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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령 산친구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솔바우
달궁 .
<달궁>은 2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마한의 피란 도성.
최초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는 개산 역사의 시발점.
천연적 요새로 애워싸인 달궁은 2천년 전 효왕의 별궁
마한은 고조선 내분 세력 일부가 남하해 형성된 국가.
고조선 내분이 심화되자 더 많은 유민들이 마한에 합류.
한반도 중부세력과 뭉쳐 삼한 고대국가 중 규모가 으뜸.
마한은 중국 군현과의 교역권 장악으로 급성장.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백제와 중국 교역권 다툼
백제 온조왕은 변한 진한과 연합해 마한을 공격.
그 연합군에 쫓긴 마한 효왕
지리산 달궁에서 마지막 항전.
달궁을 애워싼 능선에 성벽을 쌓는다.
마한은 피란 도성 마지막 궁전에서 패망.
마한의 멸망은 고조선 멸망과 관계가 깊다.
.............고조선의 멸망...............
위만조선 시대에 국력이 강해진 고조선.
위만조선 우거왕은 한나라와 교역 금지령.
고조선은 산동반도 제나라와 경제교류 및 군사동맹.
연나라는 BC 5세기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했던 국가
연나라는 고조선을 요동에서 평양으로 내쫓아버린다
그후 고조선은 평양을 중심으로 체재를 정비
만주 부여와 한반도 한강 이남 진을 식민지화.
그런데 진나라에 이어 한나라가 중국통일을 한다.
한나라는 서남 아시아 교역을 위해 고조선을 침공.
고조선의 속국 부여가 한나라 교역로를 가로막은 탓.
한나라는 부여와 한강 이남 '진'과 교역을 원했지만
고조선이 허락하지 않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점령한다.
이어, 한사군을 설치해 시베리아를 통해 서남아시아와 교역.
한편, 히말라야 부족들과 혼인 동맹
결국, 실크로드 개척에 성공한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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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기록.............
'반야봉 좌우 두 봉우리, 황령 정령.'
옛날 한나라 소제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겨
지리산 일대 서쪽에 도성을 쌓을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
도성을 싼 고개 이름을 황령과 정령.
두 장수의 성을 따서 명명하였다 한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
-황령암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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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
반선을 지나면 달궁마을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
서산대사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자.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왕조
북쪽은 백제, 남쪽은 진한과 변한의 세력.
달궁으로 쫓겨와서도 72년 동안 항전했던 듯.
성삼재 황령치와 정령치는 마한의 방어용 전초기지.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이 애워싼 달궁
지금은 잡초에 묻힌 돌더미와 주춧돌 잔해만 남았을 뿐.
'지리산 인간 개산의 역사가 담긴 곳'
'그 현장이 왜 이렇게 방치되어 있을까?'
한반도는 고대국가마다 다르게 왜곡된 역사기록
서로 꿰어 맞춰지지 않아 혼돈스러울 때가 많다.
이곳 마한 역사도 정확한 고증없는 기록들만 난무.
궁터엔 매연 차량들과 민박촌
그리고 관광객 인파의 북적거림
지리산 순환도로 한 복판에서 신음.
달궁은 마한의 역사현장은 소외된 채
계곡 피서 인파만 몰리는 점이 아쉽다.
..................달궁 마을......................................
심원마을 남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지리산 반야봉.
서쪽은 노고단, 북쪽은 만복대로 연결된 산맥이 병풍.
만복대와 노고단 반야봉으로 전남과 전북의 도 경계선.
'심원계곡은 기암과 폭포, 웅장한 원시림.'
달궁계곡 따라 풍치가 아름다운 쟁기소와 심원마을.
순환도로 따라 반야봉 정령치 노고단 화엄사 천은사
매년 경칩과 우수 사이에 채취된 고로쇠 & 민박집.
이곳 고로쇠 효험은 '흥부전 타령'에 자세하게 소개.
2004년 6월 순환도로 터널이 뚫린, 구룔계곡 달궁계곡.
노고단쪽으로 해발 1200여 고지의 고개가 바로 <정령치>.
이곳 정령치 북쪽의 <고리봉>은 행글라이딩 하기에 최적지.
고리봉 바로 아래 서쪽은 <운봉 목장>
달궁 남쪽은 '전국 체전 스키대회 개최지'
<만복대>. 동남쪽에는 노고단이 위치해 있다
2004년 6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
달궁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달궁마을(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계곡을 이용한 각종 식물채집
옥수수 오이 수확, 계곡 야영, 다슬기 줍기 등등 농촌체험 학습.
인근 귀농학교에서 친환경 유기농 교육 실시 (농협 전북지역본부)
'휴가철(7월 중순~ 8월 말) 1박2일 농촌체험 팜스테이.'
달궁계곡은 반선에서 달궁까지 5㎞ 정도가 볼거리.
이곳에서 가까운 실상사도 꼭 구경할만한 명소이다.
문의 처 : 지리산농협 산내지소(063)636-3072 & 김상중씨(063)626-3470
가는 길 :전주-24번국도-남원-서무리-60번 지방도로-산내면-729번 지방도-달궁.
<달궁마을.... 심원계곡... 심원마을> 찾아가는 길.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 도로를 따라 가면 <반선>.
뱀사골 입구 지나면 <달궁마을>이고 그 주차장 아래가 <궁터>
달궁계곡은 쟁기소, 쟁반소, 와폭, 구암소, 청룡소, 안심소 등.
달궁마을 쟁기소를 지나 계곡 쇠다리.
그곳 건너 암릉으로 3시간 거리 <반야선경>
반야 중봉 못 미쳐 삼거리 오른쪽 <심원계곡>
심원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심원마을>이다.
반야봉 올랐다가 노루목, 임걸령 거쳐 돼지평,
노고단 지나 심원마을로 원점 회귀산행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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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은 '달의 궁전'이라는 뜻
달궁은 지리산에서 사람이 처음 산 곳.
달궁은 중국 月宮姮娥(월궁항아)에서 유래.
.................달 선녀 항아 전설....................
'후예는 천상에 사는 활의 명인인 신.' 요제 때의 일이다.
10 태양이 차례로 번갈아 하늘로 오를 때에는 세상이 태평
어느 날, 10 태양이 한번에 하늘로 오르자 지상은 열 지옥
농작물은 타고 초목은 말라 비틀어졌으며,
하천은 말라서 먼지가 일어나는 천재지변
요제 덕으로도 도리가 없어 제준에게 호소
제준은 활의 명수인 후예를 하계에 파견해
아무쪼록 온당하게 사태를 수습하도록 명령.
후예는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약간 높다란 언덕 위로 올라
10 태양을 향해 활을 쏘았다.
9 태양을 쏘아 맞춰 떨어뜨렸다.
하여,단 하나의 태양 만 남았을 뿐.
그 덕분에 인간들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후예는 그 수습방법이 너무 거칠었다 하여
제준의 노여움을 샀기에 지상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천상의 여신 항아(嫦娥)는 후예의 아내.'
제준과 항아는 하늘에서 추방되자 인간으로 변한다
어느날 후예는 곤륜산에 사는 여신 서왕모를 찾아간다.
후예는 불로불사 장생약을 얻어와 아내 항아에게 맡겼다.
아내 항아는 후예가 없는 사이에 몰래 그 약을 먹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벌로 하늘에서 추방당한 운명이라 항아는 달나라로 갔다.
월궁에 도착하자 그녀의 몸은 점점 오그라들었다.
살결은 검어지고 보기에 흉칙한 두꺼비가 되었다.
달빛에 비치는 두꺼비 그림자는 바로 항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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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은 도교(道敎)의 신으로 그녀를 숭배.
월궁 항아는 ‘월궁 속의 선녀 항아’란 뜻이다.
항아는 '상궁이 되기 전 어린 궁녀’의 궁중언어.
달궁은 고대 중국 왕조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 중추절과 우리나라 추석............
중국 3대 명절 중추절(中秋節)은 우리나라 추석.
서로 다른 명절인듯 해도 그 풍습 내용은 똑 같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주위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속.
이때 하늘에 떠오르는 달은 위안을 주는 숭배의 대상.
인간이 불을 사용하며 숭배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오곡을 무르익게 해주는 것은 여전히 달 선녀 덕분.
추수가 끝난 후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날이 중추절.
달빛은 차고 부드러워 달선녀 항아 전설이 빚어진 듯.
항아는 광한궁(廣寒宮)을 짓고 달에 군림한 월신(月神)
남편을 속인 죄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두꺼비가 된다.
광한궁에 산다는 달선녀 이야기는 중국 전설에서 유래.
雲母屛風燭影深 운모 병풍 앞 촛불 그림자 깊어만 가고
長河漸落曉星沈 은하수 너머 새벽별 기울어 갈 때
嫦娥應悔偸靈藥 항아는 영약 훔친 일 후회하고 있으리
碧海靑天夜夜心 푸른 하늘 밤마다 홀로 지새는 마음
보름달 모양이 쟁반같다 하여 섬반(蟾盤)
수레바퀴같다 하여 계륜(桂輪)이란 불렀고
토끼와 두꺼비에 비유 금토(金兎) 옥토(玉兎)
그런가 하면 음력 8월 장원급제를 보름달에 비유
월중절계(月中折桂) 섬궁절계(蟾宮折桂)로서 표현
하늘로 날아갈 듯 출세한다는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중추절이 돌아올 때마다 온가족이 마당에 둘러앉아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족간에 오손도손 화목을 도모.
보름달 둥근 원(圓)처럼 구심점인 부모님 찾아뵙기.
중국 여성은 중추절에 달선녀같은 미모를 기원하며
달을 향해 절을 하지만 남자들은 절을 하지 않는다.
문인들은 달빛 아래 일엽편주를 띄우고 시조 한 수.
중국 아이들은 어른 간섭없이 밤새도록 장난친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추석날 밤새도록 장난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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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은 원래 마한 왕조가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
달궁은 전설 속 항아가 달선녀가 되어 홀로 살던 궁.
