무구와 심복인 이숙번과 조영무등은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던 중에 궁으로 들어오라는 승지의 전갈을 받고 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궁 안에 등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의심이 들어 궁을 뛰쳐나와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숙번 등은 기병 10명, 보졸 9명, 노복 10여 명을 데리고 정도전이 있는 송현으로 갔다. 당시 정도전은 남은 및 방석의 장인인 심효생 등과 안자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노복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이방원은 보졸들에게 정도전이 있던 집 주위를 둘러싸도록 하고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정도전 등은 집을 뛰쳐나와 피신하다가 이방원의 보졸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참수됐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뒤 삼군부로 가서 화염을 보고 달려온 찬성 유만수와 친군위 도진무 박위를 참수했다. 이복동생 방번도 양화도 부근에서 죽이고, 세자 방석도 궁성 서문 밖에서 참살했다. 심효생등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남은은 몸을 피해 성문 밖으로 도주했다가 이방원의 군사에게 붙잡혀 참수 당했다. 이로써 정도전과 그를 추종하던 인사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는 실록의 기록이 왜곡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정도전이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한꺼번에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록은 무인난 이라고 기록해놓았다. 후세의 사람들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무인난을 계기로 크게 상심한 나머지 이해 9월 5일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에 책봉하고 이해 12월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성계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가 태종 8년에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조선 개국의 역사적 의미
개국 후 불사이군의 명분을 내걸고 몸을 숨긴 고려의 유신들을 적극 설득해 조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국가의 역량을 극대화하지 못한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적잖은 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조에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특히 개경 광덕산 두문동 골짜기에서는 100여 명이나 모여 살았다. 이들의 설득에 실패한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모두 불에 타죽은 까닭에 훗날 두문불출로 칭하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이성계의 집안이 여진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 태조- 권원릉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개의 능이란 뜻이다. 즉 건원릉,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정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왕이라는 의미를 띄고 잇는데, 유일하게 능호가 세 글자이다. 건원릉은 수많은 왕릉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풍수적인 길지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을 심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태조는 자식들과의 관계 때문에 말년이 평탄하지는 못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이 사랑하던 어린 자식들은 물론 정도전을 제거하면서 권력을 차지하자, 태조는 분노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2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은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 태조를 위해 함흥 땅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덮었다고 한다.
제2장
정종
짧은 기간의 왕위를 이양하고 유유자적하다
■ 분경금지법의 시행
정종이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우왕 3년 5월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다. 이성계는 정종(방과)을 시켜 토벌을 명했다. 방과는 부친인 이성계를 닮아 전형적인 무골의 모습을 일찍부터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창업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었던 것은 아니다. 잇단 왕자의 난이 빚어진 뒤 화를 참지 못해 보위를 내던진 부왕의 후사가 되어 짧은 기간 조선조 건국 후 두 번째 군주가 됐다.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 이름뿐인 국왕으로 평가받아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 묘호도 없이 시호인 공효대왕으로만 불린 채 군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 함흥차사와 전곶비전
태종실록 2년 11월 5일조에 따르면 1402년 11월에 안변부사로 있던 조사의가 문득 반란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번과 이방석이 희생됐을 당시 안변부사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인 강련과 접촉하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마침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머물며 태종 이방원을 크게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태조 이성계를 끼고 반란을 일으킬 경우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조사의와 강현은 태종 2년인 1402년에 태조 이성계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했다.
크게 놀란 조정은 곧바로 박순과 송류 등을 파견해 반군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히려 반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해 11월 청천강에서 이숙번이 이끄는 4만명의 진압군과 1만 명의 반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지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조사의는 관군에 체포돼 한성으로 압송된 후 주살됐다.
태종실록 2년 12월 8일조는 당시 사건과 관련해 난이 평정되자 태조 이성계가 곧 한양으로 돌아왔고, 관군을 이끌고 역전한 이천우 등에게 말과 안장 등을 포상한 것으로 기록해놓았다. 항간에 유포된 함흥차사와는 동떨어진 행보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함흥차사는 조사의의 난 때 반군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박순과 송류 등이 죽임을 당한 일이 와전돼 만들어진 항간의 낭설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KBS가 지난 1996년~1998년 방영한 <용의 눈물>은 전곶비전 일화를 각색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사실인양 전해지는 전곶비전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조사의의난이 평정되자 환궁을 결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 이방원이 크게 기뻐하며 직접 교외로 나가 환궁하는 부왕을 영접하고자 했다. 이때 측근인 하륜이 이같이 간했다. “상왕의 진노가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여러 일을 두루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장막을 칠 때 이를 받치는 굵고 높은 기둥을 많이 세우도록 하십시오.” 태종 이방원이 이를 따랐다. 마침내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을 보자 문득 죽은 막내아들 이방석의 얼굴이 떠오르며 울화가 치솟았다. 문득 등에 메고 있던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아들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태종 이방원은 멀리 부왕이 문득 활을 당기는 모습이 보이자 화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이를 본 태조 이성계가 탄식했다.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
그러고는 태종 이방원에게 옥쇄를 건넸다. 이어 태종 이방원은 부왕인 태조 이성계에게 술잔을 올리며 장수를 비는 상수를 하고자 했다. 이때 하륜이 일러준 대로 직접 상수하지 않고, 내시를 통해 상수하게 했다. 태조 이성계가 문득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탁자 위에 내놓으며 길게 탄식했다. “아, 모두 하늘의 뜻인가 보다!” 그러고는 마침내 아들이 태종 이방원을 껴안고 흐느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화살을 날리거나 철퇴를 소매 속에서 꺼내는 장면 등은 사실일리 만무하다. 항간의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얘기가 그럴 듯하게 포장돼 전해졌을 뿐이다.
(전곶비전 일화)
서울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하류에 있는 살곶이 다리는 태조 이성계를 맞이하기 위해 장막을 친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원래 살곶이는 화살로 꿴 꼬치를 뜻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전곶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동쪽을 향해서 쏜 화살이 이곳에 박혔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군을 지을 때 이 다리의 절반을 헐어 석재로 사용하는 바람에 절반만 남았다.
제3장
태종
손에 피를 묻혀 조선왕조 오백 년의 초석을 다지다
■ 위기와 결단
당초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 창왕 원년인 1389년에 창왕을 폐위하고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옹립했다. 폐가입진을 주장한 정도전은 우왕과 창왕 모두 신돈과 반야라는 여종 사이에 태어난 인물인 까닭에 왕씨 후손인 공양왕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구세력은 정도전을 탄핵해 귀양을 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정도전은 이듬해인 공양왕 4년에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이해 4월에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 기회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에 대한 탄핵상소를 주도했다.
공양왕은 정몽주 등과 협의해 정도전을 봉화에서 체포해 지금의 경북 예천인 보주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이방원이 조영규 등 자객 너댓을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뒤 대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의 시신을 개성의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 제1차 왕자의 난
이성계는 계비 강씨를 극히 총애한 까닭에 강씨 소생의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정도전은 세자 이방석의 보도(잘 도와서 인도함)책임까지 맡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이 남은과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을 죽이기 위해 송현 중학동에 있는 남은 첩의 집에 모여 모의를 했다. 이성계의 병이 위독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이방원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뒤 병사를 동원해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이방원의 심복인 이숙번과 조영무 등이 궁으로 들어오라는 승지의 전갈을 받고 궁으로 들어갔다가 궁 안에 등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문득 의심이 들어 속히 궁을 뛰쳐나와 이방원에게 달려갔다. 이들은 곧 보졸과 노복 수십 명을 이끌고 정도전이 있는 송현으로 갔다. 당시 정도전은 남은 및 이방석의 장인인 심효생 등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방원은 보졸들에게 정도전이 있던 집 주위를 둘러싸고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정도전 등이 집을 뛰쳐나오자 모두 붙잡아 그 자리에서 참살을 당했다.
실록은 당시 이성계가 자신이 세자를 잘못 책봉한 실수를 사과하고 그 책임의 일부가 정도전에게 있다고 말한 것처럼 기록해놓았으니 이는 사실과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이려 모의 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일이다. 이 일로 크게 상심한 이성계는 그해 9월에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에 책봉하고 세 갈 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고향인 함흥으로 물러났다.
■ 제2차 왕자의 난
정종의 즉위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종을 둘러싸고 이방우너을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이는 정종이 도성을 개경으로 환도한 데서 비롯됐다. 사실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이 빚어진 한성을 혐오하는 마음이 강했다.
