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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26. [역경의 열매] 김홍일 <1-16> 불우한 어린 시절 교회 성경학교 다니며 꿈 키워
아버지 가정에 소홀해 형제들 배곯아… 교회 선생님 격려 속 하나님에 관심
2013년 봄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에 선 김홍일 대한성공회 신부. 김홍일 신부 제공개성이 고향인 아버지는 4대 독자로 6·25전쟁 중 월남했다. 아버지는 강릉에서 유랑극단 활동을 하다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양가 집안 모두 기독교 신앙과 무관했다. 친가는 종교가 없었고 외가는 무교와 불교 사이에 있었다.
낭인같은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4형제를 어머니에게 맡겨 두고 늘 집 밖을 나돌았다. 어린 나이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면 아버지는 술과 마작에 빠져 있었고,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4형제가 밀가루와 술지게미로 끼니를 채우던 기억이 아련하다. 동네 막걸리 공장 입구에 술지게미를 사려고 길게 늘어선 행렬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 부엌에서 형과 함께 수제비 반죽으로 비행기와 차 모양을 만들어 냄비에 넣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동네 꼭대기에서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종종 찾아 나선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사업이 잘 풀린 아버지는 계모와 곧 헤어지고 성북구 장위동에 정원이 있는 넓은 양옥집으로 어머니와 나, 형제들을 불렀다. 아버지의 가정적인 모습을 본 적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방학은 대부분 경기도 일산 고모 댁에서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사촌 여동생에게 이끌려 여름성경학교에 참가했다. 교회를 처음 만난 순간이다. 집에서 논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야 했던 교회를 여름방학 내내 오전·오후 두 번을 왕복했다. 교회 예배당 종탑과 작은 예배당, 교회 뒤편 높은 둑 너머로 흐르던 강이 기억난다. 한동안 나는 그 교회 주변에 집을 짓고 가축을 키우며 글을 쓰며 사는 꿈을 꿨다.
난생 처음 만난 교회를 방학 내내 그토록 성실히 다닐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여자 친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름성경학교에서 만난 교회 선생님들 덕이었다.
하루는 그 여자 친구를 좋아하던 동네 남자아이들이 교회 가는 길목을 막고 내가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것을 여자 친구가 흩어 주었다. 그 소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에게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같은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교회 선생님들은 서울 아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신경을 더 써 주신 것 같았다. 그림에 솜씨가 전혀 없던 나의 그림도 따뜻한 시선으로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는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들어서니 낯선 사람들이 집 안의 가구와 짐들을 커다란 트럭에 싣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가족들이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정원 연못 나무 뒤에 아끼던 물건을 숨겨 두고는 언젠가 꼭 그 집을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에 월세를 얻었지만 아버지는 다시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다시 생계를 책임졌다. 어느 겨울에는 한동안 월세를 내지 못해 오후 내내 동네를 배회하다 밤에만 주인집 거실에서 잠을 자며 보내야 했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 불우한 어린 시절 교회 성경학교 다니며 꿈 키워
* [역경의 열매] 김홍일 <2> 등록금 못내 중학교 중퇴 후 공장 취업
* [역경의 열매] 김홍일 <3> 교회 선생님 통해 역사·철학·문학에 눈떠
* [역경의 열매] 김홍일 <4> 군종병 되려 했으나 군목이 반대… 교파벽 실감
* [역경의 열매] 김홍일 <5> 가난한 사람들 위해 '나눔의 집' 활동 시작
* [역경의 열매] 김홍일 <6> 술에 빠진 가난한 자를 통해 배운 복음과 봉사
* [역경의 열매] 김홍일 <7> "빈민의 삶 복음적 가치로 변화시키자"
* [역경의 열매] 김홍일 <8>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 골방서 기도하며 극복
* [역경의 열매] 김홍일 <9> 교우의 포천 작은 산에서 공동체 생활 시작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0> 세계교회협의회 장학생으로 유학 기회 얻어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1> 영국 사회적기업 방문, 유학의 가장 큰 수확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2> 함께 기도할 수 있어서, 자연 속에 있어서 행복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3> 먹고 씻고 숨쉬는 모든 순간… 기도는 삶을 위한 것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4> 성직자들 모여 기도·학습 … 한국 샬렘영성훈련원 출범시켜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5> 가난한 청년들과 도심 속 공동체 '숨과 쉼' 시작
* [역경의 열매] 김홍일 <16·끝> 하나님이 심어준 각자의 연민·선의가 모여 기적이
약력=△1960년 경기도 평택 출생 △연세대 신학과 △성공회대 신학대학원 사목신학연구원 △성공회 서울교구 희년교회 신부 △한국 샬렘영성훈련원 운영위원장 △한국영성상담학회 부회장 △성공회 브랜든 선교연구소 소장 △성공회 나눔의 집 설립(1986) △숨과 쉼 설립(2014)
***[역경의 열매] 김홍일 <2> 등록금 못내 중학교 중퇴 후 공장 취업
라면 사주던 친구 따라 성공회로… 생계 어려워 4형제 뿔뿔이 흩어져
1976년 공장 생활 시절의 김홍일 성공회 신부. 중학교를 중퇴하고 강원도 강릉의 이모 집에서 거주할 때다. 김홍일 신부 제공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다시 살림을 차렸다.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이사하면서 형제들은 어머니를 떠나 계모와 함께 지내게 됐다. 여전히 끼니를 걱정했고, 집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방학이면 철야기도를 하는 어른들 틈에 끼어 교회 예배당 한쪽 귀퉁이에서 잠자며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졸업사진을 찍는 친구들을 쓸쓸히 바라봐야 했다. 일하다 뒤늦게 찾아온 큰형은 짜장면을 사줬다. 큰형은 늘 동생들을 위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풍 간다는 사실을 알고 형이 부엌에서 급하게 김밥을 싸줬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1학년이 되자 경기도 가평군 한얼산기도원에서 여름 수련회를 보냈다. 한 평 남짓한 방에서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 갑자기 까닭 모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외로움과 슬픔을 자비롭고 연민 어린 마음으로 헤아려 주는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앞에서 감추어 두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차비가 없어 미아리고개에서 혜화동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 아침은 거르고 도시락도 싸갈 수 없어 친구들 도시락을 쇼핑하듯 한 젓가락씩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어느 날 반장의 도시락에 손을 댄 순간, 반장은 나를 향해 ‘너 거지냐’고 몰아세웠다. 난생처음 반장과 몸싸움을 한 후, 한 친구가 매일 나와 함께 학교식당으로 가서 라면을 시켜 자기 도시락과 함께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한 시간 가까운 등하굣길에 어린 중학생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인생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 친구 손에 이끌려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성공회 교회에 가게 됐다. 시험 기간 독서실을 제공했기에 찾아간 성공회 교회에서 이후 내가 성직자가 될 줄은 새까맣게 몰랐다.