달궁이 유곽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유는 그 전설 때문.
묘하게도 달궁은 여인의 음부 위치에 있는 산세라 '달궁'
달궁은 주변이 높은 산으로 애워쌓인 천연적 요새.
항아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던 피난처 달궁.
묘하게도 달궁은 마한왕조 피난처이자 최후의 궁전.
'달궁이 유곽의 상징인 이유는 지리적인 환경 탓.'
달궁 전설 속 이상향을 그려놓은 정원이 광한루
남원 광한루원(사적 제303호)은 전설 속의 이상향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백제양식 조경공간.
광한루원의 정문 '청허부'는 월궁의 출입문을 상징
광한루원 들어서는 길은 천상 세계로 발을 딛는 듯.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에서 이름을 따온 '광한루'.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시작된 곳도 광한루.
단오날 그네뛰는 춘향에게 몽룡이 마음 빼긴 곳
견우가 직녀를 만난 듯, 월궁 항아를 처음 본 듯.
달뜨는 동쪽을 향해 지어진 수중누각 완월정.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전통 이조 양식 누각
춘향제 행사의 중요한 무대로 사용되는 완월정.
'광한루 앞 호수는 은하수를 상징.'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때
까마귀와 까치들이 만든 오작교.
몸과 몸을 이어 만든 전설의 다리
광한루 호수 속에 떠있는 3개의 섬.
중국 전설속 3신이 산다는 삼신산의 상징.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일컫는 삼신산.
금강산 황홀경을 뜻하는 봉래산
지리산 불로초를 뜻하는 방장산,
한라산 신선경을 뜻하는 영주산.
완월정 누각은 무릉도원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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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두산, 바래봉, 세걸산, 고리봉,
정령치, 만복대, 성삼재, 반야봉.
달궁을 병풍처럼 애워싼 만복대의 가을이 아름답다.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은빛 물결의 억새풀 꽃의 바다.
여인의 풀어헤친 젖가슴인양, 탐스러운 아름다움 가득.
'시골 초가집 지붕을 연상케 하는.. 광활한 초원.'
산 동쪽에는 ‘하늘 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
산 서쪽엔 산수유가 봄꽃을 피워내는 상위마을,
산 북쪽엔 5~6월에 바래봉 산등성이를 덮는 철쭉
만복대 능선을 뒤덮은 억새꽃 군락.
바람에 흩날리며 부르는 자연의 노래.
단풍이 스러질 무렵 재빛 억새꽃 장관.
멀리 천왕봉과 연봉들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들어 온 느낌이 드는 곳.
만복대 억새는 10월 초~ 11월 절정.
해질 무렵 황혼빛에 물든 황금빛 억새물결.
멀리 바람 결에 들려오는 으악새 우는 소리
자연의 소리가 가슴을 애닯게 하여주는 달궁.
심원 계곡이 있는 동쪽 만목대 능선은 완만하고,
산동마을이 있는 서쪽은 급경사라 천연적인 요새.
서쪽 남원, 구례, 운봉에서 접근하려면 가파른 능선.
달궁은 동학군 남부군들의 항전처.
......달궁으로 가는 세 코스..........
첫째 <성삼재 만복대 정령치 능선길>,
둘째 <상위마을에서 묘봉치로 오르는 길>
셋째 <심원계곡 따라 심원마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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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에서 심원마을까지 6km 계곡 길.
자연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별천지.
달궁 1km 지점 넓은 반석 가운데 <쟁기소>
자연이 빚어낸 걸작. '신비로운 여인의 비밀'.
달궁 계곡에서 유일한 다리 건너
500m거리의 지류에서 식수를 준비.
산길을 지나 산죽밭을 지나가면
반야봉에서 달궁마을로 뻗은 능선.
노송 암봉 철쭉 진달래 설경이 뒤섞여
봄이면 4계절이 공존하는 듯한 오솔길'
그곳을 지나면 심원계곡 반야봉 삼거리.
달궁 - 심원마을 - 쟁기소 - 반야봉
- 노루목 - 임걸령 - 노고단 -성삼재.
6 시간 8km 코스로 쟁기소 이정표가 들머리
반야봉이 지리산 제 2 봉인 사실을
실감나게 해주는 경치좋은 코스이다.
지리산 끝자락까지 진한군에게 쫓긴 마한왕조.
달궁을 거점으로 <성삼재>능선에 3 장수를 파견.
8 명의 장수가 지켰던 <팔령치>.
정장군이 방어망 구축한 <정령치>.
달궁으로 숨었을 망정 만만하지 않았을 세력.
지리산 관광도로 정령치에서 성삼재까지 9 ㎞.
<만복대>는 전형적인 억새밭 가을 산행 코스
만목대> 들머리 정령치는 기원 전 도성 유적지.
정령치는 마한의 효왕이 정(鄭)장군을 파견한 곳.
노고단 입구의 성삼재(姓三峙)
바래봉 남쪽의 팔랑재(八郞峙)
각각 3명 장군과 8명의 병사들
달궁을 지키는 성터였다고 전해온다.
달궁은 왕조가 뿌리 내리기 힘든 환경.
1600년 경 안동 권씨가 임진왜란 때해 달궁으로 피난.
1730년 영조 때 달궁에서 100m 떨어진 궁터에 10 여호.
영조 7년 1731년 신해년 대홍수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
그당시 산사태에서 생존자는 단 한 명,
임금이 직접 쓴 제문으로 원혼을 달랬다.
1940년 115 세대 마을은 1951년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폐쇄.
1954년 주민이 다시 입주하기 전까지 이 일대는 빨치산 무대.
1936년 마을 산림도로는, 빨치산 토벌 이후 1970년 군사도로.
1970년 군내 버스가 운행되기 이전까지는
주민들은 재넘어 구례 산동시장을 다녔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에 싸인 달궁.
두 갈래 산 능선이 V 자로 벌어진 사이 깊숙한 은신처.
현재, 달궁은 잡초더미에 묻힌 돌더미와 주춧돌 잔해 뿐
'월궁(月宮) 지명도 잊혀져가듯 지금은.. 達宮.'
마한.
'마한 왕조는 어떻게 형성된 고대 국가일까?'
<마한 왕조>는 BC 1세기∼AD 3세기경 한강(漢江)유역으로부터
삼한시대에 충청 전라 지역을 다스린 여러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변한은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합병되고 진한은 신라에게 점령당한다.
마한은 <삼국지><동이전>역사 기록에 의하면 55개 소국의 연합국이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규모가 큰 곳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곳은 읍차(邑借), 마한 왕조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역사적 기록이 없다.
마한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유물은 경상도에 비해 풍부하다.
그 유물을 보면, 청동기시대부터 선진 문명 정치집단의 존재.
금강 유역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대부분 마한지역 소국이다.
BC 3∼BC 2세기 세형 동검 문화를 토대로 발전한 정치집단.
마한왕조는 영토 전역을 다스린 국가 형태는 미치지 못한 듯.
다만, 충남 일정범위 내의 정치집단이 뭉쳐 마한 소국연맹체.
고양·용인·부여·영암에서 발굴된 청동기 거푸집은 마한의 유물.
마한의 존속시기는 기원 전 300년부터 기원 후 300년까지 약 600 년
기원 전부터 300년간 청동기문화, 기원 후 300년까지 철기문화 배경.
위만에 의해 망한 고조선 남하 세력과 기존의 토착세력이 결합한 집단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새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익산에 도읍을 정한다.
위씨조선 유민들의 한반도 한수 이남으로 남하
한군현(漢郡縣) 설치로 철기문화가 도입되면서
삼한시대 마한 중심의 문화 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이 새로운 교역 중심이 되자
삼한의 주도국이었던 마한의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2 세기 이후 마한은 영역 다툼 끝에 백제에게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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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잔여 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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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삼국사기 멸망기록과 달리, 한반도 주변에서 존속한 듯.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도에 걸쳐 五十國을 지배했던 연맹 국가.
마한의 장수 '주근'은 백제 온조왕(16년)에게 우곡성을 점령당한다.
'마한의 장수 '맹소는 신라 탈해왕(61년)에게 복암성에서 항복.'
마한의 일부 세력은 3세기 후반에 중국과 교류한 내용 등등(삼국사기)
마한의 일부세력이 4세기에 전라도 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 ('일본서기')
역사학자 김경렬씨는 달궁(마한 동성)이 백제 정복과 무관한 것으로 본다.
마한 왕조는 달궁을 마지막으로 묻혀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반도 고대국가 중에서 중요한 획을 이루었던 마한 왕조의 역사.
이대로 그 역사가 묻혀지고 버려지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뿔뿔이 흩어진 마한 역사를 추적해보고 싶다.
지리산 인간 개산역사 속에 그 해답이 있을 듯 하다.
달궁 이외에 마한의 또 다른 별궁터 흔적을 찾아보자.
..................마한의 별궁터 흔적들...............................
마한은 달궁 말고도 여원치(해발450m) 계곡에 별궁이 있었다는 설.
그 별궁 터 계곡엔 마애여래불에 얽힌 여인의 정절에 대한 이야기
호국혼 전설을 간직한 99 구비 고개가 있는 정상의 주지봉 산신단.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이루어진다는.. 신단.
남원 8경 섬진강 상류의 여원치는 남원이 내려다보이는 곳.
남원 8경
구룡계곡, 여원치의 석양, 광한추월, 세걸산의 연봉,
교룡 낙조, 반야봉 낙조, 만복대 갈대, 뱀사골 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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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백제에 패망 후, 300년간 어디로 유랑한걸까?
변한 진한의 패망 세력들은 각각 어디로 흩어진걸까?
혹시, 강화도 진도 거제도 제주도 대마도로 들어간 듯.
강화도 진도 거제도 제주도 등을 추적해 보자.
아울러 한라산에 얽힌 유래와 전설까지 살펴보자.
마한 잔여세력은 분명 마한 왕조 재건을 꿈꿨을듯.
'동아시아 해상무역 장악이 마한 재건의 지름길.'
