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글로벌 하우스 4회 (2~1,2화)
ICQ로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채팅을 하면서 점점 그들의 나라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이를테면 아프리카 같은 데서 아프리카인을 이웃하며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들처럼 동네를 산책하고, 가게에 들러 식품을 사고, 식사에 초대받거나 초대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한번은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외국에 가서 직접 외국인으로 살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어.” 하지만 외국에 나가서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외국에 나가도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어찌 보면 그 나라에서는 이방인인 외국인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단다. 그리고 외국에서 살아도 그 나라 사람들과 이웃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작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평범한 한국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는 정말 어렵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2년 동안 한국의 어느 은행에서 일했던 스페인 친구 올가는 한국을 떠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좋은 한국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또 6년이나 한국에 살면서 매일 한국인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 알버트도 친한 한국인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들 대부분은 이태원이 싫다고 인상을 쓰면서도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태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외국에 나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은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이 그들과 친구가 되려고 마음만 먹으면 더 가까이 하기가 쉬울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의 충동질이 또다시 용솟음쳤다. 멀리 외국까지 나갈 필요 있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과 함께 살면서 우정을 나누는 것도 꽤 신나는 일이 아닐까.
우선 방이 많은 집을 임대해서 이집트인, 영국인, 프랑스 인, 아프리카인을 룸메이트로 두는 거다. 이렇게 함께 살면 내 방에서 세계여행을 하는 것처럼 즐겁게 살 수도 있고, 세계 공통 언어인 영어는 자연스럽게 늘 것이고,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고, 가족과 한국인 친구들도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왜 그동안, 이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완전히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새봄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나 해?”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과 어떻게 한집에서 살 수 있느냐며 한사코 말렸다. 하지만 내 생각엔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장 내가 살던 조그만 원룸을 정리한 후 방이 여러 개 있는 월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룸메이트를 구하는 광고를 냈다.
코리아 헤럴드 홈페이지의 커뮤니티(community) 메뉴에 보면 숙박(accommodation) 게시판이 있는데, 거기에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몇 달 동안 외국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락날락하며 그들이 방 구하고 방 내놓는 글을 무지하게 많이 읽었던 터라 외국인 룸메이트를 구하는 글을 올리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룸메이트 구하는 글을 복사해서 주소와 방 가격만 바꾸면 되었으니까. 집을 급히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글을 올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몇 통의 메일을 받아볼 수 있었다.
아아, 외국인과 같이 사는 방법이 이렇게 쉬울 줄이야. 진작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지금이라도 늦은 건 아니다.
나는 방 구경을 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온 외국인들의 글을 읽고 그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로 더듬거리며 전화를 하거나, 다시 메일을 보내 집을 보러 오는 날짜를 맞췄다. 내 영어 실력은 엉망이었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의 부실하고 엉망인 영어가 그들과 통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글로벌 하우스 4회. 2~2화. 오! 오! 나의 첫 룸메이트 아그네스
처음 전화 통화를 한 호주 처녀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마치 멜로디 같았다. 즐거움이 가득 담긴 밝고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나는 떠듬떠듬 너의 메일을 받았고, 서울에서 방을 구하냐고 물었다.
“Hi, I’m 새봄. I received your e-mail. Are you looking for accommodation in Seoul?”
나는 모르는 말은 몇 번이나 “Excuse me?”를 연발하며 물었고, 그녀는 친절하게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반복해 주었다. 그렇게 콩그리시 반 잉글리쉬 반으로 집 근처 신촌 지하철역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가서 금발에 파란 눈을 깜박이며 서 있는 아그네스가 금방 눈에 띄었다.
“Hi, I’m glad to meet you!”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집 방향을 가리키며 보디랭귀지로 대충 거리를 설명해 주었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이제까지 만난 모든 외국인에게 했던 공통적인 질문을 했다. 고향이 어디냐, 어디 살고 있느냐, 하고 있는 일은 뭐냐, 한국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등등 아는 문장은 총동원해서 시시콜콜 물어보았다. 그녀는 예의 그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아그네스, What’s your major?”
내가 전공이 뭐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파이낸스(finance).”
