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진영의 필모그래피는 생각보다 빈곤하다. 딱 떠오르는 영화는 '와일드 카드' '달마야 놀자' '킬러들의 수다' 정도. 그러나 정진영이라는 이름값은 훨씬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왜일까?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절대 튀지 않지만 영화 전체를 안정감 있게 잡아주는 역할이 지금까지 나의 캐릭터였다. 이것은 타고난 내 기질이기도 하다.”
인간 정진영이 말하는 배우 정진영의 드러나지 않는 은근함.
“마음대로 하세요.” “좋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진행된 사진 촬영. 그동안 정진영이 가장 많이 했던 세 마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조용한 분위기를 즐긴다는 그를 위한 포토그래퍼의 배려로 스튜디오엔 마치 가을 같은 재즈가 흐르고. 늘 웃는 얼굴뿐인 그는 다음 컷이 준비되는 잠깐 동안이면 어김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배우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관성이 있는데 정진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의바름과 진지함, 그리고 그를 늘 따라다니는 지적인 배우라는 느낌. 여기에 옆집 아저씨(너무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 단어보다 더 좋은 비유는 없다) 같은 편안함이 더해져 정진영이라는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약속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스튜디오에 불쑥 들어와 기자를 놀래키더니, 카메라 앞에 선 피사체로서의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스태프들을 또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민감한 표정들이 한순간에 생겼다 또 사라진다.
사진 촬영 중간중간 웃고 떠들고, 김밥과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소소한 일상에 대해 짤막짤막한 대화들을 주고받는 동안, 처음 만난 사이의 어색함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바로 그 무렵 정진영과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Q 영화 개봉을 앞둔 지금, 흥행과 완성도 사이의 부등호 관계를 솔직히 말하라면?
정진영 이 영화뿐 아니라 내 경우엔 늘 흥행보다는 영화의 완성도에 비중을 둔다. 흥행 자체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개봉을 앞둔 지금으로서는 영화가 어떤 식으로 나올까 나 역시 기대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그는 황산벌의 완성본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감독과 스태프들의 영화 철학에 내가 동의하고 또 재미있는 발상에다 독특한 색깔로 촬영했기 때문에 결과물도 좋을 것이라 예상한다.
Q 지금까지 해왔던 영화들을 비교해보면 주인공으로 앞에 나서기보다는 공동 주연이나 조연이 훨씬 더 많았다. 이번 영화도 박중훈과 공동 주연으로 작업을 했다. 의도된 것인가? 아님 본인 스타일인가?
정진영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주로 영화의 안정감을 잡아주는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앞서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튀지 않으면서 영화 전반적으로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감독님들이 많이 시키고, 또 개인적으로 그런 역을 좋아한다. 난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좋다. 볼을 차주고 배급해주고… 홍명보 같은 그런 축구 스타일을 좋아한다. 골은 잘 넣는 사람이 넣으면 된다. 난 앞에서보다 뒤에서 모든 사물이 더 잘 보인다. 영화 속 캐릭터 말고 내 성격 또한 공격수보다는 수비수 스타일이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Q 배우도 공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생활이 공개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가족이나 사적인 부분에 대해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도 드러나지 않는 걸 선호하는 자신의 스타일 때문인가?
정진영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배우는 공인이 아니고 유명인이다. 공인은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인이라고 한다. 나는 유명인이지만 공인은 아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나는 내 사생활을 노출하길 싫어한다.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노출이 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배우의 가족까지 노출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내 가족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주고 싶다. 시시콜콜 남들이 알 필요는 없다. 아침 방송이나 여성지에서 가족을 출연시키고 싶어하고 집을 공개하길 바라는데 그런 제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사람도 싫어한다는 점이다.
Q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없이 인간적일 것도 같고 무섭도록 냉정할 것도 같다. 진짜 성격은 어떤가?
정진영 예를 들겠다. 나는 작품을 고를 때 빚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세 번 있었다. '교도소 월드컵'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영화는 망해서 거의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신씨네에서 만들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영화배우로 밥 먹게 해준 고마운 영화다. 그래서 신씨네에서 하자는 것은 그냥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와일드 카드' 때는 김유진 감독이 하자고 했다. 그가 하자면 나는 한다. '황산벌'도 마찬가지다. '달마야 놀자' 때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의 작업이라서 그들에게 신뢰가 있었고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난 한번 고마웠으면 한번 또 갚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내게 빚이 없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냉정해진다.
Q 얼굴 얘기를 해서 미안한데…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로 봤을 때, 왠지 노력파 같다는 느낌이다. 연기라는 분야에 있어 이분법적으로 나눌 때, 타고난 파인가? 은근과 끈기파인가?
