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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5일 부활절 여섯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9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계13:11-18절(신412)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둘째 짐승(거짓 선지자)
성도 여러분, 계12-14장에서 기록된 세 삽입의 이적(표적, 환상) 가운데 두 번째 삽입인 이적(13장)의 전반부(1-10), 즉 바다에서 나오는 첫째 짐승이 상징하는 악한 국가에 대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11-18)은 그 이적(13장)의 후반부로서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이 상징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첫째 짐승에 대한 말씀(1-10)과 같이 둘째 짐승에 대한 말씀(11-17)과 결론적 권면(18)으로 되어 있기에, 결론적 권면(18)을 먼저 살펴본 후에, 둘째 짐승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8절입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여기서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라는 명령은 무슨 의미일까요? 지혜와 총명이 요구되기에 그 짐승의 수인 ‘666’을 단순히 세어보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유와 ‘666’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18b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수는 666이니라.”
많은 이는 ‘666’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고대 언어에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수를 가리켰는데, ‘666’이 어떤 사람 이름(예를 들면, 네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심지어 ‘666’이 바코드 혹은 컴퓨터와 동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많은 학자는 ‘666’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숫자는 상징적 의미로 늘 사용되며, 18절에 세 번 나오는 ‘수(아리드모스)’라는 단어가 셀 수 없는 무리를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늘 사용되기 때문이며(5:11, 7:4, 9:16, 20:8), ‘짐승의 이름(짐승의 수)’(17-18)이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14:1)과 대조되는데, 후자가 영적 실재를 가리킨다면, ‘짐승의 이름’도 영적 실제를 가리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5:2절에서 ‘그 이름의 수(666)’가 짐승과 그의 우상과 동일시 되었기 때문에 ‘666’은 문자적 숫자일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의 수’에서 ‘사람’은 어떤 개인을 의미할 수 있으나, 21:17절의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에서와 같이 포괄적인 인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수’는 하나님이 아닌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의 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삼중의 육(666)’은 인간적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의 능력과 권세로 삼위일체 하나님(777)을 모방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3’은 하나님 신격의 완전함을 상징하기에, ‘666’은 ‘777’에 가깝게 보일지라도 결코 ‘777’이 아닌 인간의 종교로서 용과 적그리스도(첫째 짐승)과 거짓 선지자(둘째 짐승)로 구성된 삼위일체(불완전함의 완전함)를 상징합니다(16:13).
그렇다면, ‘그 짐승의 수(666)를 세어보라’라는 권면은 인간의 종교이며 ‘666’이 상징하는 ‘거짓 삼위일체를 분별하라(주의하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데에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소피아)’는 성령님이 계시하는 복음(그리스도)적 지혜이며(엡1:17, 고전1:24), ‘총명(누우스)’은 복음으로 변화된 생각을 의미합니다(롬12:2). 이것은 위조지폐를 분별하기 위해서 진짜 지폐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24:4-11절입니다. “예수께서 ..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심지어 목사)의 말이나 언론과 유투브의 주장을 무조건 받아 믿지 말고, 복음적 지혜와 복음에 의하여 변화된 생각(총명), 즉 비판적인 통찰력으로 그것들을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복음적 지혜와 그 복음으로 변화된 생각(총명), 즉 비판적 통찰력으로 ‘둘째 짐승’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11-17).
이 둘째 짐승은 ‘666’이 상징하는 위조된 삼위일체에서 성령님을 모방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16:13, 19:20, 20:10).
‘거짓 선지라’라고 불리는 둘째 짐승은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고, 그러나 용처럼 말을 하더라”(11)입니다. 여기서 ‘뿔’은 권세나 직분을 의미합니다.