정종이 보위에 오를 당시만 해도보위는 응당 이방원에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방의는 성품이 순후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나 이방간은 학문이 부족하고 성질이 거친데다 야심이 컸다. 그는 이방원을 시기하며 보위를 엿보았다. 이때 박포 등이 그의 야심을 자극하자 어리석은 이방간은 이에 넘어가 곧 사달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 사건을 이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박포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후 자주 이방간의 집을 찾아가 불만을 털어놓으며 서로 친교를 쌓게 됐다. 그러던 중 기회를 틈 타 이렇게 부추기고 나섰다. “정안군이 공을 보는 눈이 다르니 반드시 변이 생길 것인 즉 공이 선수를 쳐야 합니다.
정종 2년 정월 이방간은 휘하의 상장군을 시켜 정종에게 이방원이 먼저 자신을 치려고 해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게 됐다고 고했다. 정종은 크게 놀라 도승지를 보내 군사를 해산하고 궁궐로 들어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이방간 측은 수백 명의 무장병을 이끌고 개성의 동대문을 향해 진입했다. 이방원측은 즉각 영격에 나섰고 개성시내에서 격전이 벌어졌으나 이방원측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이방간은 황해도로 유배되고, 박포가 참형에 처해지면서 마무리되었다. 정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방원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 왕권국가의 수립
제4장
세종
왕패겸용으로 치국평천하의 든든한 기반을 쌓다
■ 제왕이 되기 위한 관문을 인내로 통과한 세종
세종은 대군 시절에 이미 외가인 민씨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큰형인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둘째 형인 효령대군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뒤에는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처가인 심씨 일족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때 그는 침묵을 지켰다. 과연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 굴신인욕과 수불석권하는 인내와 호학의 군주
당초 태종은 장자인 양년대군을 폐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양녕대군은 처신을 조금만 잘했어도 무난히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방자했다. 당시 온갖 역경을 헤치고 보위에 오른 태종은 그 어떤 신하일지라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자신이 있었으나, 경험이 많고 교활한 신하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실수를 미리 엄하게 꾸짖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세자를 페하기로 결단을 내렸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세종밖에 없었다. 태종이 이런 결단을 내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세종의 수불석권하는 자세였다. 한쪽에서ㅕ는 세종이 내심 세자의 꿈을 키우면서 양녕대군과 자신을 차별하기 위해 수불석권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의심하기도 하나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 효령대군
효령대군은 동생인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했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불경을 강론하는 자리를 만들고, 1435년에는 화엄사 중수를 건의했으며 1464년에 원각사를 창건하게 되자 친히 감독을 하기도 했다. 성격이 원만하여 친족들과 관계가 좋았다. 동생인 충녕과도 우애가 깊어, 충녕이 왕이 된 후에도 종종 만나 국사에 대해서 의논했다고 전해진다.
■ 소통의 정치
세종의 치국평천하 리더십은 부왕인 태종과는 정반대였다. 태종이 단호한 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난세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 데 반해 세종은 부드럽고 포용적인 정책결정 과정과 모든 사람과 소통하는 자세로 치세 리더십의 전형에 가까웠다.
민생의 안정을 우선시하고 사람과 생명을 해치는 정책은 아무리 효율성이 높을지라도 뒤로 미뤘다. 그는 매사에 솔선수범하였다. 재위 기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0여 년을 상주로 지내야 했으며, 상중에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서 빗물이 무릅까지 차는데도 빈전의 마당에 꿇어앉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 한글의 창제
한글 창제는 측근인 집현전 학사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세종은 자신의 취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자들의 반발로 인한 불필요한 잡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 왕도와 치국평천하
제5장
문종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부왕을 돕다
■ 짧은 재위 기간의 업적
문종은 부왕인 세종이 홍서하자 곧바로 1450년 3월에 즉위한 뒤 명나라에 책봉을 위한 주청사를 보냈다. 이해 5월 책봉의 고명을 받고 정식 국왕으로 즉위했다.
문종은 조선조의 역대 군왕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당시의 기록이 일부 소실된 군주다. 문종실록 13권 가운데 음력 1451년 12월부터 1452년 1월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11권이 사라졌다.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문종이 처음 대리청정을 맡았을 때, 세종은 40세, 문종은 23세였다. 문종은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성균관에 입학해 철저히 교육을 받았다.
■ 문종의 요절 이후의 조선
문종은 부왕인 세종을 시봉하는 데 모든 정성을 기울인 까닭에 세자빈에게 눈길을 줄 시간조차 없었다고 모는 게 합리적이다. 조선조 역대 군왕 가운데 세자로 있을 때 정실인 세자빈을 2번에 걸쳐 내쫓은 경우는 없다. 첫 번 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비방을 쓰다가 적발돼 폐위되었고,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의 경우 나인 소쌍과 동침하는 등의 동성애 행각이 탄로나 폐위되었다.
결국 세종은 더 이상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고, 세자의 후둥 중 1명을 선택하는 방안을 택했다. e아사자가 바로 단종의 생모인 권씨다. 후에 현덕왕후로 추존된 세자빈 권씨는 세종 23년 1441년 단종을 낳은지 하루 만에 산고로 인해 죽었다. 문종이 아내 없이 보위에 오른 배경이 여기에 있다. 문종은 즉위한 뒤에도 왕비를 간택하지 않아 조선조 역대 군왕 가운데 재위하는 동안 유일하게 단 1번도 왕비를 두지 않은 군왕이 됐다.
바로 이런 사정이 어린 단종이 즉위한 직후 곁에서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웃어른이 없어 왕권이 약화되었고, 결국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보위를 빼앗기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문종은 e아시 40세 가까이 살면서 현덕왕후 권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1남 2녀를 두었다. 유일한 단종도 28세에 얻었으니 그리 늦게 본 것만도 아니었다.
제6장
단종
권신에 기대다가 고립을 자초하다
■ 적장손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조선조의 역대 군왕 가운데 성리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은 문종과 그의 뒤를 이은 단종뿐이다.
■ 유배지의 의문사
세조실록에는 자살로 기록해놓았다. “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러나 선좃리록에는 기대승이 경연 때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전해주었다고 언급하면서 사약을 전한 기록이 의금부에 남아잇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숙종실록은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대신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해놓았다. 숙종실록 25년 1월 2일조에 이를 뒷받침하는 숙종의 언급이 나온다. “군신의 대의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대왕이 영월에 유배됐을 때 금부도사 왕방연은 고을에 도착해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뜰의 한가운데에 입시했을 때 단종대왕이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왕방연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왕의 명을 받은 사자인 봉명신인데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왕방연을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 한 사람이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얼마 후 단종 대왕이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제7장
세조
나라를 위해 비난을 감수하다
■ 세종 시대 말기의 불안한 국제 정세
세종은 죽기 전에 첫째 아들 문종과 둘째 아들 세조를 불러 유언했다. “대개 신하들은 왕이 죽고 난 뒤 형제들의 과오를 공격한다. 내가 죽은 뒤 형제들의 과오를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부디 내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친애의 마음을 위주로 하면 외부에서 능히 이간질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죽은 뒤 세자가 왕이 됐을 때 수양대군을 공격하는 관원들이 많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이같이 당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문종 또한 신병이 위중했다는 점이다.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했다. 국사는 좌의정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의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당시 의정부에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이 있었으나 좌의정 남지는 몸이 아파 쉬고 있었다. 단종은 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중요한 일을 상의했다.
■ 책사 한명회의 보필
수양대군 주변에는 한명회가 있었다. 이현로와 한명회는 어렸을 때 친구였다. 한명회는 청주 출신으로 어머니 이씨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낳았기에 칠삭둥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과거에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다. 그는 이미 문종 때 김종서와 연계된 안평대군 세력이 모반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보고 당시 장원급제해서 사헌부 감찰로 활동하던 권람을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권람이 은밀히 수양대군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집안 노비입니다. 그는 장차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선왕폐하께서 홍서하고 왕위를 이은 임금이 나이가 어리니 나라가 뒤숭숭한 때입니다.” 수양대군이 말했다. “안평대군이 비록 대신들과 결탁했을지라도 모두 재물로 사귄 것이고, 또 모두 용렬한 인재들이다. 일에는 순리와 역리가 있으니 또한 어찌 족히 두려워하겠는가? 그대는 곰곰이 생각해보라.”
얼마 뒤 한명회가 세조를 찾아가자 세조가 한 번 보고 옛 친구와 같이 여기며 물었다. “역대 왕조의 운수는 길기도 혹은 짧기도 했소. 우리나라는 대대로 성왕들의 깊고 두터운 은택이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하고, 주상은 비록 어리다고 하나 이미 큰 도량이 있으니, 잘 보좌하면 족히 수성할 수 있을 것이오.” 한명회가 사례했다. “안평대군이 대신들과 결탁해 장차 반역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아는 것이니, 그의 배반하는 정상을 뒤밟아 그 역모를 드러낼 수 없으니, 비록 즉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해도 또한 이루기 어려울 듯 합니다.”