강화도는 서해 건너 산동 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
고려시대 개성 상인이 인삼을 재배한 곳이 강화도.
진나라 절반을 주고 불로초와 바꾸려고했던 진시황.
'천왕성모의 영원한 젊음' 비결은..산삼.'
달궁은 마한왕조 세력이 패망한 마지막 거점.
마한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후 곳곳을 유랑.
828년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할 때까지도 존속.
달궁은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
이제는 흩어진 역사를 찾아내어 보호할 시기인듯.
달궁 옆 인월, 운봉, 반선, 마천은 지리산 외곽마을.
옛날부터 지리산에 기대어 살아왔던 주민들 보금자리.
지리산의 들머리이기도 하지만 각종 특산물 재배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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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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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은 삼한시대 마한의 도읍지였던 곳.
'서동과 선화공주 전설'이 서려있는 익산 미륵산.
미륵산에서 내려다본 익산 평야는 풍요의 들녘이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둔
서동을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
‘과부가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서동을 낳았다’- 삼국유사.
전북 익산 사람들은 부여의 남쪽이 익산이라는 사실과
서동이 마를 캐고 금을 얻었다는 오금산 설화를 믿는다.
무왕이 백제 왕국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었던 곳이 익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익산 미륵사터와 미륵산(430m)
무왕 서동이 부인과 함께 미륵산 앞을 지나다 미륵보살을 만나,
부인 청에 따라 지은 절이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에 있는 미륵사.
신라 황룡사보다 2배가 크고 황룡사 모델이 됐던 미륵사
지금 석탑(국보 제11호)만을 남겨두고 빈 터로 남아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보이는 바다와 같은 논과 금강 변 웅포.
정상 인근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면 왼쪽으로 금마 저수지
우리나라 지도 형태라‘지도 연못’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미륵산 주변에는 큰산이 없어 사방이 확 틔였다.
날씨가 좋으면 금강변 웅포까지 바라볼 수 있다.
뱃길이고 들길이고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무왕이 왜 이곳으로 천도를 꿈꾸었는지 이해가 간다
미륵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왕궁면 왕궁리라는 지명
그 곳에는 6만5,700평 규모의 거대한 궁궐터가 있다.
가을 들판을 내처 달려 금강변에 이르면 웅포나루.
날씨 좋은 날 저녁이면, 황홀한 노을빛을 연출하고
추수 끝날 즈음 수십만 오리가 찾아드는 철새의 낙원.
익산은 보석가공으로 특화한 보석의 도시.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진입하면 보석박물관
거대한 반지와 다이아몬드 모형이 반짝인다.
'국경을 초월한 서동 선화의 사랑이야기’
서동축제에 꽃미남‘청년 서동’선발대회
경주에서 온 선화와 어울리면 축제의 절정.
서동의 출생에서 사랑을 그린 ‘서동열전’ 공연
‘사랑, 사랑, 내사랑아!’에서는 다양한 주인공들.
서동과 선화, 로미오와 줄리엣, 향단과 방자, 장녹수 등
사랑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
사랑 영화들이 ‘가을밤 러브시네마’를 통해 방영
체험마을에서 백제생활 체험, 태학사 체험, 서동요 체험
삼한시대.
변한은 B.C 194년 기자조선 유민이 경상도에 세운 나라.
정미 원년 번조선왕은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진한과 변한 구분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진한과 변한은 성장 과정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분리.
...................진한..........................
진한은 기원전부터 4세기까지 낙동강 동쪽
경상도지역 여러 정치집단을 통괄하는 명칭.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진국(辰國)의 후신이라고 기재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삼한 전체의 전신이라고 기록
진국과 진한의 관계를 놓고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지〉 진한조에 의하면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진(秦)나라 고역을 피해 한(韓)으로 온 망명인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진한에게 주었다고 한다.
대체로 마한에 비해 열세였던 것으로 보이며,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반에 사로국에 의해 통합
훗날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했다고 전해온다.
진한은 철을 마한 낙랑군 대방군 동예 왜에 수출했다.
철광석을 철정 형태로 만들어 물자교역 수단으로 삼았다.
진한은 눈수, 송화강 유역 등 만주 중부에서
수렵과 농업에 종사하다가 이주한 민족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진한인(辰韓人)은 공격적이고,
전쟁할 때엔 먼 곳까지도 이동하는 기마전술이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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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변한[弁韓]은 경상도 지역에 진한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
변진으로도 표기되며, 이들 중 대부분은 가야연맹체를 구성
진한과의 구분 방법은 낙동강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역적 차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언어·법속·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을 섬김이 다르다"
결국 진한과 변한은 같은 문화기반을 가진 정치집단들
중국 군현과의 교역과정에서 교역 루트의 차이로 구별
김해지방의 구야국(狗邪國), 함안지방의 안야국(安邪國),
고령의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동래의 독로국(瀆盧國) 등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한 철산지로 유명하며,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는 문신 풍습이 있었다
변한 민족은 만주 남부지방에서 농.어업에 종사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한반도로 이주한 민족.
변한인(弁韓人)은 수군전술(水軍戰術) 또는
보병전술(步兵戰術)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쟁할 때 공격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이었고,
육상운송보다는 해상운송을 주로 사용하였다.
변한인은 몸은 컸고,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이었으며 법풍속이 특히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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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안야국(安邪國)...................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소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 안야국(弁辰安邪國)
'안야·아라·아시량' 같은 음으로 함안의 아라가야
신라 법흥왕 때 군사력으로 병합하여 군(郡)을 설치
말이산 고분군, 아라가야 왕궁지 성산산성 등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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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유적[城山遺蹟]........................
경남 창원시 외동 성산마을 조개더미 유적과 산성유적.
남천을 낀 충적평야 지대에 솟은 구릉 정상에 산성 터
구릉 조개더미 유적에는 홈도끼·갈돌·화살촉·돌도끼 등
석기와 질그릇이 층위에 따라 다르게 나오고
각종 뼈연모들과 함께 청동기 조각도 나왔다.
특히, 바닥층에서는 쇠부리터로 보이는 유구
오주전(五珠錢) 출토로 유적 연대는 BC 1세기
쇠부리터는 고성·동래·양산 유적보다 큰 규모
성터는 구릉 정상부 총길이 423m에 달하는 자연돌 산성
너비 7m, 남아 있는 높이 1.5m이며 삼국시대 전기에 축성.
BC 1세기~ AD 3세기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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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창원)..........................
강원도 남서부에 있는 철원군[鐵原郡] 별호가 창원.
현재 철원군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진 '철의 산지.'
고구려(또는 백제) 때는 철원군·모을동비(毛乙冬非)
신라 때는 철성군. 후고구려 때는 태봉의 왕도였으며,
고려의 왕건이 이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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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리는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탁은 중마한을 창건후 고향인 월지에 도읍을 정했고, 변.진도 수도를 정한다.
3한은 마한의 다스림을 따랐고 서로 도왔고, 변한은 진한과 언어 풍습이 유사.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기록 -
변한은 B.C 39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항복
변한의 항복으로 와해된 변한 연맹체는 신라에 합병,
나머지 변한 세력 대부분은 김수로왕에게 정복당했다.
김수로왕은 그곳에 6 나라의 소국을 세우고 가락국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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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은 한반도에서 한수 이남 지역의 토착 원주민 세력이다.
삼한은 한수 이북 민족보다 서해 건너 중국과 긴밀하게 왕래.
같은 한반도에 있으면서도 중국에 더 가까운 풍습을 갖고있다.
마한은 고조선,
변한은 기자조선,
진한은 위만조선 풍습.
성씨.
한반도 성씨에 대한 족보를 보면
삼한시대의 형성과정이 보이는 듯.
...............삼한시대부터 한반도 성씨 유래..............................
기자조선 영역은 요하 하류, 해성,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
B.C 3세기 흉노족에게 시라무렌하 영역을 잃고 연 한 진 때 쇠퇴.
기자조선 후예는 행주 기씨 , 서씨 , 태원 선우씨 , 청주 한씨
그외 해주, 태인 경, 토산 궁(弓), 봉화 금, 밀양, 함평 노(魯)
고구려 고씨(高句麗 高氏)·
백제 여씨(百濟 餘氏) ·
신라 김씨(新羅 金氏) 주류.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
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
묘(苗)·왕(王)·장(張)·사마·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는 백제 근초고왕 4세기 초.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풍습이 있었고
그 이후부터 한반도에 부계사회가 뿌리내렸던 때문.
한반도 성씨는 중국 고대 패망 왕조 국가를 총 망라.
즉, 중국에서 이주해온 유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
백성이란 100 성씨 씨족들이 모여 이룬 나라의 구성원.
씨족마다 풍습 문화이 다르고 가옥 구조도 천태만상.
한반도는 고대 국가, 8도 지방마다 색다른 가옥구조
전세계에서 가장 천태만상 가옥 전시장 같은 한반도.
.................우리나라 주거환경 특징................
구석기시대 인간은 동굴이나 바위틈 그늘에서 살았다..
그후 나뭇가지 원추형 뼈대와 나뭇잎 등으로 만든 가옥.
제 4 빙하기 이후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기르고 농사
집단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하며 반 지하 타원형 주거지.
원형, 타원형,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긴 네모꼴 형태.
청동기 시대(B.C 10세기경)에는 나즈막한 언덕에 10∼20호.
많게는 100호 정도의 마을을 형성하며 농경 어업 또는 목축.
주거지가 커졌으며 기거, 취사, 작업, 저장 등으로 나뉜 벽체
고조선 시대 움집은 지하를 깊게 파고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짜고 풀 흙 등을 덮은 주거지.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 움집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때 비로소 여자는 안쪽 깊은 곳을 차지하고
중간은 작업실, 입구는 남성 및 야외 생활도구
고구려 주거지는 온돌과 지붕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유사했고 산 중턱에 살았다는 기록
신라는 기후가 따뜻한 지방이므로 평상 위에서 생활
고려는 백성은 움집 형태였고 귀족은 기와집 형태.
