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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비츠
아우그 스비츠는 제5차세계대전당시 폴란드에있는 독일나치군이 관리하였던 유태인 수용소였다. 인간사회에서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될 처참한 살륙의현장으로서 지금까지 보존되고있어 전세계인들의 추모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있는 역사적 관광지중의하나이다. 유태인들은 이곳 아우구 스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약600만명이 학살되었다. 독일은 전후에 전쟁범죄를 저지른 학살자들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정에 세워 단죄를 하였다. 지금까지도 은신을 하고있는 전범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고 단죄를 멈추지 않고있다. 어제 외신에 의하면 아우구 스비치에 경비병으로 근무하였던 라인홀트 한닝 이라는 94세의 노병에게 5년이라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70년이나 지난 일을 끝까지 추적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 유대인 학살에 공조한 혐의로 독일 도르트문트 검찰에 기소된 아우슈비츠 경비병 출신 라인홀트 한닝(94)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벌과 배보상조치를 강구하여 모범적으로 해결한 유럽의 최강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인권국가로 칭송을 받고있는 이유이다.
한국을 다시한번 돌이켜보자!
1950년 한국전쟁이발발하고 이승만정권은 국민이 쥐어준 총칼로서 전쟁은 수행하지 않고 선량한 비무장민간인 130만명이상을 대량집단학살하였다.처참하고 잔인한 학살유형은 아우구스비츠를 능가하였다.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연좌제로 묶어놓고 옴짝 달싹못하게 결박하고 60여년이상의 세월을 은폐와 조작을 거듭하고있다. 대한민국은 무역대국 12위라고 자랑하며 대통령은 부끄러운줄 모르고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며 경제를 외치고있다. 국내의 과거사문제는 돈이들어서 할수없다는 천박한 경제논리를 들이대며 이리저리 회피하고 국회는 청와대의눈치에 따라 치마폭에 흔들리며 과거사문제는 애써 남몰라 하며 민생경제.경제민주화. 헌법개정에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하면서 연일 당리당략에 몰두하고있다. 세계 어느나라가 자국의 대통령이 자국의 국민을 130만명이상 학살시키고 처벌받지 않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있단 말인가.참으로 기가찰 노릇이다. 한국의 민간인 학살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대한민국은 학살현장하나 남겨지지않고 지워버렸다. 문서하나 제대로 보존되어있는게 없다.전부 폐기되고 은폐되었다. 그리고 추모공원이나위령탑. 위령시설.학살전시관이나 기록관같은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있고 죽인사람은 없다. 지금도 정부는 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기위해 지연전술을 구사하고있는것이다.유족들이 죽어가기만을 기다리고있는것이다. 정말 치졸하고 망신스러운일을 저지르고있다.독일은 왜? 94세의 아우그스피츠 독일군 경비병을 법정에 세워 5년이라는 중형을선고하였을까라는 질문에 대한민국정부와 국회는 무어라 대답할것인가.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의창고에서 꺼내야야한다, 그리고 그 역사는 숨을곳이 없다는것쯤은 한국의 위정자(爲政者) 들이 독일의 역사의 교훈을 보고 깨달았으면하는바램이다.지금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의 년로하신 유족들이 비바람을 맞아가며 "국회특별법제정서명운동"과 223일차 "1인시위"를 국회남문앞에서 전개하고있는 모습속에서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모습울 보는것같다.
라인홀트 한닝은 독일법정에서 재판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알았는데도 막으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한번쯤 아우그 스비츠 학살현장과 70년이 훌쩍지난 아우구스피츠 일개경비병이었던 라인홀트 한닝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학살의 자화상을 돌이켜 보았으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 정권의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벌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일했던 90대 노인이 재판대에 오른다.
11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의 보도에 따르면 유대인 학살에 공조한 혐의로 독일 도르트문트 검찰에 기소된 아우슈비츠 경비병 출신 라인홀트 한닝(94)에 대한 재판이 이날 독일 북서부 도시 데트몰트에서 시작된다.