밀린 학교 등록금 때문에 1학년 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휴학을 권고받았다. 학교에 미련이 없던 나는 휴학 대신 중퇴를 결정했다. 빨간 줄이 사선으로 그어진 퇴학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어머니가 보내준 등록금으로 아버지는 술을 드셨다.
생계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큰형은 공사장으로 갔고, 작은형은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동생은 고모 댁으로 보내져 네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게 됐다. 학업을 중단한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한동안 지방을 돌며 생활했다.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판단에 강릉 이모 댁으로 보내졌고 자동차 정비공장 판금부에서 일하게 됐다.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자동차 머플러 산소용접이었다.
“초저녁 저 하늘 별 하나, 호숫가에 반짝일 때에, 그리워 그리워라….”
공장 생활을 하며 가끔 혼자서 흥얼거리던 김홍철 작사 ‘초저녁별’이라는 노래다. 지금도 노랫말이 추억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마음 깊은 곳엔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강릉 시내에 있는 교회를 몇 곳 찾아갔다. 교회에선 긴 머리에 공장에 다니던 나를 학생회에도, 청년회에도 보내기 어려워 당황스러워했다. 그 시절 교회는 내가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일을 마치고 매일 강릉 시내에서 경포대까지, 그리고 안목해변을 지나 다시 강릉 집으로 귀가하는 자전거 퇴근길은 나에게 짧은 순례이며 기도의 시간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나의 어려움을 작게 만들어 주고 위로해 주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3> 교회 선생님 통해 역사·철학·문학에 눈떠
‘공돌이’ 시절, 하나님 형상대로 지은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는 말씀에 감동
10대 후반인 1977년 여름 교회 수련회에 참가한 김홍일 대한성공회 신부(뒷줄 오른쪽 세 번째). 김홍일 신부 제공1976년 어머니는 지방을 돌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형제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의 작은 전세방이었다. 형제들이 다시 모였음에 감사드렸다. 전세방에는 천장으로 쥐들이 뛰어다녔다. 쥐들은 천장을 이빨로 갈아 우리가 잠자는 도중 종종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난에 울고 가슴 저리던 시절, 찢어진 천장 사이로 쏟아지던 설움이고 한겨울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불어오는 새바람 맞으러 간다….’
당시 교회 문학의 밤을 위해 쓴 시다. 우리가 살던 곳에 대한 기억이다.
형은 내게 100권 넘는 세계문학전집을 선물했다. 헤르만 헤세, 레프 톨스토이, 에리히 프롬 등이 쓴 소설들은 배움을 선사했다.
중학교 시절 도시락을 나눠먹던 친구를 다시 찾았다. 그를 따라 성공회 교회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민주화운동과 산업 선교에 관심이 많던 교회 선생님은 공장에서 일하던 내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성경공부 시간이면 성서 이야기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가치관과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79년 인천으로 다시 이사해 공단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만들었다. 유신 기간에는 새마을 조회라는 명목으로 30분 일찍 출근해야 했다. 한 달에 두 번은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겨울철은 샛별을 보며 출근했고 퇴근길은 밤별을 보며 집으로 왔다.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보다 견디기 힘든 건 언제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할지 모를 일상이었다. 당시 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퇴근길 집 앞 언덕길에서 밤별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공돌이’로 놀림 받던 시절,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고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가르침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이끌었다.
교회 선생님의 소개로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구속자를 위한 목요기도회에 매주 다니기 시작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없던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합법적으로 모일 공간은 예배 공간뿐이었다. 목요기도회는 내게 살아있는 대학이었다. 대학에서 해직된 양심적인 교수와 지식인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종교인과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의 강연과 간증은 내게 또 다른 세계관과 신앙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당시 정권에서 자행한 똥물 사건을 연극으로 재연한 기도회는 잊을 수 없다. 함께하던 모든 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난간으로 나아가 유신 정권과 박정희정권 퇴진을 외쳤다.
경찰들이 강당 문을 강제로 열고 들이닥쳐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수녀님들까지 거칠고 야만스럽게 연행하기 시작했다. 난입하는 경찰을 피해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선교사 숙소 정원 나무숲 아래에서 2시간을 숨죽여 기다렸다. 고문당했던 이들의 증언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불의한 세상을 바꾸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어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할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살던 인천 동구 화평동의 산업선교센터는 동일방직 관련 싸움을 하던 노동자들의 활동 무대였다. 수많은 노동자가 여러 공장에서 파도처럼 대로를 메우며 퇴근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현실이라고 깨달았다. 그 부조리를 바꿔야 한다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4> 군종병 되려 했으나 군목이 반대… 교파벽 실감
“성직에 몸담겠다” 검정고시 공부… 연세대 신학과 합격은 하나님 선물
1983년 강원도 화천 제27보병사단 이기자부대에서 군종병으로 복무했던 시절의 김홍일 성공회 신부. 김홍일 신부 제공1980년 교회 선생님이 내게 검정고시 공부를 제안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셨다. 구두닦이, 노점상 등을 하며 세상 밑바닥을 살아가는 친구들을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났다. 그 시절 교회를 통해 한국사회 변화를 위한 희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성직에 몸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1982년 연세대 신학과 합격자 발표를 하던 날, 내 이름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기도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부르심이라 생각했다. 공장 생활로부터의 도피나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가 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한 과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기도를 떠올린다. 그 기도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는 것을 확인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과 참회의 기도 소리가 들려온다.
