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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64, 삼손 김종학
지금은 노래가락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첫줄 가사만 겨우 기억에 남아있는 노래가 하나 있다. ‘젊으나 젊은 시절에는 사랑도 했건만 지금은 철장의 신세 죄수의 몸이란다...’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인데 한탄조의 구슬픈 가락이었다. 어느 가수가 부른 곡인지도 모르는 이 노래를 그는 구성지게 즐겨 부르곤 했다. 지금도 이 노래의 출처를 알길이 없다.
이름은 김종학, 세칭 동방교에서의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삼손’이었다. 1960년대 부산지방의 주력산업이었던 신발공장, 삼화고무 개발부에서 그는 글씨체를 디자인하는 공원이었다.
당시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졸업이 전 학력인 그가 신발공장에 취직하여 손재주를 인정받아 다양한 글자체를 개발, 디자인하여 형형색색의 물감들을 이용하여 그려내는것이 그의 업무이었던것 같다. 한글과 숫자, 영문, 도형까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디자인하여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자랑하곤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을 신발의 상표나 문양에 새겨넣는것 같았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세칭 동방교의 예배당, 예배당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방에 탁자 같은 판때기에 네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흰 천으로 덮개를 씌워놓고 한쪽 모서리에 성경을 놓아두고 일곱촛대 형태를 만들어 탁자 중앙에 올려놓고 보좌(寶座)라고 해서 걸상을 조잡하게 만들어 방석을 깔아 탁자 안쪽에 놓아두고 있었던 곳,
그곳에 영적 무형(無形)으로 할아버지(세칭 동방교의 노광공 교주)께서 앉아 계시면서 방안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우리(성민)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코메디 같은 장소, 그런곳의 촛대와 보좌를 잘 만들어주곤 하던 손재주 좋은 청년이었다.
나보다 너댓살 연배인 그는 일찍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월급을 타서 돈을 만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먹거리로 입맛을 돋우던 라면이며 과자등을 잘 사주어서 인심도 좋았었다. 그도 세칭 동방교의 열성분자였다. 월급을 타면 거의 전부를 지성금으로 갖다 바치곤 해서 믿음이 솟아났다고 세칭 동방교내에서 칭찬이 자자했었다. 3년뒤에 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세칭 동방교의 성민들만 휴거해서 천당으로 간다는데 그렇게 하지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3년안에 세상이 끝나는데 군대에도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징집영장을 받고서도 그는 입대하지않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경찰서나 파출소는 멀찍이 돌아서 피해다니면서 이노무 세상이 3년만에 끝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의 끝이 오기는 커녕 자꾸만 그 3년 심판날이 연기되고 있었으니 그의 애타는 심정이 어떠했으랴, 우리 또래의 친구들이 장난으로 일부러 파출소앞을 지나가도록 그를 이끌면 막 화를 내곤 했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나포리였다. ‘나포리’는 경찰관을 가리키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다. 이런 은어(隱語는 몇가지가 더 있는데 방비(입단속), 지성(헌금), 빈집초월(무단가출), 대기처(집단숙소)등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포리’나 나포리의 친척은 세칭 동방교의 신도로 전도 하는것도 금지되어있다. 사정을 모르고 우연히 전도가 되어 세칭 동방교의 신도가 되었다 할지라도 친척중에 나포리가 있는것이 나중에 알려지면 이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정도로 나포리, 즉 경찰관을 끔찍이 경계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회질서에 반하고 위법한 내면을 숨기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여러해 병역기피자로 지내오다가 검거되었는지 자수를 했는지 지금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주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한참 아래 동생뻘되는 고참들에게 얼마나 시달리며 고문관(?)같은 군생활을 영위했을까.
동해안방어사령부에 복무하고 있던 어느날 보초를 서다가 졸음을 못이겨서 그랬던지 그만 총기를 분실하고 말았으니. . . 군대에서 엄청난 사고가 난 것이었다. 군인에게 있어 자기에게 지급된 총기는 자기생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혀지고 직속상관들이 줄줄이 문책을 당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군 형무소 남한산성에서 징역을 살게되고 . . .
제대를 하고 돌아온 그는 거의 폐인이 다 되어 정신이상자와 다름 없게 되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간질병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도 세칭 동방교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그를 세칭 동방교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소위 왕따를 시킨 것이었다. 서러운 날들이었다.
그래도 그는 새벽같이 세칭 동방교에 나가 마루바닥을 쓸고 딱고 마당을 청소하고 겨우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들어 눈칫밥을 얻어먹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그후에 세칭 동방교를 떠났으니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만 들었을 뿐 실상은 제대로 모르고 그를 잊고 지내고 있었다. 거의 20여년 세월이 흐르도록 까마득히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것은 세칭 동방교의 친구 누가(세칭 동방교의 명명)때문이었다. 조그마한 전기공사업체를 운영하고있던 그는 옛 세칭 동방교와의 인연으로 동방교 건물들의 소소한 전기 수리공사를 해주곤 했었는데 그곳에서 폐인이 되다시피 형편없이 되어 세칭 동방교 주변을 서성거리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결혼도 하지못한 상태였으므로 독신 극빈자에게 주어지는 임대아파트에 정부에서 지급하는 최저 생계비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는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간의 사정을 주위로부터 들어보니 친구 '누가'로서는 측은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손도 부족하던 차에 작업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단순한 잔심부름을 시키며 일당을 얼마씩 계산해서 주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서로 의논이 되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작업이 있을때마다 그를 작업차에 태워 같이 다니면서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도 나누면서 말벗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경과로 그 즈음에 나도 친구 '누가'를 통해서 삼손 김종학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어떤날은 얼굴이 상처투성이로 변해있고 눈두덩이 퉁퉁 부어서 왔길래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갑자기 간질이 발병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는데 마침 쓰러진 장소가 연탄불 뚜껑 위에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었더라고 친구 '누가'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간질은 원래 그런 병이라고 했다.