■ 김종서의 모반
이미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모반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당시 김종서는 단종이 성년이 되기 전에 자신의 지위와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안평대군이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결연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단종실록에는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당일 김종서의 집에 민신과 조순생 등이 모였다. 홍윤성도 참석했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자 김종서가 말했다. “전에 안평대군이 누옥을 찾아와 굳게 맹서했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소. 전에 안평대군이 친애하는 자들이 모두 요로에 앉도록 천거하시오.”
이튿날 밤중에 김조서가 사람을 시켜 홍윤성을 불렀다. 홍윤성이 르르렀을 때 이현로가 뒷문으로 가만히 나간 뒤 홍윤성을 들어오게 했다. 김종서는 비스듬이 누워 있었고 찹 셋은 뒤에 앉았다. 창궁을 잡은 호위 두 명이 그 곁에 서 있었다. 김종서가 홍윤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이같이 말했다. “너를 친자식같이 대접하니 이제 우리들이 논한 것을 누설하지 말라.”
이를 통해 김종서가 이미 안평대군을 끼고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를 통해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실록에는 단종 원년인 1453년 10월 무렵에 거사 일자를 정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창덕궁 수리 지연을 구실삼아 외방의 군인 수천 명을 소집하도록 하고, 비밀리에 황해와 충청 해안 지역의 군사를 징발해 합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탐지한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알리고 신속히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수양대군은 곧 권람과 한명회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음모자들을 제거한 뒤 나중에 단종에게 보고하는 계책을 세웠다.
■ 계유정난의 진실
수양대군의 일행이 얼마 안 된다는 보고를 듣고 김종서는 오히려 칼 두어 자루를 뽑아 벽 사이에 걸어놓고 나왔다. 김종서는 문밖으로 나온 뒤 멀찍이 선 채 수양대군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말했다.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에게 말했다.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이어 종자를 불러 가져오게 했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 사이 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긴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자 양정이 칼을 뽑아 내리쳤다.
조극관과 황보인, 이양 등이 들어오다 촐퇴를 맞고 즉사했다. 이어 사람을 보내 윤처공과 조번 등을 모조리 죽였다. 이어 안평대군을 성녕대군의 집에서 잡은 뒤 강화로 압송했다. 이때 수양대군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네 죄가 커서 참으로 주살을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세종과 문종이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양화도에 이르러 급하게 비복을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는 이같이 부탁했다. “네가 급히 가서 김종서 정승에게 때가 늦은 실수를 말해주어라.” 그는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 김종서는 죽지 않았다. 그는 다시 깨어나서 사람을 시켜 돈의문을 지키는 자에게 이같이 고하게 했다.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됐으니 빨리 의정부에 고해 의원이 약을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대군에게 고해 내금위를 보내도록 하라.”
그러고는 곧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는 가마를 타고 돈의문으로 갔으나 들어가지 못하자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었다. 이때 수양대군은 김종서 무리가 살아날 것을 염려해 곧 좌우에 명해 이들을 치게 했다. 결국 김종서는 이들에게 잡혀 죽었다. 김종서 부자와 황보인, 윤처공, 조번, 이현로, 김연 등은 곧바로 거리에 효수됐다. 계유정난은 10월 10일 저녁과 11일 새벽 사이에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단종은 다음날 숙부 수양대군이 정사를 보조하면서 군국대사를 모두 위임받아 처리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에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사를 겸하게 됐다.
계유정난은 단종을 해치려는 역도들을 쳐서 위급한 상황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당시 수양대군은 왕실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속히 정비를 맞아들여 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종이 풍저창부사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송씨는 단종보다 한 살 위로 14세에 왕비에 책봉되어 중종 연간인 1521년에 8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당시 단종과 수양대군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단종이 왕비와 함께 수양대군의 사저를 방문해 연회를 열거나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시행된 사냥대회에 참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유정난 이듬해 2월에 금성대군의 모반 음모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그 전에 화의군을 비롯한 무인들이 은밀히 금성대군 집에 모여 활쏘기와 연회를 연 사실이 있었다. 이는 수양대군을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수양대군은 이를 관대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해 윤 6월에 의정부와 육조에서 금성대군을 엄벌할 것을 요청했다. 금성대군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 하기는 커녕 처족의 딸이 간택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왕비 송씨를 음해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들은 모두 처벌됐다. 이때 단종은 우의정으로 있는 수양대군의 장인 한확 등에게 연이어 발생하는 간당들의 음모는 자신이 아직 어려서 안 팍의 일을 잘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자책하면서, 대임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곧바로 선위가 이루어졌다. 이는 결코 단종애사와 같이 수양대군이 압력을 넣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 위민위국 행보
그렇다면 단종의 선위를 당연시했던 사육신은 왜 2년 뒤에 세조를 제거하고자 한 것일까?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성삼문 등은 신권 우위의 관료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자 상왕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들은 세조가 의정부를 무력화하고 또다시 육조직계제를 도입하는 등 왕구너을 강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성삼문 등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을 때, 세조 음모 사건을 고발한 성균사예 김질과 대질심문에서 내세운 논리는 매우 이율배반적이었다.
세조는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후궁을 한 사람만 둔 군주였다. 세조는 늘 여러 군신과 장수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주색에 탐닉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 성삼문은 왜 세조를 배반했을까?
신숙주는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핵심 책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주야로 학문에 정진한 신숙주는 집현전의 상징이었다. 단종이 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결정적 사건은 세종의 제6자인 금성대군의 모반음모사건에서 비롯됐다. 금성대군을 엄벌에 처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까지 벌할 수 없다며 물리쳤다. 그러나 단종은 두려운 나머지 이를 허가했고 내관을 수양대군의 장인인 한확에게 보내 자신의 임무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맡길 뜻을 전했다.
■ 유가경전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인 성삼문
제8장
예종
왕권 강화를 꾀하다 요절하다
■ 남이와 유자광
예종은 기민한 직감의 소유자였다. 세자 당시부터 병조판서로 발탁된 남이를 위험하게 생각했다. 세조가 지나치게 총애한 면도 있지만 남이 자신의 처신에도 문제가 잇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구성군 이준을 세조가 총애하자 견제하는 말을 하다 세조에게 누구와 의논했느냐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직후 병조판서 남이를 의산군 겸사복장으로 강등시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후에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자 심문 끝에 죽였다. 흔히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래 유자광은 정2품을 지낸 지중추부사 유규의 서자였다. 유규는 아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 유자광과 한명회
한명회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주살할 때 살생부를 만들어 반대파들을 궤멸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나아가 유승지로 잇을 때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하려는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해 당대 최고의 공신이 됐다. 유자광은 예종이 즉위한 지 겨우 한 달여 만에 일어난 남이의 모반 사건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유자광을 간신으로 알고 있다. 무고한 남이 장군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다.
■ 부전자전의 세조와 예종
예종은 여러모로 부왕인 세조를 닮았다. 결단력과 추진력 등이 그렇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배후에 한명회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행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독살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비춰 이는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실록의 기록에는 예종이 홍서하기 며칠 전부터 지병이 악화돼 잇달아 병문안을 받은 것으로 기록해놓았다. 예종이 홍서 했을 때 겨우 20세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조 역대 군왕 가운데 사실상 가장 단명한 군왕에 속한다.
■ 예종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9장
성종
모후와 권신에 둘러싸인 가운데 조선왕조를 완성하다
■ 강력한 왕권 위에서 치세를 구가한 성종
성종은 조부인 세조가 만들어놓은 탄탄한 왕권 위에 성세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의 치세가 태종이 다져 놓은 강력한 왕권 위에서 꽃을 피운 것과 같다.
■ 공경대부는 물론 상인과 노비까지 사치에 빠진 조선사회
■ 성리학을 숭상하면서 한편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던 사대부들
■ 왕비의 폐출과 사사
성종실록 10년 에 나오는 성종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윤씨(연산군의 생모)가 단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폐출된 배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중궁의 일을 여러 경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 중궁의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궐 안에는 후궁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 방에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근자에 침실을 따로 하고 스스로 새로워질 것을 바랐으나 그래도 고치지 아니했는데 능히 허물을 뉘우치겠는가? 만일 허물을 뉘우칠 기미가 있다고 하면 내가 어찌 감히 폐한다고 하겠는가?”