대학에 들어가면 양심적 지성인과 구도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몇몇 동아리를 전전하다 결국 가입을 포기했다. 오랫동안 공장생활을 했던 내게 동아리 활동은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홀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사학과, 행정학과 등을 돌며 좋아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찾아다녔다.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를 찾아온 보안대 사람들은 신병들에게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 이름을 한 명씩 말하라고 했다. 금서목록을 읽어 내려가며 읽은 책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책 목록에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대중적인 소설도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이기자부대에 입소한 첫날 밤, 내 물건과 남겨뒀던 용돈을 누군가 전부 훔쳐가고 말았다. 개인의 올바른 생활과 공동체의 연대 책임을 묻는 훈련과정이 현장에서는 전혀 작동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 경험은 내가 부전공을 교육학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나와는 다른 신학적 배경에서 교육을 받은 부대 내 목사님은 나의 군종병 선임을 반대했다. 배타적인 교파들 사이의 벽을 처음 실감한 경험이었다. 목사님은 “신학이 다르면 구원도 받을 수 없는가”라고 물었던 나에게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복음의 포용적 진리가 어쩌다 서로를 배타하는 도그마로 변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부대 내 교회 목사님이 다른 부대로 발령받아 떠나며 내가 후임 군종병으로 선임됐다. 새 목사가 부임하지 않아 신학과 1학년도 마치지 못한 내가 졸지에 교회를 맡은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는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온 장교도 있었다. 애송이 신학생이었던 내가 제대할 때까지 설교와 심방 등 목회활동을 했다.
제대 후 1985년 복학했다. 장학금을 받으며 교회 일과 아르바이트로 학교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과거 경력을 알던 친구가 학회 활동을 도와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후배들과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주말과 주일에는 교회를, 평일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지낸 데다 학회 세미나와 수시로 계획되는 시위 때문에 정상적으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구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알고 있던 교회 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5> 가난한 사람들 위해 ‘나눔의 집’ 활동 시작
1980년대 한국교회엔 민중교회 운동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정작 성공회 안에서 전개됐던 사회선교 활동은 중단되거나 정체 상태였다. 성공회 청년운동을 하는 동료들과 어떻게 교구 안에서 민중선교의 불씨를 다시 지펴낼 수 있을지 모색했다.
당시 성공회에서는 한국 산업선교 역사에 영향을 준 김요한(존 데일리) 주교의 활동도 맥이 끊겨 있었다. 산업선교를 위해 세워진 영등포교회, 대학생 선교를 위해 세워진 대학로교회와 신촌교회는 일반 교회로 전환됐다. 약수동교회에서 진행하던 야학도 새로운 사제가 부임하면서 문을 닫았다.
하나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은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었다. 당시 약수동교회에서 운영하던 야학을 위해 캐나다의 한 교회에서 지원금을 보내왔다. 이 지원금은 나눔의 집 운동을 시작할 씨앗자금이 됐다.
1986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나눔의 집이 문을 열었다. 성직자도 없이 신학생과 청년들에게 새로운 선교활동이 위임됐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성수 주교와 박경조 교무국장의 지지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선교운동을 시작하는 우리를 믿고 흔쾌히 일을 맡겼다.
나눔의 집 운동은 오랫동안 봉사로 진행됐다. 초창기 전일 근무하던 탁아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최소한의 활동비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을 먹고 마실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눔의 집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걱정했지만 우리는 누구에게도 활동비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도시 빈민선교의 전통에 따라 처음 6개월은 아무런 선교를 하지 않았다. 주 1회 무료 진료로 주민을 만났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들의 필요를 알아가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에게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온 구호 라면이 유일한 식량이었다. 하루는 너무 허기가 져 라면 6개에 물을 채우고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난다. 선배가 사 온 통닭을 먹고 남은 뼈로 이튿날 아침 곰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주민들을 만나며 맞벌이하는 부부들의 육아 고충, 아이들에게 새 동화책을 사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엄마들의 사연,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접할 수 있었다. 1987년 나눔의 집은 좀 더 넓은 공간을 얻으며 낮에는 탁아소로, 저녁에는 야학교실로 운영됐다. 밤에는 집이 지방인 야학교사와 월세를 아끼고 싶어 하는 야학생들과 함께 잠을 잤다.
한번은 나눔의 집 앞 구멍가게에서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려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가게 주인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나눔의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재혼하며 계모와 함께 살다 적응이 어려워 여러 번 가출을 감행한 아이였다. 아버지를 찾아 아이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며 나눔의 집에 아이를 두고 돌아갔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함께 살기 힘들어 가출한 여자 중학생을 비롯해 어려움에 부닥친 아이들이 하나둘 나눔의 집을 찾아왔다. 나눔의 집은 차츰 마땅히 보낼 곳 없는 아이들의 공간이 되어갔다. 집과 가정에 돌려보낼 수도 없고, 가정이 있어 시설로도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함께 살면서 도시락을 싸주는 일 외에는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6> 술에 빠진 가난한 자를 통해 배운 복음과 봉사
함께 꽃구경 갔던 결연자 주일 예배 출석… 다양한 봉사자들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
김홍일 성공회 신부(가운데)가 1987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나눔의 집에서 야학교사, 학생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의 중풍에서는/왜 일가친척도 피붙이도 남지 않은 하늘 아래서/며칠 밤이고 잠 못 이루고 긴 밤을 천장과 눈씨름 하여야 하는/할머니의 외로움이 지워지지 않을까…”.
나눔의 집에서 썼던 ‘가난한 노래’ 시집의 일부다. 피난 중 잃은 아들이 나를 많이 닮았다며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할머니는 어느 날 나눔의 집에 들어와 같이 살 수 없겠냐고 했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할머니의 청을 들어드리지 못한 채 동네에 새로 생긴 노인시설로 모셨지만 어느 날 할머니의 부고를 들어야 했다. 나눔의 집 식구들과 함께 문상객 한 명 없는 장례를 치러드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함께 존재하는 일, 하나님 이름이 임마누엘이듯이 사랑은 함께 존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눔의 집 결연자 중에는 장애와 당뇨로 고생하며 딸아이를 혼자 키우던 아저씨가 있었다. 일하던 중 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생활했다. 가출한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술에 빠진 채 병원을 오가고 있었다. 당이 있어 술을 마시면 당수치가 올라 입원했고, 좀 나아지면 집에서 다시 술을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관계의 가난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가끔씩 나눔의 집 봉사자들이 찾아갔지만 돕는 자와 도움 받는 자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 관계 역시 친구나 이웃이 되지 못했다.
그분이 고립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산으로 함께 꽃구경을 갔다. 개울이 흐르는 넓은 바위에 앉아 식사하고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늘 우울하고 조용하던 그분이 어깨를 들썩이며 ‘목장 길 따라’를 부르며 흥겨워했다. 우울한 그림자 뒤에 숨겨져 있던 사람의 흥을 만나는 일처럼 반가운 일도 없다.