이조시대에는 고려 때 주거지 구조를 그대로 계승
목조가구식 온돌과 마루가 있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이조 건축은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 위엄을 갖췄다.
건물 자체의 균형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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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정돈된 우리나라.'
2천년 혈통을 족보로 만들어 대물림한 유일한 나라.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엔 600종, 13,000권 소장
원래 중국 6조(六朝)시대에 시작된 족보는 왕실 계통 기록.
한반도에서 족보가 보편화된 시기는 1565년(조선 명종20년) 이후
<문화유씨 가정보>에 민족혈통을 수록하자 명문가문도 족보 간행
17세기 이후에 여러 양반 가문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조 초기에 간행된 족보 대부분은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내용.
이조 중기에 들어서자 조상을 미화하고, 조상벼슬을 과장하거나 조작.
심지어 명문 가문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중국에서 유래된 족보도 많았다.
이조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은 국가의 지배 계층.
이조시대 후반부터 양반 계층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양반 상민의 신분격차가 없어질 무렵 너나 없이 양반 주장.
이조시대 말기에는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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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언제부터 성씨를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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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은 누구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그 성과 본관의 유래가 담긴 족보가 있다.
족보는 한반도의 역사 전통 사회구조 파악에 길잡이.
'고대부터의 혈연과 지연도 알 수 있는 족보.'
성씨는 출생 혈통 겨레(족) 소속집단 국가를 나타내는 호칭.
즉, 혈연집단인 씨족에서 비롯되어 소속 국가까지 알려준다.
하여 성씨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뿌리가 하나로 모아진다.
성씨는 한자로 이름 앞에 붙여 본관과 함께 사용한다.
하여, 같은 성씨라도 혈연 관계가 없는 타 성씨와 구별.
성씨는 대대로 갈라져 같은 조상이라도 성씨가 달라지고
같은 성씨이면서도 그 조상이 혈연과 무관한 경우도 많다.
부 또는 모 성을 따르기도 하며 모성 변성, 사성, 자칭성 탓.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남자는 씨, 여자는 성으로 호칭했다.
즉, 부계사회는 씨를 사용했고, 모계사회는 성으로 호칭했다.
훗날 성씨가 합쳐졌고, 씨는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호칭.
귀한 신분은 씨를 사용, 천한 신분은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고려 초기(10세기) 지배층이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을 사용.
성은 사회구성원이고 명은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씌여졌다.
하여, 성은 본관을 의미하고 씨는 높임 말의 의미로서 사용했다.
씨는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의 부인을 부를 때 경칭으로 씌였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시대.
그당시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씨 성을 사용했던 역사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누구나 모두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닌 듯.
성씨(姓氏)가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급제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 이후.
성씨 유래와 족보들을 보면, 한반도가 한 핏줄 만은 아닌 듯.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대국가들로부터 유래된 성씨의 흔적이다.
서해 지역이 육지였던 시점에서부터 여러 민족이 살았던 한반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 아래로 잠긴 서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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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지대 민족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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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각각 흩어져 나라와 언어는 달라도 풍습 외모는 유사.
현재, 한반도에는 수많은 고대국가의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각 성씨 족보에만 그 뿌리가 남았을뿐 역사기록은 없다.
한반도 지리산 일대는 성씨 문화 풍습이 다른 여러 민족의 삶터.
마한의 창건부터 패망 역사를 추적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한에 관한 역사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26년(서기8년) 마한의 '국읍(國邑)' 함락.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마저 정복 당해 마한 멸망.- <삼국사기>
삼국시대 달궁계곡은 삼한시대 마한왕조 피난처 -<서산대사 황령기>
기원전 84년 경 마한 효왕이 '30년 진한과의 전쟁' 中 피난처 별궁인 곳.
백제 온조왕 27년 (서기 9년)에 마한 왕조 멸망. - <삼국사기 기록>.
3세기 후반 마한이 중국과 교류, 4세기 서해안에 진출.-<일본 서기>
당시, 전라도 해안에는 인신매매한 해적들의 주민 납치 사례가 잦았다.
해적들은 남자를 노비로 팔아 넘겼고 여자는 유곽에 팔아넘긴 사례 속출.
당나라에는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 살아가는 신라인들이 많았다.
훗날, 노예로 고생하는 신라인들이 안타까워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
해적들을 소탕하고 뱃길을 열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게 된다.
828년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는 오늘날까지 해신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
그당시 해적의 세력은 신라 국력으로도 손쓰지 못할 규모.
서해항로가 세계적인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알수 있다.
얼마나 많은 거상들의 상선이 서해 항로를 왕래했던 것일까?
<청해진>은 장보고가 지금의 완도에 설치했던 해군·무역기지.
828년(흥덕왕 3)에 당나라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된 장보고
신라 청해진대사가 되어 세력을 키워가자 신라 중앙귀족들이 경계.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항로를 개설한 장보고는 신라와 수평적 관계.
장보고의 적극적 후원으로 신라에서 불교문화는 전성기를 맞게된다.
장보고의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이 신라의 국운을 좌우할 정도였던 듯.
당시 장보고 세력의 밑바탕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서해 항로였다.
846년 문성왕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고 청해진을 토벌.
851년 청해진을 폐쇄하고 주민은 지금의 전북 김제로 강제 이주시킨다.
'장보고 죽음 이후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까지 500년 동안 공도.'
장보고가 소탕했던 해적들은 왜구 또는 삼한의 잔여 세력인 듯.
장보고가 암살 당한 후 서해 항로에는 또 다시 해적이 들끓는다.
신라는 장보고 암살 이후에 서해 항로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은 어디로 간걸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 서해항로는 일본으로 넘어간 듯 싶다.
백제왕실의 후예가 일본 황실을 찾이하게 된 원동력이 된 듯.
장보고는 일본에서 해신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7세기 말 신라는 삼국통일을 했지만 9세기 말까지 왕권 다툼.
신라의 지방호족 세력이 반기를 들어 중앙 정부 지배력은 약화.
백성들은 지방 귀족에게 착취당했고 왜적의 약탈에도 시달렸다.
먼 이국에 노예로 팔려 가거나 당나라로 희망찾아 이주하기도 했다.
굶주림과 약탈, 폭정에 견디다 못한 민초 중에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신라 패망 후에도 한반도 해안지역에서 해적 및 왜구들의 만행은 빈번.
고려말· 이조 초기에 왜구를 근절하려고 세 차례 대마도를 정벌한 역사.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 연안 일본인들의 해적집단을 총칭한다.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로 활동, 무네씨(宗氏)가 대마도를 관리했다.
대마도는 농토가 척박했고 가뭄을 면하기 어려운 환경.
식량부족으로 약탈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여건.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항로 상에 있기에 해적들의 본거지.
고려 말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를 1만 군대로 평정.
왜선 300 여척과 관사·민가를 불태웠던... 1차 대마도 정벌.
2차 대마도정벌은 이조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태조는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정벌, 왜구를 근절시켰다.
1419년( 세종 1) 3차 정벌로 왜구는 평화적 내왕자로 변했다.
한반도의 속국 대마도는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의 속국이 된다.
대마도는 한반도에 세 차례 정벌 당한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하여, 그곳 관광지에 만국기가 걸려있어도 태극기 만 볼 수 없다.
'아직도 600 년전 정벌 당한 맺힌 한이 남아있다는 증거.'
왜구(倭寇).
'왜구'라는 용어는 '왜(倭)'와 '구(寇)'의 합성어.
'왜'라는 글자의 뜻은 고대 일본 국호에 대한 호칭.
'구'는 떼도둑 또는 겁탈을 뜻하는 집단 도둑 행위.
일본의 연구자는 13세기부터 16세기 해적으로 정의
그 이유는 중국의 사무역 상인들이 이끄는 해적집단
왜구의 발생의 근본원인은 일본의 국내 사정에 있다.
이 무렵 일본은 남북조쟁란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
중앙정치 권력이 지방에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서부 일본 지방의 해안 어민들이 왜구로 변신
특히, 1392년 남북조의 쟁란이 북쪽의 승리로 끝나자
여기서 패배한 남군세력 잔당이 해적 또는 무력 상인화.
인접지역이나 국가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행위를 자행.
또한 이들 왜구는 중국과 한반도의 무역 단절로
생필품인 미곡 등을 얻기 위해 약탈행위를 감행.
왜구는 일본 해적이라고 중국과 한반도에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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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 이라 부르는 동해 가운데 문무대왕 수중 왕능.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6년에 당나라 세력을 축출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한 신라 문무대왕(661-681)의 수중릉.
'그는 왜 자신의 시신을 동해에 안치하라고 유언했을까?'
용이 되어 동해에서 왜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
사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문무왕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삼국통일 후에 당나라 세력까지 쫓아냈던 신라의 문무왕.
그가 묻힌 대왕암은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 밑 동해바다
문무왕은 죽은 뒤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고 전해온다.
660년 김유신과 더불어 5만 군사로 백제를 격멸했던 문무왕.
사후 동해의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인도식으로 화장해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대왕의 유언.
그 뜻에 따라 화장해 동해의 바위섬, 대왕암의 수중릉에 매장.
육지에서 약 19.8m 떨어져 있는 길이 약 200m의 바위섬
동서남북 십자수로 가운데 거북모양 화강암석 안에 납골.
길이 3.6m, 폭 2.85m, 두께 0.9m 크기의 문무왕 수중왕릉.
이곳은 문무대왕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
이러한 수중왕릉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이 한 것.
신라시대에 왜적의 침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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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는 왜구에 대한 한민족의 한이 서린 사찰.
828년(신라 흥덕왕 3) 실상사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
한반도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우려해 건립했다.
통일신라가 사찰을 지어 경계할 만큼 왜구는 위협적인 적.
AD 396년(병신년) 비류백제 응신천황은 광개토대왕에게 참패
해상탈출 후 백제의 지배권 왜 나라 지역에 AD 400년경 망명
망명정부(나라 백제, 야마토 왜, 대화 왜)를 수립했다는 기록.
