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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김진규의 칠언율시 12首의 구조적‧문학적 고찰, 후편(後篇)>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에 소개하는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칠언율시(七言律詩) 「후편(後篇)」 12수(首)는 앞서 소개한 「전편(前篇)」에 이어, 구조적 구성과 이를 통해 완성되는 김진규 칠언율시의 문학적 특징을 알아보겠다. 「후편(後篇)」 12수(首)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피어난 처절한 외로움’과 ‘이를 선비의 꼿꼿한 지조로 버텨내는 비장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3가지 구체적인 감정의 흐름으로 묶어볼 수 있다. 먼저① 육체적 고통과 쓸쓸함이다. 가시울타리에 갇힌 채 병들어 누워 지내고, 매서운 초겨울 추위를 홀로 맞이하면서 느끼는 유배객의 생생한 고독과 서글픔이 깊게 깔려 있다. 이어② 혈육을 향한 지극한 향수다. 1692년 임신년 새해 첫날(임신원일),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편지를 쓰는 모습에서 멀리 떨어진 혈육을 향한 피맺힌 그리움과 애틋함이 정점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③신념을 지키려는 숭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몰아치는 절망 속에서도 원망에 침잠하지 않고, 선비로서 걸어야 할 올바른 길(사도)과 자신의 학문적 지조를 되새기며 정신적으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단단한 의지가 흐른다. 결국 후편 12수는 외딴섬의 겨울이라는 척박한 시공간 속에서, 가족을 향한 짙은 그리움을 견디며 선비로서의 존엄을 지켜내려 했던 지식인의 눈물겨운 내면 고백이다.
○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선생의 거제도 유배문학 중 칠언율시(七言律詩) 「후편(後篇)」 11편 총 12수(首)는 유배 생활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편(前篇)의 일상적 관조와 사계절의 풍경을 넘어,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심화, 가혹한 계절적 시련(겨울), 그리고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실존적 고뇌를 격조 높은 근체시의 양식으로 담아낸 유배문학의 절정이다. 이에 후편 12수의 구조적 구성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문학적 특성을 살펴보겠다.
먼저 (1) ‘칠언율시 「후편(後篇)」 12수의 구조적 구성’은 이러하다. 「후편(後篇)」 12수는 유배객이 마주한 '겨울의 척박한 현실(시련)', '절망 속의 고독과 성찰(내면)',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지식인의 실존적 태도(시간)'라는 3가지 축을 따라 전개된다.
*첫째로 [육체적 시련과 겨울의 곤궁]이다. ⑪ 와음(누워서 읊조림) → ⑫ 초동견(초겨울의 시름)민 → ⑬ 만제 (2수)(방황하는 마음) → ⑮ 이하(울타리 아래의 삶)
*두 번째로 [극한의 고독과 도(道)의 성찰]이다. ⑭ 독립(홀로 서서) → ⑯ 효(새벽의 사유) → ⑰ 만음(정제되지 않은 읊조림) → ⑱ 유감(감회) → ⑲ 사도(선비의 도리)
*세 번째로 [신년의 전치와 실존적 고뇌]다. ⑳ 임신원일 시일작가서(1692년 새해 첫날, 고향에 쓰는 편지) → (21) 인일(정월 초이레의 고독)이다.
이어 (가) 육체적 시련과 초겨울의 곤궁(⑪, ⑫, ⑬, ⑮)이다. ⑪ 「와음(卧吟)」과 ⑫ 「초동견민(初冬遣悶)」에선, 병이 들거나 지쳐 누워서 시를 읊고(와음), 초겨울(초동)이 닥쳐오자 배소에서 시름을 달래는(견민) 등 유배객이 마주한 육체적 한계와 계절적 시련이 직접적으로 투영된다. ⑬ 「만제(漫題)」 (2수)와 ⑮ 「이하(籬下)」에선, 생각나는 대로 적은 시(만제) 속에 위리안치된 가시울타리 아래(이하)에서의 비좁고 답답한 환경과 고독을 시각적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나) 극한의 고독과 선비로서의 성찰(⑭, ⑯, ⑰, ⑱, ⑲)이다. ⑭ 「독립(獨立)」과 ⑯ 「효(曉)」에선, 홀로 서서 멀리 육지를 바라보는 고독(독립)과 깊은 새벽에 홀로 깨어 느끼는 정신적 각성(효)을 그렸다. ⑰ 「만음(漫吟)」과 ⑱ 「유감(有感)」, 그리고 ⑲ 「사도(斯道)」에선,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회(有感)를 가감 없이 읊조리며(漫吟), 당쟁으로 귀양을 왔을지언정 자신이 추구하는 유교적 선비의 정도(斯道)를 잃지 않겠다는 확고한 정신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또 (다) 신년의 마주함과 실존적 고뇌(⑳, (21))다. ⑳ 「임신원일(壬申元日) 시일작가서(是日作家書)」에선, 1692년(숙종 18년) 새해 첫날(원일)을 유배지에서 맞이하며,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가서)를 작성하는 애틋한 정서와 세월의 무상함이 절절히 배어 있다. (21) 「인일(人日)」에선, 정월 초이레(인일)의 세시 풍속을 떠올리며, 타향이자 변방인 거제도 섬 안에서 나이를 먹어가는 지식인의 쓸쓸한 내면으로 후편의 막을 내린다.
