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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질문으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담아서 예 아니요 이렇게 답을 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감사합니다. 저는 이 질문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좀 쪼였어요.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 중에는 절대 이렇게 거짓말을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못하는 분들이 있어서 혹시나 아니요라고 이렇게 대답할까 봐 제가 마음이 엄청 쪼이고 이렇게 질문을 드렸는데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크게 내라고 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농담처럼 처음 설교를 제가 시작했지만 목사인 저에게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큰 것 중에 하나는 저 때문에 여러분이 믿음을 떠나거나 저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약해 지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굳이 이런 생각을 할 필요 없지 않을까요?
네 저에게 늘 제 양심을 좀 두드리는 말씀한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지라도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메우고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나으니라.
이 말씀이 저를 어떤 때는 되게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괴롭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계심을 믿냐고 물어본 거예요. 제가 긴 시간 목장 위에서 목회를 했는데 물론 책에 오신 분은 저와 짧은 시간이 있었죠. 제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여러분들이 행여나 아니요라고 답할까 봐 제가 마음이 되게 쪼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한 번도 아니라고 말씀 안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새 가족이 오면 새 가족 심방을 합니다. 이렇게 많이 하지 않아요. 요즘은 심방이 이렇게 대세는 아니어서 원하지 않을 경우에 저는 심방을 하지 않습니다.
근데 심방을 이제 요청이 있을 때 허락하신 분들에게 저희가 성경 구절을 이렇게 서예로 붓글씨로 좋은 작품을 써서 조그만 액자에 넣어서 이렇게 드립니다. 큰 액자를 드리면 요즘은 그걸 막 집에 이렇게 선구를 붙이는 것이 좀 불편한 분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피아노 위나 탁자 위에 놓고 이렇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붓글씨를 쓰는 서예 선생님은 되게 훌륭하신 분이에요. 집에 그분의 작품이 한 개 정도 있는 건 되게 좋다고 여겨서 그분과 오래 교제 끝에 이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가족분이 새 가족분이 좋아하는 성구를 저희가 물었어요. 마태복음 7장 23절의 일부분이에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원래 이게 좀 더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아멘 그중에 이 가운데 부분만 써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되게 과연 이 붓글씨를 써 드려야 되느냐 들지 말아야 되느냐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그런데 저희가 어떻든 요청하신 거니까 써서 이렇게 드렸어요. 그랬더니 매일 보면서 이 말씀을 좀 묵상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을 이렇게 성구 말씀으로 이렇게 적어놓으면 늘 마음에 도전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하신다고 하셔서 기쁨으로 써드렸고 이제는 그 성구를 써드린 것에 대해서 마음이 조금도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모른다고 아실 수 있잖아요. 진짜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 벌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을 섬기되 예배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리는 자세를 잃어버리면 구원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의미예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자세를 잃어버렸어요.
세상은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사상이나 철학은 목숨처럼 지키지만 하나님 말씀은 목숨처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사상이나 철학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에 영혼 구원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두려워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대해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꼭 알아야 하는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을 주의하고 조심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경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사실에 되게 오늘은 마음을 쏟고 우리의 눈과 귀를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복음에서 이탈하게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진리를 거역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럼 도대체 이거 출처가 뭘까?
오늘 이 말씀을 하면 아마 신앙이 좀 어리거나 아니면 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좀 깊이 묵상한 적이 없는 분들은 제 설교가 좀 기분 나쁘게 여겨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제가 이 말씀을 꼭 전하고 싶어요. 왜냐면 말씀에 그대로 기록된 거니까 만약에 제가 이 말씀을 재해석해서 전하는 거라면 여러분이 저를 미워하고 제 생각이나 사상을 좀 불편해도 상관없지만 여러분이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보시면 말씀 그대로예요. 하나도 제가 변경하거나 바꾼 고시 공간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불편하지만 우리가 꼭 마음에 새겨야 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 잘못된 사상 잘못된 철학의 출처가 미혹하는 영 보통 성경에는 이걸 마귀라고 그러죠. 마귀 사탄이라 그래요. 그리고 귀신이 잘못된 가르침의 출처라고 해요.
여러분 놀라셨죠?
