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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육에서 난 것과 영에서 난 것
― 몸의 눈에서 생명의 눈으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요한복음 3:6
또 요한복음 6장에서는 말씀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요한복음 6:63
이 두 말씀은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몸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을 몸과 물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해서 영과 생명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은 무엇인가?
‘영’은 무엇인가?
그리고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몸이 가치 없다는 뜻인가?
이 문제를 잘못 이해하면 육체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서 읽으면 전혀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1. 니고데모의 질문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예수님은 영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셨다.
바로 여기에서 관점의 차이가 나타난다.
2. 같은 말을 듣고도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예수님은 영적인 탄생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육체적인 출산을 생각한다.
말은 하나인데 해석은 완전히 다르다.
왜 그런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몸만 생각한다면 이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라를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지리적 장소만 생각한다면 어려워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말씀하시는데 건물만 생각한다면 역시 어려워질 수 있다.
3. 육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육’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때로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
때로는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낸다.
신약의 다른 문헌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욕망과 삶의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육은 무익하다.”
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몸은 악하다.”
라고 단정하면 지나치다.
예수님 자신도 몸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셨고, 사람의 몸을 치유하셨으며 배고픈 사람을 먹이셨다.
몸을 무가치하게 여기셨다면 이런 행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4. 몸은 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다.
몸은 소중하다.
몸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경험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걷고,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다.
그러므로 몸을 돌보는 것은 생명을 돌보는 중요한 일이다.
몸을 무시하는 것이 영적인 삶은 아니다.
5. 그렇다면 “육은 무익하다”는 것은
요한복음 6:63은 그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핵심은 육체를 혐오하라는 데 있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물질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볼 수 있다.
말씀에는 영과 생명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6. 5대 복음서로 읽기
마태복음 ― 목숨보다 더 깊은 생명
마태복음에는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잃고 예수님을 위하여 잃는 자는 얻는다는 역설적인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 역시 단순한 육체적 생존만이 생명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마가복음 ―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재산과 권력과 소유를 모두 얻어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물질적 소유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강한 말씀이다.
누가복음 ―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 누가복음 12:15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생명과 소유를 분명히 구별한다.
돈이 많아지면 생활 조건은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돈의 양이 생명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 영과 생명
요한복음에서는 영과 생명의 언어가 특히 강하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 있다.
도마복음 ― 우리는 빛에서 왔다
도마복음 50에는 제자들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빛에서 왔다.”
고 대답하라는 취지의 말씀이 전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기원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다.
영적 기원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로 읽어야 한다.
7. 몸의 눈으로 보면
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차이가 먼저 보인다.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부자와 가난한 사람.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건강한 몸과 병든 몸.
나와 너.
이 차이들은 현실에 존재한다.
문제는 그 차이가 곧 생명의 가치 차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8. 생명의 눈으로 보면
생명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것이 보인다.
모두 살아 있다.
모두 숨을 쉰다.
모두 아픔을 느낀다.
모두 사랑받기를 원한다.
모두 죽음이라는 신비 앞에 서 있다.
이 자리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생명의 높낮이를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무고저(無高低)**라고 표현해 왔다.
생명의 존엄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묵상이다.
9. 주객이 없는 생명
나는 또 생명을 **무주객(無主客)**이라는 말로 묵상해 왔다.
물질 세계에서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한다.
나와 너를 구분한다.
그 구분은 현실 생활에 필요하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까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을 오래 묵상해 왔다.
생명의 깊은 자리에서는 나와 다른 생명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섬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더 큰 생명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영성적 관점이다.
10. 일체동일이라는 묵상
나는 이를 **일체동일(一體同一)**이라는 표현으로도 정리해 왔다.
모든 사람이 외형적으로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생각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 너머에 있는 생명의 존엄에서는 하나라는 뜻이다.
이 관점은 예수님의 하나 됨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11. 영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 요한복음 4:24
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대상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바람을 예로 드신 것도 흥미롭다.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 움직임은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은 영으로 난 사람을 설명하면서 바람의 이미지를 사용하신다.
12. 영과 생명
요한복음 6:63에서는 영과 생명이 매우 가까이 연결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그리고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나는 이 말씀을 통해 영을 추상적인 유령 같은 존재로 생각하기보다 살리는 생명의 차원으로 묵상한다.
영의 열매는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
13.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영적인 사람일까?
예언을 많이 하는 사람?
환상을 보는 사람?
특별한 능력을 주장하는 사람?
그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기준으로 돌아가면 열매를 보아야 한다.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운가?
더 겸손한가?
더 생명을 살리는가?
영적인 삶의 진실성도 열매에서 확인해야 한다.
14. 영과 물질은 적인가
나는 영과 물질을 완전히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몸이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이원론으로 가면 인간의 실제 삶을 부정하게 된다.
우리는 몸을 통해 사랑을 표현한다.
밥을 만들어준다.
아픈 사람을 돌본다.
손을 잡아준다.
따라서 영적 사랑은 물질적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15. 마음과 몸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과 몸도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불안하면 몸에 반응이 나타날 수 있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의학과 심리학 역시 몸과 정신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다만 여기에서
“마음과 물질은 완전히 동일하다.”
라고 과학적으로 확정하는 것과 영적으로 하나의 관계로 묵상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16. 마음과 에너지
나는 오랫동안
마음과 에너지는 하나다
라는 방향으로 묵상해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에너지’라는 말을 사용할 때 특별히 조심하고 싶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는 측정 가능한 과학적 개념이다.
영성에서 사용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비유적·철학적 언어다.