다음으로 (2) 김진규 칠언율시 후편의 문학적 특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후편(後篇)」의 칠언율시는 전편에 비해 감정의 밀도가 훨씬 높고, 실존적 위기를 이겨내려는 지식인의 의지가 율시 특유의 정교한 대구(對句) 속에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다.
먼저 (ㄱ)실존적 위기(겨울·신년)의 시간성을 담은 서사 뼈대다. 후편은 '초겨울(⑫)'에서 시작해 '새해 첫날(⑳)', '정월 초이레((21))'로 이어지는 엄격한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 율시의 8구(56자) 형식을 통해 유배의 장기화가 주는 절망감과 새해를 맞이하는 복잡한 심경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입체적으로 엮어냈다.
둘째 (ㄴ) 대구(對句) 구조를 통한 '내면의 확장'이다. 칠언율시의 핵심인 함련(3, 4구)과 경련(5, 6구)에서 '가시울타리 안의 비좁은 육체(⑮)'와 '바다 건너 고향을 향해 뻗어 나가는 정신(⑳)'을 완벽하게 대치시켰다. 좁은 방에 누워있으면서도(와음) 우주와 역사, 그리고 선비의 도리(사도)를 논하는 거시적 사유의 대비가 율시의 대구를 통해 긴장감 있게 표현된다.
셋째 (ㄷ)우울과 고통을 학문적·정신적 지조로 승화이다. 고독과 고통을 단순한 원망이나 넋두리로 끝내지 않는다. 「사도(斯道)」나 「유감(有感)」 등에서 드러나듯, 기사환국이라는 가혹한 정치적 보복 속에서도 자신이 걷는 길이 옳다는 신념을 다잡음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정신적 숭고미로 바꾸어내는 힘을 보여줬다.
넷째 (ㄹ)편지(가서) 형식을 도입한 시적 소통이다. ⑳번 작품처럼 시 자체를 고향에 보내는 '편지(가서)'의 양식과 결합했다. 이는 고립된 섬이라는 공간적 단절을 이겨내고, 육지에 있는 혈육 및 명문가로서의 연대를 유지하려는 절박하고도 지적인 소통의 발현이기도 하다.
참고로 후편 12수 중에서 가장 감정이 절절하게 드러낸 율시는 '새해 첫날의 시' 「임신원일(壬申元日) 시일작가서(是日作家書)」이고 ‘지조가 돋보이는 시’는 「사도(斯道)」다.
결국 죽천 김진규의 칠언율시 후편 12수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라는 가혹한 현실과 겨울이라는 계절적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흐트러짐 없는 선비 정신과 가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56자의 엄격한 율격 속에 녹여낸 조선 후기 유배문학의 기념비적인 연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이번 지면에는 김진규(金鎭圭)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총 21편(22首) 중에, [후편(後篇)] 11편(12首) ⑪「와음(卧吟)」, ⑫「초동견민(初冬遣悶)」, ⑬「만제(漫題)」 2수(首), ⑭「독립(獨立)」, ⑮「이하(籬下)」, ⑯「효(曉)」, ⑰「만음(漫吟)」, ⑱「유감(有感)」, ⑲「사도(斯道)」, ⑳「임신원일(壬申元日) 시일작가서(是日作家書)」, (21)「인일(人日)」 등 11편의 칠언율시(七言律詩) 「후편(後篇)」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1) 다음 ‘侵’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와음(卧吟)」 ‘누워서 읊조리다’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유배 생활 2년째에 접어들어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성찰하고 달관하려는 심경을 담은 명작이다. 이 시는 겉으로는 유배지의 혹독한 추위와 빈곤, 외로움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그 고난을 영혼의 성숙과 깨달음의 계기(千悟)로 승화시키는 선비의 꼿꼿한 기상과 내면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신체적인 고통 속에서 피어난 '고음(苦吟)'이 결국 자신을 다스리는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과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와음(卧吟)」**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寒宵未半已如深 차가운 밤은 아직 깊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밤중 같고
遠夢初回杳莫尋 고향 집 그리운 꿈에서 막 깨어나니 아득하여 다시 찾을 길 없네.
墜葉得風鳴破牖 떨어진 잎새는 바람을 타고 깨진 창문을 두드려 울리고
繁霜如雪着單衾 하얗게 내린 서리는 눈 같아서 홑이불 위로 달라붙는구나.
無衣無食聊高卧 입을 옷도 먹을 양식도 없지만 애써 태연하게 누워 지내고
多病多憂只苦吟 병도 많고 근심도 많아 오직 괴롭게 시만 읊조리네.