이날 대신들은 윤씨의 폐출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으나 성종의 의지가 워낙 강한 데다 화를 내며 자리를 뜨는 바람에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윤씨는 자신의 폐출 문제가 거론된 지 반나절도 안 되어 승정원이 마련해준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쫓겨났다.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윤씨를 폐출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윤씨의 사소한 잘못까지 빠짐없이 언급한 대비들의 언문 의지에도 이런 얘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당시 대비들의 증오 대상은 윤씨에 그치지 않았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처 역시 윤씨가 폐출된 지 겨우 두 달 만에 안순대비의 극성에 쫓겨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제안대군은 두 번이나 정실부인을 쫓아냈다가 결국 첫째 부인과 다시 결합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 성종은 윤씨를 왜 미워했나
친정으로 쫓겨난 윤씨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음이 틀림없다. 끼니를 제때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씨가 친정으로 쫓겨난 지 다섯 달이 됐을 때 윤씨 집에 도둑이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아주 냉담했다. 대비들은 윤씨가 폐출된 뒤에도 윤씨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불안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씨는 시가로 쫓겨난지 3년 만에 사약을 받았다.
■ 신권의 본산 홍문관
왕권이 극도로 약화된 가운데 신권 세력이 통치권을 장악하는 관행이 고착화할 경우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부 지배층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세종이 치세하면서 신권 세력이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세종이 태종 때 형성된 공신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집현전 출신 소장 신권 세력을 육성한 결과였다.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출신 인사들 대부분이 세종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어린 단종을 지키려 했다.
세조는 즉위 초부터 신하의 신분으로 왕을 협박해 왕위에 올랐다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단종 복위 사건이 터지자마자 집현전을 가차 없이 철폐했다. 집현전을 계속 유지할 경우 자신의 재위 기간은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왕통의 정통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성종이 집권하면서 예문관의 일부 기능을 독립시켜 집현전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을 개설한 데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홍문관을 중심으로 성종 때 떠오르기 시작한 소장 신권 세력은 세종 때 등장한 집현전 출신 소장 신권 세력과는 여러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세종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리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신진기예들이 든든한 지역 기반을 토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원래 홍문관은 왕의 경언을 전담하기 위해 발족한 전문 연구 기관이었다. 성종이 홍문관을 설치해 소장 신권 세력을 적극 양성하고 나선 것은 세조 때 형성된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 왕권에서 신권으로 본격적으로 이동하는 통치세력
제10장
연산군
태평세에 풍류를 즐기다 폐위되다
■ 군왕과 풍류
■ 의도된 왜곡
연산군은 태어날 때 아주 운이 좋았다. 그가 태어나기 세 달 전에 생모인 윤씨가 후궁에서 중궁으로 발탁됐다. 윤씨는 2년여에 걸친 시험 기간 중 대비들에게 가장 좋은 점수를 얻어 드디어 비어 있던 중궁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네 살 때 생모가 쫓겨난 데 이어 일곱 살 때에는 생모가 사약을 받는 고통을 겪었다.
연산군은 자신이 네 살 때 일어난 생모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성장했다. 이는 연산군이 어느 정도 장성할 때까지 중종의 생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면서 컸음을 시사한다. 연산군이 비로소 자신의 외가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부왕인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 부왕의 묘지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연산군일기 1년 3월16일조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길고해 놓았다.
“왕은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판봉상시가 윤기견이란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 부사 윤호를 윤기견으로 잘못 쓴 것이 아니냐? 고 했다. 승지들이 아룁기를, 이는 실로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라고 했다.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
윤호는 중종인 진성대군의 외조부이고, 윤기견은 연산군의 외조부이다. 연산군은 즉위할 때까지 자신의 외조부가 윤기견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그 사실을 알고 다음 날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 사림의 왕권 견제
연산군이 즉위할 당시, 성종 때부터 키워 온 사림 세력의 위세는 왕권을 위협할 만큼 막강했다.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이들 신권 세력의 도전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마침내 재위 4년째 들어서 김종직을 추종하는 사림세력은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왕통을 부인하면서 왕권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고 나섰다. 무오사화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당시 이 사건은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폐출되어 사약을 받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윤필상을 비롯한 훈구 세력의 이중적인 행태가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이로 인해 훈구 세력은 물론 남아 있던 사림 세력들마저 대거 제거되고 말았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부관참시와 시체의 뼈를 빻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같은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사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는 무오사화 및 갑자사화와 비교할 때 그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훨씬 자의적이고 참혹했다.
■ 조선왕조실록의 제작과 전수
조선조 역대 군왕의 사적이 매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실록은 자신의 사적과 관련한 사초를 읽어본 사람은 단 1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흔히 연산군이 사회로도 불리는 무오사화 때 자신의 사초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본인의 사초가 아닌 증조부인 세조에 관한 사초를 보았을 뿐이다. 그 내용 또한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인 이극돈이ㅐ 발췌해 베껴온 초략을 읽은 것에 불과했다.
편찬 과정은 3e나계로 이루어졌다. 1단계는 실록청을 도청 아래에 둔 뒤 1~3의 방으로 나누는 것부터 시작됐다.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처럼 분량이 많을 때는 방을 6개까지 늘렸다. 2단계는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를 작성하고. 이어 각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를 만드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마지막 3단계는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를 작성한다.
완성된 실록은 5개를 필사해 춘추관과 지방에 있는 4개의 사고에 1개씩 보관했다. 사고 보관 작업이 끝나면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작업을 시행했다. 나중에 초초와 중초의 기록이 누출돼 문제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세검정일대이다. 세초 후에는 세초연의 잔치를 열었다. 광해군일기는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으로 인해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정초본에 없는 기사가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실록을 편수할 때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 한양의 충추관에 1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해 보관했다. 이어 3년에 한 번씩 실록을 사고에서 꺼내 바람에 쐬고 볕에 말리는 포쇄 작업을 실시했다. 사고는 원래 춘추관 외에 충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로 구성돼 있었다. 대사헌 양성지는 세조 12년인 1466년 11월에 이같이 상소했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에 있는 충주, 성주, 전주의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장차 왜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전주 사고는 지리산, 성주 사고는 금오산,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보고나하고 인근 절에 땅을 지급해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중종 33년인 1538년 11월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부터 연산군 때까지 애쓰게 만들어온 실록이 전소되는 일이 빚어졌다. 나머지 사고에서 실록을 꺼내 다시 인쇄하고 필사해서 성주 사고로 보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이로부터 54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참사이다.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됐다. 전주 사고본도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두 유생이 없었다면 진존이 불가능했다. 당시 이들 두 유생은 사재를 털어 전주 사고에 보관돼 있던 책을 wsjqn 내장산으로 옮겨놓은 뒤 번갈아가며 이를 지키다가 관청에 넘겼다. 광해군 때 춘추관,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 5대 사고를 설치한 뒤 전주 사고본을 베낀 실록을 이들 5곳에 비치하였다. 이후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됐다. 도중에 청나라와 관계가 악화되면서 또다시 소실될까 우려돼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옮겼다.
일제 강점기 때 각지의 사고가 철폐되면서 적상상본은 창경원 장서각,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로 옮겨졌다. 3.운동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오대산본은 일제 때 동경제대 도서관으로 빼돌려졌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에는 2종류, 북한에는 1종류의 사고본이 남아 있다. 북한에는 적상산본이 남아 있다.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정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 태백산본은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대 있다. 일본에 남아 있던 오대산 사고본은 2006년 한국에 반환됐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완전무결한 게 아니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의 문종실록 11권이 사실상 파본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인쇄의 실수로 인해 9권에 11권 표지가 입혀진 게 근본원인이다. 이후 복제된 판본 모두 전주사고본을 베낀 것이므로 문종실록 11권은 사실상 완전히 소실된 것이나 다름없다.
■ 연산군은 과연 폭군인가?
연산군일기의 재위 후 3분의 2까지의 기록은 성군의 자질에 손색이 없는 기록이다. 그 이후 기록은 중종반정 세력에 의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으로 기록돼 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위리안치 처분을 받았다. 9월 24일 폐세자와 창년대군 및 양평군 등은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의해 사사됐다. 연산군은 이해 겨울에 학질에 걸려 죽었다. 반정이 일어난 이틀 후부터 반정세력들은 중국에 보낼 사신에게 왕이 바뀐 연유를 고하는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9월 21일에 병으로 인해 연산군이 중종에게 양위했다는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만일 연산군의 병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이 있었고, 세자가 죽은 뒤 상심이 도를 지나쳐 이전의 증세가 다시 도졌고, 이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며 현기증이 나서 방안에 깊이 거처하며 창문도 열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하게 했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폭군은 결국 두 번에 걸친 반정이 보여주듯이 연산군과 광해군 두 사람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제11장
중종
우유부단한 행보로 왕권을 실추시키다.
