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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박성철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가 2019년 11월 2일 한국기독교학회 조직신학분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라고 가르쳤고 스스로 제자들을 섬겼다(요13:15). 섬기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차별이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속 교회는 언제나 사회적 차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적 차별이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나 사회적 카테고리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상이한 취급을 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의식은 사회적 기제인 차별을 통해 인간을 억압하면서도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해 비인간적인 환경을 악화시킨다. 특히 차별 의식이 정치적 영역에서 표현될 때 폭력을 동반한 극단적인 혐오와 배제의 문제로 변질되곤 하였다.
뒤로멈춤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또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정치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광풍처럼 일고 있는 반反이슬람과 반反동성애 운동과 같은 기독교 운동은 이러한 일상적인 그리스도의 사회·정치적 참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배타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배타성은 권위주의적 종교(authoritarian religion)의 전형적인 모습이다.1)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 종교는 파시즘(fascism)과 결합하여 종교적 파시즘(religious fascism)으로 쉽게 변질되었고 종교적 파시즘은 차별 의식을 다양한 기제를 통해 정당화하면서 폭력적이면서 극단적인 혐오와 배제를 양산했다.2)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인종차별, 여성 차별 그리고 자본에 의한 계급적 차별 등과 같은 사회적 차별이 신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인식 체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폭로했다.3) 종교적 파시즘과 같이 차별 의식에 기반한 배타적인 종교운동은 언제나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기제로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그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 기독교 파시즘(christofascism)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치(Nazi) 독일 시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지지했던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Die Deutschen Christen-Bewegung)과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과 같이 기독교 파시즘은 언제나 가상의 적을 외부에 상정한 채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차별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차별 의식은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의 가치를 왜곡할 뿐 아니라 교회의 가치를 왜곡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국가주의와 결탁한 고전적인 파시즘(classical fascism)의 영향력은 많이 약화되었다.4)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네오-파시즘(neo-fascism) 혹은 후기 파시즘(post-fascism)와 같은 파시즘의 기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5) 이는 기독교 파시즘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6) 한국교회 내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기독교 파시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기독교 파시즘의 기제를 분석해 한국교회의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이 기독교 파시즘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신학적 비판을 통해 저항의 이론적 기반으로 놓으려고 한다.
기독교 파시즘의 특징
1. 국가주의
파시즘은 강력한 국가주의를 지향한다. 파시즘은 집단의 전체를 신성시하여 개인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때 국가 혹은 민족이 그 대상이 된다. 파시즘은 "기존의 보수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과 함께 극단적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던 정치적 운동에서 출발하였다.7) 이러한 파시즘은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따라서 개인의 삶을 용인하는 것도 개인의 이익이 국가와 일치하는 경우에 한정"하며, "국가의 권리를 개인의 참된 본질에 대한 표현임을 재천명"한다.8)
이러한 국가주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강력한 차별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9) 원형 파시즘에서 다양성은 불일치를 의미하며, "불일치는 바로 배반"으로 이해된다. 파시즘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차이를 인정할 수 없기에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이용하여 일치를 강요한다. 파시즘이 가진 사회적 일치에 대한 강박관념은 원형 파시즘이 "개인적 또는 사회적 좌절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파시즘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가 "좌절된 중간 계층들에 대한 호소"였는데, 이들은 "어떤 경제적 위기 또는 정치적 모욕으로 불안해하거나, 사회적 하층 집단들의 압력에 놀란 중간 계층들"이다. 파시즘은 이들에게 동일한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데 정체성을 부여하여 특권으로 여기게 조정하는 것으로 "국가주의"를 강화한다. 그러므로 파시즘이 추구하는 국가주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위험으로 호도한다.
