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연석회의와 북조선 임시헌법 토의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 초까지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고, 그 사이 남한에서는 남로당의 2.7구국투쟁과 제주4.3항쟁 등 단선반대투쟁과 미군정·경찰·우익세력의 저지 노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북조선은 연석회의 개최 결정 후 헌법초안 토의를 미루고 단정수립 반대 및 통일정부 수립에 집중했으나 독자적인 정부수립 계획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북조선 내에서는 통일정부 수립과 독자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두 가지 흐름이 교차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막일인 4월 19일 소련측 핵심인물들인 말리크, 스티코프, 둔킨은 소련 외상 말리크에게 보낸 공동서신에서 ‘남한에서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실시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한 이후에 북한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내각 형태로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석회의 개최 전에 이미 소련측은 남한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나면 북한에서도 헌법의 실시, 최고인민회의 선거, 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개최(1948년 4월) 북조선측이 정부 수립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 정부가 남한의 단선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남북연석회의의 성공적인 진행이 필요했고, 이 성공이 북조선측의 계획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남북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가 모인 대규모 연석회의와 4월 26일에서 30일 사이에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등의 소규모 연석회의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소련측과 북조선 지도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부수립에 김구와 김규식이 참여한다면 정통성 있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북조선 지도부는 김구와 김규식이 대규모 연석회의에 적극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요청했다.
그러나 김구는 연석회의 주석단에 포함되어 축사를 했지만 북한의 희망과 달리 남한측 대표로 보고를 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아예 병을 핑계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김규식은 그동안 모스크바 결정과 관련한 정세와 활동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고, 북조선 주장과 달리 소련 또한 동일한 외세로 인식하였다. 남한 단독정부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의 정부수립 또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식하였다. 김구·김규식은 북측의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는 대규모 연석회의보다는 정치지도자들간의 긴밀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4김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 등 소규모 연석회의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같은 견해차로 인해 대규모 연석회의에서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를 채택하면서 남한의 5.10단정 반대투쟁에는 합의했으나 통일정부 수립 문제는 이후의 소규모 연석회의의 논의 과제로 미루었다.
그런데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대규모 연석회의가 진행중이던 4월 22일 그동안 연기해왔던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를 4월 28〜29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소규모 연석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임시헌법초안을 토의하고 4월 29일 헌법제정위원회에서 작성한 조선헌법 수정초안을 원안대로 ‘찬동’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다만 북조선인민회의가 ‘전조선’ 헌법을 채택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비준’ 또는 ‘채택’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북조선은 ‘인민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남한측의 선전에 대응하는 한편,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북조선 헌법초안은 인민위원회를 국가권력의 기초로 하는 인민적 국가형태와 인민주권 형식을 담고 있었고, 경제구성에서 국가소유, 협동단체의 소유, 개인소유를 모두 인정하는 ‘인민민주주의’ 성격으로 되어 있었다. 북조선 헌법초안은 소련 헌법의 영향을 받았으나 2차 대전 후 동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일반화하고 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틀을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성격보다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인민민주주의혁명) 수행이라는 목표에 어울리는 내용이었고, 자본주의적 요소도 일정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소유와 상속권, 중소산업과 상공업의 자유 경영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었다. 대한민국의 초대헌법 내용과 비교해도 많은 부분 서로 근접하는 부분이 있었다. 권력 형태와 권력구조 등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경제체제에서는 중요산업 국유화 등 남북한 공히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북조선 토지개혁에서 한도가 5정보였던 토지소유도 5정보 또는 20정보까지 최대한도를 설정했는데 이는 향후 남한의 토지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헌법초안에서는 국기와 관련해 태극기 대신 신국기(인공기)를 채택하였다. 김두봉은 신국기 제정 이유로 태극기는 그 유래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어서 새로이 건립될 민주국가의 성격에 맞지 않으므로 새 민주국가의 성격에 맞는 국기를 새로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주26) 이로써 북조선 헌법초안은 향후 설치하게 될 최고인민회의의 형식적 ‘채택’ 절차만 남겨놓은 상태가 되었고, 북조선 또한 단독정부 수립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1948.7.8. 북조선인민회의 5차 회의에서 애국가와 태극기 폐지하고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를 채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