어느 날 그분은 스스로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광고시간에는 가끔 자원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친구와 이웃이 생기면서 먹던 약도 잘 듣고 술도 줄이게 됐다는 고백을 들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정서적·관계적 빈곤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됐는지를 깨달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일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분절적으로 진행되던 의료적 지원과 방문 봉사, 경제적 지원, 반찬 지원 등 다양한 지원들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봉사자, 병원과 의료봉사자, 경제적 후원자 등 다양한 봉사자들을 하나의 봉사조직으로 구성했다. 봉사자들 역시 삶의 의미와 의미 있는 관계에 목말라했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늘 경쟁해야 하는 긴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웃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냐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대답했다. 율법 교사가 이웃이 누구냐고 되묻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며 이웃이 돼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했다.
봉사하는 사랑은 삶의 새로운 의미에 눈을 뜨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한계와 씨름해야 하며 그 여정을 격려하고 지지할 친구들을 만나는 경험은 새롭다. 구원은 ‘가서 사랑하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그렇게 알아갔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7> “빈민의 삶 복음적 가치로 변화시키자”
야학 졸업생들과 봉제 공장 운영… 노동자 협동조합 운동 불씨 댕겨
1992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실과 바늘’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 공장을 시작하면서 설립 멤버들과 한자리에 모인 김홍일 성공회 신부(뒷줄 왼쪽).
산동네를 옮겨 다니며 살던 어린 시절, 가난이 한 사람의 존엄과 가족의 행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를 보았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복음적 가치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게 됐다. 우리 역할은 가난한 이가 주체화하는 과정을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눔의 집은 다양한 주민모임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탁아소 선생님들은 밤늦게까지 가정방문을 하며 탁아소 부모회를 조직했고, 문해 교육 교사들은 어머니 학교 동문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시급한 이들에게 모임은 늘 부차적이었다.
사람들을 연결할 방안을 고민하다 마을 단오축제를 열었다.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돼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지역 공부방 수녀, 전도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마을의 큰 축제가 됐다. 월간 마을신문도 발행했다. 주민들이 직접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방식이었다. 배달은 공부방 학생들과 교사들이 맡았다.
1980년대 말 서울의 많은 달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산동네들이 연립주택 밀집 지역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세입자들은 의정부 등 경기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나눔의 집은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가장 먼저 나눔의 집 가정결연 대상을 임대아파트 주민들로 확장했다. 임대아파트 통장, 새마을부녀회 회장, 마을 방범대장 등에게 방문 봉사와 생활비 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추천받았다. 임대아파트 마을잔치가 있는 날에는 대학생 풍물패를 섭외했고 노래방 기계와 음료를 지원했다.
임대아파트 주민지도자 워크숍도 매주 진행했다. 주민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공유했고 외국 사례를 들어 제도적 문제의 개선방안 등을 토론했다. 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조직하고 지역 외 대표자들, 주거운동단체, 연구자들과 연대하면서 법 제정 운동을 진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협동운동을 시작했다. 열악한 영세하청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야학 졸업생들과 함께 공장을 얻었다. 도급제 방식으로 일하면 좋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92년 초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실과 바늘’이라는 공장을 만들며 처음으로 노동자협동조합을 시작했다.
사장 없이 자신이 노동한 만큼 급여를 받으며 재미있게 일했다.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으면서 일했다. 친지들의 애경사가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청년들은 여러 공장을 경험했지만 이렇게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일해 본 경험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경영의 어려움으로 임금체불이 이어지자 95년 한동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는 협동조합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실과 바늘은 여러 지역에서 봉제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불씨가 됐다. 서울과 인천의 몇몇 공장들이 모여 협의체를 구성하고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일도 생겨났다.
자발적 생산공동체 운동은 93년부터 주민들의 주체적인 탈빈곤 운동 모델로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96년 보건복지부에서 생산적 복지정책의 하나로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을 전국 5곳에서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첫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자활지원센터는 나눔의 집이 위탁받았다. 공공부문과 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던 나눔의 집이 지방자치단체와 공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된 것이다. 이는 나눔의 집 선교의 새 전환점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8>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 골방서 기도하며 극복
동료 사제들과 기도·공부 모임 만들어… 5년간 모인 경험 토대로 영성센터 열어
2003년 김홍일 성공회 신부(왼쪽 세 번째)가 성공회 영성센터 모임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조직되자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지역 정당들이었다. 단지마다 수천∼수만 명이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의 주민조직 지도자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과정에서 주민조직 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작은 이해관계에 흔들리는 지도자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주민조직을 바라보며 든 생각은 ‘사람’이었다. 교육에 관한 관심이 내 활동의 새 화두로 다가왔다.
1994년 함께 생활하던 야학 교사와 청년들이 취업과 결혼 등으로 집을 떠나면서 나눔의 집에는 나와 아이들만 남게 됐다. 나눔의 집을 위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신혼살림을 차린 청년들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일을 갖고 찾아오는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흘낏 본 후로 문뜩 외로움이 몰려왔다.
모든 관심을 나눔의 집에 쏟으며 주변 사람들과 소원해져 갔다. 한때 깊이 있게 관계를 맺었던 친구들은 서로 다른 삶의 현장을 사느라 함께 나눌 일이 적어졌다. 홀로 선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나눔의 집 부엌 한구석에 있는 골방에서 혼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토록 말씀이 살아서 내 가슴에 와닿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외로움은 자연스럽게 나를 하나님께 이끌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다.
“외롭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맥박 소리 같은 것입니다/ 하여 외로움은 사람을 찾아 메워야 할 그리움의 공백이 아니라/ 더 익히고 썩혀/ 당신 앞에 순수하게 서야 할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 일지에 적었던 짧은 글이다. 골방에 혼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생겨났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아침저녁으로 성무일과를 드리며 생활했지만 혼자 침묵 가운데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기도는 배운 적이 없었다.
동료 사제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선배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해 매월 1박 2일로 전국의 수도원과 피정센터를 돌며 기도와 공부를 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한 달도 거르지 않고 5년을 모였다. 그동안 배우고 수련한 것을 나눌 방안을 모색하다 1999년 성공회 영성센터를 시작하게 됐다.