千悟應資二年謫 수많은 깨달음은 모름지기 이 년 동안의 유배 생활 덕분이니
古人誰獲此時心 옛사람 중 그 누가 이 시기의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 내용인즉, [1~2구]에선, 잠 못 드는 유배지의 쓸쓸한 밤을 묘사했다. 추운 겨울 밤(寒宵)은 서늘한 외로움 때문에 실제 시간보다 훨씬 깊은 밤처럼 느껴진다. 잠시 잠에 들어 고향이나 가족을 보는 꿈(遠夢)을 꾸었으나, 깨어나고 나니 꿈속의 풍경은 아득히 사라져 다시 붙잡을 수 없음에 허탈해한다. [3~4구]에선, 작가가 처한 비참하고 빈궁한 환경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은 하필 '깨진 창문(破牖)'을 때려 쓸쓸한 소리를 내고, 방 안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추위 탓에 서리가 '홑이불(單衾)' 위에 눈처럼 하얗게 내려앉는 듯한 극한의 동장군을 묘사했다. [5~6구]에선, 대제학까지 지냈던 명문가 사대부의 유배지 현실은 '무의무식(無衣無食)'할 정도로 처참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상을 초탈한 듯 '애써 태연히 누워(聊高卧)' 지내려 노력한다. 다만, 쇠약해진 육신의 병(多病)과 나라 및 가족 걱정(多憂)만큼은 떨치지 못해 괴로운 시(苦吟)를 토해낼 뿐이다. [7~8구]에선, 이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이 벌써 2년째(二年謫)에 접어들었다. 작가는 이 가혹한 시련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인간과 삶에 대한 '수많은 깨달음(千悟)'을 얻는 수행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고독과 고통의 심연 속에서 얻은 이 숭고하고 초연한 마음(此時心)은 유배를 겪어보지 않은 옛 성현이나 다른 이들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정신적 자산임을 담담하게 선언하며 시를 맺었다.
12) 다음 ‘微’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초동견민(初冬遣悶)」 ‘초겨울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다’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초겨울의 쓸쓸한 풍경을 바라보며 유배객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신세 한탄을 노래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사대부로서의 꼿꼿한 기상과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은 명작이다. 또한 이 시는 전형적인 유배시의 흐름인 '현실의 고뇌 -> 외로운 처지 한탄 -> 세월에 대한 허무함'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결코 나약하게 눈물 흘리며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구절에서 가슴속에 맺힌 답답함(悶)을 시원하고 웅장한 가락(상송)으로 터뜨리며, 비록 몸은 유배되어 있을지언정 사대부로서의 당당함과 지조는 서리 찬 겨울 숲을 뒤흔들 만큼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호방한 기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초동견민(初冬遣悶)」**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百念縈懷萬事違 온갖 생각 마음에 얽히고 만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데
所憂非是在寒饑 내가 걱정하는 것은 추위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네.
窮陰正感龍蛇蟄 겨울의 음산한 기운(초겨울)에 용과 뱀이 숨는 것을 깊이 느끼고
薄暮空看鳥雀歸 해질녘 어스름에 참새들이 둥지로 돌아가는 것을 부질없이 바라보네.
歲月茫茫行欲老 세월은 아득하기만 하여 조만간 늙어 가려 하는데
乾坤蕩蕩獨何依 하늘과 땅은 넓고 넓건만 이 몸은 홀로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猶能曳杖歌商頌 오히려 지팡이 끌며 당당하게 상송(옛 시)을 노래하니
響振霜林葉葉飛 그 우렁찬 울림이 서리 맞은 숲을 흔들어 나뭇잎들이 흩날리며 날아가네.
○ 내용인즉, [1~2구]에선, 시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현재 유배지에서 겪는 정신적 고뇌를 드러냈다.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萬事違) 생각만 많아지는데, 자신이 진정 걱정하는 것은 유배지의 육체적인 고통인 추위나 배고픔(寒饑)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육체적 곤궁함보다 나라 걱정이나 사대부로서의 의리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정신적 고뇌가 더 큼을 뜻한다. [3~4구]에선, 초겨울의 계절적 배경을 빌려 자신의 처지를 비유했다. '궁음(窮陰)'은 겨울의 음산하고 군색한 기운을 뜻한다. 만물이 겨울잠을 자러 숨는 '용사칩(龍蛇蟄)'의 모습을 보며 조정에서 쫓겨나 은거(유배)해야 하는 현자의 처지를 생각한다. 또한, 저녁 무렵 둥지를 찾아 돌아가는 참새(鳥雀歸)들을 보며,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대비시켜 부질없는(空看) 외로움을 극대화했다. [5~6구]에선, 유배 생활이 길어지면서 느끼는 허무함과 절대적 고독감이다. 끝없는 세월 속에 몸은 늙어가고, 천지(乾坤)는 이토록 넓고 아득한데 자신은 유배지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는 '독하의(獨何依)'의 고독을 노래했다. [7~8구]에선, '상송(商頌)'은 《시경(詩經)》에 수록된 시로, 은(상)나라 신하들이 조상을 찬미하고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며 부른 엄숙하고도 웅장한 노래다. 작가는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서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른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당차고 기운찬지, 서리 맞은 가을 숲을 뒤흔들어 낙엽들이 우두두 떨어져 날아갈 정도다. 깊은 고독과 절망을 당당한 기개로 승화시켰다.
13) 다음 ‘麻’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연작시 「만제(漫題)」 ‘즉흥적으로 읊다’ 2수(首)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절망적인 유배 생활(풍토병, 고립, 냉대) 속에서도 도가(道家)적이고 장자(莊子)적인 초월의 철학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는 사대부의 내면을 보여준다. 병이 들어도 약 하나 구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을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섭리'로 수용하고, 타향마저 고향으로 여기겠다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경지가 돋보이는 명작이다.