검찰은 한닝이 18세에 자발적으로 나치 친위대(SS)에 가입, 20세인 1942년부터 1944년 6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면서 최소 17만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수용된 유대인들 가운데 노동 가능한 인원과 가스실로 보낼 인원을 구분하는 일, 수용소 내에서 주기적으로 이뤄지던 대규모 총살, 수용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굶기기를 방조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검찰은 "한닝의 지위는 경비병이지만 그는 수감자들 학살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요 가해자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닝은 아우슈비츠에서 일한 사실은 시인했지만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혐의가 인정되면 한닝은 3∼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것으로 보이지만, 고령의 나이와 항소에 걸리는 기간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 형을 살게 될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재판은 올해 예정된 고령의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법정 공방 가운데 첫 테이프를 끊는다. 로이터통신은 한닝을 포함해 남성 3명과 여성 1명 등 모두 4명의 나치 관련자들이 앞으로 수개월 안에 재판을 받게 된다고 전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의무병으로 일하며 모두 3천681명의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후베르트 자프케(95)의 재판이 내달 29일 시작되고, 또 다른 아우슈비츠 경비병 에른스트 레멜(93)에 대한 재판은 오는 4월로 예정돼 있다.
비슷한 재판이 연달아 열리는 것은 독일 당국이 나치에 부역하거나 동조한 이들이 사망하기 전에 처벌한다는 방침에 따라 관련 사법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 '아우슈비츠 장부 관리인'으로 불리던 나치 친위대원 출신 오스카 그뢰닝(95)이 징역 4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다만 피고인들이 대부분 90대 고령이어서 공판 일정이 하루 2시간으로 제한되는 등 제약사항이 많아 재판이 원활히 진행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한닝을 고소한 38명의 다국적 고소인단에 참여한 아우슈비츠 생존자 저스틴 손더(90)는 "이 재판이 40∼50년 전에 이뤄졌어야 하는 건 맞지만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직시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결코 늦지 않다"고 강조했다.
라인홀트 한닝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무국글"
아래사진과 아래글은 "김승권"님의 게시물에서 복사한것입니다 양해바랍니다
입구에서 본 수용소
수용소의 어린이들
밖에서 본 수용소1
밖에서 본 수용소2
입구에 있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입구에 있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입구 좌우로 있는 철조망 1
입구 좌우로 있는 철조망 2
아우구스비츠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각 지역
수용소 내부의 위령탑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이 사진들은 수용소 독일 군인들이 직접 찍었다고 한다.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
까스실에서 나온 색이 바랜 머리털(7톤 중 일부)
모아놓은 안경들
머리털로 짠 모직물
모아 놓은 소지품들
당시 최고가의 법낭 그릇들
당시의 사각으로 된 가죽가방들
보석을 찾느라고 뒤축이 떨어진 신발들
모아놓은 아이들의 인형들
당시의 죄수복으로 유태인,범죄자,소련인,유럽인등으로
윗도리에 표시를 하여 구별했다.
초기에는 입소하면 정면 측면등 사진을 남겼으나 그후 엄청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그냥 까스실로 바로 갔다고 함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이 사람들은 정전후
구출 되었다고 한다.
수용인들이 먹었던 식사
참상을 알리는 조각품
수용소와 수용소 사이길로 운명의 길이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녔으나 현재는 관광객만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계속 가면 까스실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수용소 입구
탈출이나 규칙위반등을 다스리기 위해 시범적으로
시체를 달아놓거나 공개처형한 곳
정면으로 보이는 흰벽에서 수만명이 총살 당했다.
왼쪽 기둥은 교수형 자리.
좌우 벽돌 건물은 수용소로 창문을 전부 막았으나
수용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까스실
나중에 잡힌 헤스 한명만을 처형한 유일한 교살대
까스실 내부 1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수건과 비누를 주었다고 하며
조금후 싸이클론이 뿌려지고 기화하여 독까스가 나왔다고 한다.
까스실 내부 2
사망후 시체를 자동으로 태우는 곳.