영성센터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묵상집을 발행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관상기도를 보급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단체를 확대하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배 사제인 박경조 신부가 모임에 참여했고 2005년 그가 서울교구 주교로 선출되며 교구 전체 성직자에게 기도 피정을 의무화했다. 영성센터는 한국 성공회 전체에 관상기도와 침묵기도가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가 서 있던 사회선교 현장과 영성을 통합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의 일치를 고민하고 갈망하는 구심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나눔의 집 활동가 몇 사람과 함께 성공회 프란시스칸 수도회의 재속회와 도로시 데이가 시작한 가톨릭 일꾼공동체 모델 등 몇 가지 모델의 특징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나눔의 집에서 시도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9> 교우의 포천 작은 산에서 공동체 생활 시작
‘가난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공동체 추진… 외환위기 때 노동자협동운동 사업 구축
독거노인 등 지역 어르신들이 2014년 7월 중복을 맞아 경기도 포천 나눔의 집에서 삼계탕으로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
스스로 공동체를 살아가지 못하는 활동가들이 주민들을 향해 가난을 넘어서는 대안이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이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나눔의 집에서 10년 넘게 박봉의 활동비로 지내 온 활동가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이런 고민으로 나눔의 집 활동가들을 위한 공동체 형성을 모색했다. ‘스스로 지속 가능한 가난’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 나눔의 집과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인근의 땅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단돈 100만원도 모아 놓은 게 없는 가난한 활동가, 청년들과 함께 공동체를 위한 땅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서울주교좌성당 교우 한 분이 자신이 소유 중인 경기도 포천의 작은 산에서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다는 반가운 제안을 해왔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고민하던 모임은 상계동 인근의 땅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야 했다. 포천에서 살 수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포천 땅에서 공동체 준비를 해나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땅은 훗날 서울교구로 공동체 건설을 위해 기증됐다.
상계동과 포천의 거리적인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포천 시내에도 새로운 나눔의 집을 세우기로 했다. 포천 나눔의 집은 안식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봉사자들의 피정센터와 치유·안식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당시 서울교구에 제출한 제안서에는 “공간적으로는 분열된 도시와 시골의 활동을 잇고, 계급적으로는 배제된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를 잇고, 환경적으로는 파괴되는 생태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잇는다”고 썼다. 교구의 보증금 지원으로 포천경찰서 옆 공터에 가건물을 임차해 2002년 나눔의 집을 개척할 수 있었다.
서울과 포천을 오가며 생활하던 차에 1997년 외환위기로 초유의 대량실업 사태를 맞았다. 성장이 최상의 복지라는 슬로건 앞에 복지지출에 인색했던 한국사회는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길거리에 나앉는 노숙인이 급증해 위기에 처하게 됐다. 상계동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던 주민 한 분은 월세를 못 내 가게 문을 닫았다. 아내마저 집을 나가자 어린 딸을 혼자 키우기 위해 나눔의 집을 찾아왔다. 많은 주민이 건설 잡부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동네에도 노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 시범사업으로 1996년부터 자활지원센터를 운영하던 나눔의 집은 실무자들의 인건비가 지원됐고 가난한 이들에게 창업을 위한 저리 융자가 제공됐기에 노동자협동운동을 비약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1990년대 초반부터 교류하던 일본 노동자협동조합의 시작을 연상케 했다. 지금은 고용인원 4만명에 이르는 일본 노동자협동조합의 시작은 대량실업 사태로 인한 실업자운동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취로사업을 기초로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며 운동은 발전해 갔다.
한국에서도 노동자협동운동이 소규모 창업을 넘어 전국 차원에서 토대를 구축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공공부문에서는 예산 부족으로, 민간에서는 기대수익이 없어 방치되는 일들을 공공근로사업으로 진행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무료 병간호와 컴퓨터·음식물쓰레기 재활용, 학교청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구축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0> 세계교회협의회 장학생으로 유학 기회 얻어
나눔의집 경험으로 무료 간병사업 시작, 외환위기 이후 실업극복연대회의 활동
김홍일 성공회 신부(왼쪽)와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 동료들이 2001년 최저생계 보장 등을 논의하기 위해 정부과천청사 앞에 모였다.
노동자협동운동의 무료 간병사업은 나눔의 집에서 만난 한 노인 부부의 어려움을 돕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폐암이 뇌까지 전이된 할아버지와 척추가 안 좋아 걷지를 못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고 할머니의 수술비를 도와 달라고 했다. 입원해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던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눔의 집에서 수술비를 지급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뜻밖의 상황을 맞이했다. 입원을 위해서는 간병인이 필요했는데 수술 후 간병인이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도 간병인이 나눔의 집에서 비용을 지급하길 기다리며 병원으로 계속 출근했던 것이다. 간병비는 수술비만큼이나 나왔다. 수술이 필요해도 간병인을 둘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눔의 집은 무료 간병사업을 시작했다. 가난한 주민들이 간병 협동공동체를 형성해 그 일을 함께했다.
외환위기 직후 국민들은 실업과 빈곤 문제에 많은 관심을 뒀다. 종교계와 노동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실업자를 지원하는 일에 참여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한 불황에 취업 지원 활동은 쉽지 않았다. 실업자들이 산업구조조정으로 변화된 환경에서도 새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건설일용노동조합 운동을 하던 선배와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소장을 만나 실업 문제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풀어가자고 논의했다. 이 자리가 계기가 돼 실업자를 지원하는 전국 단체들과 함께 99년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를 결성하며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나눔의 집과 함께 서울 노원구에서 모색하고 실천하던 일들을 전국의 실업단체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지방 출장과 강의, 발제를 하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전국의 많은 실업단체 활동가들을 만나 현장 이야기를 듣고 배우던 시기였다. 경기가 차츰 회복되며 시민단체들의 실업지원 사업을 하던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도 남은 국민 성금 400억원을 기본재산으로 재단법인 전환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 참여하던 분으로부터 새로 출범하는 재단의 준비와 출범, 초기 정착 활동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반상근 형태로 1년 정도 일하게 됐다.