물론 이미 알고 있는 분도 많지만 잘못된 가르침들, 잘못된 사상들, 잘못된 철학의 배후에는 누가 있냐?
마귀와 사탄이 그리고 귀신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왜 잘못된 가르침이 강력한지가 이해가 돼요.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잖아요. 못 빠져나와요. 성도들 중에 책을 수십 권, 수백 권 읽고 어떤 사정에 빠진 게 아니라 한 사람의 강의를 듣고 그 강의에 매료되어서 그 강의를 못 보자는 성도들이 생각보다는 많아요.
왜 그럴까요?
그 배후에 뭐가 있어서 미혹하는 영이 있기 때문인 거예요. 만약에 그런 강력한 힘이 없다면 여러분 한 번 읽었는데 거기에 빠져들겠어요?
여러분 중학교 고등학교 때 대학 때 공부했잖아요. 한 번 읽는다고 그렇게 빠져들던가요? 아니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잘 안 빠져들잖아요. 우리가 그런 존재예요. 우리가 한 번 인다고 뭐를 막 익히고 한 번 암송한다고 뭘 다 아는 그런 존재냐 아니에요.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 구절을 얼마나 많이 외우고 듣고 암송했어요. 근데 거기에 안 빠지셨잖아요.
그런데 묘하게 많은 성도들이 동영상 하나 보고 책 한 권 읽고 심지어 어떤 사람도 한 줄 문장을 읽고 이상한 가르침에 빠져요. 그걸 따르기 시작하고 그걸 본받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강한 힘이 있을까요?
잘못된 가르침에 그 배후에 미혹하는 영과 귀신이 있기 때문인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전한 말씀과 오늘 성경과 다른 점이 있으면 여러분 지적하셔도 돼요. 만약 여러분이 오늘 설교를 듣고 가서 목사님 제가 아무리 묵상해도 목사님이 오늘 설교하신 그 내용과 본문의 말씀은 틀린 겁니다고 여러분 저에게 항의하셔도 돼요.
저는 개인적으로 절대 티를 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악한 교훈의 출처가 사람이나 사상이나 종교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악한 교훈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아이들이 악한 사상을 좀 따라도 언젠가는 벗어나올 수 있겠지. 성도들이 악한 사랑을 좀 좋아하고 거기에 빠져 있어도 언젠가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요. 목회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부모도 그래 생각하고 솔직히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이 잘못된 가르침의 출처가 미혹하는 영 귀신이라고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혀요.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이 아주 강력한 거예요. 그 배후의 조정자가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아니라 미혹하는 영 귀신이기 때문에 이게 붙잡음이 결속이 아주 강력한 거예요. 그래서 한 줄을 잃고도 인생을 거기에 올인해요.
아니 우리가 초등학교부터 얼마나 많은 교과서를 읽었어요? 여러분 그거 읽고 거기에 올인하는 사람 본 적 있어요?
없어요. 국어 교과서를 읽고 수십 권의 국어 교과서를 읽었는데, 심지어 중고등학교를 되면 여러 교과서를 같이 공부해야 돼요. 요즘은 제가 정확히 잘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아이들은 여러 교과서를 공부를 같이 했어야 됐어요. 그래도 거기에 안 빠져들잖아요.
근데 왜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 줄 사상에 빠져들어갈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얄팍한 한 권의 철학 책을 읽고 빠져들까요?
많지는 않지만 제 서재 한 구석엔 철학책으로 차 있어요. 다 읽었어요. 웬만한 건 그래서 그 쪽이 안 빠졌잖아요. 저 니체도 좋아하고 사르트르도 좋아하고 캐릭터도 좋아하고 저 좋아하는 철학들이 되게 많았고 또 저 거기 안 빠졌어요. 그 책을 읽을 때 언더라인을 읽은 것도 많아요. 그래도 안 빠졌어요.
근데 왜 요즘 젊은이들이 왜 요즘 성도들이 왜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 줄 사상의 인생을 빠뜨리고 살아갈까요?