**「만제(漫題)」** 당시 병이 들었으나 약을 구할 길이 없었고, 마침 오이를 심었기 때문에 5구와 6구에서 이를 언급했다(時有病 而得藥無由 又適種瓜 故五六及之)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跡遠何須起歎嗟 자취 멀어졌다고 어찌 반드시 탄식과 한숨을 일으키랴,
身閑還覺厭喧譁 몸이 한가해지니 도리어 시끄러운 세상일이 싫어지네.
機心已絶鷗常狎 기만하는 마음이 이미 끊기니 갈매기가 항상 친하게 다가오고
懶性相宜蝨屢爬 게으른 성품에 딱 맞게 잇달아 이를 긁적거리네.
交態今無宋淸藥 세상의 인심이란 메말라 지금 송청(宋淸) 같은 약을 주는 이 없고
生涯古有邵平瓜 내 삶에는 옛날 소평(邵平)이 심던 오이가 있네.
極知榮悴皆非我 번성함과 시듦이 모두 내게 달린 것이 아님을 지극히 아노니
一任開花與落花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모두 자연의 섭리에 맡겨두노라.
[주1] 기심(機心) : 《열자(列子)》에 나오는 고사다. 바닷가에 살던 이가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機心)을 품자, 갈매기들이 귀신같이 알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주2] 송청의 약(宋淸藥) : 당나라의 유명한 약상인 '송청'의 고사다. 송청은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외상으로 약을 지어주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병이 들었으나 약을 구할 길 없는 현실을 빗대어, 권력에서 밀려나자 아무도 약을 보내주거나 돕지 않는 냉혹한 세상 인심(交態)을 쓸쓸하게 표현했다.
[주3] 소평의 오이(邵平瓜) : 진(秦)나라가 망한 뒤 동릉후(東陵侯)였던 '소평'이 신분을 숨기고 장안성 밖에서 오이를 심으며 청빈하게 살았던 고사다. 작가가 마침 유배지에서 오이를 심으며 벼슬을 잃고 은거하는 처지를 소평에 비유했다.
又
已分炎洲作我家 이미 이 더운 유배지(거제섬)를 내 집으로 삼기로 마음먹었으니
寧思杜曲舊桑麻 어찌 고향인 두곡(杜曲)의 옛 뽕나무와 삼나무(전원)를 그리워하랴.
傷音慣聽能怡鴂 낯선 사투리(혹은 새소리)도 귀에 익어 때까치 소리마저 즐겁고
荒藪長隣不畏蛇 거친 덤불을 늘 이웃하며 사니 이제는 뱀도 두렵지 않네.
章甫固知無用矣 장보(章甫)가 이곳에서는 본래 쓸모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虗舟那復有呼耶 빈 배처럼 나를 비웠거늘 어찌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겠는가.
他鄕故土隨安處 타향이든 고향이든 마음 편히 머무는 곳이 곧 살 만한 곳이니
何必偏懷下澤車 하필이면 진흙길을 달리는 수레(관직 생활의 고고함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미련)를 굳이 생각하랴.
[주1] 두곡(杜曲) : 당나라 두보가 살던 곳이자 한양 근교의 유서 깊은 사대부 거주지를 비유했다. 여기서는 작가가 떠나온 본가(고향)를 뜻한다.
[주2] 장보(章甫) : 《장자(莊子)》에 나오는 고사, 송나라 사람이 예복에 쓰는 모자인 '장보'를 사서 문화가 전혀 다른 월(越)나라로 장사를 가니,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여 모자가 아무 쓸모 없었다는 이야기다. 유배지에서는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명예나 유학자로서의 의관이 아무 소용없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주3] 허주(虗舟) : 역시 《장자》에 나오는 '빈 배' 고사다. 강을 운행하다가 빈 배와 부딪치면 아무리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 자신을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마음을 비운 빈 배'로 만들었으니 세상의 비난이나 시기(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뜻한다.
[주4] 하택차(下澤車) : 《후한서》 마원전에 나오는 말로, 진흙탕 길을 가기에 알맞은 낮고 소박한 수레를 말함. 여기서는 과거 고향에서 소박하게 살던 때를 그리워하거나, 혹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는 미련을 완전히 내려놓았음을 상징한다.
14) 다음 ‘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독립(獨立)」 ‘홀로 서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만제(漫題)」가 도가적이고 장자적인 철학으로 현실의 고통을 달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이 시는 초가을의 쓸쓸한 풍경 속에서 밀려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歸心)과 유배객의 외로움(客意), 그리고 늙어감에 대한 서글픔을 아주 솔직하고 애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독립(獨立)」**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新秋田野稻花盈 새 가을이라 들판에는 벼꽃이 가득 피어있는데
獨立柴門竹杖輕 사립문에 홀로 서 있자니 대지팡이가 가볍구나.
衰草䖝聲如有感 시드는 풀숲의 벌레 소리는 마치 나처럼 감회가 있는 듯하고
斜陽雨色却無情 석양에 내리는 비는 도리어 무정하기만 하네.