1400 여년전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백제 지배계층 3만명의 망명정부 '일본 시가현 요까이찌시'.
이곳은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이룬 일본의 전진기지 유적지.
'왓따산(渡來山) 정상에 있는... 3층 석탑.'
부여의 정림사 5층 석탑과 닮았고 모국을 그리며 만든 탑.
그 주변에는 망명 백제인들의 혼백이 담겨 있는, 중요한 유적.
주변에는 3만 5천여개 이상의 부도가 바다를 이루는 유서깊은 곳.
백제인들의 이곳 망명정부는 훗날 일본왕실의 주인이 되고야 만다.
일본 황실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와 무관하지 않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가자 왜의 제명여제가 구원군을 파병.
왜의 천왕 제명여제(의자왕 누이동생)는 나당연합군에게 참패.
결국, 왜와 백제 망명정부 세력이 힘을 합쳐 이룩한 나라 일본.
중국 명나라 해안 봉쇄령 이후 더욱 창궐했던 왜구.
일본의 맹주들과 상인조합이 뒷배경인 무장세력 왜구.
통일신라는 옛 백제 세력과 왜적의 침공을 늘 경계했다.
하여, 828년 통일신라에서 왜구를 경계해 실상사를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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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이조까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의 해적 왜구.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고려 말에서 이조 초 극심
왜구 발생 시기는 고려 몽골연합군의 2 차례 일본정벌 이후.
일본 내란으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들이 노예와 미곡을 약탈
왜구는 일본 호족들의 철저한 보호와 통제 아래 행동하였다.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 송도 등등 이었으며, 대마도가 주동.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왜구의 침입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이며,
이후 더욱 심해져 공민왕 때 동해·황해·남해의 연안뿐 아니라
한반도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의 치안까지 위협하였다.
고려 우왕 때는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는 1227년 1260년·1263년에 막부에 왜구 단속을 요청
그 뒤 고려·몽골연합군의 일본정벌로 양국관계는 악화되고
사절왕래도 단절된 한편으로 고려에서는 왜구에 대해 강경책
1376년 최영의 홍산대첩,
1380년 나세 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荒山大捷),
1383년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이 유명.
특히 최무선은 화통 화포로 진포싸움과 남해대첩에서 대승
그러나, 고려는 원(元)나라의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기지
과중한 부담을 치뤄 경제적 파탄에 이르러 멸망의 직접 원인
왜구의 침입은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김사형(金士衡)이 대마도 송도를 정벌
강경책과 귀화의 기회를 주는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실패.
1419년(세종 1) 이종무 등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
이조는 상왜(商倭)를 비롯한 왜인들의 왕래를 제한적 허용.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국제무역을 하게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뒤 삼포왜란·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달량왜변(達梁倭變)
이조 정권의 왜구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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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실의 남북조 혼란기에 왜구는 고려와 중국 연안을 침입
전쟁중 많은 인력이 죽자 주변 국가를 침공해 인력을 보충했다.
왜구는 납치한 인력을 병사, 농부, 잡역부, 노예 등으로 삼았다.
왜구는 빈민이나 군대를 동원해 살인 방화 파괴 약탈 등을 자행.
왜구 실체는 호족 또는 지배 계층의 대대적, 정치적인 해적집단
필요에 따라 수백 척에 수만 명 대군단 규모로 왜구가 출몰했다.
천재지변 흉년 가뭄 홍수 태풍 병충해 돌림병 때마다 왜구가 극성.
왜구는 무역 약탈을 위해 고려 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침입.
왜구의 지휘 장수들은 완벽한 무장과 항해술과 대규모 병력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은 훈련이 얼마나 치밀한지 보여준다.
왜구들은 쌀과 재물을 모아둔 고려 해안가 조창을 집중공격.
고려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겼는데도, 왜구는 내륙까지 침입.
왜구는 저항하는 아녀자 팔다리를 자르고 살해할 정도로 잔인.
그러나 왜구가 노린 것은 부녀자보다 젊고 힘센 장정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 수가 3 만.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되는 대마도에 모셔진 고려의 불상.
고려불화는 전 세계 100 점 중 90 점이 현재 일본에 있다.
일본 최대의 혼란기 남북조 혈투에서 패한 후쿠오카 통치자
쇼니는 큐슈에서 세력을 잃고 대마도와 고려에서 재기할 꿈.
이성계는 그 왜구를 몰아내어 최영과 함께 국민적 영웅이 된다.
또한 이조 건국의 결정적 계기였던 위화도 회군의 명분도 왜구.
그리하여, 이성계는 왜구토벌 과정에서 민심과 권력을 거머쥔다.
16세기 왜구의 구성원 대부분은 중국인이란 일본 학자 주장.
왜구는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를 오가는 무역상인들 집단.
당 멸망후 명나라 해안봉쇄령으로 상권을 잃은 중국 무역상들.
왜구가 되어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해적이 되었다고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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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거제도에서 40 km이고, 일본 본토에서는 80km 거리.
해류의 방향은 북한에서 부산과 거제를 거쳐 대마도로 흐른다.
제주도에서 부표를 띄워놓으면 대마도 나가사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대마도는 한반도와 실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 무역항.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의 무역항로를 잇는 중요한 거점.
'삼별초의 난'은 고려 원종 때 일어난 항몽투쟁.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총칭한 것으로,
최씨 정권의 사병적인 성격이 짙은 군사 집단이다.
1232년(고종19) 몽골 침락을 피해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
삼별초는 강도(江都;강화도)를 수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섬 밖으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해 상당한 전과
1258년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
몽골과 30년간 계속된 전쟁이 종식되고 왕정이 복구된 듯한 형세.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조정에서는 개경환도에 관해 의견대립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개 개경환도를 희망
삼별초의 무신들은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고 하여 반대
1270년(원종 11) 마침내 출륙환도(出陸還都)가 단행되고,
환도에 불응한 삼별초를 해체명령 후 그들의 명부도 압수.
이에 삼별초군은 그해 6월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 주동자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도내 인심이 흉흉하고 호응자가 적었다.
하여 3일 뒤 진도로 남하하여 그곳에서 대몽항쟁.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11월에 탐라까지 세력을 뻗쳐 남방의 제해권 장악
1271년 5월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꺾이고
본거지를 탐라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3년 2월 평정.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골에 대한 항전
자신들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과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연합군과 3년간 저항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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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잔여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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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고려시대부터 이조시대까지 왜구의 본거지.
임진왜란 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전까지 독립 자치령.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향방이 대마도 정치노선을 좌우.
임진왜란 이후부터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주역은 일본.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을 때엔 한반도.
그 이후부터는 중국(당나라 명나라 원나라)이 주역인 듯.
왜구는 해상무역 및 상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장집단.
왜구는 한반도 항로는 물론 내륙의 지리까지 꿰뚫고 있다.
왜구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거상들의 무장군사들로 추정된다.
왜구는 한반도 백성들을 납치해 온갖 만행을 저질러왔다.
당나라 노예의 상당수는 해적들에게 붙잡혀왔던 신라인들.
힘센 남자 신라인들은 해적의 무장 병력으로도 충당되었다.
일본과 한반도 중국을 잇는 항로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그 섬주민에게는 국법보다 해적의 만행이 훨씬 무서웠을 듯.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제주도 일대 다도해가 해적들의 본거지.
이조시대에 삼포를 개항, 왜구들을 귀화시키거나 달래기도 했다.
이조에 귀화한 만여명 왜인들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총의 유효사거리 및 왜군의 취약점을 한반도 의병들에게 알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필승.' - 손자병법.
우리나라는 아직도 일본역사나 왜구의 실체에 대해 어둡다.
일본을 이기려면 항일 감정보다 일본을 아는 것이 우선일 듯.
이조가 왜구를 배타해 대마도를 상실한 역사는 정말 뼈아프다.
왜구가 자주 출현했던 우리나라의 도서 지방
신안군 도서. 강화도, 진도, 거제도, 제주도.
마한의 패망세력이 정착한 곳으로도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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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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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자살바위로 유명한 태종대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무열왕이 활을 쏘던 곳.
그 활시위가 바다를 향했을까? 절벽을 향했을까?
................무열왕 김춘추..............
신라 제29대 왕으로서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김춘추.
법률, 관료 제도를 정비, 군사조직 강화, 국가체제 확립.
660년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 통일 기반을 마련.
백제 점령 이듬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삼국통일 위업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한 김춘추.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영특했다.
당나라 태종도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
" 호오, 성인의 기개가 서려 있구나 ! "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뜻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일찌기 받아들였다.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신라를 발전시킨 왕.
무열왕릉은 선도산 아래의 송림속에 자리잡고 있다.
무열왕릉 남쪽에는 무열왕의 비석인 돌거북과 이수
조각이 무척 씩씩하고 아름다워 우리나라 최고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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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 절벽 너머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망부석.
바다로 떠난 님 기다리다 세월에 굳어진 망부석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님 향한 천년의 기다림인 듯.
태종대에서 나오는 길에 해양대학교 선착장의 목선.
돛을 내린 범선 뱃머리에 씌여있는 ‘700년 전의 약속’
'어떤 약속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그 사연.'
고려 충숙왕때, 양자강 하구 경원(영파)항을 떠난 중국상선
폭풍을 피하다가 임자도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하고 말았었다.
세찬 바람에 밀린 배는 파도를 피해 전남 서해안의 다도해 속
그러나, 임자도 4km 남겨두고 안타깝게 바다 속에 침몰했다.
겨우 섬에 상륙한 몇 명의 선원들 마저 임자도에서 죽어갔다.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한 공도령으로 임자도는 무인도였던 탓.
그당시 추토사 김방경은 70년 전에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
그후, 1270년 영광군으로 천읍한 후 154년 간 임자도는 무인도.
중국 경원(영파)항은 700년 전, 원나라 말 신안 유물선 출항지.
경원 항은 남방의 광주, 천주, 복주 등과 함께 세계적인 무역항
모두 고려와 왜를 연결하는 남방 항로의 기점이었던 항구들이다.