■ 태생적 한계
현재 중종에 대한 평가는 조광조에 대한 평가와 대조된다.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중종을 무능한 군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종은 현군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무능하거나 간교하다고까지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12장
인종
어린나이에 암투의 희생양이 되다
■ 작서의 변
인종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었다. 인종은 3세 때부터 책을 줄줄 읽어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30세에 즉위 할 때까지 24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았다. 12세 때인 중종 22년 세자 인종의 생일날 동궁 뜰에서 끔직한 물건이 발견됐다. 입과 눈, 귀가 모두 불탄 쥐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 잇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세장의 생년월일과 세자의 급사를 기도하는 취지의 의약 잡술을 꾀하는 방서까지 매달려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이 보고를 받은 중종이 불같이 화를 낸 정황을 이같이 기록해놓았다. “상이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면서 이르기를 동궁에 이런 요괴스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즉시 추문을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궁중 사람들은 경빈 박씨를 의심했다. 그리고 곧 체포돼 심문을 받게 됐다. 박씨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의 종들이 심문 중 매를 맞아 죽었다. 결국 경빈 박씨와 그의 소생 복성군이 폐서인 돼 유배에 처해졌다. 그 후 다시 동궁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생기자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됐다. 중종 28년, 또다시 같은 필체의 방서가 발견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결국 진범이 권신인 김안로의 아들 김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다가 아들 김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안로가 권력을 틀어쥔 까닭에 중종은 q아서를 태워 없애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 중종 36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신원이 회복됐다.
■ 김안로와 척족의 발효
제13장
명종
모후의 수렴청정으로 기를 펴지 못하다
■ 을사사화의 배경
을사사화는 명종이 즉위한 1545년에 대비인 문정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의 세력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의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반정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보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 세력의 위압에 눌려 정실인 신씨를 내쫓은 뒤 반정의 3등공신인 윤여필의 딸을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정경왕후는 원자인 이호를 낳은지 7일 만에 죽고 말았다. 재위 12년인 1517년에 연산군 때 벼슬한 윤순의 조카인 윤지임의 딸을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로 맞아들였다. 당시 사림 세력들은 윤지임의 딸을 두 번째 계비로 맞아들이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인종은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은 까닭에 아주 고단한 tfka을 살아야만 했다. 인종의 나이 20세때 경원대군 이환(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는 자신의 소생을 보위에 올릴 심산으로 인종을 심하게 괴롭혔다. 6세에 세자에 책봉된 뒤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있던 인종은 중종 39년인 1514년에 부왕의 죽음으로 비로소 보위에 올랐다가 재위 8개월 여 만에 요절했다.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의 소윤파는 경원대군을 보위에 올려놓기 위해 인종의 외숙인 윤임의 대윤파와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했다. 윤임은 인종이 즉위하자 유관과 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천거해 기세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람들이 속속 정권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인사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하자 사림 세력도 크게 대윤파와 소윤파로 분열됐다. 사림 세력이 최초로 분열한 경우다. 이에 공조참판 윤원형은 대윤파인 대사헌 송인수 등의 탄핵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인종이 죽고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문정완후가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정의 실권이 대윤파에서 소윤파로 넘어갔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의 형 윤원로는 먼저 대윤파를 제가하기 위해 그들이 전에 경원대군을 해치려 했다고 모함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윤파의 힘은 아직 강했다. 윤원로는 오히려 대윤파인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으로부터 천륜을 이간하는 망언을 한다는 탄핵을 받고 해남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때 예조찬의로 복귀한 윤원형은 세력을 모아 윤임이 그의 조카인 중종의 8남 봉성군 이원에게 보위를 옮기려고 일을 꾸몄다고 대윤파를 모함하고 나섰다. 그러자 소윤파는 일거에 대세를 역전시켜 대윤파를 대거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로서 윤임을 위시해 대윤파로 분류된 유관과 유인숙 등은 모반죄로 유배됐다가 사사되었다. 이것이 을사사화다.
■ 정미사화와 임꺽정
양재역벽서 사건은 명종 2년인 1547년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을 가리킨다. 일명 정미사화로도 불린다.
명종 14년에 조선 최초의 의적이라 부르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수탈이 빚어낸 일종의 민란이다. 원래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의 백정으로 살던 사람이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한 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으며 관아의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활동을 했다. 개성으로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을 살해하기도 했다. 임꺽정은 백성들의 도움으로 관군의 토벌을 피했으나 명종 15년에 형 가도치와 참모인 서림이 체포되자 곧 세력이 줄었다. 임꺽정은 2년 뒤 구월산에서 토포사 남치근이 이끄는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처형됐다. 임꺽정의 난은 당시 지배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는 명종실록 14년의 기사가 뒷받침 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오,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조를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이에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 할 곳이 없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게 됐다.”
조선조는 조정 대신들이 인종과 명종의 시기를 거치면서 서로 편을 갈라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패망의 조짐이 완연했다.
■ 문정왕후의 여인천하
중종의 제2계비로 인종의 계모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조 역사상 여인의 몸으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여인천하의 주인공이다.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더불어 파평윤씨 가문이 배출한 최고 권력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와 함께 조선조의 역대 왕비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명종 때 빚어진 을사사화의 당사자인 윤원형과 윤임의 권력 다툼은 파평 윤씨 가문의 내전 성격이 짙다.
중종 12년인 1517년에 17세의 나이로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문정왕후는 제2계비가 된다. 같은 파평 윤씨 가문인 문정왕후의 입장에서 볼 때 장경왕후는 9촌인 삼당고모다. 세자로 있던 인종의 외숙부 윤임의 천거 덕분에 중전이 됐다. 문정왕후는 어린 세자인 인종을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있었다. 실제로 처음엔 성심성의껏 어린 인종을 훈육했다.
문정왕후는 비록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기는 했으나 집안이 한미했던 까닭에 든든한 배경에 왕자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다. 그러던 중 문정왕후는 34세 때 마침내 고명아들 경원대군을 얻게 됐다. 17세에 입궁해 결혼 17년 만에 첫 아들을 낳은 셈이다. 그러자 태도를 바꾸어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들여 경원대군을 호위하는 당파 세력을 만들게 했다. 그게 바로 세장의 외척인 윤임과 대립한 윤원로와 윤원형이다.
(제Ⅱ권)
제14장
선조
망국적인 봉당정치의 씨앗을 뿌리다
■ 붕당정치가 만개한 선조의 통치시대
선조의 시대는 한마디로 붕당정치의 시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림 세력들이 거대한 붕당을 형성해 왕권을 위협하는 막강한 신권 세력으로 부상했다.
개국 초기에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하면서 신권 우위를 보장한 의정부를 무력화하고, 세조가 사림 세력의 집합소인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태종 때의 육조직계제를 부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두 신권 세력의 발효를 미리 차단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림세력은 연산군 이후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사화로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와서는 유일한 신권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는 기본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다듬어 낸 퇴계와 율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퇴계와 율곡이 출현한 후 조선의 모든 신권 세력은 앞다투어 사림을 자처하며 두 사람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선조때 등장한 서인과 동인은 시간이 갈수록 남인과 북인, 소북과 대북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리보다 당리를 앞세우는 붕당의 망국적인 행태가 드러났다. 국난인 임진왜란은 붕당정치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화였다.
을사사화 당시만 해도 사림 세력은 대윤과 소윤의 외척 간 권력 투쟁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는 사상 최초의 사림 간의 대립으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이었다. 을사사화는 외견상 대윤이 가담한 사림 세력의 몰락으로 종결되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사림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사림이 집단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 대세로 작용했다. 을사사화로 물러났던 퇴계가 중앙 정계로 재차 진출한 것이 사례다. 선조는 이런 대세의 흐름 t고에서 즉위했다.
선조는 대세를 파악하고 나름대로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그의 묘효를 선종에서 선조로 격상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와중에 붕당정치가 횡행하여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왜 다투었을까?
이순신은 원래 정읍현감으로 있었다. 선조 24년 이조판서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순신보다 5세 연하인 원균은 관직과 경력 면에서 이순신의 선배였다. 선조 27년 류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왕은 문득 이렇게 물었다.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게 이닌가?” 류성룡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
이 대화에서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순신을 의심하고 원균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한다. 실제로 선조는 체직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 이순신은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자주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의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는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할 뜻을 밝혔다. 이는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탁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체직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선조 28년인 1595년 8월에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학하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었다. 이때 선조는 원균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자 화를 내며 원균을 옹호했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고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데서 오는 반발로 볼 수 있다.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당시 세자인 광해군의 부름에 불응했는데 이는 선조의 마음에 골을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이해 7월에 이몽학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시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일을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 이원익이 선조에게 “이순신은 경상도 장수 중 제일 훌륭합니다. 원균은 평상시 상관과 닽무이 있기는 하나 전투에는 제법 기용할 만합니다.” 선조가 원균을 옹호하자 이원익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원균은 전공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 군사를 주어 돌격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 군사를 주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선조 29년 일본이 재침첩보를 입수한 조정은 원균을 수사로 다시 기용하자 이순신은 신중하게 대처하기를 건의하자 선조는 “한산도의 장수는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른다”고 한탄했다.