雲天悠遠歸心折 구름 낀 하늘은 아득히 멀어 고향 가고픈 마음 꺾이고
烟海微茫客意驚 안개 낀 바다는 아득하고 막막하여 나그네의 마음 놀라네.
忍制潺湲雙淚下 잔잔히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을 차마 참지 못해 흘러내리는데
不禁蕭颯二毛生 쓸쓸히 바람 부는 속에 반백의 머리칼(두 마음)이 돋아남을 금할 길 없네.
[주1] 운천(雲天)과 연해(烟海) : 구름 낀 하늘과 안개 낀 바다. 작가가 갇혀 있는 섬(거제도)의 지리적 환경을 보여준다. 유배지에서 고향(한양)을 바라보아도 먼 하늘과 끝없는 바다에 가로막혀 갈 수 없는 공간적 단절감과 절망감을 극대화했다.
[주2] 이모(二毛) :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게 변하는 것, 즉 반백(半白)의 머리를 뜻함. 진나라의 시인 반악(潘岳)이 가을에 거울을 보다 흰 머리를 발견하고 서글퍼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내용인즉, 이 시는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수련(1~2구)과 함련(3~4구)에서는 초가을 사립문 밖의 벼꽃, 벌레 소리, 비 내리는 석양 등 가을의 애잔한 풍경을 묘사했다. 이어서 경련(5~6구)과 미련(7~8구)에 이르러서는 갇혀 있는 섬의 아득한 하늘과 바다를 보며 솟구치는 '귀심(고향으로 가고픈 마음)'과 '눈물', 그리고 거울 속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으로 시상을 마무리 지으며 애절함을 더한다. 「만제」에 비해 유배객으로서의 인간적인 슬픔과 고독이 훨씬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15) 다음 ‘微’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이하(籬下)」 ‘울 밑에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거제도 유배지의 쓸쓸하고 황량한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세상과 철저히 고립된 유배객의 처지와 고향(한양)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담았다.
**「이하(籬下)」**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籬下寒潮漲欲歸 울타리 아래 찬 조수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려 하고
山頭落照淡無輝 산봉우리의 낙조는 엷어 빛을 잃었구나.
連天篁竹幽居僻 하늘까지 이어진 대숲 사이로 머무는 곳 흐릿하고 외딴데
滿地莓苔過客稀 땅에 가득한 이끼 위로 지나가는 나그네조차 드물네.
老樹荒庭秋漠漠 늙은 나무 거친 뜰에는 가을빛이 아득하고
棲鴉赤島(鳥似 是島)晩依依 해 질녘 깃든 까마귀와 붉은 섬은 아른아른 번져가네.
鄕園遙在浮雲外 고향 집은 저 멀리 떠 있는 구름 밖에 있으니
魂夢猶難得奮飛 꿈속의 넋조차 세차게 날아 돌아가기 어렵구나.
[주1] 참고 : 원문의 6구 중 '棲鴉赤鳥' 뒤의 주석 '(鳥似是島, 조는 아마도 도(島)의 오기인 듯하다)'는 후대 판본이나 필사 과정에서 생긴 글자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맥락상 '棲鴉赤島(서아적도, 깃든 까마귀와 붉은 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2] 매태과객희(莓苔過客稀) : 땅에 이끼가 가득할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끊긴 상태를 말한다. 유배지의 철저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주3] 추막막(秋漠漠)과 만의의(晩依依) : '아득한 가을'과 해 질 무렵 '어스름하게 번지는 풍경'. 빛을 잃어가는 가을날 저녁의 쓸쓸한 분위기를 시각을 통해 극대화했다.
○ 내용인즉, 이 시 역시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가 돋보인다. 1구부터 6구까지는 밀물과 썰물, 빛바랜 낙조, 빽빽한 대숲, 이끼 낀 마당, 늙은 나무, 그리고 저녁노을 속 까마귀와 섬 등 유배지의 황량하고 쓸쓸한 가을 저녁 풍경을 촘촘하게 묘사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7~8구에 이르러 아득한 구름 밖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터뜨린다. 꿈에서라도 가고 싶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대목에서 유배객이 느끼는 깊은 절망감과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6) 다음 ‘庚’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효(曉)」 ‘새벽’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번민 속에서 오경(五更, 새벽 3시~5시)을 맞는 유배객의 처연한 심경을 담았다. 특히 "盈三歲(세 해가 차오르다)"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유배지에 갇힌 지 어느덧 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효(曉)」**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月昏燈滅曉風生 달빛은 어둑해지고 등불마저 꺼질 제 새벽바람이 이는데
孤枕虛齋客睡驚 외로운 베개, 텅 빈 서재에서 나그네는 잠에서 깨어나네.
絡緯聲中秋最入 베짱이(귀뚜라미) 울음소리 속에 가을은 깊어만 가고
芭蕉葉上雨偏鳴 파초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유독 요란하구나.
幽憂欝欝盈三歲 깊은 시름에 울적해한 지 어느덧 세 해가 찼고
殘夢茫茫亂五更 아득하고 막막한 남은 꿈은 새벽녘의 마음을 어지럽히네.