바로 그 배후에 미혹하는 영 귀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을 합니다. 원래 오늘 본문은 목요일날 새벽 기도회 본문이에요. 제가 이제 교육자 회의 때 설교를 조정하고 앞으로 부목사님은 매주 목요일부터 설교를 하시면 새벽에 설교를 하시면 됩니다. 조정했는데 새로 오신 부목사님이 되게 이렇게 열심히 많으셔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준비해서 이렇게 앉아 있다 왔더니 목사님이 양복을 입고 설교 준비를 다 하신 것 같아서 제가 그냥 조용히 입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고 저는 그래도 이 말씀이 좀 아쉽고 안타까워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잡아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꼭 전하고 싶었어요?
원래 새벽 기도인데 이상하게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목사님이 뭐 잘못했다 말하는 게 아니에요. 목사님이 설교를 아주 잘하세요. 저는 부역자가 설교를 잘하면 너무 행복해요. 이건 진짜 사실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 한 1% 2% 정도 불편함이 있을지 몰라요. 저는 사람이라서 기본적인 건 좋아요.
왜요? 제가 없거나 빈 자리에 성도들을 좋을 말씀으로 채울 수 있는 부교역자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잖아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혀 좀 이상하게 전하면 제가 불편하고 화가 나는 거지 잘 전하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말씀을 잘 전하시더라고요. 앞으로 제가 조금씩 비워도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이 과정을 왜 이야기하냐 하면 원래 이게 목요일 새벽 말씀이었다는 거예요. 근데 오늘 전하게 됐어요. 이 가정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서 과정을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게 됐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졌다가 못 빠져나와요. 어떤 사람들은 한 번 표정이 바뀌면 평생 그 표정에서 못 돌아오더라고요. 사도든 사모든 사상을 접해요. 거기에 빠져요. 그래서 표정이 바뀌어요.
여러분 사람이 먹는 것에 따라 표정이 바뀌잖아요. 그 영혼이 들어오는 것에 따라서 표정이 바뀌어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목회자들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잘못된 사상이 들어오면 표정이 바뀌어요. 그 바뀐 표정으로 평생 신앙생활을 해요. 그래서 교회 안의 목회자 역 간 대립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런 부류의 모임만 이제 쫓아다니는 거죠. 그리고는 교회 안에 있지만 행복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잘못된 가르침을 또 잘못된 사상들을 조심해야 되냐 하면 그 배후에유묘혹하는 영 귀신이 있기 때문에 붙잡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인 거예요. 너무 강력해서 한 줄로도 인생을 사로잡을 수 있어요.
저는 그래서 뭐 한 줄 읽고 인생이 꽂혔다는 사람들 무서워요. 아니 말씀에 그렇게 꽂혀야죠.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인생이 꽂히고 내 인생이 바뀌었으니까 저는 막 박수를 치고 축복해 줄 수는 있지만 어떤 책 한 권을 읽고 그렇게 인생이 바뀌었다 하면 저는 두려워요. 혹 그 배후에 미혹한 영이 있지 않을까 귀신의 영이 역사하지 않을까 그래서 두렵습니다.
여러분 알아야 될 것은 귀신의 억눌림을 벗어나는 일은 되게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 번 귀신과의 싸움을 해봤어요. 어려워요. 정말 어려워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 앞에 있을 때도 많아요. 물론 나중에 본성이 드러내지만 그만큼 악한 사상이 앞면을 몰수하게 하고요. 악한 사상이 관계도 깨뜨리게 만들고요. 악한 사상이 교회의 본질도 공격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인해서 동일하게 우리 간에 강력하게 역사예요. 그러니까 악한 사상도 귀신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그 역사가 강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강력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악한 영의 교훈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성령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잘못된 교훈을 분별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육과 싸우기도 어렵습니다. 악한 영과 귀신이 주장하는 잘못된 교훈은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마비시켜요. 그것을 추정하는 순간 우리의 양심이 마비가 됩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잘못된 교훈을 전하기 때문에 더 신뢰가 생기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해야 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이 하나님 나라가 실제하구나 잘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근데 악한 사상은 양심이 마비되어서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얼마나 담대하게 전하는지 몰라요. 표정 하나 변해 사람들이 그걸 진리로 믿어요. 여러분과 저는 우물쭈물하고 전하고 이단들은 확신으로 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단의 가르침이 진짜로 여기고 거기에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시작.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게 어떤 화인 맞았다는 게 뭐냐 하면 이 달군 쇠로 이렇게 낙인을 찍는 거예요. 낙인을 찍는 자리는 대개 이렇게 두꺼워져서 감각이 없어져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악한 영에 붙잡게 되면 양심의 하인을 맡게 되고 양심의 감각이 없어져요. 그래서 그 이후로 거짓말을 해도 위선의 삶을 살아도 자기는 진리 안에 있는 것처럼 복음 안에 있는 것처럼 말해요.