노원구 상계동과 경기도 포천 나눔의 집을 오가며 공동체 준비를 했고, 새롭게 출범한 재단에서 함께 일할 실무자들을 인선하고 조직을 정비하던 중 뜻밖의 상황이 다가왔다. 한국교회협의회 장학위원장으로 있던 박경조 신부가 매년 한 사람씩 세계교회협의회 장학금으로 해외에 나가 공부할 사람을 지원하는 일에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선배인 박 신부는 10년 넘도록 지원받은 성공회 성직자가 없어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20여년을 영어와 담을 쌓고 지낸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 준비 등으로 바빴기에 난감함을 교회협의회 실무자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실무자는 내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서류라도 제출하라고 당부했다. 장학금 신청서를 제출한 이들의 면면이 화려했기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여러 신청자 중 내가 선정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학금을 포기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포기한다면 이후 혜택을 받을 사람들도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말에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1> 영국 사회적기업 방문, 유학의 가장 큰 수확
필리핀·인도서 지역사회개발 등 수료… 17년 사역 돌아보는 귀한 정화의 시간
2004년 영국 이스트앵글리아 지역의 한 초원에 서 있는 김홍일 신부. 당시 다양한 사회적기업을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1986년부터 2003년까지 나눔의 집에서 사역하며 쉼 없이 달려오던 인생에 갑작스러운 여백이 생겼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던 유학은 기대도 됐지만 당황스러웠다.
활동가들이 늘어나면서 나눔의 집에서 내 역할은 주일 성찬 예배를 드리는 일 외에는 의사결정 회의와 나눔의 집 대표로서 얼굴 내미는 것 정도였다. 나눔의 집 활동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보다는 외부적인 일이 늘어났다. 가끔 활동가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와야 하는 상황과 마주할 때면 그들과 고민을 나누는 일에 내가 매우 서툰 사람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상담공부를 하고 싶었다. 영성 모임을 하며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는 영적 지도와 관련한 공부도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서 함께 일하는 활동가들이 쉼과 성찰로 새로운 힘을 얻어 활동을 쇄신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책으로만 보던 유럽의 사회적기업들을 방문하고 싶었고 나눔의 집 활동을 더욱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지역사회 조직 등의 공부도 하고 싶었다.
어학연수는 강원도 강촌에 있는 수도원 형제들의 도움으로 3개월 정도 영국 힐필드의 수도원에서 준비할 수 있었다. 나눔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중풍이 있던 아버지는 양평의 한 시설에 요양을 부탁드릴 수 있었다.
영국에 도착해 수도원으로 간 첫날, 창밖으로 한가로운 들판에서 뛰노는 노루를 보며 다른 세상에 온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누군가와 말할 기회는 적었다. 식사 시간 외에는 각자에게 맡겨진 노동을 했고 수도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2주 정도 수도원에 머물다 영국 버밍엄 인근의 솔리헐대에서 3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하며 영국 교회들을 방문했다. 이후 유학한 영국 어센션대에서의 경험은 그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주로 해외 선교사들을 훈련하는 수업 내용이었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버밍엄과 런던 브리스틀 등에 있는 사회적기업들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현장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런던의 사회적기업가 학교를 찾아가 인터뷰하며 학교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훈련에 참여할 기회도 얻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여러 사회적기업을 방문하고 사회적기업가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던 일은 가장 큰 배움으로 남아 있다.
장학금이 부족해 영국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동료 사제가 포천 땅을 기증한 교우에게 이를 알렸다. 고맙게도 그 교우가 후원금을 보내줘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소셜인스티튜트에서 운영하는 지역사회개발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영국과 다른 환경이었지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일본 등 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였다.
필리핀 산골 마을에서 현장실습을 하는 동안 지역주민의 집 부엌 평상에서 열흘을 지내며 함께했던 경험은 필리핀 주민의 선한 마음과 아픈 현실을 동시에 경험하는 시간이 됐다.
필리핀에서의 공부를 마치며 다음 영성 공부를 위해 2005년 인도 방갈로르에 있는 다르마람대에서 운영하는 영성형성가 과정을 수료했다.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청원자를 위한 양성 담당자를 만드는 학위 과정이었다. 그곳에서 아침저녁으로 소박한 식사와 기도를 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귀한 정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2> 함께 기도할 수 있어서, 자연 속에 있어서 행복
파주서 피정센터·공동체 생활 시작… 쉼과 회복·성찰 위한 프로그램 운영
2005년 인도 벵갈루루에 있는 다르마람대학교에서 인도 출신의 사제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홍일 성공회 신부(가운데).
인도에서의 시간은 정화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내게 준 선물은 나의 어두움과 잘못들을 돌아볼 기회를 준 것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고백해야 할 여러 사람이 떠올랐지만 편지를 보낼 주소가 없었다. 결국 귀국하면 고해를 하리라 마음먹고 동생에게만 편지를 보냈다.
세바그람의 간디 아쉬람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봉사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곳으로 간디가 활동했던 장소다. 네팔에서 만났던 조계종 승려 한 분과 불교 유적지를 다니며 이웃 종교에 대해 서로 배울 수 있었다. 짐꾼 없이 혼자서 히말라야 등반도 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잠시 태국 방콕에 들렀다. 그곳에서 내가 서울대성당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경조 신부가 서울교구장으로 피선돼 일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서울대성당에서의 사역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과 사뭇 달랐다. 집과 일터가 분리되지 않는 나눔의 집에서 20년 가까이 지내 온 내가 교회가 제공한 아파트에 살면서 교회와 집을 오가게 됐다. 덕분에 시설에 있던 아버지를 모시고 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신앙적 갈망을 갖고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을 만나며 목회할 수 있었다. 노숙인 급식을 위해 꾸준히 봉사하던 교우들과 청년 예배를 시작한 일은 소중한 기억이다.
대성당에 있는 동안 나눔의 집 후배 성직자들과 활동가들은 “처음 유학을 떠나며 계획했던 활동들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고 내게 물어오곤 했다. 나눔의 집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돕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을 지키고 싶었다.
나눔의 집만이 아닌 교회를 위한 훈련센터였으면 좋겠다는 주교 제안으로 ‘디아코니아 훈련센터’를 시작했다. 나눔의 집에서 오래 활동했던 활동가 두 사람과 후배 성직자 등과 함께 사회선교 현장의 성직자 및 실무자와 교회를 위한 영성훈련, 공동체 관계훈련, 정서 심리 치료 등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디아코니아 사역을 하며 마음 한구석에는 늘 포천에서 준비하던 공동체에 대한 미련과 땅을 기증한 교우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후배 사제가 사역하는 현장으로 가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주어진 현실에서 공동체를 시도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눔의 집 후원자 한 분이 파주 산기슭에 사용하지 않는 땅과 집이 있다고 했고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디아코니아 피정센터’를 운영하게 됐다.