此夜空吟七字苦 이 밤에 부질없이 칠언시(七字)를 읊조리며 괴로워하니
淸朝應見二毛明 맑은 아침이 오면 틀림없이 허옇게 세어버린 머리칼(二毛)을 보게 되리라.
[주1] 락위(絡緯) : '베짱이' 혹은 '귀뚜라미'를 뜻하는 시어로, 가을의 전형적인 전령사다. 벌레 소리를 들으며 가을이 뼈저리게 깊어짐(秋最入)을 느낀다.
[주2] 파초 잎 위의 비(芭蕉葉上雨) : 전통 한시에서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독수공방하는 이의 외로움이나 나그네의 향수, 애상감을 극대화하는 대표적인 청각적 장치다.
[주3] 칠자고(七字苦)와 이모명(二毛明) : 밤새 괴로워하며 7언절구나 7언율시(七字)를 짜내어 읊조리느라 고뇌했으니, 아침이 밝아 거울을 보면 그 스트레스로 인해 흰머리(二毛)가 한층 더 하얗고 분명하게(明) 보일 것이라는 서글픈 한탄이다.
○내용인즉, 이 시는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배객이 느끼는 시각적·청각적 자극을 아주 섬세하게 엮어냈다. 달이 지고 등불이 꺼지는 시각적 어둠 속에서, 베짱이 울음소리와 파초 잎의 빗소리라는 청각적 슬픔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어느덧 유배 3년째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은 없고, 매일 새벽(오경)마다 남은 꿈과 번민에 시달리며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시인에게는 정신적인 고통(七字苦)이자 육체를 늙게 만드는(二毛明) 과정임을 고백하고 있다. 앞서 읽으신 유배시들과 일맥상통하면서도 시간적 심화가 돋보이는 애절한 작품이다.
17) 다음 ‘東’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만음(漫吟)」 ‘부질없이 읊조리다’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앞서 보신 「효(曉)」와 마찬가지로 "三歲(세 해)"라는 시어가 등장하여, 거제도 유배 생활이 3년째에 접어들었을 무렵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부질없이 백 여 편의 시를 쓰며 봄새와 가을 벌레를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래는 유배객의 가련한 심경이 절절하게 표현된 명작이다.
**「만음(漫吟)」**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浮生易盡恨難終 덧없는 인생은 다하기 쉬우나 한스러운 마음은 끝내기 어렵고
今夕斜陽昨夜風 어제 동풍 불던 밤 지나니 오늘 저녁의 석양이로구나.
一片孤雲何處托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은 어느 곳에 몸을 의탁해야 하나
千尋積水幾時窮 천 길 깊이로 쌓인 바닷물은 어느 때나 다할 것인가.
家山渺渺愁眉外 고향 산천은 시름겨운 눈썹 저편으로 아득하기만 하고
身世茫茫醉眼中 이내 신세는 술에 취한 눈 속에 막막하기만 하네.
三歲謾將詩百首 삼 년 동안 부질없이 백여 편의 시를 지어놓고
伴吟春鳥與秋虫 봄날의 새와 가을날의 벌레와 더불어 짝하여 읊조리노라.
[주1] 일편고운(一片孤雲)과 천심적수(千尋積水) : 대구(對句)를 이루는 표현이자 유배객의 처지를 비유했다.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은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자기 자신을 뜻하고, '천 길 깊이의 바닷물'은 거제도라는 유배지를 둘러싼 끝없는 바다이자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절망적인 장애물을 상징한다.
[주2] 수미외(愁眉外)와 취안중(醉眼中) : 고향 쪽을 바라보는 시인의 얼굴에는 시름 가득한 주름(愁眉)이 잡혀 있고,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의 현실을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 술에 의지해 흐릿해진 눈(醉眼)으로 자신의 막막한 처지를 바라보고 있다.
○내용인즉, 이 시는 죽천 김진규가 거제도에 갇혀 지낸 3년의 세월 동안 겪은 정신적 피로감과 고향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시 백 수'라는 구체적인 숫자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아무리 고향을 보려 해도 눈앞에는 끝없는 바다(千尋積水)만 펼쳐져 있고, 시름을 잊으려 술을 마셔봐도 눈앞은 여전히 막막하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봄새가 울고 가을벌레가 우는 동안, 자신은 좁은 유배지방에 갇혀 부질없이 시만 써 내려갔다는 독백이 듣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깊은 애상감을 지닌 작품이다.
18) 다음 ‘侵’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유감(有感)」 ‘느끼는 바가 있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1693년 연말에 지은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가 유배지에서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나라에 대한 충심, 덧없는 세월에 대한 탄식, 그리고 쓸쓸한 처지를 노래한 한시다.
**「유감(有感)」**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1693년 연말 作
結髮曾懷許國心 머리를 비녀로 묶을 때(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나라에 몸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품었었고
登朝非是戀華簪 조정에 나아간 것은 결코 화려한 비녀(높은 관직과 명예)를 탐해서가 아니었네.
五年事逐浮雲變 지난 5년 동안의 일들은 흘러가는 뜬구름을 따라 변해버렸고
千里愁看漲海深 천 리 밖 유배지에서 시름에 겨워 불어나는 바다의 깊이를 바라보네.