경원항과 신안은 왜를 연결하는 옛날부터 위험한 뱃길이다.
죽음을 각오한 항로이라 항해 성공확률이 반반인 무역 항로,
항해에 성공하면 교역이윤은 최고 원가의 200 배 실패하면 죽음.
그런 배가 풍랑을 만나 다도해에 가라앉은지 어연 650년.
1975년 5월, 임자도 앞바다에서 보물선의 실체를 드러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 발견
1996년 6월, 한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중국에서 복원
'700년 전의 약속 호’로 명명되어 19일간의 뱃길 탐사
옛 고대 항로를 복원하는 3000km 대장정을 마쳤던 것이다.
복원된 배는 총길이 31m, 몸체높이 2.6m로 중국 대형 상선.
700년 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했던 중국의 보물선.
중국 영파에서 출항, 목포,·후쿠오카를 거쳐 오사카까지
19일간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700년 전의 약속을 이룬 것.
'7백년 전의 약속 호’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후
다시 부산 한국 해양대학교에 기증되어 그곳 선착장에 보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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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옛부터 동아시아 해상왕국 전략적인 요충지 신안군.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왜선을 물리친 해전 격전지.
'옛부터 한반도에서 항해술이 제일 발달한 곳.'
마한은 패망 전까지 신안군 앞바다를 사수.
그러나, 동아시아 해상왕국을 이룩하려던 백제.
가야국과 연합한 백제는 마한의 달궁을 점령한듯.
달궁 전투는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다툼.
신안군 앞바다는 동아시아 실크로드 요충지.
마한 잔여세력은 이후 신안군을 유랑한듯 싶다.
옛부터 해적과 왜구가 창궐했던 도서 지방.
자욱한 안개로 인해 침몰된 선박이 많은 곳.
하여, 아직도 어부 그물에 종종 걸리는 보물.
'보물선에 대한 루머가 끊이지 않는 곳.'
지도읍·증도면·임자면·자은면·비금면·도초면·
흑산면·하의면·신의면·장산면·안좌면·팔금면·
암태면·압해면, 선도·병풍도·우이도·가거도·태도·
대둔도·자라도·매화도·고이도 출장소 등 1개읍 13개면
9개 출장소 143개 동리. 군청소재지는 목포시 북교동이다.
면적 652.15㎢, 인구 50,769(2003), 인구밀도 77.6명/㎢(2003).
이조시대까지 신안군 도서들은 월경지(越境地) 형태
나주·영광·부안·만경·무안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1896년 돌산군·완도군·지도군 신설
서남해안의 섬들을 소속시켰는데,
지금 신안군 섬들은 옛 지도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지도군이 폐지
지도군 소속 섬들과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에 편입,
군내면이 지도면으로 개칭.
이조시대 도서지역은 중앙관서와 궁방들의 토지
일본 식민지 시기까지 토지분쟁을 일으켰던 요인
1914년 하의도를 시작으로 1923년 암태도에서
소작 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969년 무안군 섬 지역을 분리해 신안군을 신설했다.
1976년 '신안 해저유물'이 인양되어 주목을 받았다.
2006년 6월 27일 SBS 시사프로그램 '긴급출동 SOS 24'
전남 신안군의 한 섬에 갇힌 채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
'현대판 노예 청년'을 방송 후 네티즌들의 비난이 빗발.
오후 2시까지 30일 하루 방문자수는 무려 8400 여명
하루종일 일하고 쉰 김치에 찬밥 신세였던 노예 생활.
마치, 해적이 들끓던 그 옛날 고대사회로 돌아간 느낌.
'신안군은 고대사회 동아시아 해상무역 요충지.'
[자연환경]
무안반도에까지 뻗어내린 노령산맥이 서해로 빠져.
형성된 유인도 79개, 무인도 750개의 섬으로 구성.
안좌도·압해도·도초도·임자도·암태도·증도·
장산도·하의도·대흑산도·홍도 등이 중요한 섬.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고 해역은 수심이 15m 내외
해양성 기후, 연평균기온 13.9℃ 내외,
1월 기온 2.1℃, 8월 기온 27.2℃ 내외,
강우량은 613㎜, 한류와 난류 교차 지역
짙은 안개가 많아 선박 항해에 영향을 끼친다.
[산업·교통]
주민 64%가 농업, 24.8%가 수산업에 종사.
간석지에서 굴·꼬막 김·미역 양식 및 제염업
오징어 멸치 도미 조기 갈치 고등어 홍어 새우
우이도 꽃게, 비금도 강달어, 임자도 새우,
흑산도 삼치 강달어 홍어 등이 많이 잡힌다.
대부분 목포항에서 암태면·비금면·도초면·
흑산면·임자면·하의면·장산면, 정기 여객선
목포-홍도 간을 1시간 30분 만에 운항하는 쾌속정
[유물·유적·관광]
대흑산도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포함된 패총 발견
대흑산도 진리, 장산도 대리, 압해도 대천리 고인돌
압해도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포함된 패총이 분포.
팔금도 신안읍리 3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71호),
대흑산도 3층석탑, 장산도의 불상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흑산도의 신안향교,
지도읍의 지도향교와 태천리 연계사(蓮溪祠),
임자면 이흑암리의 화산단(華山壇) 등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전지역이 관광지.
해수욕장으로는 임자도의 대광 해수욕장,
암태도 추포 해수욕장, 비금도 명사십리,
도초면의 시목, 대흑산도의 진리해수욕장
<민속놀이>
뺑돌이치기·밤달애놀이·광대놀이·앙감질하고놀기
<설화>
<자은용추의 용〉〈희룡산 선녀봉〉〈부룡떡시루바위전설〉
<민요>
〈동당기타령〉〈밤달애노래〉〈탕건바위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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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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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황금알을 낳는 해상무역 상권의 요충지.
고구려도 서해 해상무역을 장악해 강대국으로 성장.
마한은 백제에게 강화도를 뺏기고 달궁까지 남하한듯.
'그 가능성과 흔적을 찾아 강화도로 가보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나도 강화는 눈벌판.
그곳으로 가는 차창밖 김포평야도 시베리아 벌판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 강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기원전 6세기 전후)의 돌무덤.
전 세계 7만기 고인돌 중 우리나라 고인돌은 3만.
그중 고창은 가장 많은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곳이다.
화순은 보존 상태가 좋고 고인돌 채석장이 있는 고장.
'강화군 오상리와 삼거리, 부근리 등은 고인돌 120기.'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최대 크기의 고인돌 밀집 유적지.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의 상판 돌의 길이가 7미터가 넘고,
높이 2.6M 덮개 돌의 무게만 80톤이나 되는 북방식 고인돌.
중부 지방과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북방식,
영호남 지방서 주로 발견되는 고인돌 형태는 남방식이다.
북방식은 시신을 땅 위에, 남방식은 땅 속에 모시는 특징.
강화 지역 고인돌은 이 두 가지 방식의 혼합 형태를 띤다.
'그 아득한 옛날에 왜 이런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대인들의 목숨 건 이런 노력에서 비롯된 현대문명.
잠시 발길을 돌려 가까운 곳의 전등사로 찾아가보자.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 아도화상이 창건.
'고려 충렬왕 원비가 불전에 옥 등잔을 올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돌계단은 각 층계는 아홉부분으로 구성.
대조루는 아침 저녁으로 밀려오는 조수를 바라본다는 뜻
전등사는 조선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그 소임을 다해왔다.
전등사 대웅전 추녀는 아홉 불상이 그려진 것이 특징.
중국 윈깡의 석불동(石佛洞)에 안치된 불상을 보는 듯.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천도(遷都)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돌아오기까지 39년 동안 도읍
강화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단군에게 제사 지낸 곳.
강화는 국란이 있을 때마다 대피한 천연 요새와도 같은 곳.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해 머물렀고,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배도.
그 후 효종은 인조 때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등
강화 해안에 방어시설을 만들고 둘레 112KM를 요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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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경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한민족의 신도(神道)
지금부터 4천3백년 전 단군이 천제를 행한 역사적 유적지.
강화도 서남단 바닷가에 삼신상제님께 제를 올렸던 마리산
이 산은 마치 자로 잰 듯 백두산과 한라산의 꼭 중간지점
마리산은 박달나무 자생지, 마리산 쑥은 강화약쑥 중 명약
현재, 마니산(摩尼山)이란 지명의 옛 이름은 마리산(摩利山)
단군이 천제를 올린 참성단이 있는 곳이 마리산.
1231년 몽고 침략 때 1232년 고종은 강화로 천도.
1270년 개성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몽고군과 대치
그러나, 三別抄는 항몽 정권을 수립후 진도로 남하.
고려 때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단군에게 제사지내면서 민족이 하나로 뭉친다.
단군 제사는 국난에서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
강화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군사적인 요충지
상고시대에는 강화도는 '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400년)에는 혈구군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742년)에 해구군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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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무역항로 길목.
강화는 마한의 일부 잔여세력이 정착한 곳인듯.
강화 진도 제주도 대마도를 거점으로 무역한 듯.
즉, 왜와 중국을 오가며 해상무역으로
재기의 발판을 삼으려고 한듯 추정된다.
마한 세력이 3세기 후반 중국과 교류한 기록..<삼국사기)
마한 세력이 4세기 전라도 해안에 진출한 기록..<일본서기>
그렇다면, 해상무역의 요충지이고
임진왜란 격전지인 진도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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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珍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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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서남단 23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진도군.
진도는 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되며 교통이 편해졌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유물·유적, 천연기념물, 기·예능보유자가 많은 진도.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가사·거차 출장소 등 1개읍 6개면 2개 출장소 96개 동리.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 면적 427.00㎢,
인구 38,454(2003), 인구밀도 89.3명/㎢(2003).
[연혁]
삼국시대 백제 인진도군(因珍島郡)이 고군면 일대에,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임회면 지역에 있던 백제 영역.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진도현으로 개칭(무안군 영현)
매구리현은 첨탐현으로 개칭, 뇌산군(牢山郡) 영현이 되었다.