이때 부산 왜영에 방화 사건이 일어나 1천여 가옥과 마곡창고, 군기 등이 타버렸다. 이를 두고 이순신이 저질렀다는 장계가 올라갔다. 이 와중에 선조 30년 다토 기요미사가 있는 15만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날 선조는 이순신에 책임을 물어 신문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비변사에서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순신은 백의종군 하게 되고 원균이 통제사로 임명됐다. 왜란에 패한 원인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 원균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 <선조수정실록>에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 통제사가 된 뒤 무모하게 출전했다가 참패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우너균을 용장으로 묘사해놓은<선조실록>과는 다르다.
15장
광해군
나라를 위기국면에서 구하려했지만 폐위되다.
광해군은 선조8년 후궁인 공빈 김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인 임해군은 난폭하고 방탕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둘째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해산 후 2년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선조는 다시 왕위 39년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로부터 영창대군을 얻게 되자 광해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해군의 즉위는 대북파의 지원으로 성사되었다.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했으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이첨 등이 주장하는 이른바 폐모론으로 인목대비(영창대군의 모친)를 지금의 덕수궁인 서궁에 유폐시켰다.
재위기간 중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와 이귀, 김자점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와 제주로 유배되었으며, 인조 19년 유배지 제주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
■ 반정의 희생양
조선 500년을 통틀어 신하들에게 쫓겨난 군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두 사람 뿐이다.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들과 며느리의 자결과 부인의 참혹한 죽음을 지켜보며 처참한 세월을 보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난길에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궁궐 건축 사업에 병적으로 매달렸다.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은 거의 모두 광해군이 지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초기의 법궁은 경복궁이고, 이궁은 창덕궁이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중 청상과부가 된 생모 인수대비를 포함해 세 명이나 되는 과부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남향으로 지은 것과 달리 창경궁을 동향으로 지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조선의 왕궁은 모두 세 개되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렸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복원사업에 매달려 곧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했다.
제16장
인조
명분론에 휩싸여 군남을 초래하다
선조의 서자인 정원군(원종)과 인헌왕후(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대북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광해군 15년, 서인과 손을 잡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 시켰다.
인조 14년 청태종 홍타이지로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온 병자호란을 일어났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으나 삼전도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냈다.
■ 도덕과 부도덕
인조반정은 국가의 이익보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듬해 일어난 이괄의 난은 권력을 사이에 둔 반정 세력 내부의 다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잘 보여준다.
광해군 때 권세가에게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반정 이후에 이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반정 세력은 일부만을 국고로 환수한 뒤 나머지를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해서 자신들이 나눠가졌다.
■명나라 사신의 횡포
조선은 인조의 계위를 승인받은 대가로 후금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군사 동원의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발발
인조는 재위 14년 교서를 내려 명나라를 위한 대의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절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해 4월에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요구했다. 인조는 전쟁을 선포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청태종은 이해 12월에 여진족군 7만과 몽골군 3만 등 총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한 뒤 거침없이 남하해 보름이 채 안 되어 개성을 점령했다. 인조는 황급히 세자와 원손을 강화도로 피신해 장기전을 펼칠 생각이었으나 청군이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어놓은 까닭에 백관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비밀리에 강화도로 옮기려고 했으나 폭설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산성 안에 병력 1만 3천명과 양곡 1만 4천석이 있었으나 농성 40일 만에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인조 15년인 1637년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신하로 예속됨을 뜻하는 쪽빛 군복인 남융복을 입고 한강 동남쪽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다.
제17장
효종
불가능한 북벌론으로 설욕을 꿈꾸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갔던 봉림대군(효종)은 소현세자가 귀국 후 두 달만에 급서하자, 인조 27년 인조가 죽자 효종으로 즉위했다.
■김자점의 모반
인조 8년 시녀가 되어 궁에 들어온 조씨는 왕의 총애를 받아 종1품 귀인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씨는 인조의 세자빈 강빈(소현세자의 아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조 23년 소현세자가 의문사한 뒤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귀양을 가고 이듬해인 1646년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강빈 처소의 나인들이 잡혀가 심문을 당했다. 그리고 강빈 역시 두달 뒤 사사되었다.
1649년 봉림대군(효종)이 즉위하자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과 정치노선이 달랐던 김자점이 효종을 청나라에 밀고했다가 광양현으로 유배되었다. 사실 인조가 강빈에게 사약을 내릴 때 대신들은 사건이 애매하다며 사사를 반대했으나 김자점만은 이를 지지했다. 강빈이 사사된 후 김자점은 영의정이 되었다. 김자점은 봉림대군이 보위에 오를 때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후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이 그와 거리를 두자 매우 서운하게 여겼다.
효종 2년인 1651년 조귀인(조씨)가 장렬왕후를 저주하는 엽양 사건이 일어나면서 김자점이 자신의 아들 김련과 김식을 비롯해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였던 김세룡 등과 역모를 꾀했다. 조귀인의 장자인 승선군(이징)을 새 군주로 추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김자점은 의금부로 압송된 뒤 아들 김식 및 손자 김세룡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 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공서파는 몰락하고 딤장생과 김집 등의 서인의 청서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 망자존대의 북벌
효종이 재위할 당시 명나라의 잔당들은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조선의 군신들은 전세가 역전되기를 고대하며 명나라의 잔당과 합세해 청의 배후를 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효종은 즉위 직후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다. 효종은 무력을 통한 북벌을 주장했으나 송시열은 군주의 수신을 강조하며 군덕 함양을 주문했다.
청나라가 망할 형세에 있다는 효종의 생각은 현실을 오판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임금의 덕을 함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재로 효종 10년인 1659년 청군이 쇄도하자 명나라의 인명왕은 지금의 미얀마인 비르마로 도주했고 3년 뒤 청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비르마까지 진격해 영명왕을 살해함으로 명나라는 사라졌다.
효종은 송시열의 독대를 가진 지 두 달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원래 효종의 귀밑에는 작은 종기가 있었는데 그 독기가 퍼지면서 급서한 것으로 알려진다. 향년 39세였다.
제18장
현종
예송논쟁을 방관하다 사림에 휘둘리다.
효종 10년에 부왕인 효종이 홍서하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급서한 뒤에 낙향했다. 그후 현종이 잇달아 불렀으나 전혀 응하지 않은 채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송시열은 현종을 두고 덕이 부족하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하는 사람만 등용한다는 식의 비난을 서슴없이 했다. 현종이 갑자기 죽고 14세의 어린 세자 숙종에게로 넘어갔다.
제19장
숙종
당쟁을 부추겨 왕권 유지를 꾀하다
숙종(이돈)은 현종2년인 1661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체세 기간 중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을 이뤄 정치 자체가 실종됐다.
■ 끝없는 예송 논쟁
숙종은 현종과 달리 과단성이 있는 데다가 성정 또한 불과 같았다.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송시열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숙종이 태어났을 때 송시열이 효종의 상중에 잉태된 것을 꺼려 의도적으로 축하 행렬에서 빠지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명성왕후가 훗날 아들 숙종에게 이를 말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숙종의 뜻을 헤아린 남인들이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해 거듭 상소를 올렸고 현종의 장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남인이 송시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송시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이를 갑인환국이라 불린다. 14세의 어린 숙종은 부왕의 장례를 치르는 도중에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정권 교체를 단행하는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 허적의 유악 사건
송시열은 숙종 원년인 1675년에 멀리 떨어진 덕원으로 유배됐다. 남인은 숙적인 서인을 타도하자마자 허적과 권대운등의 탁남과 윤후와 허목 등의 청남으로 갈려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허목과 윤후는 정치 경륜은 없었으나 송시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뛰어난 학문과 식견을 자랑하는 남인의 우상이었다.