후배 성직자들과 함께 파주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과 밤 기도를 함께하며 서울로 출퇴근하며 생활했다. 함께 기도할 수 있어서, 자연 속에 살 수 있어서, 한가로운 산책길이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퇴근하며 마당에 들어설 때 온 마당에 가득했던 백합 향을 잊을 수 없다. 주말에는 피정센터로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매월 센터를 찾아오는 손님들과 함께 피정을 하며 즐겁게 지냈다.
가난한 사람들을 현장에서 돌보는 활동가들을 위한 쉼과 회복,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디아코니아 사회통합 치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치유를 제공했다. 여러 분야의 심리치료사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하며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경제적 가난과 정서적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도 공동체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3> 먹고 씻고 숨쉬는 모든 순간… 기도는 삶을 위한 것
美 샬렘재단 성직자 리더십 프로그램서 기도와 삶·활동 연결시킬 방법 깨달아
김홍일 성공회 신부(왼쪽)가 2006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샬렘재단에서 아침 기도를 인도하며 기타를 치고 있다.
노무현정권이 끝나갈 무렵 정부에서는 반관반민 형태의 사회투자지원재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당한 민간 파트너를 찾던 중 사회적기업육성지원법 제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대회의에 그 제안이 전달됐다. 사회적기업 지원센터 활동가들과 함께 사회투자지원재단 설립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사회투자지원재단은 당시 보건복지부와 노동부, 기획예산처 차관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로 이사회가 구성된 반관반민 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3년 동안 정부에서 사업예산을 지원하기로 했고 재단은 사회적 경제에서 시민사회의 주도성과 정체성을 실현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2008년 정권이 바뀌며 재단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시민사회 대표 이사들 가운데 몇 사람을 교체해 달라며 예산 집행을 미뤘다. 이사장과 상임이사, 핵심 실무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압박이 정부로부터 들어왔고 그 배후에는 유명한 성직자 한 분도 포함돼 있었다.
재단은 정부에서 이사로 파견된 차관들을 내보내고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시민단체들과 함께 민간재단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려 속에도 재단은 지난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가끔 성직자로서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활동을 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곤 한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문제와 빈곤문제가 극심하던 때에 많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이 복음적 가치에 근거해 협동조합운동과 사회적 경제운동에 깊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영국 협동조합 사상에 중요한 기초를 놓은 프레데릭 데니슨 모리스와 찰스 킹즐리 등은 성공회 사제였다. 그들은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중요한 선교적 과제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시장의 기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상과 사회를 향한 교회 역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삶의 현장에 조금만 눈길을 돌려도 상생과 호혜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 과제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06년 디아코니아 훈련센터에서 사역할 때였다. 교구 성직자 훈련프로그램을 준비하라는 주교의 요청으로 미국 워싱턴의 샬렘재단에서 진행하는 성직자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동시에 국내에서 복지 사역으로 관심을 받던 세이비어교회의 영성과 사역 등도 관찰할 수 있었다. 워싱턴에 위치한 두 곳은 영성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고 있었다.
미국 샬렘과의 인연은 나의 영적 여정에 있어 또 다른 획을 그었다. 침묵과 실습, 그룹 나눔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많은 지식을 배워가야 한다는 기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프로그램 전체를 휘감는 관상적 분위기와 태도를 보며 그 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성공회 영성모임에 참여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렉시오 디비나, 예수기도, 복음관상 등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기도를 배우고 실천했다. 하지만 기도와 삶, 기도와 활동이 어떻게 연결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샬렘재단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샬렘은 보는 기도, 걷는 기도를 비롯해 옷을 입고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며 호흡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줬다. 기도는 결국 삶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4> 성직자들 모여 기도·학습 … 한국 샬렘영성훈련원 출범시켜
여러 교파 성직자·성도들을 이사로 2012년 한국교회협의회도 발족
김홍일 신부(가운데)가 2016년 서울 서대문구 아현감리교회에서 열린 기도학교에서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7년 성공회 서울교구는 미국 샬렘재단을 한국의 성직자 훈련 프로그램에 초청하려 했다. 그 계획을 재단에 전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샬렘 프로그램 수료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한 번 더 참여할 것과 타 교파 성직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초교파 프로그램을 요청했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한국에 돌아와 한국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과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와 함께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2년간 재단 설립자 틸든 에드워드와 성직자 리더십 프로그램 책임자인 칼로레 크럼리를 초대해 성직자 리더십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등 다양한 교파의 56명이 함께했다. 새로운 영성운동을 향한 한국교회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재단 도움으로 2011년부터 2년간 미국에서 운영하는 주요 프로그램을 모두 공부할 수 있었다. 틸든의 집에서 2주간 머물 기회도 얻었고 많은 시간 그와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눈 일은 내 인생에 또 다른 축복이었다.
그 무렵 파주 공동체는 후배 성직자 한 사람이 결혼을 준비하며 문을 닫게 됐다. 미국 세이비어 교회를 방문한 뒤 교회 사목을 중심으로 영성과 공동체를 연결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기존 교회에서 사목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내담 중이던 성도 몇 사람과 지인을 초대해 서울 종로구 도시연구소 사무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건물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건 성공회 내에서 여전히 낯설었다. 영국 성공회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되던 ‘새로운표현운동’ ‘선교형교회’ 등으로 불리는 선교운동과 교회개척 움직임을 동료 성직자와 함께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 세미나와 공청회를 진행했다. 기존 교회나 교구에서 개척하는 교회에 건물을 얻어주고 성도들을 떼어 분가하는 방식이 익숙한 상황에서 선교를 지향하며 시작된 교회개척 시도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을지는 지금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샬렘의 성직자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매월 아현감리교회에서 월례모임을 이어갔다. 서울과 대전을 중심으로 매주 모여 샬렘의 기도와 학습을 진행하는 그룹도 생겨났다. 몇 년 동안 오전 7시에 만나 3시간 동안 기도와 공부, 나눔의 시간을 함께했다.
2010년부터 2년 동안은 미국 샬렘재단 기도그룹 인도자 프로그램 책임자인 안 덴 목사와 미국 성공회 사제 마셜 클레버를 초청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월례 모임으로 운영하던 모임을 한국 샬렘영성훈련원으로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미국 샬렘재단과 한국교회를 연결하고 지원한 박경조 성공회 주교와 2008년 처음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한국 샬렘 운동에 지지를 보낸 조경렬 아현감리교회 목사를 공동대표로 세웠다. 또 여러 교파의 성직자들과 성도들을 이사회로 구성해 2012년 11월 한국교회협의회 2층 강당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디아코니아 훈련센터와 성공회 교육 훈련국에서 실무 역할을 하던 목회자들은 사무국 조직을 맡았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교회와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향으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한 열매였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5> 가난한 청년들과 도심 속 공동체 ‘숨과 쉼’ 시작
생활 막막한 청년들 하나둘 찾아와… 방 모자라 거실서 3명이 함께 자기도
김홍일 성공회 신부(왼쪽 두 번째)가 2014년 청년주거공동체 시설인 서울 광진구 ‘숨과 쉼’에서 청년들과 함께 기도를 인도하고 있다.