둘을 같은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 구분을 해두면 오히려 우리의 묵상이 더 정직해진다.
17. 의식이 모든 것을 창조하는가
저자는 오랫동안
“의식이 모든 물질과 시공간을 창조한다.”
는 관점을 묵상해 왔다.
이것은 깊은 철학적 질문이다.
그러나 현대 양자물리학이 ‘인간의 의식이 모든 물질과 시공간을 창조한다’는 명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것을 저자의 철학적·영성적 가설과 묵상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 구분이 중요하다.
18. 과학과 영성
과학은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검증한다.
영성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 삶의 근원을 질문한다.
둘은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를 억지로 증명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의 말씀을 양자물리학이 증명했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양자물리학을 성경 구절로 증명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질문과 방법을 존중하면서 대화하면 된다.
19. 몸은 실상의 그림자인가
나는 몸을 ‘실상의 그림자’라고 묵상해 왔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직접 표현은 아니다.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몸은 분명히 현실적이다.
아프면 아프고,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몸만이 존재의 전부인가라는 질문이다.
20. 몸이 나의 전부라면
만약 몸만이 ‘나’의 전부라면 몸이 늙을수록 나는 줄어드는가?
팔을 잃으면 나의 존재도 그만큼 줄어드는가?
기억이 변하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되는가?
이런 질문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제7부록 「나란 무엇인가」에서 이 문제를 더 깊게 다루었다.
21. 예수님은 어느 자리에서 말씀하시는가
여기에서 이 책의 중요한 묵상 하나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영과 생명의 자리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흔히 몸과 물질의 자리에서 듣는다.
이것은 모든 예수 말씀을 설명하는 역사학적 공식이 아니라 저자의 해석적 관점이다.
그러나 이 관점으로 읽으면 여러 어려운 말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22.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예수님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장례를 치를 수는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언어에는 영적 생명과 죽음의 차원이 있다.
23.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지키는 자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육체적으로는 죽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육체적 죽음의 부재만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서도 생명의 더 깊은 차원을 질문해야 한다.
24. 도마복음 1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시작한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 역시 육체적 불사만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죽음’과 ‘생명’을 어떤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25.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은 부활 논쟁의 문맥에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항상 생명이라는 단어에 멈춘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길도 살아 있는 생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26. 빛과 생명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말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서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도마복음 50의 ‘빛에서 왔다’는 표현과도 흥미로운 대화를 이룬다.
나는 여기에서 생명·빛·아버지의 관계를 깊이 묵상해 왔다.
27. “하나님은 빛이시다”에 대하여
한 가지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직접 표현은 예수님의 어록이 아니라 요한일서 1:5에 나온다.
반면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책에서는 이런 출처를 분명히 구분한다.
예수님의 직접 말씀과 후대 신약 문헌의 신학적 고백을 섞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2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유명한 표현도 예수님의 직접 어록이 아니라 요한일서에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깊이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출처를 구분한다고 의미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정확해진다.
29. 저자의 묵상 ― 생명, 빛, 사랑
나는 오랫동안 이렇게 묵상해 왔다.
생명은 빛이다.
생명은 사랑이다.
사랑은 신의 표현이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표현을 종합해 만든 저자의 영성적 고백이지, 예수님의 한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리학적 의미의 빛이나 에너지와도 구분해야 한다.
30. 그리스도와 생명
이 책에서 중요한 질문은 결국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는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칭호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도의 강론』과 오랜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를 내 안의 생명과 참자아라는 방향으로도 이해해 왔다.
이것은 전통적 기독교의 정의와 구별되는 저자의 영성적 해석이다.
31. 생명의 관점이 교만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신적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
이런 표현을 잘못 이해하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높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이 참되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와야 한다.
내 안의 생명이 귀하다면 당신 안의 생명도 귀하다.
나와 당신의 생명에 높고 낮음이 없다면 교만할 이유가 없다.
32. 영적인 깨달음의 열매
어떤 영적 깨달음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예수님의 기준으로 돌아간다.
열매다.
깨달음 이후 더 사랑하는가?
더 겸손해지는가?
더 자유로워지는가?
사람을 더 귀하게 보는가?
그렇다면 좋은 방향이다.
반대로
“나는 깨달았고 너는 모른다.”
“나는 신이고 너는 낮은 존재다.”
라는 우월감으로 간다면 다시 돌아봐야 한다.
33. 관점이 바뀌면 말씀이 달라 보인다
여기에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니고데모는 육체의 출생을 생각했다.
예수님은 영으로 나는 것을 말씀하셨다.
관점이 달랐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물질의 눈으로만 보면 모순처럼 보이던 말씀이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삶으로 가져오기
오늘 사람을 만날 때 외형보다 먼저 생명을 바라보자.
직업보다 생명.
재산보다 생명.
나이보다 생명.
종교보다 생명.
그리고 자신의 몸도 함부로 대하지 말자.
몸은 버려야 할 적이 아니라 지금 생명이 표현되는 소중한 자리다.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자.
“내 몸 안에서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질문하자.
“나는 몸만인가?”
답을 급하게 정하지 않아도 된다.
질문을 품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오늘의 묵상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과 물질의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영을 강조하면서 몸과 현실의 책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생명을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낮추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잠시 머물자.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오늘 몸의 차이를 넘어 생명의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제8장 한 줄 묵상
“몸은 생명이 표현되는 소중한 자리이지만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영과 생명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몸의 차이 너머에 있는 하나의 생명과 그 존엄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수님 말씀으로 성경 이해하기 운동본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