정진영 사실 연기하는 데 노력을 많이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배우라는 직업으로 먹고살고 그걸로 페이를 받고 있다. 그 페이는 결국 관객이 주는 거다. 관객들이 자신의 소중한 2시간을 쓰고도 또 돈까지 주는데 그것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 영화배우는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엔 내 자신이 선천적인 배우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Q 얼마 전 박신양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는 질문에 '초록 물고기'에서 정진영 씨가 계란 장수로 나왔던 장면을 말했다. 이 질문을 똑같이 던진다면?
정진영 하하하(박신양의 얘기를 해주었을 때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난 '최고' 그런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에 최고라기보다는 놀랐던 장면을 말하겠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나무 자르는 장면.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 자체에도 놀랐지만 그 장면의 표현 자체에 놀라웠다. 연기라기보다 영화에 놀란 것 같다. 그래도 '황산벌'이 최고다(웃음).
Q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것 같다. 자신의 연기를 직접 모니터할 때 어떤 부분이 눈에 가장 빨리 들어오는가?
정진영 촬영이 끝나면 영화 시사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영화의 완성본을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 늘 생긴다. 처음 완성본을 볼 때는 영화 전체를 도저히 보지 못한다. 오직 나 한 명만 보일 뿐이다. 실수나 아쉬운 점만 눈에 들어와 처음엔 괴롭다. 최소 다섯 번은 봐야 영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내 영화를 볼 수 있으려면 1년은 지나야 한다. 나는 내 영화에 대해 객관적이질 못한다. 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영화는 무지하게 좋아 보인다. 눈에 콩꺼풀이 생기는지… 객관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영화 속에 많은 추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좋게만 보이는 것 같다.
Q 새 영화 '황산벌'은 단순한 코미디 영화라고 보면 되나? 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영화라서 아무리 코미디라지만 강한 메시지가 있을 것도 같다.
정진영 '황산벌'은 잘 아시다시피 1,300년 전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가 싸우는 얘기이고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역사를 코미디로 만든 영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시는 바가 재미있는 코미디라는 점일텐데, 그저 단순한 코미디는 아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내용이고, 전쟁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도 들어 있다. 전쟁으로 5,000명이 죽은 얘기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르가 코미디라곤 하지만 그걸 가볍게만 다룰 수 있겠는가?
Q 사극이라는 부담감은 없었나? 갑옷 다이어트를 했다고 들었는데?
정진영 맞다. 옷을 입고만 있어도 체중이 저절로 빠졌다(웃음). 의상이나 기본 복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사극을 찍으면서 감독님의 의도는 예스럽게 찍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대적으로 찍는 것이었다. 지역 감정이라는 문제도 영화 속에 나오는데 그런 것들은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에 굳이 예스러운 척은 안 했다. 역사물이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을 빌렸지만 그런 역사적 상황들이 크게 현대와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인 상황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Q 연출부에서 일하다 배우로 데뷔한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두문불출하고 시나리오만 썼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연기 외 그쪽 분야로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나?
정진영 두문불출하고 시나리오만 썼던 적은 없다. 그땐 할 게 그것밖에 없었다(웃음). 시나리오 쓰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욕망은 있는데 능력이 안 된다. 지금 하라고 하면 배우 그만두고 시나리오 공부만 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건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모르겠다'이다. 그때 시나리오 쓴 걸 보면서 내가 정말 어렸구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Q 연기 외에 인생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몰두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정진영 솔직히 연기 외엔 하는 것이 없다. 일할 땐 일하고, 일 끝나면 집에 가고. 특별히 즐기는 여가도 없다. 운동은 달리기 정도… 운동도 원래 촬영 없을 때만 한다. 난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한다. 성격이 그렇다. 하나 들어가면 다른 건 눈에 안 보이고 또 못한다. 다른 것을 할 정신적 여유가 없어진다. 지금은 쉬니까 그나마 틈틈이 뜀박질도 하는 거다.
Q 앞으로 '황산벌'이라는 새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 한마디한다면?
정진영 영화란 관객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마음대로 볼 권리가 있다. 단,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할 뿐이다. 위험한 요소도 있고. 역사적인 인물들을 희화화하려고 하진 않았지만 다른 각도로 영웅을 그렸다. 쟁쟁한 역사적 인물들이 역사책과는 다르게 나온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침략한 얘기이니깐 그런 민감한 부분도 각각 반응이 다를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지만 어떻게 관객들이 받아들일지 기대가 된다.
Q 영화 촬영이 모두 끝이 났는데, 마지막으로 계획을 묻고 싶다.
정진영 오는 겨울까지 그냥 쉴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나중에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