우리는 조금만 잘못 살아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여러분과 저 중에 그러니까 죄인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여러분 저는 여기 올라올 때까지 계속 싸워요.
제가 왜 일찍 와서 분당에 앉아 있는지 아세요?
계속 싸워요. 제 일주일에 어지럽던 생각들과도 싸우고 계속 싸우고 있다가 여기에 올라와서 말씀을 전해요. 어떨 때는 이게 다 해결이 안 돼서 말씀을 전할 때도 힘이 없어져요.
왜요?
자신이 없어요 미안하고 성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때론 나 자신에게 미안하고 어떨 때는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씀을 전해요.
근데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어떤 일이 벌어져요?
그런 삶과 아무 관계없이 거짓을 참인 것처럼 잘하고 그렇게 전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아요.
왜요? 배우가 다르기 때문인 거예요. 배후에 성령이 있는 것과 배후에 악한 영이 있는 것은 달라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또 눈여겨봐야 될 대목이 있어요. 이것도 들으면 여러분 엄청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이니까 들어야 돼요. 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지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잘못 사장대 가르침의 대표적인 것을 오늘 사도 바울이 두 가지를 들어요. 하나는 비혼주의 또 하나가 채식주의예요. 결혼을 못할 수 있어요.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못할 수 있지만 결혼을 안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연히 우리 결혼 못할 수 있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 생겨요. 그런 사람이 많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돕고 싶어요. 할 수만 있으면 우리 교회에 많은 싱글들이 와서 저희 교회를 통해서 저희 교회랑 결혼을 하고 또 그런 어떤 루트를 또 그런 좀 통로를 만들어서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제 소원이에요.
그러나 비혼주의자는 다른 거잖아요. 가정이 어려워서 삶이 힘들어서 결혼을 못하고 결혼의 시기를 놓친 것과 결혼을 안 하는 것 비혼주의가 그 사람의 삶 사장인 것과 완전히 다른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비혼자를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해요. 어떤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대표적으로 따지면 채식주의겠죠. 이것도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 빠져 있어요 비혼주의에 빠져 있고 채식주의에 빠져 있어요.
그 말고도 많은 사상들이 지금 우리나라는 팽배해요.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거기에 다 빠져들어가고 있어요.
저는 새벽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게 마음이 좀 두려웠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저를 욕해도 꼭 꼭 이 말씀을 전하고 싶었어요. 한 번쯤은 꼭 전해야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거예요.
이 배후에 잘못된 사상이나 가치관이나 문화와 종교의 배우가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주 강력한 거예요. 세상을 다 물들여 버렸어요. 몸이 아파서 채식은 할 수 있어요. 고기가 먹기 힘들어서 채식도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고기만 먹으면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어요.
저도 몸의 체질상 지금은 고기를 많이 먹으면 안 되는 약간 질병들도 있어요. 당연히 저는 고개를 줄여야 되죠. 그러나 사상이 된 채식주의, 사상이 된 비혼주의는 우리가 정말 조심 그런 사상들은 정말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거죠.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그 한 줄 사상이 그 동영상 하나가 되는 그 사상이 우리를 따로 잡아서 말씀을 이기게 만들거든요.
원래 뭐가 이겨야 돼요?
말씀이 이겨야 되는 거잖아요. 할렐루야
세상에 사장과 말씀이 싸워서 뭐가 이겨야 돼요? 말씀이 이겨야 되죠? 지금 뭐가 이기고 있어요? 사상이 이겨요 왜요?
성도들이 몰라요. 이 배후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을 듣고 저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은 좀 솔직하게 말씀 앞에 우리를 내려놓아 봅시다.