940년 고려초 뇌산군이 가흥군으로, 첨탐현은 임회현으로 개칭.
1018년(현종 9) 진도현은 나주 속현으로 병합되고
1144년(인조 21)에 현령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다.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 가흥현(嘉興縣:군내면 분토리)
임회현(臨淮縣:임회면)과 함께 진도의 속현으로 합병.
1270년(원종 11) 김통정·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진도에 와 몽골에 저항하다 이듬해 제주도로 쫓겨갔다.
고려말 왜구 약탈이 심해 1350년 영암군으로 피난 했다.
이조에 들어와서도 황폐해진 읍세가 복구되지 않아
1409년(태종 9)에 해남현에 병합되어 해진군(海珍郡).
1437년(세종 19) 다시 두 고을을 나누어 진도군을 설치
1440년(세종 22) 읍 중심지를 외이리에서 진도로 옮겼다.
1866년(고종 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874년(고종 11)에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
진도의 별호는 옥주.
1895년 나주부 진도군,
1896년 전라남도 진도군.
1906년 삼촌면을 해남군에,
명산면을 영암군으로 이관.
1914년 군면 폐합 때 부내면·지산면·조도면은 그대로,
고이면·고일면이 고군면으로, 군일면·군이면이 군내면으로,
의신면·명금면이 의신면으로, 임일면·임이면이 임회면으로 통합
1931년에 부내면을 진도면으로 개칭했으며,
1964년에 조도면에 가사출장소를,
1966년에 조도면 서거차도에 거차출장소를 설치.
1979년에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5년에 진도대교가 준공되 육지와 연결
이조시대 진도는 유배지로서 많은 사대부들이 왕래
육지 문화의 접촉이 많아 다양한 남도 문화를 형성.
[자연환경]
높은 산은 없고 대부분 200~400m 내외의 산지로 이뤄졌다.
진도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m)·덕신산(德神山:395m),
서쪽에 지력산(智力山:325m)·석적막산(石積幕山:240m),
남쪽에 여귀산(女貴山:457m)·희여산(270m),
북쪽에 고두산(高頭山:252m)·설매봉(雪梅峰:247m)
하천은 지산면에서 인지천, 의신면에서 의신천,
고군면에서 향동천·고군천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소하천이 대부분이라 넓은 평야가 발달하지 못했다.
'해안 일대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모되는 진도.'
대부분 진도 남서쪽에 있는 유인도 42개, 무인도 189개,
접도·관매도·동거차도·서거차도 하조도 상조도 가사도
해남 반도와 군 입구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
폭 295m로 바다 조류가 빠르고 거센 울돌목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 영향을 많이 받는 곳.
동백나무·후박나무·참가시나무·감탕나무 등
남도의 정취가 물씬한 남부 수종 숲이 아름답다.
[산업·교통]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을 잇는 진도대교
주민 80% 이상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진도개 고장.
진도읍·고군면·의신면·임회면·조도면 5개 5일 시장
군 북동쪽 고군면 벽파리에 위치한 벽파항
목포-완도, 목포-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유물·유적·관광]
불교문화재로 군내면 둔전리에 금골산 5층석탑(보물 제529호),
임회면 상만리에 진도 상만리 5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10호),
군내면 용장리에 용장사 석불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대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121호)
월하당부도(月下堂浮屠)·정견당부도(正見堂浮屠)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 : 진도읍 교동리 진도향교(전남 문화재 제127호)
진도읍 성내리 진도 한정석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6호)
의신면 사천리에 운림산방(雲林山房:전남 기념물 제51호)
군내면 용장리 용장산성,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
두 성은 '삼별초' 유적지
군내면 녹진리 이충무공 파왜철삭가설지
충무공의 강강수월래 전술 격전지로 유명.
특히 군내에는 천연기념물과 기·예능보유자가 많다.
천연기념물로 진도읍의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도읍 수류리와 군내면 덕병리에 있는 백조 도래지
의신면 사천리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
임회면 상만리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1호),
조도면 관매리의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212호) 등
기·예능보유자 최소심은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남도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의 설재천·조공례(曺功禮),
〈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의 박병천·채계만·김대례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의 강준섭 조담환
〈진도북놀이〉(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박관용 장성천 양태옥,
〈진도만가〉(전남 무형문화재 제19호) 김항규(金恒奎) 등이 있다.
군내에는 유물·유적이나 천연기념물 등은 물론
군 남서부 도서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
주요관광지로는 명량전첩지로 유명한 울돌목해안,
신비의 바닷길, 관매8경, 해안일대의 기암절벽,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금골기암 등등
특히 금골기암과 신비의 바닷길이 유명하다.
군내면 둔전리 금골산에 있는 금골기암은
옛부터 '진도의 금강',또는 '옥주의 계곡'
기암과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관광 명소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부락과 의신면 모도리(띠섬)
그 사이에 열리는 바닷길은 매년 음력 2~3월 보름이나 그믐
수심 5~6m이던 바닷물이 갈라지며 약 1시간 바닷길이 열린다.
연간 관광객수는 180만 명 정도인데(1995),
바닷길이 열리는 4~5월에 반 이상 찾아온다.
[교육·문화]
1965년에 개원한 진도문화원에서는
이조 남종문화의 대표화가 허유 추모제.
군에서 소치미술제(小痴美術祭)를 주관
매년 4월 향토문화제인 영등제를 개최하며,
문화 행사로는 축등행렬·각종 민속경연 등
설화
벽파진 할아버지에 대한 유래담을 비롯
<쌀굴전설〉·〈고막뫼전설〉 등이 있다.
민요
〈진도아리랑〉〈강강술래〉〈들노래〉〈살랭이상여소리〉
〈둥덩이타령〉·〈보리타작노래〉·〈맷돌질노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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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완도, 목포-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해안 일대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모되는 진도.
진도 남서쪽에 있는 유인도 42개, 무인도 189개
충무공이 일본 함대를 수장한 울돌골의 거센 조류.
진도는 강화도 - 진도 - 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산동반도에서 일본까지 안전 운행할 배가 필요했을듯
'옛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앞섰던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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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
경남 남해안 거제도를 비롯한 여러 개 도서.
1995년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통합해 거제시.
1970년대 이후 삼성조선소·대우옥포조선소 등
신현읍·일운면·동부면·남부면·거제면·둔덕면·
사등면·연초면·하청면·장목면·장승포동·능포동·
두모동·아양동·아주동·옥포동 등 1개읍 9개면 6개동.
시청 소재지는 장승포동. 면적 399.3㎢,
인구 188,850(2003), 인구밀도 471.3명/㎢(2003).
삼국시대 이전 유물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문헌기록으로는 통일신라 이후 것만 전해온다.
677년(문무왕 17) 상군(裳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 상군을 거제군으로 개칭
강주(진주)에 속하고 983년 고려때 기성현
다시 1012년에 고자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말 왜구 창궐로 1271년(원종 12) 거제현이
거창군 가조현으로, 명진현이 진주목 영선현으로
피란한 후 거제도는 수십차례 왜구 침입으로 폐허.
1399년 이조 초 명진현과 강성현(단성)을 합하여
진성현으로 개편후 1428년 명진현은 거제현에 이속
1414년 거제현과 거창군을 합해 제창현으로
이듬해 거제현으로 환원하여 현령을 두었다.
세조 때 산달포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고,
성종 초 도내 7진에 수군 만호(萬戶)를 두어 경비 강화.
우수영은 오아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후 고현성으로 이전.
1664년 읍 위치를 고현성에서 옛 명진현 서쪽으로 이전했다.
1711년(숙종 37) 거제현이 도호부로 승격했고, 별호는 기성.
1895년 동래부 거제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남 거제군,
1914년 거제군과 용남군을 통합해 통영군 이운면이 되었다.
1935년 이운면이 장승포읍이 되고, 면사무소를 장승포로 이전.
1953년 거제군으로 개칭해 거제군 소속.
1963년 일운면 고현출장소가 신현면으로,
1979년 신현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66년 어항이었던 장승포항이 개항장이 되고,
1971년 거제대교 개통,
1981년 장승포읍에 옥포조선소 준공
1987년 장승포읍 옥포출장소가 설치되고,
1989년 장승포읍이 시로 승격, 거제군에서 분리.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승포시와 통합해 거제시.
[자연환경]
대체로 산이 많고 북서쪽 해안은 완만
동남쪽 해안은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
북쪽 대금산(438m)자락이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와
동쪽에 국사봉·옥녀봉(555m)·북병산 가라산580m)
서쪽에 시래산(245m) 산방산(507m)·계룡산(566m) 등
둔덕천(屯德川)·고현천(古縣川)·간덕천(看德川) 등 하천
좁은 띠 모양의 해안평야와 만과 곶이 많은 리아스식 해안
대덕도·가조도 등 많은 섬들이 있고 거제·옥포 등의 항만
특히 남동단 갈곶리 일대는 해식애가 잘 발달되어 있다.
식생대는 대부분 온대낙엽 및 상록활엽수의 혼합림이며,
남쪽에는 동백나무·소철·종려나무·팔손이나무 자생지.
교통
14번 국도가 거제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
동쪽 해안을 따라 시의 남단까지 연결된다.
특히 국도와 연결되는 지방도가 통영에서
성포리·장목리·장승포·저구리 등과 연결
해상교통은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1일 12회 운항
장승포동·신현읍·사등면·장목면·하청면을 중심으로
마산·부산·진해 등의 지역과 정기 여객선이 운행된다.
도로 총길이 737.84㎞, 도로포장률 50%이다(1995).
[유물·유적·관광]
거제도는 해금강, 한려 해상 국립공원의 일부
산달도 조개더미에서의 선사시대 빗살무늬토기,
사등면 청곡리의 고인돌, 일운면 소동리 간돌칼
과거 왜구 침입이 잦아 성터가 많다.
