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四面楚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된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진퇴유곡도 비슷한 말입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로 초(楚)나라의 항우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군에 패하여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었을 때, 사방을 에워싼 한나라 군사 속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크게 놀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점령했다
는 말인가, 어째서 초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하고 슬퍼하였다 한다. 이것은 한나라 고조가 꾸며낸 심리작전으로,
사면초가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분서갱유 焚書坑儒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
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으로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삼고초려 三顧草廬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자기의 사람을 얻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무릅쓴다는 말이다.
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關羽, 張飛 등과 의형제를 맺어 漢室을 부흥하려는 뜻을 품었던 劉備였지만 워낙 세력이 없는 상태
에서 시작한 관계로 늘 쫒겨다니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관우와 장비 같은 장수는 있으나 그들을 지휘하고 군기를
세울 軍師가 없어서 조조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조조에게 쫓기다가 명마 덕분에 목숨을 건진 유비는 길을 잃고
도망을 다니다가 숲 속에서 司馬徽를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비에게 말하기를 伏龍이나 鳳雛 중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느 것이었다. 양양 땅에 사는 제갈공명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유비는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얼마 후에 또 찾아갔으나 공명을 또 외출을 하고 집에 없는 것이
었다. 그러다가 그 해를 넘기고 다음 해에는 공명이 집에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다시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공명이 낮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깨우겠다고 하는 동자를 말려서 그가 잠에서 깰 때 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
로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장비는 집에 불을 놓겠다고 하였지만 관우가 말려서 겨우 진정을 하였는데, 집을 비운 것이나 낮잠을
자는 것 등은 모두 공명의 계략이었다.
세 번째 찾아온 유비를 더 이상 뿌리 칠 수 없었던 공명은 그때부터 군사를 맡아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오나라의 손권과 주유를 설득하여 적벽에서 전투를 벌려 100만에 가까운 조조의 군사를 물속에 장사 지내는 쾌거를
이룬다. 이에 천하를 삼분하여 위, 오, 촉으로 되니 이 모든 것은 유비가 몸을 굽혀 공명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것에서 비롯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