2011년 미국 샬렘재단의 친구회에서 열린 5박6일 일정의 침묵 피정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마음 깊이 정말 원하는 삶에 대해 묵상하며 산책을 하다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부르심을 체험했다. 함께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었다.
귀국해 처음 1년 동안은 강원도 강촌의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에서 장기 손님으로 머물게 됐다. 일주일에 3일은 서울로 출퇴근을 했고 주일에는 개척한 교회 사역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성공회 서울교구로부터 교육훈련국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강촌을 떠나게 됐다. 수도회 입회와 교구 사역을 동시에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미국 샬렘재단의 설립자 틸든 에드워드가 말한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하나님과 내가 이루는 공동체”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서울로 돌아가면 프란시스칸 재속회나 신수도원운동 등과 같은 공동체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개척한 희년교회에서는 주중에 쓸 모임 공간과 선교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2014년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전세를 얻어 선교센터와 공동체 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숨과 쉼’을 시작했다. 도심 속 수도원처럼 분주하고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숨과 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고자 했다. 무엇보다 공동체 사람들이 기도와 활동을 함께하는 삶의 공간이고자 했다.
나와 교회 청년 두 명, 신학도 한 명이 숨과 쉼을 처음 시작하며 매일 아침과 밤에 공동기도를 드렸다. 규칙적으로 이른 아침 기도를 드리는 일은 청년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모두가 그 시간만큼은 기쁘게 참여했다. 한 날은 기도를 인도하던 청년이 기도 인도 중 잠깐 잠이 들기도 했지만 기도를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두는 일에는 모두가 노력했다.
청년들의 지인들이 숨과 쉼을 방문하며 이곳은 자연스레 청년들의 공간이 됐다. 청년들의 대화를 듣는 일이 많아졌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고민과 마주하게 됐다. 가끔 차가 끊겨 집으로 갈 수 없는 청년들이 잠을 자고 가기도 했고 급기야 집을 나와야 하는데 혼자 힘으로 방을 얻어 생활할 수 없는 청년들이 짐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던 청년은 불가능한 독립을 꿈꾸다가 숨과 쉼에서 생활하고 싶다고 했다. 남은 잠자리가 거실밖에 없어 걱정했지만 청년의 바람으로 함께 생활하게 됐다. 그렇게 사연을 지닌 청년들이 하나둘 숨과 쉼을 찾아왔고 거실은 청년 세 명이 함께 지내는 공간이 됐다. 독립심이 부족하다며 집에서 쫓겨난 청년과 아버지와 다투고 무작정 집을 나온 청년이 찾아오기도 했다.
100만원 남짓 되는 월급으로 월 30만∼50만원 방세를 내고 학자금 융자도 갚으며 살아가야 하는 청년들이었다. 고시원, 좁은 단칸방에서의 고립된 생활은 청년들에게 불안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외로움을 만들었다. 꿈을 꾸기도 전에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청년을 만나며 든 생각은 이런 세상을 만나게 해 준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이었다.
청년들은 교회가 청년들을 위한 공동 주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숨과 쉼과 같은 공간을 늘려나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내 안에서 가난과 청년을 분명히 연결할 질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홍일 <16·끝> 하나님이 심어준 각자의 연민·선의가 모여 기적이
성도들 도움으로 여성 생활 공간 마련… 청년주거문제 해결 위해 시민출자운동
김홍일 성공회 신부(뒷줄 왼쪽 두 번째)가 지난해 청년주거공동체 시설인 서울 광진구 ‘숨과 쉼’에서 청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난한 청년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년교회에서 청년의 공동주거에 필요한 집을 마련할 방법을 논의했다. 3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교회공동체 구성원이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의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앞서 청년주거공동체인 숨과 쉼을 시작할 때의 기억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신뢰토록 해 주었다. 숨과 쉼의 종잣돈은 내가 가진 전세금 5000만원, 교구와 은행 대출 1억원, 성도들이 출자한 5000만원 등이었다. 먼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그 나눔에 참여할 사람을 찾고 정부와 지자체가 나눌 수 있는 것을 모으면 새로운 창조의 역동이 가능했다.
서울시 사회투자기금, 교회와 성도, 생활하던 청년의 출자 등이 모여 여성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같은 건물 내에 따로 구하게 됐다. 2년 동안 1000만원을 무이자 출자해 준 교우가 있었고 다른 교단 성도로부터도 1000만원을 1년 동안 출자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청년 공동체 주거를 위한 시민출자운동은 2003년 영국에서 만난 ART라는 지역 시민은행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ART는 지역시민들에게 1년 이상 무이자 예금을 받아 어려움에 처한 주민들의 사회적 기업과 협동 창업에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5000명 넘는 굶주린 군중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는가 걱정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양식을 나누는 것으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주님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은 각 사람의 선의를 통해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엄청난 기적을 믿고 행하셨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영의 문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주거가 영의 문제다. 기사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출자하겠다는 한 성도의 전화를 받고 난 후 나는 지금이 일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혹자는 청년 주거문제를 시민들의 출자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무모하다고 했다. 정부와 공공에서 나서야 한다고도 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공의 재원은 한정됐고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청년은 너무 많다.
초기 금액은 지인들의 출자로 모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들이 출자금을 찾아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출자자가 들어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근거는 믿음에 있다. 우리에게 겨자씨 하나만 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산도 옮길 수 있다.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연민과 사랑은 내가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교회와 생활협동조합, 뜻있는 개인들이 운동을 함께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이 일을 제안했고 1000개 넘는 제안서 가운데 시민출자운동은 다섯 개 우수 사업의 하나로 선정됐다.
이 운동이 단지 청년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출자자를 모으는 운동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적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신앙운동이라고 믿는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불신, 교회와 세상의 간극을 넘어서는 운동이기도 하다. 미래세대를 열어 갈 청년들이 더 따뜻한 눈길로 세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길 바란다.