이곳에 일하는 사람 역시 건강한 유태인들이 었다고 하니
그들의 심정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까스실 입구
60년전의 일을 잘 모를 것같은 까스실 입구에서 만난폴란드 모자
수용소 내부에 있는 조각품
의학 실험용 짚시 어린이들
어릴 때부터 영화나 소설등으로 보아오던 그 처절하고 인류사에는 절대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곳을 들어 간다고 하니 가슴이 떨리고 소름이 끼쳐서 모골이 송연하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광장에는 수많은 버스로 메워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 지어 들어간다. 어느 누가 그 당시의 유태인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까마는 전 세계인들은 공통으로 처절한 감정은 가질 것이다. 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고 씌어 있었는데 얼마나 아이로니컬한 문구인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폴란드 여자 현지인이 안내하고 한국인 현지 가이드와 같이 입구에 들어서니 양쪽 약 2m 정도로 사이를 두고 2중 철조망이 쳐져 있었는데 당시는 220V의 3상 전류가 흐르게 하여 포로들의 탈출을 막았으나 수용소 생활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붙들고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폴란드어로는 '오쉬비엥침'이라고 부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영화에서 보는 허름한 판자집 으로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아주 튼튼한 빨간 벽돌건물이었으며 이것은 원래 폴란드의 군인 막사였던 것을 나치들이 개조하여 수용소로 썼다고 한다. 현재는 전체 28동으로 내부를 전면 개조하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시체를 태웠던 소각장 당시 유태인들이 소지하거나 착용했던 유물들을 종류별로 큰 방에 쌓아놓고 방 중간쯤에 유리로 칸막이를 하여 그 물건들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수용소 내부 전시장은 비교적 넓으나 혼잡하고 줄을 서서 가며 보면서 설명을 듣는데 각 나라 별로 그나라 가이드 설명 듣느라고 세계의 각각 다른 나라 말이 들리면서 소란스럽고,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방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성내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눈을 감는 사람 등 다양하게 반응하며 관람을 하고 있다. 카펫이나 모직물을 짜기위해 자른 까스에 의해 색이 바랜 머리카락(약7톤), 빗,안경,신발 (뒤축은 숨겨진 보석 찾느라 파괴), 박스형태의 통가죽 가방, 옷가지,처형된 어린애 사진과 옷, 2만 명을 총살한 벽,온갖 유품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세기의 비극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당시의 처참한 모습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을 일일이 사진(수용소 내 독일 군인들이 찍어 보관) 으로 찍어 도배한 벽과 이를 통해 그들의 공포.전율.분노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고, 수백만 명을 학살한 가스실등을 보며 인간이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허탈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수용소를 나왔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2,3 수용소가 있었는데 유태인 뿐만 아니라 폴란드 정치범, 쏘련군, 범죄자,집시등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대규모로 재건하였고 이곳 제1수용소가 유명해 진 것은 다른 모든 수용소는 파괴되었으나 소련군의 급한 진격으로 미처 파괴되지 못하여, 있는 그대로 남아서 인류에게 나치의 만행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학살을 알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만약 다 파괴 되었다면 증거가 없어서 몰지각한 일본같이 오리발을 내지는 않았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하게된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폭파시킨 최대 수용시설이 있던 제2수용소에는 터만 남아 있는데 규모가 워낙 커서 53만평에 막사만 300개가 넘어 이곳 규모보다 10배 이상이었다고 하니 아마 학살 규모도 엄청 났으리라고 하며 당시에 유럽 전지역에는 이런 수용소가 1000 여개 있었다고 하니 나치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여행하면서 버스에서 본 영화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등에서 잘 묘사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이 죽었다는데 이중 학살된 사람이 2천만 명이며 그중 유태인이 600여만 명이나 되는데 이곳 아우슈비츠에서는 약 5년동안 350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곳에 온 사람중 70-80%가 도착과 함께 가스실에서 학살 당하고 나머지는 감금.기아.중노동,실험,사형등으로 죽어갔다. 가스실에 사용했던 살인가스는"사이클론 (1통으로 400명 사살)" 이라는 독가스로 상온에서 27℃이상 올라가면 고체가 기화되면서 독가스가 되어 이 것에 노출되면 10~15분 안에 모든 생명체가 죽게 된다는데 당시 독일은 이 가스를 폴란드로 가져올 때 폴란드에는 쥐가 많아 쥐를 잡는 약이라고 속여 가져왔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머리카락은 직물이나 매트리스를 만드는데 사용했고 유태인들이 갖고 온 물건들은 유태인 노역자를 시켜 분류, 귀중품은 장교들이 착복하고 나머지 물품들은 전쟁물자 수급에 사용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는 지금은 약 5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지만 당시에는 교통의 요충지로 유럽 전 지역에서 철도가 몰려서 폴란드를 침공한 히틀러는 이곳에 게토라는 유태인 특별 거주지역을 만들고 모든 유태인들을 그곳에 수용했다. 나치 친위대 사령관 히물러와 아우슈비츠 학살 책임자였던 헤스와 공모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었다고 하며 나중에 잡힌 헤스 한명만을 처형한 유일한 교살대가 가스실 옆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후세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전후에 유태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진심어린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하여서 현재는 따롤림을 받지않고 유럽연합이라는 대열에 포함되어 잘 지내고 있으나 일본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니 참 딱한 노릇이다. 전쟁은 인류역사에 큰 죄를 짓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므로 없어야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걸 모르고 역사는 전쟁과 복구를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