天末孤光流短景 하늘 끝 외로운 햇빛(임금의 은혜 또는 덧없는 시간)은 짧은 풍경 속으로 흘러가고
雨餘寒氣結層陰 비가 내린 뒤의 차가운 기운은 겹겹이 어두운 그늘을 맺는구나.
脩名未立身將老 훌륭한 이름(업적)은 아직 세우지 못했는데 이 몸은 장차 늙어가니
歲暮殊方抱膝吟 한 해가 저무는 이때, 낯선 타향에서 무릎을 안고 외로이 시를 읊조리네.
[주1] 수명(脩名) : 닦아놓은 훌륭한 명성이나 업적을 말함.
[주2] 포슬음(抱膝吟) : 무릎을 안고 시를 읊조린다는 뜻, 삼국지의 제갈량이 세상에 나아가기 전 초야에 묻혀 지내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외롭게 지내는 처지를 나타낸다.
○내용인즉, 이 시는 숙종 세 자녀의 외삼촌이자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진규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했을 때 지은 작품이다. [1~4구]에선, 젊은 시절 관직에 나아간 것이 개인의 부귀영화(화잠)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위한 충심(허국심) 때문이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지금은 천 리 먼 바닷가 유배지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5~8구]에선,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비 온 뒤의 차가운 서늘함과 어둠은 작가의 암담한 심정을 대변한다. 나라를 위해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는데 나이만 들어가는 처지를 한탄하며, 해 저무는 타향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신세를 시로 달래고 있다. 전체적으로 나라를 향한 변함없는 충정과 함께, 뜻을 펴지 못하고 늙어가는 유배객의 깊은 고독과 서글픔이 짙게 배어있는 명작이다.
19) 다음 ‘寒’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사도(斯道)」 ‘유학의 도리’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유배지라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유학자로서의 올바른 길(사도)과 선비로서의 높은 지조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노래한 작품이다.
**「사도(斯道)」**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古來斯道屬艱難 예로부터 이 도(선비의 올바른 길)를 따르는 것은 고난에 속했으니
得喪那須更控摶 관직을 얻고 잃는 일(영욕)을 어찌 구태여 다시 연연하고 다투겠는가.
馬放聊隨孤鴈伴 말을 놓아 기르며 애오라지 외로운 기러기를 동무 삼아 따르고
鳳飢羞與衆鷄餐 봉황은 굶주릴지언정 부끄럽게 어중이떠중이 닭들과 함께 모이를 먹지 않네.
茫茫積水天疑濕 망망하게 고인 바닷물에 하늘마저 젖은 듯하고
漠漠窮陰歲正寒 아득히 어두운 그늘 속에 한 해가 바야흐로 저물어 춥구나.
拄杖徘徊歌一曲 지팡이 짚고 배회하며 노래 한 곡조 부르니
風篁爲我響琅玕 바람 부는 대숲이 나를 위해 옥(琅玕) 굴러가는 소리를 울려주네.
[주1] 봉황(鳳)과 중계(衆鷄) : 고결한 뜻을 지닌 선비(자기 자신)를 봉황에, 현실의 이익만 좇는 유배지의 소인배나 타협하는 무리들을 닭에 비유하여 강한 대조를 이룬다.
[주2] 낭간(琅玕) : 아름다운 청색의 옥(玉). 여기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과 줄기가 부딪치며 내는 청아한 소리를 비유했다.
○내용인즉, 이 시는 작가가 당쟁에 밀려 먼 바닷가 섬(거제도)으로 유배되었을 때,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다짐하는 내면을 잘 보여준다. [1~4구]에선, 올바른 길(斯道)을 걷는 삶은 역사적으로 늘 험난했다는 점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관직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초연한 태도를 보이며, 특히 ‘봉황은 굶주릴지언정 닭과 함께 먹지 않는다’는 구절을 통해 비록 유배객의 처지일망정 세상의 소인배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매서운 선비의 기개를 드러낸다. [5~8구]에선,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축축하고 어두운 유배지의 겨울 풍경을 묘사하여 작가가 처한 고독감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작가는 낙담하는 대신 지팡이를 짚고 서서 노래를 부른다. 이때 대나무 숲이 화답하듯 청아한 옥 소리(낭간)를 내어 주는데, 이는 대나무의 절개가 곧 작가 자신의 꺾이지 않는 절개와 맞닿아 있음을 시각적·청각적으로 승화시킨 명장면이다.
20) 다음 ‘灰’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임신원일(壬申元日) 시일작가서(是日作家書)」 ‘임신년(1692년) 새해 첫날(설날)에 유배지에서 고향과 임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풀려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읊다’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4(卷之四)에 수록되어 있다.
**「임신원일(壬申元日) 시일작가서(是日作家書)」**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年年元日共愁來 해마다 새해 첫날(설날)은 시름과 함께 찾아오니
欝欝孤懷豈易裁 울적한 외로운 마음을 어찌 쉽게 걷어내겠는가.
徂歲秪能添鬢雪 지나간 세월은 다만 살쩍에 흰 눈(흰머리)만 보태었고
新春猶未暖心灰 새 봄이 왔건만 불 꺼진 재 같은 내 마음은 아직 따뜻해지지 않네.