“Really? me too. I also studied fine arts!”
대학 때 미술을 전공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맞장구를 쳤다. 말이 잘 통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왠지 반가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의 전공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아 단순한 언어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아그네스는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어느 증권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전공을 증권, ‘finance’였다. 한참 지나서야 사실을 알고 나서 서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그네스의 직장은 시청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신촌의 아파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이라는 내 계획을 “Great idea!”라며 굉장히 좋아했다.
그 주 토요일에 아그네스는 한국인 친구와 함께 택시로 이삿짐을 나르고, 방 정리를 마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과 함께 살게 되는 터라 나도 적잖이 들떠 있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안되는 영어로) 열심히 집과 생활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나름대로 잘해주려고 애썼다.
나의 이 대단한 모험에 ‘네가 기어이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한국 친구들은 걱정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나도 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험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백지 한 장 차이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을 하지만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이 아닐까.
사실 나의 이런 무모한 도전정신은 타고난 것 같다. 대학도 지칠 정도로 떨어졌지만 결국 졸업장을 따냈고, 대학 다닐 때도 안 해본 일 없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 후 취업을 그만두고 창업할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그런 도전정신에 그냥 저질러보기로 했다. 실패하더라도 분명히 경험은 남을 것이다. 덕분에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영어 실력도 쌓고, 다른 나라의 문화도 체험하게 됐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기대도 잠시, 다음 날부터 악몽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인사성 밝은 아그네스는 자고 일어나서 아침마다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 으흠”하고 미소 짓고는 썰렁하게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솔직하게 ‘네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설명을 해주겠지만 내가 아그네스의 설명은 알아들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라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Did you sleep well?” 즉, 잘 잤냐는 말이었다. 우리도 식구들끼리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어?” 하고 매일 물어보지 않는가. 그런데 그 쉬운 인사가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마도 그 전에 한 번도 외국인에게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외국인과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아그네스가 하는 말은 너무 빠르잖아.
하여튼 난 아침마다 내게 던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출근하기 전까지 내 방에서 아예 나오지도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심정을 누가 알랴? “잘 잤냐?”라는 간단한 인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예 아침 먹으러 나오지도 못했던 내 심정을…, 지금이라면 당연히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겠지만, 당시에는 경험이 없고, 또 무슨 말인지 그녀가 설명해 봐야 그 소리도 못 알아들을 게 뻔해서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너무 답답한 마음에 <이해중의 영어 회화 문법책>을 하루 만에 봐버렸다. 대학 때 영어 공부 진짜 열심히 하던 남자 친구에게 부탁해서 내게 맞는 가장 얇고 쉬운 책으로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몇 년 동안 한두 장 읽고 구석에 처박아놨었는데 급하니까 하루 만에 읽게 되었다. 어쨌든 그때 did는 do의 과거형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으하하하! 그걸 알고 나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아, 나 대학 졸업한 사람 맞아?
아그네스와 보낸 첫 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둘은 출근하기 전 부엌에서 아침 먹을 때와 퇴근 후 거실에서 TV 볼 때 많은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답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그녀는 나의 막무가내 콩그리시를 인내심 있게 들어 주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녀의 말을 내가 아주 조금밖에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매번 모른다고 하기 자존심 상해서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대강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그네스가 이야기 도중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새봄, 내 얘기 이해하니?”
나는 순간 당황스러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나쁜 짓 하다 들킨 꼬마처럼 두려움에 숨을 죽이며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그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아그네스는 이제까지 열심히 설명한 자기 얘기를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허탈했겠지만, 난 영어 때문에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에게 무시당한 게 부끄럽고 열도 받았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해야지…. 지는 영어 말고 다른 나라 말할 줄 아냐? 나이도 어린 것이…!’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도 유창했다. 어쨌든 그날,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 기어코 이 수모를 갚아주리라. 어떻게? 별 수 있나. 영어 공부해야지. 끙~….
아무튼 그 후로 나는 서점에서 영어 테이프 고르는 버릇이 생겼다. 영어책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책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내 딴에는 영어는 언어니까 책으로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의 게으른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영어 테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내 영어 실력 향상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