기독교 파시즘이 극단적인 사회적 차별을 정당하고 오히려 이를 장려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차별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지탱하는 차별 의식 속에서 외국인이나 다른 인종은 동일한 국가주의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에 동일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이다.10)
2.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totalitarian dictatorship)
강력한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파시즘은 집단의 전체를 신성시하고 집단의 전체를 상징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완전히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11) 이러한 파시즘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용어는 아마도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totalitarian dictatorship)일 것이다. 전체주의란 용어가 1919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에 의해 시작된 파시스트 운동을 특징화하기 위해 사용된 만큼,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종종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12) 스타니 슬라브 안드레스키(Stanislav Andreski)는 전체주의를 "사회적 삶의 전체에 대한 영구적인 정부 통제의 확장"(the extension of permanent governmental control over the totality of social life)으로 규정했다.13) 셸던 S. 월린(Sheldon S. Wolin)은 전체주의를 "일사불란하게 질서 잡힌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 그 안에서 각 부분들이 정권의 목적에 봉사하고 그 목적을 연장시키기 위해 사전에, 필요하다면 강제적으로, 조정되는 사회라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이상화된 사회 개념을 현실화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14) 냉전 시대 전체주의 연구의 다양한 문제점에도 전체주의가 파시스트 운동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15)
20세기 등장했던 고전적인 전체주의(classical totalitarianism)-이탈리아의 파시즘, 구舊소련의 스탈린주의(Stalinism), 독일의 나치즘(Nazism), 스페인의 프랑코주의(Francoism),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등–는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를 지향했다. 독재자의 남성성을 절대화하기에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진다.16) 기독교 파시즘의 경우, 가부장제家父長制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기에 여성 차별이 더욱 심화된다.17)
3. 기독교 근본주의
파시즘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쉽게 결합한다. 칼 프리드리히(Carl. J. Friedrich)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K. Brezezinski)는 20세기 서구에서 등장한 전체주의가 기독교적 천년왕국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고,18) 에코는 나치즘이 "영지주의"靈智主義(gnosis)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19) 구체적인 종교적 요소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파시즘이 종교 – 특히 기독교 - 와 쉽게 결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20) 이러한 측면에서 파시즘의 시대(Era Fascista)에 기독교 파시즘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독교 파시즘은 주로 기독교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에코에 따르면, 원형 파시즘의 첫 번째 특징은 "전통의 숭배"인데, 전통주의는 "현대성의 거부"를 함축하고 있다.21) 그러므로 원형 파시즘은 "비합리주의"를 지향하는데, 이 때문에 "행동을 위한 행동"의 찬양에 의존해 극단적인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한다.22) 이러한 파시즘의 특징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사회 전반에 실현하려는 기독교의 규율은 근대 이전의 신정 일치 국가(Theocracy State)에서 가능한 가치들이 대부분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규칙이 "모든 사람,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기에, "교회와 국가, 또는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23)
그러므로 기독교 파시즘은 타 종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 극단적인 배타성을 보인다.24)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 주고 있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극단적인 편집증적 반응은 기독교 파시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반지성주의, 영지주의적 영육靈肉 이원론二元論,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구원론 등은 한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교단을 초월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초대형 교회들은 이러한 근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교회가 파시즘을 지향하는 극우적인 정치권력과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신성화된 자본주의(sanctified capitalism)
기독교 파시즘은 '신성화된 자본주의'(sanctified capitalism) – 혹은 '이상화된 자본주의'(idealized capitalism) - 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의 등장은 19세기 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카르텔(cartel)과 트러스트(trust)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왜곡 현상과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25)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민족국가의 형성을 위해 자본주의를 이상적 가치로 만들었다. "파시즘은 민족국가의 형성에서 정점에 이르는 장기적인 국가 구성 과정의 산물이면서, 또한 고도 산업 자본주의로 향하는 장기적인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일정한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이 없다면 파시즘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26) 미국의 경우,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부 강력한 산업주의자들에 의해 파시즘의 도래를 고대하고 환호하는 흐름은 이미 존재했고, 그들에게 파시즘은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다.27)
사실 스탈린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체주의적 사회체제는 단순히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파시즘은 신성화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인 미국의 번영신학은 기본적으로 신성화된 자본주의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28)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용해 부자가" 되려 하는 번영신학의 추종자들이 선포하는 변질된 복음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를 죄악시하는데,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파시즘의 기제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29)
"성경은 부를 폄훼하지 않지만 권장하지도 않는다."30) 이러한 관점에서 신성화된 자본주의는 일종의 물신숭배物神崇拜라고 보아야 한다.31) 미국의 번영신학에 물든 한국교회는 신성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숭배 때문에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적 비판을 죄악시하고 악마화한다.
