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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 크루스
새우에게서 배운 교훈
최근에 나는 새우가 일년에 6번 내지 8번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탈피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오래된 살 아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서 옛 살을 바꾸는 현상이다.
새우는 새 살이 나기 시작하면 바다 밑 바위에 살을 문질러서 오래된 살을 벗겨낸다.
그런데 매번 이 탈피를 할 때가 되면 어떤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새우는 본성적으로 바닷가에 깔린 작은 모래나 자갈들을 머리의 한쪽에 붙인다. 탈피를 할 때면 이미 붙어 있던 작은 자갈들은 옛 살과 함께 떨어져 나가고, 새 살이 나오면 다시 새 모래를 머리에 붙인다. 이 조그만 자갈을 “상태석”이라고 부르는데, 새우의 머리에 붙어 있는 이 조그만 자갈들은 새우가 살아남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수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새우들은 어쩔 수 없이 물결을 따라서 바다 밑바닥을 정신없이 뒹굴면서 돌게 되는데, 이때 새우들에게 자세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자갈(상태석)들의 역할이다. 머리에 붙은 이 자갈들은 무게와 중력에 의해서 무게 중심이 지면을 향하게 되고, 새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내려 누르는 작은 자갈의 중력 방향을 이용하여 자신이 똑바로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하등동물 안에 이러한 특별한 기능을 설치하심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거칠게 변하는 바다 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몇 년 전에 어느 해양 생물학자가 특별한 실험을 실시하였다. 커다란 수족관 안에 여러 마리의 새우를 넣어놓고 그 바닥에는 모래 대신에 쇠 조각들을 깔아 두었다. 탈피할 시기가 됨에 따라서 새우들은 본능적으로 그 표피를 벗겨 내었지만 바닥에는 모래가 없었으므로 모래 대신에 조그만 쇠 조각들을 머리에 붙였다.
새우가 쇠조각을 머리에 붙이는 과정이 끝나자 이 생물학자는 강한 지남철을 가져다가 수족관 위를 덮어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강한 지남철은 새우의 머리에 붙였던 쇠 조각들을 끌어들이므로 새우들에게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머리에 붙여놓은 모래가 중력에 의하여 끌리는 쪽을 지면으로 알고 있던 이 새우들은 이제 자신의 머리에 붙어있는 쇠조각들이 자력에 의해서 위쪽 방향을 향하게 이끌리게 되자, 위쪽을 바닥(지면)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족관 안에 있는 모든 새우들은 거꾸로 수영을 하게 되었다. 자석이 새우의 방향감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 실험을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생물학자는 머리에 쇠조각이 아니라 조그만 자갈이 붙여 있는 다른 정상 새우들을 그 수족관 안에 집어 넣어보았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벌어졌다. 새로 넣은 새우들은 정상적으로 똑바로 수영을 하는데, 쇠 조각을 머리에 붙인 새우들은 계속해서 거꾸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우스운 장면인가? 아마 머리에 쇠를 붙이고 있던 새우들은 새로 들어온 새우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왜 거꾸로 수영을 하고 있어” 하고 놀려댔을 것이다. 쇠조각을 머리에 붙인 새우들은 서로 귀속 말로 소문을 퍼뜨리면서 새로 들어온 정상 새우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도데체 너희들은 왜 유별나게 노니? 무엇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수영을 하지? 우리들은 똑바로 다니는데, 왜 너희들은 거꾸로 다니냔 말이야!”
이제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쇠를 붙이고 있던 새우들은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다. 수족관에 있던 새우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1) 그들은 느낌에 의존해서 판단하였다. 자신의 머리에 붙은 쇠 조각들이 끌리는 그 방향에 의존해서 판단하였다. 2) 그들은 대다수의 군중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수족관에 있는 다른 대부분의 새우들이 다 자기처럼 다니는 모습에 의존하여 자신들이 똑바로 수영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과 주변에 있는 대다수 새우들의 행동에 의존하여 진실과 진리를 판단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에 붙어 있던 쇠 조각들이 자신들을 쇠뇌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거꾸로 걸어다니게 되는 과정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 수족관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강한 자석과 같은 유혹들이 우리들의 정신적 삶을 교란시켜서 우리를 거꾸로 걷게 만들고 있다. 단순히 감정과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굴복당하고 쇠뇌 당하게 된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자신들이 끌리고 있는 그 상태에 의해서 달라지게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판단 기준을 통하여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거꾸로 걸어다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맞추어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거꾸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감각이 옳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옳은 것을 그르게 보고, 그른 것을 옳게 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고,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광신자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로 취급하여 버린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며, 싫어하는 것을 나쁘다고 믿는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실제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감정과 다수의 의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결정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는가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가르침과 설교를 판단할 때에 우리 자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느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몇 몇의 목사들과 신학박사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로 판단해서도 안된다.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은 항상 자신의 입장과 믿음을 합리화하거나, 절대로 틀릴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강한 자석에 이끌려서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수족관의 새우들처럼 우리도 자신의 느낌이나 군중심리가 주는 강력한 자력에 의해서 완전히 기만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단의 두가지 전략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진리라는 자력에 의해서만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언제나 거짓일 수 없는 단 한가지의 자력의 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혀내고 판단할 수 있는 표준을 제시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욕구들과 감정들은 이 말씀에 의하여 먼저 시험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 설교, 생활 습관, 언어, 그리고 은사와 기적들은 성경 말씀의 철저한 감독과 제한아래서 검사와 검사를 거듭하여 판단된 후에 받아들여 지거나 거절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가르침과 은사들조차도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거나,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내려진 잘못된 판단이나 오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단이 자주 이용하고 있는 두 가지 무기인 감정과 군중심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연구하여 대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요긴한 일이다. 사단의 두 가지 무기는 인간의 정신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의 심리를 이용하여 인류의 시조를 유혹에 굴복시킨 이후 6000년 동안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 왔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느낌과 감정을 이용하여 하와를 점령하였으며, 노아 홍수 때에는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직 노아의 8가족들만이 방주 안에 들어가 구원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단의 연구는 어떤 정신병 의사들의 연구보다 더 세심하다. 사단은 자신이 연구하는 것을 이미 6000년 동안 실험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인간을 유혹할 때에 사용하는 느낌과 감정, 그리고 군중심리라는 발판을 잘 방어하고 보호해야만 한다.