어느날 친구들과 모여 점심을 먹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려 받으니 다짜고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도모다찌야 내다, 종학이가 죽었다. 나는 인자 다 살았다, 진작 니말 들을꼬로. . .” 하면서 누가(세칭 동방교의 명명)의 당황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나더러 빨리 좀 오라고 난리가 났다.
‘도모다찌’란 친구 누가(세칭 동방교의 명명)가 평소 나를 부르는 별칭이었고 ‘종학’이란 이 야기의 주인공 세칭 동방교의 ‘삼손’을 말한다. 나는 평소에 친구 '누가'를 만나면 삼손 김종학을 데리고 다니는 문제에 대하여 걱정을 많이 하고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데다 간질병까지 안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전후야 어찌되었던 너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되니 아무리 일당이 싸다고 하더라도 데리고 다니는것을 재고해야 된다고 누차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니면 삼손 본인이 극구 원해서 도와주는 차원에서 데리고 다닌다는 각서나 확인서라도 본인과 세칭 동방교 교인들에게 제대로 받아두어야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친인척이나 관계기관에 제시할 수 있다고 누누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진작 니말 들을꼬로......’ 하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급히 택시를 타고 구포 한중병원으로 가니 삼손은 벌써 119 구급차로 실려와서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누가'는 근처에서 작업중이었고 김종학 삼손에게는 무슨 공구를 좀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가는 도중에 늘 그렇듯이 갑자기 간질이 발작, 근처의 다리밑으로 떨어져 농수로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같이 일하던 다른 인부가 예감이 이상하여 둘러보고 농수로에 빠져있는 삼손을 발견하니 벌써 늦었더란다. 이 일을 어이할꼬. . . ‘나는 인자 다 살았다. .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당황하는 '누가'를 위로하고 모든 것을 사실데로 이야기하라고 조언했는데 그날 저녁 친구 '누가'는 경찰서에 가서 경위조사를 받고 밤 늦게 귀가했다. 이튿날 오전에 나도 부의금을 준비해서 한중병원 장례식장으로 가서 문상하고, 친구 ‘누가‘도 100만원을 급히 마련하여 문상했다.
김종학 삼손의 형님과 조카들이 와 있었고 그간의 경위와 내 친구인 사장이 장애인증을 발급 받아주기 위해 애쓴 점, 그리고 데리고 다니면서 돌보아 준 점등을 설명하니 가족들이 모두 수긍하는 듯 했다. 말은 안해도 자기 집안에서 큰 우환덩어리 하나가 제거 된듯한 분위기였다. 조카중의 한명은 현직 경찰관이었다.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 사건은 다행히 수습도 잘 되었다. 며칠 후 김종학 삼손이 다녔던 부산의 문현동 세칭 동방교 목사에게서 친구 '누가'(세칭 동방교의 명명)에게 전화가 왔다. 삼손이 환상중에 나타났는데 몹씨 춥다고 하더란다. 환상이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니까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어야 하니까 분골을 뿌린곳에 가서 흙을 뿌려 주어야 한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날을 정해 화장후 분골을 뿌린 그곳에 같이 가서 흐르는 물위에 흙을 몇 웅큼씩 움켜쥐고 뿌려 주었다고 한다. 이불을 잘 덮어 주어서 추위가 가셨는지 그 후로는 환상을 보았느니, 춥다고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더 없었다고 한다. 세칭 동방교가 기독교인지, 무당종교인지, 잡동사니 집단인지 또 한번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하려니 또 한 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세칭 동방교의 '사상8교회'에는 고니아라는 장애인이 있었다. 삼손과 같은 '사상8교회' 교인인 셈이다. 당시 20대 중반의 남성으로 삼손보다는 두 세살 연상이었다고 짐작되는데 한쪽 다리를 절면서 한쪽 손도 마비되어 늘 손 한쪽을 가슴밑에 붙이고 절룩거리며 이곳저곳으로 구걸을 다녔다.
그래도 그 구걸한 돈으로 정성껏 지성금을 바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나도 들은바가 없다. 잠자리는 언제나 '사상8교회'의 마루바닥에 자리를 깔고 이불을 덮고 지냈는데 추운 한 겨울에도 차디찬 마루바닥 연탄난로옆에 자리를 펴고 누워 불편한 밤을 지새우며 지냈다. 지병인 결핵이 있어서 한번 기침이 터지면 그칠줄을 모르고 피를 토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니 출입하는 세칭 동방교의 교인들에게 어지간히 눈치도 받았다.
교인들이 출입하는 낮 시간에는 이부자리를 개어서 보이지 않는곳에 숨겨놓았다가 늦은 밤에 들어와 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원래 허약체질인데다가 병을 몸에 안고 있으니 몸이 온전한 날이 많지 않았고 그때마다 낮에도 자리를 펴고 기침을 콜록대고 누워 있었으니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세월은 흘렀고 얼마후 그도 결국 지친몸을 누이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후의 소식을 김종학 삼손으로부터 들었다. 어느날 삼손은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니, 고니아 알제, 그 고니아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아브넬 할아버지께서 말씀 하셨는데 천국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있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초등학생이 친구들에게 뽐내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브넬 할아버지란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 노영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가 정말 천국의 제일 좋은 자리에 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삼손과 만나 옛날 '사상8교회' 이야기 주고 받으며 정답게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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