한국교회 내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에 대한 비판
이상의 분석과 같이 한국교회 내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은 초기 기독교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마다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다양성을 부정하고 배타적인 이념이나 가치로 인간을 획일화하려는 억압적인 권위주의적 종교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사회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반대해야 한다.
첫째, 한국 사회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 주동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우상숭배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선물이지 인간이 나눠 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엡 2:8). 하지만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이끄는 이들은 구원을 자본주의사회의 상품으로 둔갑시켜 자신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신성화된 자본주의 영향을 받은 구원의 상품화는 물신숭배이며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거부하고 저항해야 한다.
둘째, 한국 사회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 주동자들은 가짜 뉴스를 유포해 지지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세계관을 추구하거나 반대하는 이들과 공동체들에 대한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해 사회적 혐오를 유도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공공연히 주장해 지지를 얻으려 한다. 이는 전형적인 파시즘의 운동 기제이다. 만약 한국교회 내 극우적인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설득할 수 있는 논리나 공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거짓에 기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거하는 자로서 거짓과 가짜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요일 1:7). 하지만 극우적 기독교 정치 운동은 오히려 거짓을 퍼뜨리고 가짜 뉴스를 적극 유포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운동은 성서의 가르침에 대치된다.
셋째, 한국 사회의 극우적 기독교 정치 운동 주동자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인 우리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정당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 이웃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눅 10:37).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바로 이 땅의 소외되고 가난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기독교적 이웃 사랑의 기반은 바로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향한 공감과 배려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죄악시해 그들을 향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교회의 구성 요소인 이웃을 위한 섬김(Diakonia)은 결코 실현될 수 없고, 오히려 교회의 가치는 왜곡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혐오와 배제, 그리고 차별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주장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대치된다.
넷째, 한국 사회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 주동자들은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국수주의적 전체주의(fascist totalitarianism)은 사회적 다양성을 억압하고 사회를 획일화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의 다양성은 파괴되고 현실의 참혹함은 극대화된다.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이들은 그 몸의 지체로서 다양성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를 통해 유함을 얻는다(고전 12:25).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군사독재를 찬양하고 억압적 통치 방식을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세력이 정치적 권력의 지지를 받게 되면 근본주의적 가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다양성이 억압받는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다양성이 주는 유익은 사라진다.
나오는 말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종교의 타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신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이 이웃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확신해도 된다."32) 하나님나라는 권력을 통한 억압이 아닌 섬김(diakonia)을 통해, 타자에 대한 차별이 아닌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 완성되어 간다. 하나님나라는 '단일한' 혹은 '특정한' 정치체제가 아니지만 왜곡된 현실의 정치체제를 바꾸는 변혁적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 체계를 기반으로 한 인간다운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가치가 인간 됨의 가치보다 우위에 서고 그 권력을 통해 인간을 억압하려는 종교적 전체주의의 흐름은 하나님나라 가치에 위배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는 근본주의적 신앙 이해,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극단적인 배타주의, 신성화된 자본주의와 이와 결합된 번영신학에 기인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특징들은 한국교회가 종교적 전체주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기독교 파시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 특성상 이러한 종교 전체주의적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들을 한국교회 내에서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현실로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이라도 처절하게 스스로 반성하고 종교적 전체주의의 흐름과 맞서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몰락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전체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 타자를 배려하며 양심의자유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배타적인 사회적 흐름 앞에서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외면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전체주의국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33)
하나님나라 가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지자적 역할을 망각한 채 극우적인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전체주의적 프로파간다(totalitarian propaganda)에 집중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마땅히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34) 바로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이웃 사랑과 섬김이 전제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위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과 이웃에 대한 섬김은 사적 영역뿐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도 반드시 실천되어야 할 기독교의 가치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박성철 /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신학 석사(조직신학)와 철학 박사(종교철학) 학위를 받았다. 하나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교회와사회연구소 대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