둘째 짐승이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다’(11)라는 것은 첫째 짐승과 달리 어린양을 모방하여 온유한 인상을 주며, 특히 ‘두 뿔’은 11:3-4절의 두 증인, 두 촛대, 두 감람나무의 권세와 역할, 즉 오늘로 말하면, 목사나 선교사를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7:15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러나 둘째 짐승은 용처럼 말을 하더라’(11)입니다. 그러면, 둘째 짐승의 실체를 보여주는 ‘용처럼 말을 하더라’(11)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용처럼 거짓을 진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20:29-30절입니다. “내(바울)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첫째, 양 떼(교회)를 아끼지 아니하며, 둘째, 제자(성도)들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거짓 선지자)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로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어그러진 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하는 것, 즉 장사꾼처럼 그것을 혼잡하게 하는 것(고후2:17)입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복음은 반드시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하여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롬14:7-9). 고후4: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주)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성도 여러분,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육체(죄)에서 원래 창조 질서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복음적인 지혜와 복음으로 변화된 생각(총명), 즉 비판적인 통찰력으로 복음의 진리에서 어그러진 거짓 선지자의 말들을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용처럼 말하는 것’은 마귀같이 교만한 태도로 말을 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주장에는 어떤 오류도 없는 완전한 진리라고 절대 확신하는 태도입니다. 그의 말에 의심하지 못하게 하고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거짓(그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일 것입니다. 이것은 18세기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생긴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였던 근본주의자들이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빠진 흑백 논리(17세기의 데카르트의 인식론)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 특히 타락하였고 구원받았지만, 그 완성을 기다리는 우리는 완전무오할 수 없습니다. 고후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권면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무조건 받지 말고 그것을 시험하고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용처럼 교만한 태도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더욱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강한 자를 좋아합니다.)
어린양의 모습으로 가장한 둘째 짐승이 용같이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한 첫째 짐승(국가)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여기서 사람들이 처음 짐승(국가)을 경배하게 하도록 둘째 짐승은 용에게 권세를 받은(4)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입니다. 이것은 그가 국가의 모든 권세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은 신문, 방송, 그리고 유튜브 같은 언론들과 국가와 사회의 조직들을 이용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을 계속 선전하여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무조건 그들을 추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둘째 짐승은 심지어 이적(표적)을 사용하기도 합니다(13-15a).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둘째 짐승(거짓 선지자)은 용에게 권세를 받은(4) ‘첫째 짐승 앞에서, 즉 권능을 받아’(14),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받아’(15) 행하는 이적을 통하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것도 ‘큰 이적’(13)입니다. 그의 이적 중에는 심지어 엘리야(왕상18:38) 처럼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만들었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우상이 말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15)는 성령을 가리키는 성경적 은유 용어입니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국가)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15a)는 단지 종교적 우상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는 관계없는 모든 국가나 사회 구조에 생기를 불어넣는 모든 철학적,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사상)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국가나 민족이나 집단을 신성시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들을 아무 비판 없이 믿고 따르게 하는 ‘시민종교’, 곧 짐승의 우상입니다. 여기에도 복음적 지혜와 비판적 통찰력(총명)이 필요합니다.
특히 성도 여러분, 이처럼 큰 이적을 하는 어떤 목사가 있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그의 이적 때문에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의 교회는 많은 사람으로 차고 넘치게 되며 더욱 큰 건물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에게도 미혹하기 위하여 이적들을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신13:1-3절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를 시험하는 이적들을 무조건 받지 말고, 복음적 지혜와 복음으로 변화된 생각(총명)으로 이적을 하는 자의 말들을 분별하여 거짓 이적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후2:9-12절입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거짓을 믿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들을 진리의 사랑, 즉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과 다른 사람들 섬기게 하는 복음의 진리와 사랑으로 분별하여야 할 것을 경고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이적이 있을 때 무조건 받지 마시고 그가 용처럼 말하는지를 복음적 지혜와 비판적 통찰력(총명)으로 분별하여 거짓 이적의 미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짐승(거짓 선지자)의 직접적 폭력과 폭정입니다(15b-17).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여기서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666)인 ‘표’는 문자적인 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7:3, 14:1)과 같이 짐승의 소유권을 의미하는 보이지 않은 상징입니다.
둘째 짐승은 국가(우상)에 경배를 거절하는 자는 국가(우상)가 다 죽이게 하며(15b), 모든 자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 즉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666)를 받도록 강요하고, 그 표가 없는 자는 사고팔고를 못하게 합니다(16-17).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며(10), 복음적 지혜와 변화된 생각(총명)도 요구됩니다(18)
그래서 본문의 결론적 권면입니다(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성도 여러분, 세상이 어렵고 문제가 많을수록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웅(지도자)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다림 중에 우리를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하였던 과거의 지도자를 회고하며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영웅이 나타나 문제들을 다 해결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신성시하며 경배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수인 ‘666’입니다. 역사상에서 그런 영웅들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런 이데올로기(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사상 등등)도 과거의 유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바벨탑같이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많은 사람이 추종하여도 복음적 지혜와 변화된 생각(총명), 즉 비판적 통찰력으로 그런 사람이나 그런 현상이 ‘666’인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이 세상의 약과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찬송 288장, 성찬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