허적은 그의 조부 허잠이 사후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시호를 받고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인 궤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연시연을 베풀었다. 당시 도성에는 허적의 서자 허견이 김석주와 김만기를 독살하려한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허적이 두 사람을 초청하기 위해 허견을 다섯을 다섯 번이나 보냈으나 김석주는 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 김만기에게 대신 참석하도록 권했다. 일부러 늦게 도착한 김만기는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남의 잔을 빼앗아 마시면서 돌림잔이 오면 일부러 받지 않았다. 독살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때 마침 비가 내리자 숙종이 특별히 궐 안에서 쓰던 기름 먹인 장막과 아일인 유익을 찾아 허적에게 갖다 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허적이 군왕의 허락도 없이 유악을 가져간 뒤였다. 이를 안 숙종은 대로했다. “옛날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은 하지 못했다.” 숙종은 곧 내관에게 명해 거지 차림으로 허적의 잔치를 정탐하게 했다. 남인들의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고받은 숙종은 즉시 궐문을 닫지 말라고 명한 뒤 훈련대장 유혁현과 김만기에게 패초를 보냈다. 이는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총임하는 신하에게 패를 보내 급히 찾는 것을 말한다. 허적이 김만기를 붙잡고 자초지종 물었으나 김만기는 냉정하게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남인들이 대거 몰려나고 서인들이 다시 구너력을 잡는 환국이 이루어졌다. 이를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 송시열과 장희빈
숙종은 나이가 30세에 가까웠으나 후사가 없었다. 첫째 부인 인경왕후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숙종은 계비로 서인 민유증의 딸을 인현왕후로 a자아들였다. 그러나 인현왕후도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때 장씨가 숙종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명성왕후는 장차 국가의 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염려해 장씨를 궁중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죽자 장씨는 다시 인현왕후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와 숙종과 재회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인현왕후가 장씨의 입궁을 적극 주선한 것이다.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숙종이 장씨를 지나치게 총애하자 서인을 대표해 부교리 이징명이 상소를 올렸다. “장씨는 역관 장현의 친척입니다. 장현은 복선군 등에게 빌붙은자로 귀양가게 됐는데, 그의 근족을 가까이 두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징명은 파직 당하였다. 오히려 숙종은 장씨를 내명부 종4품인 숙원에 봉했다. 이 일로 박세채가 체직되고 그를 옹호하던 영의정 남구만 등이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숙종 14년인 1688년에 숙종이 바라던 왕자 이윤(경종)이 태어났다. 보위에 오른지 15년 만에 본 첫 아들이었다. 장씨의 친정어미가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8인용 옥교를 타고 궁중에 들어오자 지평 이익수가 옥교를 불사르고 옥교를 메고 온 종을 잡아다가 치죄했다. 법제에 따르면 당상관의 처나 며느리가 아니면 옥교를 탈 수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숙종은 분노를 터뜨렸다. “해산할 때를 당해 들어와 보도록 허락한 것은 옛 규례이고, 교자를 타는 것도 또 이미 행하던 전례가 있다.”
옥교를 불사른 사헌부 금리와 조례가 국문을 당한 뒤 죽고 말았다. 숙종은 서인을 몰아내고 왕자 윤을 원자로 정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할 생각이었다. 숙종은 왕자 윤이 출생한 지 세 달도 안 돼 명호를 정했다. 조선 전체를 통틀어 생후 1년도 안 돼 명호를 정한 경우로는 유일하다.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너무 성급하다고 반박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이를 빌미로 삼았다.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로서 나라의 형세가 고단하고 약해 인심이 물결처럼 험난한 때에 감히 송나라 철종을 끌어들여 원자의 정호가 너무 이르다고 했으니 이를 그대로 둘 수 없다. 마땅히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야 할 것이나 그래도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이니 삭탈관직하고 성문밖으로 내치도록 하라.”
이를 계기로 거의 1년에 걸쳐 100명이 넘는 서인이 처벌됐다. 이때 이율곡과 성혼의 문묘출향이 단행됐다.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이 있은지 네 달 만에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었다. 죄목은 투기죄였다. 숙종은 곧이어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위리안치에 처했다. 결국 송시열은 정읍에 옮겨저 사사됐다.
■ 취선당 사건
기사환국 이 일어난 지 5년 뒤 숙종 20년, 노론의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 민씨의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만기의 적장손 김춘택 등이 은밀히 궁중의 환관과 궁녀들과 내통하여 꾀한 일이었다. 당시 숙종은 무수리 출신의 숙원 최씨(영조의 모친)를 총애하고 있었다. 최씨는 훗날 영조가 된 연양군을 낳았다. 당시 장씨는 성은을 입은 최씨가 혹여 자신의 전례를 좇아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 나머지 최씨를 아주 혹독하게 다뤘다. 이를 알게 된 숙종은 대로했다. 당시 서인을 지나치게 제거한 장씨 및 남인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은 내심 민비를 폐위한 일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남인들은 초토화 되었고 서인들이 다시 5년 만에 권력을 되찾았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송시열이 복관되고, 이율곡과 성혼도 다시 문묘에 배향됐다.
초조해진 장씨 일족은 노론 타도를 위한 음모를 꾸몄다. 숙종 22년 장희재의 부친 묘에서 흉물이 발견되었다. 나무인형에 세자의 생념 간지가 적혀 있었고, 무덤에 나무칼이 꽃혀 있었다. 무덤 옆에는 노론인 병조판서 신여철의 집안 노비의 호폐가 떨어져 있었다. 이를 신고한 장희재의 노비 업동을 문초한 결과 전모가 드러났다. 이에 노한 숙종은 이후 장씨의 거처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다.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 역시 분한 마음에 숙종과 왕비 민씨에게 드려야 하는 후궁의 예를 한 번도 실행하지 않았다.
숙종 27년 왕비 민씨가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장씨는 창경궁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다시 중전이 되게 해달라고 날마다 빌었다. 장씨는 누가 물으면 세자의 건강을 기원한다는 식으로 말을 둘러댔다. 이 사실이 숙원 최씨의 고자질로 숙종의 귀에 들어갔다. “희숙빈이 평소 인현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해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장씨가 무술로써 남을 저주한다고 고했다.” 대로한 숙종이 희빈 장씨의 품속까지 뒤져 민씨를 저주한 단서를 찾아내게 했다. 숙종은 장씨를 사사한 뒤 남구만 등 소론 대신들을 대거 파직했다.
■ 대리청정의 파문
희빈 장씨가 사사된 뒤 숙종은 세자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숙종의 마음은 최씨가 낳은 연양군과 연령군에게 기울어졌다.
제20장
경종
당쟁의 표적이 되어 단명에 그치다.
생모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세자였던 경종 이윤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경종의 대리청정은 극도로 신중했다. 생모가 사약을 받고 라이벌 격인 연령군과 연인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리청정은 독배의 암수에 가까웠다.
■ 경종의 불임과 독살설
경종은 즉위 1년 만에 이복동생인 연인군을 세자로 삼은 뒤 대리청정을 위임했다가 재위 4년 만에 급서했다. 항간에는 독살설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제21장
영조
탕평책으로 붕당은 해체되었으나 외척 세력이 창궐하다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들어 붕당 타파를 천명했다. 조선의 역대 군왕 중 유일한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아사시킨 비정한 군왕으로 각인되어 있다. 영조는 생모가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 두 번째 방계 출신이다. 경종의 경우는 생모인 장희빈이 재차 빈으로 강등돼 사약을 받기는 했지만 한때 왕비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나 영조의 생모는 생모 중에서 신분이 가장 낮은 무수리 출신으로 영조를 낳은 뒤 비로소 빈이 된 인물이다.
■ 사도세자의 횡사영조는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했으나 이미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는 각각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두고 있었다. 효장세자가 영조 4년에 10세의 나이로 요절한 까닭에 영조 11년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조급하고 민첩한 성격의 영조와 달리 말수도 적고 행동도 느렸다. 영조가 이런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기자 사도세자는 부왕을 늘 두려워했다. 영조의 질책이 심할수록 사도세자는 일탈된 행동을 하며 더욱 거칠게 반발했다. 사도세자는 주색에 빠져 짐승은 물론이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세자의 비행은 도성의 큰 화제였다. 오직 영조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영조 38년 시정의 건달 나경언이 사도세자와 관련된 고변서를 형조에 제출했다. 형조에서는 좌의정 홍봉한에게 이를 알리자 홍봉한은 곧바로 영조에게 알리도록 조치했다. 이는 홍봉한이 이미 세자를 포기하고 훗날 정조가 된 세손을 보호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영조가 직접 신문에 나서자 나경언은 옷 속에서 한 통의 글을 꺼내 바쳤다. 이 글에는 세자가 시전 상인에게 유흥비를 빌린 사실 등 십여 조목에 걸쳐 세자의 비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영조는 곧 대신들의 청에 따라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세자의 비행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면서 사도세자에게는 자결을 명령했다. 영조실록의 기록이다.
영조는 세자가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시늉만 하자 곧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뚜껑을 닫은 뒤 자물쇠를 채웠다. 영조는 그것도 모자라 널빤지를 가져와 못을 밖고 동아줄로 뒤주를 묶어버렸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힌지 8일 만에 죽었다. 임오화변이다.
제22장
정조
드높은 이상과 자신감으로 도학군주를 꿈꾸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영조가 홍서하자 2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정조는 어렸을 때 생부가 뒤주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목도한 까닭에 신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속 이어갔다.
정조는 재위 13년 그간 미뤄 놓았던 사도세자 묘의 이장을 공식 선포했다. 정조가 이장을 선포한 속셈은 화성 수원의 경영에 있었다. 그는 보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어 자연스럽게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촌하게 하면서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상왕정치를 펼치고자 한 것이다.