炎洲氣與東風動 남쪽 유배지(염주)의 기운은 동풍과 함께 움직이는데
故國書隨北斗廻 고향(또는 대궐)의 소식은 북두칠성을 따라 돌아가네.
還恠流光唯不棄 오히려 도리어 괴이한 것은, 흐르는 세월만이 나를 버리지 않아
窮荒千里屢相催 이 천 리 먼 거친 변방까지 몇 번이고 나를 재촉해 찾아오는구나.
[주1] 원일(元日) : 새해 첫날, 즉 설날. 본래 축제 분위기여야 할 명절이 유배객에게는 고독감을 극대화하는 시간이다.
[주2] 심회(心灰) : 불 꺼진 차가운 재가 된 마음. 절망감이나 슬픔으로 인해 열정이나 희망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주3] 궁황(窮荒) : 아주 멀고 황량한 변방, 즉 유배지 거제도.
○내용인즉, 남들은 기쁘게 맞이하는 명절(설날)이 외딴섬 유배객에게는 되레 야속하고 슬픈 날로 다가오는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명시다. [1~4구]에선, 유배지에서 맞이하는 설날은 늘 근심 덩어리다. 세월이 흘러 새해는 밝았지만, 그 세월이 작가에게 준 것은 늙음을 뜻하는 귀밑의 흰머리(빈설)뿐이다.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바뀌어 가지만, 고독과 절망에 빠진 작가의 마음은 여전히 차가운 재(心灰)처럼 온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5~8구]에선, 남쪽 유배지(炎洲)에는 벌써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지만, 작가의 마음과 서신은 오직 임금과 가족이 있는 북쪽만을 향해 돌고 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흐르는 시간을 의인화하여, 세상과 조정은 나를 버렸을지언정 흐르는 세월만큼은 나를 잊지 않고 이 천 리 먼 유배지까지 찾아와 나이를 먹으라고 재촉한다며 서글픈 역설을 던지고 있다.
21) 다음 ‘侵’ 운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인화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죽천집(竹泉集)』 권4(卷之四)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작가가 유배지에서 맞이한 정월 초일곱날(人日)의 쓸쓸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아프게 표현한 작품이다.
**「인일(人日)」**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此日題詩秪獨吟 오늘 시를 지어 두고 다만 홀로 읊조리니
四年爲客負光陰 4년 동안 나그네 되어 세월을 허송했구나.
天南地暖歸鴻早 하늘 남쪽 땅이 따뜻해 돌아가는 기러기 빠르고
海上春生暮靄深 바다 위로 봄기운 돋아나는데 저녁 안개는 깊어만 가네.
殊俗笑談那可接 낯선 풍속의 웃음 섞인 대화를 어찌 친하게 접하겠으며
故園梅柳竟誰尋 고향 정원의 매화와 버드나무는 끝내 누가 찾아줄 거나.
江湖佳興今牢落 강호의 아름다운 흥취도 이제는 쓸쓸히 사그라들고
滿地風濤道路沉 온 땅에 바람과 파도 일어 돌아갈 길마저 잠겨버렸네.
[주1] 人日(인일) : 음력 1월 7일. 옛사람들은 이날 시를 짓거나 봄기운을 점치며 명절처럼 보냈다.
[주2] 수속(殊俗) : 서울(고향)과 다른 유배지의 낯선 풍속과 사투리를 의미한다.
[주3] 뢰락(牢落) : 외롭고 쓸쓸하여 쇠해진 모양을 말한다.
[주4] 풍도(風濤) : 바람과 파도. 실제 바다의 거친 물결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가둔 험난한 정치적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 내용인즉, 이 시는 숙종 대의 문신 김진규가 거제도 등 남해안 바닷가로 유배를 간 지 4년째 되던 해 정월 초일곱날(인일)에 지은 회포의 시다. 명절을 맞아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2구]에선, 홀로 맞는 명절의 쓸쓸함을 드러냈다. 원래 인일(人日)은 문인들이 모여 시를 주고받는 날이지만, 작가는 유배지에 홀로 갇혀 자신이 쓴 시를 홀로 읊조릴 뿐이다. 타향에서 의미 없이 흘려보낸 4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탄식이 묻어난다. [3~4구]에선, 자연의 변화와 대비되는 처지를 표현했다. 남쪽 유배지는 벌써 봄기운이 돌고 기러기들은 고향(북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자연은 순리대로 돌아가는데, 자신은 여전히 저녁 안개처럼 답답하고 어두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대비시켰다. [5~6구]에선, 유배지의 소외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술했다. 말도 풍습도 낯선 유배지 사람들과는 마음 터놓고 웃고 즐기기 어렵다. 동시에 자신이 없는 고향집 정원에 피어날 매화와 버드나무를 바라봐 줄 사람이 없을 것을 안타까워한다. [7~8구]에선, 절망적인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자연을 벗 삼아 즐기던 강호의 흥취마저 유배 생활의 고통 속에서 다 사라졌다. 마지막 구절의 '바람과 파도'는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막는 실제 바다의 물결이자, 자신을 유배 보낸 조정의 냉혹한 정치적 현실을 상징한다. 돌아갈 길이 완전히 끊겨버린 듯한 절망감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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