과연 제가 지금 틀린 말을 하고 있는지 찾기 어렵죠. 하나도 없죠 그죠? 가슴에 손을 던져도 없어요. 없어요.
왜요?
너무 명막한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멋진 말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할까요? 아름다운 말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할까요? 감동적이고 배려의 말이 중요할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중요할까요?
말씀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투박하고 거친 말씀이지만 여러분과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중요해요.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 못하노라.
이 말씀은 얼마나 거칠어요? 기분 나빠요 거칠지만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요?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아요 아름답고 수용적이고 포용적이지만 우리를 지옥으로 안내하기 때문에 죽음이 가르침인 거예요. 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죽음의 원녀에 매료 당해서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부탁합니다. 죽음의 언어에 여러분의 영혼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생명의 말씀에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겁니다. 할렐루야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이 시를 읽으면서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어요. 시가 정말 좋아요. 저는 옛날에 어른들이 찍은 시보다 이분의 시가 훨씬 더 지적인 감상이나 이런 것들이 탁월하다고 봐요.
근데 이분의 시를 읽다가 보니까 자살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름답고 감성적이지만 죽음의 언어였던 거예요. 물론 제 마음의 상태가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때 마음이 너무 안 좋았으니까 그런 시를 읽고 그런 마음이 들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성도들은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말로 포장된 세상의 사상의 근본을 발견해내고 그 위험성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영혼을 맡겨야 됩니다. 그럴 때 영혼의 해방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한 줄 사상이 주는 해방이 그렇게 큰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해방은 얼마나 위대하겠어요? 여러분 아직도 모르세요? 동영상 하나 가주는 그 영향력이 그렇게 센데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하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로 회복되려면 성도가 성도로 회복되려면 말씀의 유대함을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바른 교훈을 전하는 좋은 일꾼이 되게 되고 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이거를 디모데에게 에베소의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써서 전달한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바른 교육과 가르침 위에 서려면 먼저 목사가 바른 교훈과 가르침 위에 서야 돼요. 목회자는 자신을 바른 교훈과 가르침 위에 세우기 위해서 또 훈련받고 또 훈련받아야 돼요. 제가 훈련받는 일들을 게으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좀 불편하더라도 좋아하셔야 돼요. 제가 말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여러분도 말씀 위에 세울 수 없기 때문인 겁니다.
이후에 나오는 6절에서 16절은 바울이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권면하는 겁니다. 이미 이제 앞에서도 많은 목회자의 자격을 살펴봤어요. 여전히 바울은 목회자들에게 높은 신앙의 수준과 높은 삶과 높은 경건을 요구해요.
왜 그럴까요?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을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거예요.
최소한 니가 하나님 나라를 섬기려면 니가 이런 삶을 살아야 된다. 이 정도의 수준의 삶을 살아야 니가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자가 된다
라는 것을 모 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삶이 목회자들의 잘못된 삶이 복음을 훼손하거나 교회가 훼손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권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나 여러분과 저의 삶이 교회를 훼손하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디서 배운 한 줄 잘못된 사상이 교회를 훼손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한 번쯤은 묵상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이 배후에 미워하는 영이 귀신의 영이 있는 건 아닐까 나를 자꾸 우울하게 만드는 이 생각과 날 하나님께 떠나게 하는 이 사상들이 이 철학이 이 가치관의 배후에 악한 것이 있지 않을까 꼭 살펴야 됩니다. 모든 학문이 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이 철학가들도 크리스천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책 한 권에 한 줄, 글 한 줄에 말씀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만난 정치인에게, 잠깐 만난 여은이에게, 잠깐 만난 인플루언서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의 배후에 생각의 배후에 사상의 배후에 성령이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 배우가 된 삶을 살아야 돼. 나의 삶의 배우가 된 삶. 그래서 여러분 혹시 집에 잘못된 사장이 담긴 책이 있으면 버리세요. 아이들이 잘못된 사정을 혹시 읽고 있다면 아이들과 합의하에 버리십시오. 그 한 줄의 인생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목장 교회가 말씀 위에 서서 말씀을 견고히 붙잡는 말씀의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