항상 똑바로 걸어다닐 수 있는 비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걸려들었는가! 타락과 부도덕으로 물들어진 이 세상이 사단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승리해 왔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과 진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군중심리를 따라서 걸어가는 길이야말로 넓은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러한 상태를 미리 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자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2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누가복음 17:26
이 말씀은, 마지막날에 오직 적은 소수의 무리들만이 온 세상에 편만하는 압도적인 기만을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경고해 준다. 세상 역사에서 오직 적은 소수의 사람들이 안일과 부정을 떠나서 진실과 정직의 편에 굳게 섰던 것처럼, 성경 역사에서도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진리와 원칙의 편에 굳게 섰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남은 무리(남은 자손)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하고 있는 이적, 자신들이 믿는 가르침, 자신들이 듣고 있는 설교를 오직 성경에 비추어 보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중요시 하며, 하나님의 눈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서워하고, 성경에 기록된 진리보다는 다수의 군중들에게 인기있는 가르침만을 골라서 따라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롭고 정확한 심판 하에서 경건의 모양만을 뒤집어 쓰고 있는 가라지로 판결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적은 숫자의 남은 무리들에 대하여 존경을 표해왔다. 일반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진리를 위하여 안일한 삶을 버리고 눈총과 따돌림 속에서 외로운 생애를 마친 이 적은 숫자의 의인들 때문에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다수는 진리를 찾기보다는 편안하고 쉬우며 대다수에 의하여 인정받는 삶을 선택한다. 그들은 자아의 부정과 절제 생활에 관한 기별을 성가신 것으로 여긴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성령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새벽 기도회 때에 드렸던 열정적인 방언 기도에도 불구하고, 낮 시간동안에는 부도덕과 부정직, 그리고 돈과 명예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마음대로 분을 내고 부절제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만 가면 각종 은사의 능력을 행사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진리에 대한 오해에 있다. 성령의 열매가 생애와 성품 속에 충만하게 맺힌 자들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성령의 은사가 아무 때에 아무에게나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설교 단상에서 저속한 농담을 섞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과 욕을 하면서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목사에게서까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혼돈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에 대하여 조롱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생애와 성품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현저하게 맺지 못한 자들에게도 방언과 치유의 은사가 내려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과 마귀의 기적을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감정과 느낌과 흥분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사단의 전략에 깊이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성경은 기적을 판단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두가지를 모든 것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번째 기준은 그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바가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가 이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해를 보지 못하고” 사 8:20. 두번째 기준은 그들의 성품과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 있는가 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얻는 느낌인 흥분과 행복감으로 거짓과 진리를 구별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경험한 기적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더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또한 자신의 경험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이 변화된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품성에 맺히고, 품성이 변화된 결과로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부여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안수 기도를 통하여 억지로 얻어내고, 얻어낸 은사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게 되는 앞뒤가 바뀐 뒤틀린 신앙을 통하여 점점 더 깊은 자기 기만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조심하라! 자신의 경험이 쇠 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새우의 경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군중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
사단이 덫에 쉽게 걸려들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동물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에 적응하듯이, 인간들도 환경과 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된다. 무의식적으로 듣고, 보는 사람들의 말들과 생활 방식이 우리의 생활을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킨다. 한 사람의 변화가 누룩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를 거꾸로 걷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던 일들에 차츰 적응되면, 나중에는 이상하던 것들이 정상으로 되어 버리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군중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적응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불필요하게 별다른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과 이웃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동물도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도 환경에 적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며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도하며, 성경을 상고하여 하늘로부터 도움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아래서 살고 있지만, 독립적인 판단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도 있고, 남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단순히 반응만을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결정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유혹과 기만의 손길을 뻗친다.
사도 바울은 사단의 기만적인 자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 마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숨겨져 있는 마귀의 덫을 볼 수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고 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5
우리들의 마음이 감정에 의하여 흔들리거나, 어리석은 군중들 속에 홀로 서 있다가 그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려고 할 때에, 또한 우리들의 행동과 반응이 대다수의 선호도에 의하여 정복되게 되려 할 때, 우리는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유혹과 기만에서 구할 수 있는 도움은 오직 하늘에서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펼치는 기만적인 덫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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