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
| 국가 |
이탈리아 |
| 분야 |
철학 |
| 해설자 |
문시영(남서울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교목실장) |
≪신국론(De civitate Dei)≫은 ≪고백록(Confessiones)≫의 확대판이다. ≪고백록≫의 성찰을 역사와 문화에 확대 적용한 셈이다. 그 방대한 분량과 치밀하고도 해박한 지식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레 겁먹게 만드는 불후의 고전인 이 책, ≪신국론≫을 읽고 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탁월성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그의 논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서양 최초의 역사철학, 시작과 종말을 잇는 직선 사관의 효시, 라틴문학 및 수사학의 거작 등 다양한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이 책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우선 엄청난 분량에서 입이 벌어지고, 유머도 없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는 탓에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읽어내기 어려운 책이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충분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두 도성, 즉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본질과 특징, 기원과 전개과정 및 종말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요 하나의 대하(大河) 드라마에 견줄 수 있을 듯싶다. ≪고백록≫을 완성한 후 12년이 지난 413년, ≪신국론≫은 특별한 배경 속에서 집필되었다. 책의 전체 구성을 보면 그 배경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국론≫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전반부, 1∼10권의 기독교를 위한 호교론과 후반부, 11∼22권의 두 도성에 관한 고찰이다. 혹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것처럼, 전체를 5부로 나누어 다루기도 한다. 이 경우, 전체의 흐름은 기독교를 위한 호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호교론(護敎論, 혹은 변증론으로 사용되며 ‘apology’의 번역)이란 기독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응답의 하나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를 위한 합리적 변증과 진솔한 설득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특정 종교를 위한 책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역사에 관한 통찰을 키워주고 라틴 고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며 로마의 시대상과 철학 및 문화를 배우는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탁월성은 이 책 여러 곳에서 빛난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고, 생물 및 광물을 포함한 자연과학적 지식의 방대함 또한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 수사학 전문가답게 고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당대 철학적 권위의 최고봉이라 할 플라톤을 들먹이는 것이 그렇고, 로마신화의 전문가 바로(Marcus Varro), 스토아철학의 거봉 키케로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성경에만 의존하는 일반적인 호교와 달리 라틴문화의 여러 요소들을 통로로 삼아 보편적인 설득을 시도한 점에서 더욱 독창성이 드러난다. 심지어 자연과학에 관해서도 해박하다. 예를 들어, 제21권에서 나온 이야기, 영원한 불 속에서도 죽지 않고 징벌을 당하는 육체에 대한 설명에서 생물, 광물들에 대한 언급은 가히 훗날의 백과전서파 학자들을 능가할 정도다. 자신의 분야에만 갇히기 쉬운 현대인의 교양이 얼마나 얕은 수준에 머무는 것인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 전체의 흐름을 본다면, 먼저 로마의 역사적 현실, 즉 이방인들의 침입에 힘없이 무너져 내린 로마의 도덕적 위기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역경의 때에 기독교가 보여준 배려와 포용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이야말로 진정한 위기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특히 로마의 타락은 참된 종교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反)기독교 세력을 오히려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근거로 삼아 로마의 종교와 문화에 깔린 정령 숭배 혹은 문란한 신들의 문제를 지적한다. 로마가 위기를 맞이한 근본 이유는 도덕적 타락에 있으며, 그 원인은 그들의 종교가 인간의 타락을 경고하지 않은 데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신국론≫이 직면한 정황은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부족들에 의해 침략을 당한 직후 흉흉한 인심이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아 온갖 비난을 퍼붓고 강력한 혐오를 토해냈다. 하지만, 기억을 되살려 올라가면, 오히려 기독교는 로마가 침략당할 때 로마 시민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교회는 로마의 침탈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앙인 행세를 하며 교회로 피신해 오는 로마 시민들을 흔쾌히 품어주었고 소위 ‘야만인’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사회는 역경이 지난 후 적반하장으로 로마의 고난이 기독교 탓이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나쁘고 불리한 것은 모두 기독교 탓으로 돌리는 로마인들의 어리석음은 착각에서 온 것들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로마는 이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그것이다. ≪신국론≫의 집필 배경에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로 하여금 남을 탓하는 일방성에서 벗어나 도덕의 위기, 종교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를 위해 바람직한 사회와 타락한 사회, 즉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비교를 통해 사회의 윤리적 이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역사에 두 도성이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진리를 따르고 윤리적 성숙을 지향하는 도성, 그리고 탐욕과 명예에 집착한 나머지 진리를 외면하고 윤리를 상실한 도성, 이 두 도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의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도성(都城) 개념은 라틴어 ‘civitas’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도시국가 혹은 공동체에 가깝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어를 성경에서 응용했다. 오늘날의 도시(city)와는 뉘앙스가 다르다고 하겠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도시는 고층건물과 교통수단의 발전 등 과학기술의 발전에 수반되는 일종의 도시적 에토스(urban ethos)를 가진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는 공동체의 본질 혹은 특성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두 도성의 기원 혹은 본질에 관해 ‘사랑’의 차이를 말하는 대목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는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영원한 진리를 외면하고 소멸해 버릴 가치에 집착하는 자들의 공동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와 윤리적 완성을 바라보는 공동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의 전개과정과 결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은 지상에서의 가치들에 함몰되지 않고 영원한 도성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지상의 도성은 지상에 매여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듯 착각하면서 탐욕과 만용으로 전쟁을 일삼고 심지어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두 두성의 차이는 종말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진리 안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지상의 도성은 종말의 때에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요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에게 지상의 생활을 떠나 은둔하거나 밀의적인 생활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 역시 지상의 평화를 사용하기도 하며 잠정적인 것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한 도성에서 이루어질 평화와 삶의 완성을 바라보며, 마치 나그네처럼,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은 마치 밀과 가라지처럼, 혹은 알곡과 쭉정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혼재되어 있으나, 결국에는 가려질 것이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형벌로 결말이 날 것이다.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설명에서 하나님의 도성이 지니는 탁월성과 궁극적인 승리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장강(長江)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두 도성의 역사와 전개과정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시작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직선 사관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법으로 말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흘러가며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관점이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역사에 관한 철학적, 신학적 성찰의 효시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는 순환하는 것도 아니고 우연 발생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목적과 방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리한 요점인 셈이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관해서, 그리고 종말에 관해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쏟아냄으로써 서양사상의 샘이 되었다.
또한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관해서도 분명한 논지가 있다. 지상의 도성이 추구하는 행복과 하나님의 도성이 추구하는 행복 사이에 차이가 있다. 지상의 도성은 영원한 절대가치를 무시한다. 한시적이며 소멸하여 상실되고 말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절대자를 향한 소망으로 살며, 하나님을 뵈옵는 비전(visio Dei)으로 산다. 과연 누가 진정한 행복의 주인공인지 물을 필요도 없이, 영원한 삶을 향하는 자들의 행복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통찰의 요체다.
기나긴 논의 끝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달한 것은 기독교에게 로마에 앙갚음하라는 선동이 아니었다. 진정한 삶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로마인을 포함한, 혹은 로마 시민사회에 섞여 사는 모두가 참된 종교(vera religione)를 찾고 진정한 윤리적 성숙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국론≫은 기독교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한 번쯤 읽어야 할 고전이다. 그 안에 역사에 대한 통찰, 도덕과 윤리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인간과 행복에 대한 지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은 신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신학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으며 시대적 간격을 넘어 오늘의 인간을 위한 통찰로 높이 평가된다는 점, 그것이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