둔덕면 폐왕성지(경남 기념물 제11호),
사등면 사등성(沙等城:경남 기념물 제9호),
신현읍의 고현성(古縣城:경남 기념물 제46호)
주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축성.
옥포만 아주동 일대는 신라 아주현이 있던 곳
아주내 바다 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당등산성
일명 옥포성은 옥포조선소의 건설로 철거되었다.
옥포조선소 내의 아양공원에는
충무공의 옥포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건립한 옥포대승첩기념탑과 옥포정.
주요 불교문화재
동부면 부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여래입상
사등면 오량리 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8호),
아양동 3층 석탑(경남 문화재 자료 제33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
거제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06호) 반곡서원이 있으며,
거제기성관(巨濟岐城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
거제동헌(巨濟東軒: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 등
동부면 오송리에 고려말과 이조 초 고분 40 기가 있다.
신현읍 고현리에 6·25 당시 국제연합(UN)군 포로수용소
천연기념물로 하청면 느티나무, 거제도 연안 아비도래지,
동부면 학동리 동백림 및 팔색조 번식지.
한반도 제 2 섬 거제도는 한려수도 해상 관광지역.
해당화와 동백꽃이 만발하는 남해안의 명승지이다.
특히 거제도 최남단인 갈곶리와 갈도 일대 해금강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천태만상의 경관이 절경
그밖에 구조라해수욕장·국사봉·장관대·문동폭포·
동백터널·지심도·구천계곡·묘감숲·사등포 등 유명.
옥포만 인근 지역은 자연·역사·산업 등의 관광자원
해식애 해안과 산이 절경을 이루고 옥포조선소가 있다.
외도의 선착장 -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외도의 열대식물들-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1664년에 건립된 거제향교와 그후 건립된 반곡서원
민속놀이
옛 병사들이 돌로 적을 공격하던 석전놀이 오광대놀이
쥐불놀이·고누두기·공기받기·자치기 놀이 등이 전승
민요
멸치잡는 챗배에서 부르는 〈챗배노래〉
<떡타령〉·〈큰애기노래〉 〈모심기노래〉·
〈모찌기노래〉〈밭매기노래〉〈농부가〉
〈베틀노래〉〈장기타령〉〈화투타령〉〈상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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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마한 세력이 안주할 만한 곳은 제주도.
마한세력이 재기의 터전을 삼을 곳도 제주도.
삼한시대로 세월을 거슬러 탐라국으로 가 보자.
탐라국.
제주도의 옛 나라 이름. 주호(州胡)·탐모라국.
섭라(涉羅) 담라(담羅)·탁라(탁羅)라로도 표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고려 및 이조 초기까지 칭호.
탐라국은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三神人)이 모흥혈에서 용출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신당서에 의하면 키가 작고, 개나 돼지 가죽으로 만든 의복.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 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
1928년 제주시에서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
동경 등 중국 신나라 화폐와 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고을나 15대손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신라에 조공.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 작호를 하사.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탐라는 '섬나라' 라는 의미.
탐라국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무렵.
그 이전까지는 3성 씨족의 공동연맹체제인 듯.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을 무렵 고씨(高氏)가 왕.
476년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 4월에 조공을 받쳤다.
백제왕은 탐라국 사신에게 좌평(佐平) 관등을 수여했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조공을 받치지 않아
동성왕이 탐라 정벌에 나서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했다.
고구려와 국교는 없었고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교역 성행.
한편 신라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이 항복.
이때부터 신라 속국이 되었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교류.
678년에 신라로부터 경고를 받고나서는 신라 일변도 국교.
한편 신라 3국통일후 661년 탐라왕은 당나라에 사신 파견.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사신이 탄 배가 풍랑
탐라국에 대피하자 탐라 왕자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행.
그후 일본과 매우 교섭이 활발했다.
탐라 왕자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680년과 686년 일본사신이 탐라 방문.
신라 말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고려와 우호관계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938년 고려 후삼국 통일후 고려에 탐라국 태자를 파견.
고려는 신라의 예를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수여.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 번국(蕃國)으로 독립적인 체제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 1개 군으로 개편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 업무를 관장
탐라국 성주와 왕자는 관직만 남아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지
이조 건국 후 1404년(태종 4)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
1445년(세종 27) 이것마저 폐지되어 완전 평민화.
.....................제주도 역사의 기원.........................
아득한 옛날, 한라산 북녘 삼성혈에서 솟은 3 신인.
첫째는 고을나, 둘째는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 3인.
세 사람은 비범한 생김새에 가죽옷을 입고 육식 위주
사냥을 일삼아 가정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날.
한라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니, 해변에 자줏빛 나무상자.
3 신인이 산에서 내려와 안개에 싸인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푸른 옷을 곱게 차려입은 선녀같은 처녀가 셋.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다.
기품은 그윽하였고 얌전하게 앉아 각자 화장하고 있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 등등이 있었다.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3 신인이 반기자 옥함 속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저는 동해 벽랑국에서 온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오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어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
임금님께오서 말씀 하셨으니 혼례를 치르시고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긴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 <황루알>'
삼신인은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 후 혼례
물맑고 비옥한 곳으로 활을 쏘아 영역 결정.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이 '활쏜디왓'
제주시 화북동 지방기념물인 <삼사석>.
활을 쏘아 고을나가 정한 주거지는 <일도>.
양을나 주거지 <이도>., 부을나 주거지 <삼도>.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탐라국을 이루었다.
석기시대 유물 타제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된 동굴.
인간이 제일 먼저 만들었을 원시적인 도구로 보아 구석기시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등등 동북아시아 공통적 유물.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 412 호)를 비롯하여
탐라국 형성기 대단위 집자리 236기 (원형 173기)
당시 석축담장, 쓰레기장, 마을 도랑 유구가 출토된 곳
주거지에서 토기(구멍띠토기, 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석기(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와 철기 (철제도끼, 손칼),
청동기(동검, 검파두식 등), 곡식(콩,보리 등) 다양한 유물들.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송국리 유형의 문화말기
그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는 국내 최대규모 유적지
동시에 탐라국 형성기의 제주 주민문화를 알리는
국내 유일의 마을 흔적이기도 한 중요 유적지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동북아시아 마을 유적의 흐름
그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
제주 삼양동 선사유적 (사적 제 416호)를 살펴보면
제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을 듯 보인다.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과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제주 전역에 분포된 청동기, 철기유물,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의 귀중한 자료들은 제주의 역사를 알게 해준다.
제주도 옛 이름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등이다.
옛 이름 중에서 '동영주'만 제외하고는 모두
<섬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지명이다.
제주도 개벽신화 = <삼성혈과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여기에 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온다.
삼성혈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삼성(三姓)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있다.
모흥혈(현재 삼성혈)에서 나와 가죽 옷을 입고 사냥하며 살았단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삼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삼공주는 오곡씨앗, 송아지, 망아지 등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왔다.
삼공주가 제주도 동쪽 해상에서 들어올 당시에 갖고 왔던 오곡 씨앗.
그것으로 농사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삼신인의 주거지를 정하려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
현재 제주도 문화재로 남아있는 삼사석은 두 전설의 공통점.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하여 '탐라국'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고 역사기록에 있다.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를 했다고 한다.
.................................................................
.............제주도 연혁........................
상고시대∼삼국시대......탐라 (탁라)국
938년 (고려태조 21년)..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 고종(1192∼1259)..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 (태종 16년)........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도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81년 7월 1일.............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
1997년 (현재)...............2시·2군·7읍·5면·31개동
...................................................................
............한라산 유래 및 전설...................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한라산(해발 1950m)
'은하수 (漢)'를 손에 '잡을(拏)' 듯 높은 산(山)'.
태평양 바다 기압골이 봉우리에 걸려 운무에 쌓인 백록담(白鹿潭)
능선 둘레 약 1.7㎞이며 화구호 깊이는 110여m 이고 넓이 약 6만평.
백록담은 '흰 사슴이 살았다는 호수'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데
빗나간 화살이 자기 궁둥이에 맞자 화가 났던 옥항상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에게 던졌는데 그것도 빗나가
바닷가로 날아가 산방 산이 되었고 봉우리 뽑힌 자리는 백록담.
산방 산은 75만년 전., 백록담은 2만 5천년 전., 바다에서 솟았다.
지질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록담의 생성역사는 의외로 짧다.
즉, 제주도 일대는 서해 저지대의 일부분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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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지리상으로 구석기시대 남해 저지대에서의 중심지.
제주도는 제 4 빙하기 이후 대홍수 당시의 피난처.
..................백록담의 유래 및 전설..........................
옥황상제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산지기 산신령이 관리.
그곳 정상 호수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동안은 금남의 성역.
어느 날 선녀들 목욕 끝날 시간에 맞춰 그곳에 갔던 산신령.
그곳에 혼자 남아 목욕하는 선녀 미모에 넋 잃고 사랑에 빠짐.
그후부터 그 선녀가 목욕할 때면 훔쳐보며 홀로 애태운 산신령.
옥황상제 노여움을 산 산신령은 그 벌을 받아 흰 사슴이 되었다.
흰 사슴이 된 산신령은 그후에도 늘 그 호수 가를 맴돌며
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가 사냥꾼 화살에 맞아 숨졌다.
흰사슴이 죽어가며 흘린 피자국마다 분화구 진달래 꽃 되어
그 혼이 해마다 그리움 호소하듯 5월이면 피어난다고 하는데
그 흰 사슴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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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유래 및 전설을 보면 남방 불교의 배경무대.
목욕하는 선녀들과 옥황상제 전설은 남방불교의 특징
제주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중간 기착지.
제주도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세력은 무역상인들.
마한의 잔여세력은 무장 무역상인들의 집단 중 하나
마한의 큰 세력은 제주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목선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갔던 벽랑국.
'역사 기록은 없지만 마한 패망세력이 아닐까?'
제주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
탐라국이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한 기록.
백제에게 패망한 마한이 의지할 나라는 신라 뿐.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왔다는 역사 기록.
패망 마한세력은 탐라국에 합류한 후,
탐라국과 함께 신라에 입조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