제23장
순조
가렴주구를 방관해 패망을 재촉하다
정조 14년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교금압을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했다. 이른바 신유박해이다. 최초의 천국 규모 천주교 박해였고 이때 시파를 모두 숙청했다.
■ 황사영 백서 사건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사도세자와 순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이인)을 비롯한 왕실의 일족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흥국영이 자신의 누이동생 원빈(정조2년에 후궁으로 들어옴)이 왕세자를 낳지 못하고 요절하자 은언군(이인)의 맏아들 이담을 누이동생의 양자로 삼은 일이었다. (※사도세자는 헤경궁 홍씨 사이에서 두 아들<이정, 이산)을 낳았으나 이정은 요절하였다. 후궁 순빈 임씨와의 사이에서 <이인, 이진>과 후궁 경빈 박씨 사이에서 <이찬>을 낳았다). 그러나 이담은 홍국영이 죽은 뒤 역모를 도모하다 일이 탄로될 것을 우려한 홍국영 일당에게 독살되고 말았다.
은언군은 신유박해 당시 처와 며느리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를 받은 일이 발각되어 사사되고 말았다. 그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헌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이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은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 천주교도들이 신유사옥에 대한 전말과 대응책을 비단에 적어 비밀리에 중국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적발된 사건이었다. 백서 사건을 접한 조선 사대부들은 격노했다.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다. 군주를 향햐 부도한 말이 아님이 없고, 국가에 원수가 되려는 계획이 아님이 없다.”
순조가 재위 34년에 죽자 8세의 어린 세손인 헌종이 24대 왕으로 즉위했다. 헌종은 11세가 되던 해 김조근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그가 효현왕후 김씨이다. 이에 따라 임금의 장인이 되어 영원부원군에 봉해진 김조근은 김조순을 대신해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세력과 대립하게 된다. 풍양 조씨의 세력은 순조 연간에 막강한 힘을 과시해 온 안동 김씨 세력을 압도했다. 그러나 헌종 12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내분이 일어나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헌종은 조병구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병구가 대궐에 왔을 때 헌종은 조병구의 죄를 조목조목 따진 뒤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대경실색한 조병구는 황급히 대궐을 빠져 나가다가 수레가 뒤집혀 머리를 땅에 박고 죽고 말았다. 순조 30년 효명세자(요절)가 급서하자 풍양 조씨 세력은 잠시 정계에서 밀려났으나 조만영은 계속해서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세손인 헌종을 보호했다.
제24장
헌종
어린 나이 즉위로 혼란을 야기하다
■ 조선 임금 중 가장 어린나이로 즉위
15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다. 15세 이후에 친정을 시작했으나 실권은 어머니인 신정왕후에게 있었다.
헌종의 치세 때 2차례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건은 헌종 11년 상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헌종은 즉위 15년에 건강이 크게 나빠져 자리에 누웠다. 순원왕후는 헌종의 후사를 왕족 안에서 물색했다. 마침내 덕흥 대원군의 증손인 경원군 이하전이 항렬상 헌종의 조카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후계자로 내정했다.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순원왕후는 곧바로 나인에게 옥새를 가져오게 한 뒤 후계자 발표를 서둘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하전 대신에 은연군의 손자이며 전계군의 제 3자인 이원범이 후사로 낙점됐다. 이는 배후 세력인 안동 김씨의 사주를 받은 데 따른 것이다.
당시 강화도령 이원범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도저히 보위에 오를 수 없는 몰락한 왕족이었다. 그런데도 이원범은 갑자기 일게 평민에서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너래 철종은 가계상 헌종의 아버씨뻘에 해당했다. 철종이 조카뻘인 현종의 뒤를 이으면 풍양 조씨가 계속 정권을 유지할 가능성이 컸다. 안동 김씨 세력은 이를 막기 위해 항렬을 문제 삼아 이원범을 수렴청정을 하는 순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만들어 순조의 뒤를 잇게 했다.
제25장
철종
왕권이 땅에 떨어진 가운데 문득 즉위하다
철종 이변은 순조 31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 전계대원군 이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철종은 생전에 아들이 없었던 까닭에 일찍이 고종에게 보위를 넘기려는 뜻을 내보인 적이 있었다. 철종은 주색을 좋아했다. 철종이 재위 14년에 후사 없이 죽자 헌종의 모후 신정왕후 조씨는 세도가인 안동 김씨를 누르기 위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을 보위에 오르게 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이명복을 자신의 아들로 삼은 뒤 고종 3년 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수렴청정을 거둔 뒤 그간 몰래 모아 둔 30만냥을 각 도에 나눠 주는 형식으로 재정권을 대원군에 넘겼다.
선조 때 처음으로 붕당정치가 등장한 이래 모든 붕당은 구너력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겉으로는 늘 세도의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순조 이래 세도는 허울 뿐인 명분으로 변했고, 소수의 척신 세력이 통치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하는 세도만이 판쳤다. 왕권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린 나머지 민란을 일으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조선을 빠르게 패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왕권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권에 똠짝 못하게 된 이후 사림세력이 주도한 붕당정치가 고착화하면서 300년 가까이 황폐를 면하지 못했다. 그 부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군약신강이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 노선이 왕권과 왕위를 강화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26장
고종
국난의 위기에 엇갈린 행보를 거듭하다
고종 이경은 철종 3년, 영조의 현손인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 민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죽자 12세에 보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후에는 흥성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해 국정을 좌우했다.
조선조는 27대 군왕인 순종으로 끝났지만 사실상 26대 군왕인 고종 때 패망했다. 순종은 재위 3년이지만 일제가 조선합병에 대비해 옹립한 형식상의 군왕에 불과했다. 고종의 통치는 44년간이며 영조통치 52년 다음으로 긴 기간이다.
고종이 등극할 당시 조선은 순조 이래 헌종을 거쳐 철종에 이르기까지 외척세력으로 패망의 길을 치닫고 잇었다 특히 철종 때 김문근의 딸이 철종비로 간택된 것을 계기로 안동 김씨의 마지막 15년간의 세도정치는 극에 달한 시기였다.
철종이 죽자 흥성대원군은 즉시 조대비와 tsh을 잡고 12세의 어린 고종을 보위에 앉혔다.
제27장
순종
허수아비가 돼 패망을 묵도하다
순종은 고종 11년 왕비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 기간은 일본에 의해 한반도 무력 강점으로 사실상 허수아비 군주였다.
(Review)
‘시몬 베유’는 정치구조에서 정당이 갖는 모순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몹시 복잡한 계산을 한 뒤 답이 짝수일 때마다 매를 맞아야 하는 난처한 상황과 같다고 말했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면 답에서 홀수를 얻으려고 애를 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오히려 짝수가 아닌 곳에서도 짝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단적 정념이 개인의 사고까지도 변질시킨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사색당파다. 정쟁이 감정싸움으로 변질되어 서로를 모함하고 헐뜯다가 결국에는 국력이 쇠약해지는 해악이다. 개국 초기에 사대부 시대에 이어 나라에 공을 세운 훈 신세력이 주도했으나 이후 사림세력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서로 부딪치면서 강력한 왕권은 힘을 잃었다. 이후 사림세력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며 선조 때부터는 소위 붕당정치가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소북과 대북 등으로 분열되면서 국리보다는 당리를 앞세우는 망국적인 행태가 노골화되고 조선조가 패망하기까지 외척들의 패권 다툼까지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권수로 1,894권이며 글자 수는 4,965만 자에 이른다. 여기에는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모든 사안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러나 사실들 하나하나에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연이 있다. 역사가는 확인된 사실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사연들을 유추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역사의 기록은 마치 생선 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이라면 역사가는 그 생선으로 갖은양념을 더해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대중은 이러한 역사 서적에서 역사의 진실보다는 더욱 문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 책 <조선왕조실록>은 두 권으로 조선조 27대 왕들의 왕위 계승과 치세 중 겪게 된 중요 사건들을 요약해 놓았다. 장황하게 스토리 위주로 흥미를 주기보다는 핵심 주제별로 구성되어 역사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에 집합적 정념이 작용하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다. 집합적 정념은 옳지 못한 일에도 동의하게 만들고 둘, 넷, 다섯으로 갈라지면 나라는 더 여럿의 집단으로 찢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진실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서로 싸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요즘 들어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높아지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정치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형국이 되었다. 서너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으레 정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고 친구 간의 카톡방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분열이 일어나고 카톡방이 깨어지는 경우도 있다. 국회 찬반투표를 하는 전광판을 보면 어떻게 저런 현상이 벌어질까 놀랍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형국을 두고 서로 모함하고 헐뜯던 지난 역사를 들어 한탄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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